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개진 (2)
어느 머나먼 탑으로부터 건너온 변덕인지,
아니면 아이베리아 어딘가에 벌어진 전투의 후유증인지.
늦은 밤 억수 같은 비가 쏟아져 내렸다.
쏴아!
구름에서 쏟아진 갈퀴가 한바탕 세상을 할퀴고 있는데, 누군가가 호롱불을 들고 거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는 곧 낡고 허름한 집 앞에 멈춰 서서 호롱불을 들고 있는 손으로 문을 두들겼다.
그렇게 열린 문 너머,
불쑥 고개를 내민 젊은 남자는 찾아온 이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몰룬 경, 이 야심한 밤에 무슨 일로…?”
폴란의 물음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던 몰룬이 씁쓸한 얼굴을 내비치며 답했다.
“실례했군, 내 잠시 들어가도 되겠나.”
그의 말에 폴란은 허겁지겁 문을 열어 그를 반겼다.
“그럼요, 어서 들어오십시오.”
흠뻑 젖은 후드를 벗으며 막 폴란의 집으로 들어선 그는 호롱불을 내려놓고 물먹은 수염을 한바탕 꽉 짜내었다.
“가을에 어울리지 않는 비로구먼, 북쪽 탑에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을까? 아니면 중원 어딘가에 전투가 벌어지기라도 했나?”
이윽고 경직된 분위기를 풀려는 듯, 몰룬은 작은 목소리로 투정을 부렸다.
이에 폴란은 싱긋 웃으며 막 끓어오르는 주전자를 기울여 차 한잔을 그에게 건넸다.
“그것도 아니라면 곧 불어닥칠 태풍의 전조일 지도요.”
폴란의 말에 몰룬은 두 눈을 반짝였다.
“예끼, 고작 이따위 비바람이 리케니엔의 태풍일 리 없잖은가.”
순간 튀어나온 우직한 기사의 면모에, 폴란은 마찬가지로 매력 넘치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어서 자리에 앉으시지요.”
그렇게 폴란의 안내를 받고 작은 의자 하나에 몸을 맡긴 몰룬은,
멍하니 찻잔을 기울이며 식은 몸을 데우는 데 집중했다.
그 모습에서 뭔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폴란은,
조심스레 주전자를 내려놓은 채 그 앞에 마주 앉아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몰룬이 찻잔을 말끔히 비우고 나서야, 눈치를 보던 폴란이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의 말에 몰룬은 품에서 인장이 찍힌 봉인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폴란은 그 봉인에 찍힌 인장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오르테의 인장이 아닙니까…?”
“맞네, 불과 몇 시간 전에 온 따끈따끈한 봉인이야.”
“때가… 된 겁니까?”
“그렇네, 변경의 지휘관이 봉인을 보냈다는 것은 빌비온 내 전체적인 군사적 움직임이 있을 거라는 소리니까.”
“몰룬 경께서도 떠나시는 거로군요.”
몰룬은 조잡한 의수를 만지작거리다가 물에 젖은 이마를 시원하게 쓸어 넘겼다.
“그렇네. 그래서 내 자네를 찾아온 거야.”
한차례 물기를 털어낸 그의 얼굴엔 진지함과 그에 걸맞은 고심이 묻어 있었다.
“자네도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모나켈’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아.”
그의 고심에 폴란은 주저하지 않고 씁쓸함을 드러냈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기가 시기인지라 1차 원정이 어느 정도 갈무리 됐을 시점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래선 안 되네.”
몰룬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단호하게 말했다.
“모나켈이 입점하면서 여러모로 많은 게 변화되었어, 티히트라의 정체성을 뒤흔들 만큼의 자본력이 들어왔단 말이네. 아이베리아의 촌뜨기나 다름없는 티히트라는 이것에 대한 면역이 없어. 세월로 탁해지신 가본 경도 마찬가지고.”
“몰룬 경…!”
“맞는 말이 아닌가! 모나켈의 그 어린 상속자 놈이 내뱉는 달콤함조차 거스르지 못할 정도로 이미 가본 경은 판가름할 머리를 잃으셨어. 자네도 말만 섭정이지 실상은 반쪽짜리잖나.”
“그럼…, 어떻게 하시길 바랍니까?”
몰룬은 그 우람한 체격에 걸맞지 않은 이채를 드러냈다.
“작금의 빌비온에게 티히트라의 석재는 성장통에 필요한 약이나 다름없네, 기업 놈들이 이것을 가만히 냅두겠는가? 어느 방향으로든 폭리를 취하려고 할 거야. 그 부분으로 견제를 해보자는 걸세.”
