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41화 (241/365)

241화. 전야

“데잘! 햇살 좀 나눠줘!”

“네 건 어딨는데?”

풀어헤친 브리간딘, 그 속에서 터질 듯 튀어나온 뱃살.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겨우 모닥불 옆에 앉은 남자가 맞은편 남자에게 두꺼운 손을 내밀어 보인다.

“난 다 써버렸어.”

뚱뚱한 남자의 말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따져 물었다.

“원정 첫날에 보급받은 햇살을 다 써버렸다고? 대체 뭔 짓거릴 했길래?!”

그러나 그의 진지한 따짐에도 뚱뚱한 남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답할 뿐이다.

“등심을 구웠거든.”

“정신 나간 놈, 고기 하나 구우려고 보급받은 햇살을 다 썼다는 게 말이 되냐?!”

이어지는 핀잔에도 뚱뚱한 남자는 진지함을 고수하며 답했다.

“하지만 고기였다고, 햇살로 구운 고기는 불에 구운 거랑은 차원이 달라.”

“욥, 이 미련한 화상아! 기사는 보급품 낭비만으로도 문책을 받을 수 있단 거 몰라?”

“그러니까 조금만 빌려줘, 사타구니 쪽이 땀에 젖어서 좀 말려야 해.”

적갈색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넘긴 남자, 데잘은 질린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조금밖에 못 줘.”

끝내 품에서 쨍함이 담긴 작은 유리병을 욥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짧은 금발의 뚱뚱한 사내는, 자신의 비어있는 병에 쨍함을 조금 옮겨 닮곤 얼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역시 데잘, 자네밖에 없다니까.”

미워할 수 없는 익살스러운 웃음을 지은 욥은 자신의 병을 뱃살에 파묻혀 있던 벨트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나저나 욥, 좀 위험한 거 아냐? 거기서 조금만 더 살이 쪘다간 갑옷을 입지 못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걱정하지 마, 우리 가문의 갑옷은 굉장히 거대하다고.”

“그 거대함이 무색하게 네놈 살이 오르고 있으니까 하는 말이야, 갑옷을 입을 수 없게 되면 기사의 자리에서도 박탈된다고.”

계속되는 데잘의 잔소리에 욥은 그대로 숨을 크게 들이켜 배를 집어넣었다.

“오때, 이뤄면 좀 나아보이놔?”

“아서라, 패혈증에 걸려 죽기 직전인 돼지가 마지막으로 유언을 남기는 것 같잖아.”

“푸학!”

데잘의 냉소적인 의견에 욥은 참았던 숨과 함께 웃음을 내뱉으며 껄껄 웃었다.

“그러니까 웃을…,”

모닥불을 이리저리 들쑤시며 설교를 이어가려던 데잘은,

“이봐 데잘.”

조금 초연해진 욥의 말투에 금방 입을 다물었다.

“나는 아직도 모르겠네.”

그의 그 말에 데잘은 한참 누그러진 얼굴로 대답했다.

“뭐가.”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우린 켄타나의 깃발 아래서 발기지르를 쓰러트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잖나.”

욥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두 눈을 모닥불로 적셨다.

“그 싸움의 치열함이 무색하게, 기사로서 내걸었던 모든 다짐이 무색하게. 우리는 지금 베나즈라는 이름을 갖고 싸우려 하고 있지.”

“그렇지.”

데잘은 욥의 말에 십분 공감한 듯, 짧은 한숨을 내쉬며 시원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우린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모르겠네. 기사는 그저 머리 위 휘날리는 깃발을 따라 움직이는 존재이지만…, 가끔은 그 깃발의 방향에 의문이 생기곤 해.”

처연한 욥의 말에 데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을 살핀 욥이 살짝 반색하며 물으면,

“자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이 있나?”

데잘은 다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안 그렇겠나, 당장 우리에게 주어진 보급을 보게. 세상에 군 보급품으로 원정군 모두에게 날씨 파편이 주어지다니. 조상들이 들려주신 이야기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환경이 아닌가.”

그러나 욥에 대한 공감을 내비치면서도, 데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그런데 욥, 어쨌든 세상은 변하게 되어있어. 그 아이베리아마저도. 선두를 자처하는 깃발들은 이미 이 모든 변화를 겪고 적응해 그 위에 군림하고 있겠지. 우리는 구식에서 막 벗어난 후발주자인 셈이야.”

“그 말인즉슨, 우리 위의 휘날리고 있는 깃발 역시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변화란 소린가?”

“그래.”

데잘은 확고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욥은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마지막 의문을 내비쳤다.

“그것이 베나즈의 깃발이어도?”

그 의문에.

데잘은 쉽게 답하지 못하였다.

이 순간에도 베나즈는 아이베리아 내에서 공공연한 금기어에 해당하는 불경한 것.

그 휘날리는 깃발 아래 자신이 서 있다는 사실은.

