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38화 (238/365)

238화. 개진

높이 솟은 하늘, 그 위로 등정을 마친 태양이 시원한 쾌청을 쏟는다.

나뭇잎은 빛바랜 얼굴로 고개 숙였지만, 두 발 걷는 자들이 보기엔 계절을 대표하는 색깔이어서 아름답기만 하다.

짧고 굵은 여름이 끝난 가을.

베나즈의 깃발이 아이베리아 중원에 공표된 지 4개월이란 시간이 지났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수많은 선전포고문을 받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선발대를 자청하려는 깃발은 없었다.

되려 우리 쪽이 먼저 움직여주길 기다리고 있는 듯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베나즈에 우호적인 답신을 보낸 깃발들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베나즈의 행보에 따라 얻게 될 득실을 따지려는 듯 말이야.

그렇게 생각했을 때,

에커즈 기사단이 베나즈에게 보인 행동은 확실히 대단한 것이었다.

시간은 모호한 것에게 선명함을 부여한다.

억겁의 파도가 해안선을 구축하듯이 두루뭉술했던 원정 역시 점점 구체화 되기 시작했다.

어디를 거쳐서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1차 원정의 매듭은 어느 지점이 될 것인지.

또 이러한 원정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하는지.

원론적인 고민과 그에 따른 부수적 문제로 기사들과 수많은 담론을 쌓았다.

1차 원정의 결론은 하나뿐인데,

그 결론에 도달할 방법은 무수하다.

그러나 제시된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오롯이 내 몫이었고,

동시에 선택에 따른 후회와 책임 역시 전적으로 내 책임이었다.

다른 기사가 대신 책임을 지려 한들 민중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민중에게 허락을 구하는 순간,

이미 불리한 조건 속에 일어났던 베나즈의 신뢰는 완벽하게 무너져내릴 테니까.

오히려 신뢰의 첫 단추는 1차 원정의 성공으로써 꿰어질 것이다.

성지 탈환.

기사왕의 거점을 쟁취하는 것으로 그 정당성의 주장을 만천하에 던지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베나즈 가문의 첫 발언권이 생기게 되는 거다.

이러니 나날이 내 머릿속은 복잡해져만 갔다.

그러나 내 복잡함이 거듭되어 갈수록, 기사와 재상과 집사부는 일치단결하여 속속들이 준비에 대한 결실을 내놓고 있었다.

티히트라의 폴란.

리케니엔의 기지어.

발리르의 베르융.

켄타나의 조이.

심지어 에커즈의 아리나까지도.

결정권자가 임박한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의 그 긴장감은,

도저히 적응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구나.

그러고 보니 그간 티히트라에 아주 많은 일이 있었다.

나이가 많은 영주, 가본 내쉬를 대신해 폴란이 그곳의 섭정이 된 것이다.

이미 기지어의 사상에 동화된 폴란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노선으로 티히트라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덕분에 그쪽 귀족들의 불만이 많이 쌓이고 있다고 했다.

거기에 더해 건설 기업 ‘모나켈’이 입점하면서 여러모로 부산스러워진 티히트라를 통제하는데 애먹고 있을 거다.

잠에서 막 깬 상태에서 짐짓 생각을 거듭한 결과, 의미 없는 결론에 도달해버렸다.

이대로 계속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하다간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누워있겠지.

그리고 그 때 쯤엔…,

아마도 테리아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았을까.

잡념을 떨치듯 이불을 박차고 나오자,

머리맡에 놓여 있던 두루마리 몇 개가 돌돌 말리며 정신없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부랴부랴 그것들을 주워 정돈하려는데,

그 소리를 듣고 집사부들이 달려와 내 방문을 조심스레 두들겼다.

“기침하셨습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급히 두루마리를 침대 위에 올려놓은 나는,

“괜찮습니다.”

점잖은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이내 밖에서 성큼성큼 들려오는 시원한 발소리에 절로 고개를 가로저어야 했다.

“바돈입니다, 영주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예,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같은 복색을 갖춘 집사부의 일원들이 고개를 숙인 채 일사불란하게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 사이로 유일하게 고개를 든 바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악몽이라도 꾸신 겁니까?”

“그냥 일어나다가 두루마리 몇 개를 떨어트렸을 뿐입니다.”

“송구합니다.”

푹, 고개 숙인 바돈을 따라 집사부의 일원들이 일제히 내게 고개를 숙인다.

“모두 다 나가거라, 내가 직접 영주님을 수행하겠다.”

이어 바돈이 잘 정돈된 까칠한 수염을 실룩이며 카리스마를 내비치자 집사부의 일원들이 다시 일제히 밖으로 나갔다.

끝내 문이 닫히기 무섭게,

“바돈, 너무 예민하신 것 아닙니까.”

그에게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면, 그는 온화한 미소로 단호함을 내비쳤다.