그의 의견에 폴란은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런 폴란의 표정에 몰룬은 자조적인 표정을 지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자네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알지, 그래도 궁지에 몰리면 쥐새끼도 머리 굴리는 소리를 낸다고. 나도 못 할 거 뭐 있나.”
“그 부분이라면 부담 없이 모나켈을 견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베나즈 가문의 재상이 직접 개입하게 된다면…,”
“지들이 별수 있겠나, 수틀리게 행동하는 순간 변방의 기사들이 들이닥칠 텐데.”
이제 자리를 털고 일어난 몰룬은 인자한 얼굴로 폴란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힘내게, 내 비록 기사이나 가진 힘이 보잘것없어 자네에게 보탬이 되질 못하는구만. 하지만 티히트라의 토박이로서 조금이라도 자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네.”
“티히트라에 몰룬 경이 있어 다행입니다.”
폴란은,
허리를 푹 숙여 몰룬에게 예를 갖추었다.
그런 그에게 몰룬은 털털한 웃음을 지으며 이내 물기가 가득한 후드를 뒤집어쓴 채 밖으로 나섰다.
* * *
한바탕 비가 쏟아진 다음 날.
아직 눅진함이 남은 땅 위로 수많은 발굽이 찍혔다.
그 발굽은 모두 리케니엔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이른 아침 저택 난간에 기대어 밖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말과 마차의 행렬이 꼬리를 물고 저택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곧 집사부의 일원 넷이 방으로 들어와 옷 입는 것을 도왔다.
세라의 주관이 잔뜩 들어간 그 정복은 중대사를 결정하는 자리에만 입는 옷이었다.
밑단에 금 자수가 들어간 검은색 튜닉, 그 위로 둘러맨 적갈색 2중 벨트에 머스킷 한 자루와 새비안을 무장하는 것으로 단순 나열하면 화려한 느낌은 거의 없지만,
반대로 내가 이 땅 위의 누구로서 서 있는지를 가장 적나라하게 알릴 수 있는 복장이었다.
사실 귀걸이나 목걸이, 반지를 주렁주렁 차고 다니지 않아도 이미 새비안의 드러난 자루가 그 화려함의 비중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남은 집사 하나가 마지막으로 7월의 햇살과 쇳조각을 이용해 튜닉 곳곳을 다리면,
어느새 내 몸 위로 단정이 꽃피워져 있다.
이윽고 검은 양복을 갖춘 바돈이 문 앞으로 다가와 나를 기다렸다.
슬슬,
걸음을 옮기면 바돈은 물 흐르듯 옆으로 빗겨서 내 뒤를 곧장 따랐고.
그 뒤로 여덟 명의 집사부가 2열로 늘어서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따랐다.
식탁과 식기들이 모두 치워진 저택 홀엔,
이미 기사들이 모두 집결한 상태였다.
“디안 베나즈 공께서 입회하십니다.”
바돈의 우렁찬 목소리를 시작으로, 기사들이 양옆으로 갈라져 길을 튼다.
나는 그사이를 가로지르며 나와 눈을 마주치려는 열렬한 자들의 시선을 하나하나 대꾸하듯 맞춰주었다.
익숙한 얼굴도 많았지만,
그만큼 처음 보는 얼굴들도 많았다.
그러나 휘하, 산하라는 이름 아래 묶인 기사와 전사들임은 분명했으리라.
새비안의 자루를 옆으로 빗겨 잡고 상석에 비치된 의자에 조용히 앉자, 집결한 기사들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왼편 구석엔,
집사부의 일원들.
정확히는 저택의 일을 돕는 유순한 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체온을 유지하려는 뱁새처럼 서 있는 게 보였다.
세라를 필두로 모인 여인들도 작금의 상황을 인지한 듯 모두가 무겁고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금세 어제 만찬 속에서 나눴던 웃음이 벌써 그리워지는 기분이다.
“베르융 경, 시작하십시오.”
각설하고.
고개를 살짝 들어 이제는 익숙한 근엄을 내뱉어 부르면, 오늘 모인 기사들의 수장.
베르융 오르테가 각 잡고 일어나 내 앞에 예를 갖췄다.
“1차 원정의 핵심은 빌비온의 본격적인 진출로를 개척하는 것입니다.”
베르융의 그 말에 오른편에 앉아 있던 재상, 기지어가 자리에서 일어나 첨언했다.
“그러면서 발언가들을 필두로 베나즈 가문의 오명에 대한 재고를 시작할 겁니다. 한 번에 모두를 설득하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차근차근 모두를 설득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니까요.”
그런 기지어의 뒤로는 조엘과 베나즈 가문의 파수꾼 할리가 서 있다.
그렇게 이어진 기지어의 발언에,
조이는 내심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일단은 1차 원정에 집중합시다, 모든 구체적 계획의 실현은 원정의 시작으로부터 이뤄질 테니.”