기사로서 쉽게 납득하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지금 이 원정에 참여하는 것은, 당장 그들이 모시는 켄타나의 깃발이 베나즈와 함께 휘날리고 있기에.

그렇기에.

데잘은 이내 시인하듯 답했다.

“기사이니까. 기사는 그래야 하는 존재이니까.”

그제야 욥은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데잘의 그 말만으로도 충분히 납득한 듯이.

그렇게 한 차례 침묵이 흐르고 난 뒤,

“갑자기 내 몸무게만큼 분위기가 무거워졌구먼.”

욥은 제법 유쾌한 목소리로 주위를 환기했다.

그러고 나서 꺼낸 새로운 화제는.

“데잘, 디안 공을 직접 뵌 적이 있나?”

자연히 지금 머리 위 휘날리는 깃발의 주인이었다.

데잘은 활짝 핀 표정으로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보았지, 공표식이 있었던 날 나는 저택 바깥마당에 있었거든. 아주 찰나였지만 그래도 말을 타고 개선해 들어오는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있었어.”

“그래서, 소문이 사실인가?”

욥이 살에 반쯤 파묻힌 코를 실룩이며 묻자, 데잘은 마치 어떤 설화를 얘기하듯 뜬구름 잡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사실이더군. 한때 아름다운 외모로 명성을 떨치셨던 메리안 공녀님의 실체를 확인한 순간이었지.”

“어머니 쪽을 빼다 닮았다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외모가 나오겠어?”

적극적인 표정을 지은 욥이 몸을 들썩이며 데잘 쪽으로 고개를 불쑥 내밀어 물었다.

“얼마나 잘생겼기에?”

그러면 데잘은 피식 웃으며 따지듯 되묻는다.

“생각해보게, 공표식에서 그 콧대 높으신 빌로즈 가문의 차녀께서 한눈에 반해 베나즈의 집사부로 들어가시지 않았는가.”

“그래…, 그렇네. 그래서 더 궁금해지는군.”

골똘히 호기심을 내비치던 욥은 잠시 후.

조금은 자조적인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바깥에 드러난 매력이 가장 강한 명분이 되긴 하지…,”

이에 데잘은 껄껄 웃으며 한마디 보탰다.

“혹시 몰라, 상대측 가문의 여식들이 디안 공의 얼굴을 보고 전쟁을 고사시킬지도.”

그럼 욥도 그 보탠 말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파안대소한다.

“키야, 정말 그렇게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새로운 전설이 되겠구만.”

* * *

“새들을 날려 보내는 족족 격추되어 정확한 위치는 파악하지 못했으나, 그 격추 기점으로 계산한 결과 상대는 막 국경 인근에 접근한 것으로 보입니다.”

참모로 보이는 기사 하나가 들고 있던 봉으로 간략하게 그려진 지도 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그 보고를 듣고 있던 람비의 영주 레테는 무심한 표정으로 물었다.

“적군의 규모는.”

“대충 짐작해도 천오백 가까이 됩니다.”

“공성 병기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군세가 제법 크다만, 꾸려온 병력만 보면 대대적인 공성을 하러 온 것 같지는 않군.”

레테의 말에 참모는 봉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아무래도 성을 포위한 채 장기적 국면을 통한 항복을 받아내려는 목적 같습니다.”

“공표식 한 번 요란하게 거행하더니, 기껏 한다는 게 기업으로 배 불린 군세를 갖고 들이닥치는 것뿐인가.”

레테의 비아냥에 자리에 모여 있던 기사 몇몇이 동조하듯 보란 듯이 크게 웃었다.

“아이베리아를 떠난 배반자의 후손이라서 그런지, 이 땅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이럴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애를 상대로 입을 갑옷은 없는데.”

웃음 속에 곁들어진 힐난에 레테는 작게 피식 웃으며 참모를 바라보았다.

“람비 인근의 땅은 지금쯤이면 질은 진흙이 되었겠지.”

“그렇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을 바람의 인챈트로 무리하게 병력을 운용했다간, 그대로 기동력에 크나큰 손실을 얻을 터.”

“다만 그래도 경계하셔야 할 것은 기사 베르융과 테티르입니다.”

전설적인 두 기사의 이름이 참모의 입에서 나오자,

웃음기 가득했던 자리엔 금세 침묵이 내려앉았다.

“테티르의 바람은 일대를 장악하는 것이어서 지형적으로 우리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베르융의 바람은 좀 다르지.”

레테의 판단에 참모는 적극적으로 동조하며 대답했다.

“공성 병기의 부재 역시 베르융의 존재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람을 무겁게 하면 될 일이다. 1기사 발손, 그대의 인챈트로 람비 인근에 두꺼운 안개를 깔아놓아라.”

그의 명령에 자리에 모인 기사 중 하나가 일어나 큰 목소리로 답했다.

“명 받들겠습니다.”

“그자가 바람을 전신에 두르기 전에, 수성 병기의 화력을 집중해 찍어누르기만 하면 될 일이다. 지형 특성상, 베르융을 집중해 저격할 기회는 반드시 오게 되어있어.”

