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개진 (3)
“아버지!”
한 남자가 어두운 금발을 휘날리며 막 성관 안으로 들이닥쳤다.
철실 자수가 들어간 멋들어진 버프 코트,
그리고 허리춤에 느슨하게 채워져 있는 롱소드.
그 차림에 걸맞게 주위 사람들은 그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이내 젊은 남자는 바로 옆에 보이는 중년의 남자를 붙잡고 물었다.
“아버지께선 어디로 가셨는가.”
“영지 순찰을 나가셨습니다요.”
“혹시 오늘 아침에 들어온 기별을 듣고 가신 게냐?”
“소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청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순수한 무지를 드러낸 남자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안 되겠다, 말을 준비시켜놓거라. 내 직접 찾아가야겠어.”
이윽고 잿빛의 눈동자를 반짝거리던 그가 출렁거리는 롱소드 자루를 붙잡은 채 성관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렇게 청년이 정원 입구에 다다를 때쯤엔,
이미 봉사인 두 명이 그가 탈 말을 준비해놓은 뒤였다.
한 치의 지체도 없이, 준비된 말 위로 단번에 뛰어올라 탄 남자는 그대로 고삐를 감아 급히 밖으로 말을 몰았다.
준 명마에 속하는 ‘애번타시’
특유의 짧은 갈기와 그것에 걸맞은 아담한 골격과는 달리 지구력과 용맹함이 매우 뛰어나 기사들이 애용하는 말이다.
그 말과 이미 몇 년간 유대를 나눈 청년은 몇 번의 보챔도 없이 아주 쉽게 말을 몰아 원하는 목적지까지 바람처럼 내달렸다.
몇 분이 지났을까.
드넓은 장원 하나를 건너 듬성듬성 나무 첨탑이 세워진 경계선에 다다른 그의 머리 위로 막,
툭.
투둑.
얇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확인한 청년은 더욱 고삐로 말을 보채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년은 말을 멈춰 세웠다.
저 앞에 우뚝 솟은 깃발 하나와 그 아래 모인 수십의 장정들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가랑비에 어느새 두 어깨가 모두 젖은 청년이 그들에게 접근하자, 그중 가죽 갑옷을 입은 기사 몇이 그를 발견하고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청년은 그들의 인사는 뒤로하고 오롯이 그 가운데 있는 인물에게만 시선을 쏟았다.
“아버지!”
그의 부름에,
막 기사들 사이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초로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 앞엔,
짧은 아밍소드가 땅에 반쯤 박혀 있었다.
“갤렝, 네가 이곳까진 어인 일이냐.”
초로의 남자.
람비의 주인 ‘레테’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아들인 갤렝은 한참이나 고개를 들어야 했다.
“이미 소식을 들으신 겁니까?”
“그래, 곧 빌비온 놈들이 불경한 이름을 갖고 들이닥칠 거라지.”
“그렇담 먼저 펠테아에 지원 요청을…!”
“갤렝, 조바심 부리지 마라. 네 전쟁이 아니다.”
레테는 거친 수염을 실룩거리며 냉정히 말했다.
“0이 돌아왔다느니 하는 건 베나즈라는 불경함 속에서 찾은 명분일 뿐이다. 기사라면 그런 낭설 따위에 흔들리지 않고 그저 우직하게 서서 막아낼 줄도 알아야지.”
“하지만…!”
“동맹이라고 했느냐? 근방의 깃발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 말은 꺼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해서 여쭙고 또 여쭙지 않았습니까! 아버지께선 알려달라는 소자의 물음에 침묵만을 내놓으셨습니다!”
레테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알 것이 없다. 이 전쟁도 마찬가지다. 너는 아직 어려, 온실 속으로 들어가거라 기사의 태를 조금이라도 입게 된다면 그때 네 불만을 해갈해주마.”
곧이어 이어지는 레테의 턱짓에,
기사들은 익숙한 모습으로 갤렝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러한 기사들의 행동들을 지켜보던 갤렝은,
조용히 뒷걸음질 치다가.
이내 그들 사이로 들려오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였다.
“이 속도라면 오늘 내로 영지의 절반에 해당하는 땅을 적실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이 기동력에 한계를 느끼게 되는 순간은 짧을 것입니다, 그 안에 확실한 승부를 보셔야…,”
그들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갤렝은 다시 조심스레,
앞을 향해 한 발자국 내밀어 외쳤다.
“낭설이 아니라 진짜라면요! 진실한 근거를 빌미로 0을 갖고 돌아온 것이라면요!”
그의 외침에 일순간,
기사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잠시 후 기사들 품에서 레테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뿜어져 나왔다.
그는 단숨에 갤렝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렸다.