그러자 몇몇 기사들이 조이에게 동조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지어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원정의 발단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이름을 중심으로 이 자리에 모였는지 말입니다.”
이어 쏟아내는 카리스마에 기사들은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러한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베르융은 점잔을 내비치며 기지어에게 존중을 내비쳤다.
“물론 우리는 절대로 뿌리를 잃지 않을 겁니다, 재상. 하지만 기사는 싸움으로써 증명되는 존재이기에 눈앞의 싸움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이 땅이 아이베리아인 이상 땀 냄새나는 이들의 말이 더 크게 들리는 것쯤은 이해해주시오.”
그러면서 딱딱한 유쾌를 빗대자 기사들 몇몇이 웃음소리를 내었다.
기지어 역시 베르융의 그 유순함에 한 수 접고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아야 했다.
다시 장내의 시선은 베르융에게 집중되었다.
“1차 원정의 시작점은 ‘오르덴크로그’입니다. 여러 깃발과 지식인이 머리를 맞대어 고심했고, 마지막으로 0의 주인께서 승인하신 결과입니다.”
슬쩍,
내 눈치를 살피는 베르융에게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자.
그는 더욱 강고한 의지를 두 눈에 담은 채 펼쳐진 지도 옆에서 설명을 이어갔다.
“오르덴크로그는 켄타나의 북쪽 구릉지로, 우리는 그곳을 거쳐 ‘람비’ ‘펠테아’ ‘뱅그스’를 차례로 점령할 겁니다.”
그 설명에,
제법 많은 휘하를 거느리고 온 엘르길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첨언했다.
“람비에는 그 유명한 ‘여우비 레테’가 수문장으로 있소, 펠테아는 지식인 ‘크롬’이, 뱅그스에는 귀신 ‘피에르비’가 있지.”
잠깐, 모두의 시선이 엘르길에게 향하자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유창한 언변을 뽐냈다.
“구 발기지르와의 전투를 시작으로 켄타나의 위세를 키울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터라 그 방면의 깃발들이라면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켄타나의 염원이 베나즈라는 하나로 통합된 이름으로 이뤄지니 감개가 무량할 따름이군요.”
마지막으로 내게 예를 갖추며 인사를 하는 엘르길의 모습에, 그 뒤에 있던 휘하 기사들은 박수와 함성을 질러댔다.
사실,
이미 이러한 정보들은 주요 기사들을 비롯해 여러 번 거쳐 검토까지 마친 것들이었지만.
지금 그가 구태여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다지기 위함이었다.
어쨌든 그는 기사이면서 발언가이기도 했으니까.
이 저택에 모인,
베나즈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묶인 기사들에게 존재감을 드러낼 좋은 기회인 것이다.
참 계산적인 사람인데,
그 사람 자체가 매력적이어서 쉬이 다루기가 힘든 부류인 것 같다.
어쨌든,
집사부의 힘을 실어준 것도 켄타나 측 귀족의 입회로 이뤄진 것이기도 하고.
그 부분을 성사시키는 데에 엘르길의 발언이 아주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기도 하고 말이야.
이후 기사들의 몇 의견들이 오갔다.
재상인 기지어는 부대의 보급과 이동 거리의 정확한 측량을 전부 보고했고, 그 정확함에 몇몇 기사들은 칼자루를 가슴에 얹어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하여 이번 소집에서 결론지어진 요는,
1차 원정의 시작점과.
그 과정에 거쳐 갈 지점들.
람비.
펠테아.
뱅그스.
이제 정말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됐어.
재해와 재해가 맞부딪히는,
그런 싸움이.
회의가 모두 끝날 때까지, 줄곧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나는 마무리를 짓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침묵은 득이 될 수도, 혹은 독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은 정확히 반반인 것 같네.
내 침묵에 의심의 눈초릴 보내는 기사들도 있는 반면에, 내가 의도한 대로 그 침묵의 무게를 무겁게 받아들이는 기사들도 있다.
이 위치에선 그 불균형적인 저울의 중심을 맞춰주기만 하면 된다.
물론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저울질만으로 쉬이 조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다루려는 저울 위엔 기사들만이 서 있다.
그리고,
기사는.
오롯이 단 하나만으로 귀결되니.
“원정은 엿새 후 새벽, 빌비오나스 평원에 집결하여 출발할 것이다. 기사들이여, 명예를 다짐하라. 아이베리아의 역사가 늘 그러했듯 그 다짐 역시 새겨질 것이다. 내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보증하겠다.”
명예.
자루를 고쳐 잡은 채 자리에서 내려오자, 자리에 모인 기사들은 모두 불꽃을 품은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침묵의,
그러나 시끄러운 투지를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