레테의 냉철한 판단에,

기사들은 열의에 찬 눈빛으로 수긍했다.

“참모, 징집병을 포함해 우리 측 총 병력은 몇이나 되지?”

“천백입니다.”

그 대답을 듣자마자 레테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허리에 물린 아밍 소드를 뽑아 들며 말했다.

“베르융을 저격한 뒤 기동력을 상실한 배반자의 무리를 직접 나가 꺾는다. 그 뒤 성으로 복귀하여 역으로 놈들을 붙잡아 장기적으로 말려 죽인다. 기업으로 배 불린 놈들의 실책은 반대로 기업의 압박에 눌려 죽게 될 것이다.”

레테의 비장한 명령에 자리는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위에서 그 현장을 내려다보고 있던 레테의 아들, 갤렝은 조용히 어금니를 씹어야만 했다.

그는 곧 자신의 옆에 붙어 있던 부관에게 토로하듯 말했다.

“너도 느껴지지 않느냐, 저 비이성적인 현장이. 마치 의도적으로 0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지 않은가!”

이에 지긋한 나이의 부관은,

“그래야만 하겠지요, 람비 가문의 역사는 그들을 부정함으로써 태어났으니까요.”

스스럼없이 자신의 의견을 내뱉었다.

“0이 소실되었다, 마지막 잔당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 중추였던 맥레인마저 처단했다. 그 결과를 통해 부흥의 결실을 얻은 수많은 깃발 중 하나가 바로 람비입니다.”

“하지만 0이 소실되지 않았다면? 정말 맥레인의 후손이 돌아온 것이라면?”

“람비의 역사에, 아니 람비 가문과 같은 무수한 깃발의 역사에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부관! 자네마저…!”

부관은 냉정한 얼굴로 갤렝을 내려다보았다.

“도련님, 이것이 아이베리아의 역사입니다. 부정과 번복의 끝없는 싸움. 그 속에선 저마다의 명분을 갖고 사력을 다하는 기사들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사이에 의심을 거듭하여 진실을 보고자 하는 이는 없어야 하는 건가?”

이에 부관은 즉답했다.

“지금 아이베리아의 역사는 그것을 ‘배반자’라 부릅니다.”

“허…,”

갤렝은 막 열의에 찬 얼굴로 건배를 나누는 기사들을 내려다보며,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 * *

이른 새벽.

베르융과 테티르가 나를 찾아왔다.

“출발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테티르는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 새벽에 걸맞지 않은 뜨거움을 품은 채 내게 말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베르융은 차분히 내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공,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이윽고 베르융의 물음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람비와의 전투는 없을 겁니다.”

이에 테티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이내 베르융의 눈치를 살피곤 두꺼운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허어…, 그럼 공께서는…,”

전율하는 테티르의 말에 베르융은 조용히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대답했다.

“그저 람비의 항복을 받아내실 생각이시네.”

테티르 론바즈.

그 태산 같던 사내는 곧바로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흘렸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그것을 끝으로, 나는 조용히 천막 밖을 나섰다.

베르융은 그 뒤를 바짝 쫓았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 자리에 모인 무수한 깃발들의 생각을.

베나즈라는 이름이 공표되었지만,

베나즈가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실체는 단 한 번도 드러난 적이 없어.

그에 따른 의심과 오해가 아군에게까지 쌓일 정도로.

그래서 이제 그 실체를 보여야 할 때다.

베나즈가 가진 눈을,

아이베리아에게 보여줘야 할 때다.

새로운 이름으로 복원된 그릇 안에,

온전히 담기게 된 그 눈을.

아군에게 열렬한 확신을 줄 그 눈빛을.

베르융은 어느새 멀리 떨어진 채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뒤로한 채.

새비안을 뽑아 들었다.

밤중의 별이었던 그것은 새벽을 가르는 빛으로 반짝였고.

이내 흐르는 기류를 가르며 공명하듯 진동했다.

그 공명에 반응한 것일까.

그저 검을 뽑았을 뿐인데 심장이 울컥하며 박동한다.

천천히 검을 역수로 잡아 땅을 향해 검을 박아 넣었다.

동시에 자루를 잡은 손으로부터 헤아릴 수 없는 감각의 영역이 흘러들어 온다.

낡은 베일에 감추어져 있던 0은,

걸맞은 그릇을 만나 유감없이 그 크기를 내게 알려주었고.

이내 크기를 이해한 나는.

재현.

[0]

[마그나베노스]

[세상을 관통한 창공의 눈]

검을 박아넣은 점을 중심으로 하늘의 모든 것이 물리쳐진다.

강제로 만들어진 쾌청.

그것은 나와 내 검으로 그려낸 거대한 눈.

이윽고,

만들어진 쾌청 주위로 세상을 일그러트릴 만한 바람결이 휘감기기 시작했다.

전야가 끝나고,

태풍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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