“아이베리아에 남은 이상은 없다, 이해관계와 그에 따른 기사도적인 선택지만 남아있을 뿐. 설령 0이 진짜로 돌아왔다고 한들, 아이베리아가 베나즈의 이름에 설득당한 자를 받아들여 줄까?”
한바탕 단단한 박력에 부딪힌 갤렝은 눈물을 글썽였지만, 그럼에도 꿋꿋이 답했다.
“베나즈라는 이름이 이긴다면요. 0을 가진 베나즈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왜 그 가능성은 애써 무시하시려는 겁니까?”
레테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어떤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갤렝이 대신 대답했다.
“단순히 당신께서 선택한 기사도적 선택지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레테는 아들인 갤렝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가 방금까지 쏟은 여우비에 축축이 젖은 땅이었기에, 아들 갤렝은 온몸에 진흙을 뒤집어써야만 했다.
그러나 갤렝은 진흙으로 범벅이 된 얼굴 속에서도 잿빛 눈동자를 초연히 빛내며 일갈했다.
“그때 왜 그 엄동설한에 동조하셨습니까, 그 이상의 무너트림에 왜 일조하신 겁니까!”
레테는,
순식간에 냉정해진 얼굴로 뒤돌아 말했다.
“네 일이 아니다.”
그리곤 땅에 박힌 아밍소드를 뽑아 들었다.
그러자 곧, 하늘에서 추적추적 쏟아지던 가랑비가 뚝 그쳐 버렸다.
“가지, 둘은 남아서 녀석을 성으로 돌려보내라.”
* * *
말없이,
바돈은 실크 같은 사슬 갑옷을 내게 입혀주었다.
또 말없이,
검은 진줏빛을 띠는 갑옷을 하나둘 내 몸에 체결시켰다.
그렇게 말없이,
옆구리의 매듭을 모두 마무리 지은 바돈은 안면 가리개가 열린 아멧 헬름을 들고서 내 앞에 마주 섰다.
“영주님.”
“바돈, 역시 다시 생각해 봐도 그 얼굴에 침울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내 말에 바돈은 얼굴에 묻은 침울함을 털어내려는 듯 피식 웃어 보였다.
그러나 되려 그의 우울한 감정이 더욱 선명해진 것 같다.
“부디 무탈하게 다녀오소서.”
이내 바돈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내게 아멧 헬름을 전했다.
그것을 받아 옆구리에 낀 나는 남은 손으로 바돈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참.”
그러면서 접견실 벽에 장식된 플랑베르주를 바라보며 그에게 말했다.
“관리 잊으시면 안 됩니다.”
내 말에 그제야 얼굴에 묻은 침울함을 모두 털어낸 바돈이 순수한 호기심을 내비쳤다.
“도대체 누구에게서 온 선물입니까? 대충 봐도 대단한 실력을 가진 난쟁이인 것 같은데…,”
화제를 돌려 그의 우울함을 휘발시키는 데에는 성공했는데…,
“검을 복원하시는 과정에서 사귀게 된 친우분이신 겁니까?”
반대로 그의 호기심을 건드려버렸네.
“돌아와서 이야기합시다, 겸사겸사 밀린 술자리도 함께.”
내 말에 바돈이 금세 웃음꽃을 피우며 화답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접견실 밖을 나섰다.
복도에는 집사부 전원이 줄지어 선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가니 순식간에 미끄러지듯 내 뒤로 행렬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저택 입구에 내려가자,
기다렸다는 듯 내 등장에 맞춰 한쪽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올리는 기사.
조이 크레비디.
달빛에 젖은 듯한 은색 갑옷을 반짝이며 인사를 마친 그는 조용히 일어섰다.
“조이 경, 그럼 부탁합니다.”
“특별 서기관으로서, 공께서 주신 방위의 임무를 완수할 것을 맹세합니다. 빌비온에 그 어떤 깃발의 주관도 들여놓지 않겠습니다.”
제법,
가벼운 기색도 드러내며 날 안심시켜줬던 조이였는데.
지금은 차갑고 단단한 기사 그 자체의 모습만 보이네.
아마 단둘이었다면 조금은 유쾌한 면모를 보여주지 않았을까.
내심 아쉽지만 반대로 그의 그러한 면모가 참으로 믿음직스러웠다.
바돈은 곧바로 나와 조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진지한 얼굴로 집사부의 일원들을 손짓해 불렀다.
불려온 집사부 중 둘은 화로를 들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고급스러운 가죽 함을 든 채였다.
이제 바돈이 가죽 함을 열어 안에 든 내용물을 꺼냈다.
그것은 아무런 문양도 새겨지지 않은 반지.
그 반지를 화로에 한바탕 달군 바돈은 손가락이 닿는 부분을 식혀 조이에게 내밀었고,
조이는 그것을 손가락에 낀 채 달궈진 반지의 단면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 단면에 손가락에 걸린 인장을 찍어 누르듯 가져다 대었고.