“하루에도 영문 모를 협박 편지가 수십 통이 날아오는 판국에, 저로서는 예민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놓인 주전자를 집어 든 그는,

“제아무리 베나즈라고 해도 암살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으니까요, 그 위대한 검성이었던 벨리야드도 대변을 누다가 독 붙은 볼트를 맞고 절명했습니다. 그 벨리야드보다 더욱 위대했던 기사 맥레인 경께서도 암살에 한해선 두려움을 내비치셨지요.”

전혀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를 유쾌히 던지며 내 눈치를 살폈다.

“하루라도 빨리 원정을 통해 아이베리아 중원을 주름잡고 있는 귀족들과 친분을 쌓으셔야 할 겁니다.”

“그들이 기사 집안인 베나즈를 상대로 친분을 유지하려 들겠습니까?”

“그 기사가 중원의 주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요. 영주님의 생리현상을 처리하기 위해 그들끼리 가능하다면 암투까지 벌일 겁니다.”

“세상에.”

질린 표정을 짓자 여태껏 딱딱한 모습으로 일관하던 바돈이 해맑게 웃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저와 집사부가 평생 영주님을 모실 겁니다.”

“장난이었습니까, 바돈?”

“아뇨, 그래도 귀족들과의 친분에 관한 얘긴 진심이었습니다. 그들의 진심 어린 후원이 공께서 앉으실 자리를 굳건히 만들어 줄 테니까요.”

그러나 그 해맑은 미소도 잠시, 금세 사무적인 태도로 돌변한 바돈이 품에서 일정표를 꺼내 내게 건넸다.

“오늘 하루는 가을에 걸맞은 공허를 맛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말을 들으며 일정표를 펼치니,

그 안엔 자유가 꽉꽉 채워져 있다.

“그간 매섭게 달려오셨잖습니까, 하루쯤은 여유를 맛보셔야지요.”

“고맙습니다, 바돈.”

“그저 집사부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마치 뜻하지 않은 급여를 받은 사람처럼, 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바돈을 바라봐야만 했다.

그럼 바돈은,

마치 아버지와 같은 인자한 표정으로 날 보며 웃어주었다.

* * *

“영주님, 오늘도 좋은 아침입니다.”

갈색 머리를 질끈 묶은 여인이 내게 공손히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다.

오밀조밀, 다람쥐 같은 인상을 한 그녀는 뷰글스의 마드렌.

그런 그녀 옆에 붙어 있는 곰 같은 남자는 뷰글스의 우덱.

“우덱, 뭐 하고 있어!”

마드렌이 팔꿈치로 우덱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자, 그제야 두꺼운 눈썹을 움찔거린 그가 휘청 고개를 숙인다.

“영주님, 오늘도 조찬 입회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둘의 인사에 화답한 나는 얼른 반대편 자리를 향해 손짓해주었다.

그럼 내 바로 오른편에 앉아 있던 바돈이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앉으시지요.”

둘이 앉기 무섭게 우덱은 투명하고 거대한 구슬을 꺼내 식탁 한가운데 올려놓았고,

마드렌은 수첩을 꺼내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주 영주님의 소탈한 식사 특집이 실리면서 그와 관련된 제품군 판매량이 14배나 뛰었다고 합니다. 또 리케니엔 내 베나즈 가문에 대한 설문을 진행하였는데 9할 이상이 긍정적인 답변을 하였습니다.”

그녀의 차분한 보고를 듣고 있던 바돈이,

“잘 해주셨습니다, 4개월 전에 비하면 정말 엄청난 발전이로군요.”

진심으로 격려해주자 다람쥐 같던 그녀의 졸망졸망한 코끝이 움찔거렸다.

“그 외에 발리르와 켄타나 역시 영주님에 대한 친밀도가 굉장히 상승했으며 지지율 역시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그녀의 보고에 잠자코 있던 우덱이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두서없이 끼어들었다.

“영주님, 실례가 안 된다면 지금 구슬에 모습을 담겠습니다.”

그럼 마드렌은 역시나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급히 찌른다.

“우덱! 구슬에 모습을 담는 건 조찬이 모두 끝난 후라고 했잖아!”

“하지만 지금 영주님의 얼굴이 가장 멋있으신데요.”

슬쩍 내 눈치를 살피던 마드렌은 그저 한숨을 픽 내쉴 뿐이다.

낯선 우덱에게서 그 옛날 엔제이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아, 그 정겨움에 고개를 끄덕여주면.

그제야 마드렌은 눈썹 위에 내려앉아 있던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햇살 담은 병을 기울여 구슬에 흘리면,

그 빛을 흠뻑 머금은 구슬이 전방의 내 모습을 그대로 비춰 간직한다.

왜 햇빛 담은 눈동자 위로 눈꺼풀을 덮으면, 빛의 응어리가 형상으로 남는 것처럼.

다음으로 마드렌은 무거운 주제를 입에 담았다.

“다음은 티히트라와 관련된 기사입니다, 티히트라에 입점한 기업 모나켈의 발언가 라드리치의 발언이 실렸는데…, 거기에 영주님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습니다.”

이에 바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통제하지 그랬습니까.”

경고하듯 말했지만, 그 뒤편에 서 있던 세라가 다가와 다그쳤다.

“뷰글스가 편향을 시작하면, 그 부메랑이 아주 매섭게 돌아오게 될 거예요. 차라리 높은 지지율로 우직하게 그들을 상대하는 편이 좋아요.”

그 말에 마드렌이 두 눈을 반짝였다.

“맞습니다, 그편이 모나켈을 압박하는 데에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즉시 납득한 바돈이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했다.

“역시 포개어진 손 조합에 관한 내용이었겠지요.”

“예, 티히트라의 특산품을 세금으로 바쳐야 하는 것과 포개어진 손 조합의 과한 혜택 등을 꼬집는 내용입니다.”

막 빌비온의 몸집이 폭발적으로 증대되는 지금,

티히트라 특산품인 석재의 가치는 분명 천정부지로 치솟았을 것이다.

그것을 포개어진 손 조합의 부당함과 엮어 부당함을 호소하는 것을 보면, 그 속내가 빤히 보이는군.

아무래도 폴란이 내정 적으로 많은 압박을 받는 것 같은데, 그 부분을 완화 시킬 필요성이 있겠어.

“바돈, 재상에게 이 부분에 대해 언질을 넣으십시오.”

그라면 이미 이 문제를 직시하고 있었을 테고, 오히려 내 쪽에서 응답이 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바돈은 즉시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략 숟갈질 다섯 번에 포크 질 네 번 정도 했을까.

정신없던 조찬은 그렇게 끝이 나버렸다.

* * *

화려한 복색을 벗어 던지고 잿빛 리넨 셔츠에 간단히 어스름을 뒤집어쓴 채 저택 밖을 나섰다.

수확을 마친 리케니엔은 곡식의 풍만한 향취가 가득 차오른 상태였고,

결실을 거둔 주민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평온이 깃들어 있었다.

그 사이를 가로지르다가, 이내 새롭게 만들어진 가파른 길로 올라서면.

베클리엄 만물상회의 거대한 이동식 상점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 다음 주쯤이면 켄타나 쪽으로 이동을 시작하겠지.

무질서하게 늘어선 간판 아래 골목으로 들어선 뒤, 그 끝 골목 구석에 있는 가게로 들어서면.

늙은 난쟁이 하나가 나를 반겨주었다.

지난 4개월 동안 간간이 자유가 주어졌을 때 방문한 가게였기에 내겐 더없이 친숙한 곳이기도 하다.

허름한 덮개로 뒤덮인 새비안을 옆으로 빗겨 찬 채 자리에 앉아 있으면, 늙은 난쟁이는 익숙한 모습으로 막 뽑은 면을 내 앞에 내놓았다.

소박하게 차려진 음식,

그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에 화답하듯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것만큼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윽고 돌아오는 길, 허름한 서점에 들러 책 몇 권을 들춰보며 마음껏 재미를 누리다가.

뒤늦게 저택에 돌아오면.

어,

제법 익숙한.

그러면서 그리웠던 향기가 내 코를 간질인다.

저택 입구에서 인기척을 드러내면, 바돈이 금세 달려와 내게 인사를 건넨다.

“바돈, 손님이 온 겁니까?”

내 물음에 바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심부름꾼 하나가 영주님께 전할 물건이 있다며 방금 막 전달하고 갔습니다.”

“어디 있습니까.”

내 말에 바돈은 위층을 올려다보았다.

“봉인이 새겨져 있어 바로 영주님의 접견실로 올려보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얼른 접견실로 올라가 보니,

책상 위, 정성껏 포장된 기다란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그립고 익숙한 향기의 근원은 바로 그것이었다.

서둘러 자리에 앉아 하얀 아마포로 겹겹이 쌓여있는 그것을 풀어헤치면.

티끌 하나 없이 미려함으로 정련된 대검 하나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플랑베르주.”

대검의 종류를 확인하자마자, 가슴 두근거림을 못 참고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어버렸다.

이어 같이 동봉된 편지를 펼치면.

그 펼침만으로도 열 개의 꽃을 스친 가을바람이 부는 것 같아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친애하는 별 친구에게.]

떨어진 별을 찾아 헤매던,

그날 밤이 불현듯 떠올라 두들겼어요.

내 심장 박동 따라 두들기기엔, 그 과정에서 부러질 것 같아 조금 덜어 두들겨 보내요.

추신 – 이번엔 ‘합금’ 대신 ‘접쇠’ 방식으로 만들어 봤어요. 아, 근데 확실히 내가 봤던 플랑베르주보단 좀 못생긴 것 같네요?

-막 학회에 입회하여 정신없는 그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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