그렇게 조이의 반지에 오목한 베나즈 가문의 인장이 새겨졌다.
바돈은 그 즉시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선언했다.
“현 시간부로 조이 크레비디 경은 베나즈 가문의 대리자로서 모든 권한을 시행할 수 있습니다. 베나즈 가문의 집사부는 마땅히 대리자의 권한에 예속되어 움직일 것이며, 권한의 증표인 오목한 인장은 원주인의 복귀와 동시에 같은 화로에 그 권한과 함께 태워질 것입니다.”
선언이 끝나자,
집사부의 일원 모두가 나와 조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그들 모두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을 때.
조이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양팔을 벌렸다.
그 신호를 읽은 나는 그의 포옹에 화답하듯 안겼고, 그런 내 등을 팍팍 두들긴 조이는.
“잘 다녀와라, 맥레인의 아들아.”
귓가에 대고 썩 유쾌한 말투로 격려해주었다.
* * *
“핫하하! 전사들아! 디안 베나즈 공께서 나오신다!”
저택 밖으로 나서기 무섭게 들려오는 천둥 같은 목소리.
거대한 말 위에 태산같이 자리 잡고 있던 테티르 경이 메이스를 붕붕 휘두르며 주위 병사들의 시선을 환기했다.
“테티르 경의 수행이라니, 영광입니다.”
그에 화답하여 테티르에게 기사의 인사를 건네자, 그는 금세 흥분한 얼굴로 가슴을 두들겼다.
어찌나 우악스러운 힘인지, 순간 갑옷이 그대로 찌그러지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가시지요!”
테티르의 신호를 받으며 벤투스 위에 올라탔다.
오랜만이야, 벤투스.
최근 몇 주간 녀석과 마주치지도 못했었지.
내 반가움에 벤투스는 머리를 흔들어 살갑게 답해주었다.
평상시라면 심술궂은 행동을 했을 텐데.
녀석도 아는 건가, 곧 벌어질 일들이 무엇인지를.
“이랴!”
이윽고 테티르가 말을 끌어 저택 바깥으로 나섰다.
그러면서 밖에 대기하고 있던 기병들을 새롭게 도열시켰다.
그 사이를,
고삐를 잡고 빠르게 나아가자 곧 테티르가 내 뒤를.
그리고 휘하 기병들이 그런 테티르의 뒤를 바람처럼 따랐다.
공허한 맛이 없잖아 있는 가을의 바람인데,
스쳐 지나가는 것들은 하나같이 무겁다.
그래도 벤투스 위에서 바라보는, 수채처럼 뭉개진 가을 풍경 하나만큼은 그 알록달록함이 아름답기 그지없구나.
한참 북동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발리르를 거치고,
거기서 다시 동쪽으로 꺾어 한참을 더 달려가면.
이내 언덕 너머로 솟아오른 수백의 창대가 눈에 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면,
산 위로 고개를 내미는 해처럼.
창대 밑에 휘날리는 단 한 종류의 깃발들이 눈에 들어온다.
검은색 십자 검 실루엣이 자수 된, 그 깃발은 마치 과거의 위상을 재현하려는 듯 가을바람 앞에 불꽃처럼 휘날렸다.
좀 더.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언덕 꼭대기 위로 올라가자.
그 너머로 펼쳐진 평야가 내 두 눈에 모두 담겼다.
빌비오나스.
그 넓은 평야 한쪽을 가득 채운.
빌비온의 군사.
곧 군세 선두에 있던 한 기사가 우리의 등장을 알아채고 육중함을 뽐내며 달려왔다.
1차 원정,
선봉 기사 베르융 오르테.
그가 그레이트 헬름을 벗어 옆구리에 낀 채, 땀에 젖은 앞머리를 휘날리며 인사했다.
“영주님, 티히트라, 발리르, 켄타나의 의지가 한곳에 다 모였습니다.”
그러면서 말머리를 돌려 집결한 군사들 쪽으로 안내하려는 그를 따라 말을 몰면,
“총 병력 1,380명. 기사의 수만 30으로 능히 아이베리아의 중원 일부를 바꿔낼 군세입니다.”
담담한 보고가 곁들어진다.
그 보고를 들으며 시선을 군세 쪽으로 쏟으면.
아,
새벽이 미처 거두지 못한 밤 조각 하나가 평원 아래 떨어진 것 같다.
군세란,
하늘의 것으로도 지울 수 없는 그런 것이로구나.
이내 군세 중앙에 멈춰 선 나는 맞춰 멈춘 베르융에게 말했다.
“출발합시다.”
돌아온 베나즈 가문의 첫 원정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