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42화 (242/365)

242화. 태풍

가을의 것이라곤 볼 수 없는 쾌청.

그 가운데 바람 줄기 하나 흐르지 않는다.

직전까지 휘날리던 작은 깃발조차 풀이 죽어버리고, 발아래 깔린 낙엽조차 바스락거림을 멈춘 채 숨죽인다.

베나즈 군의 야영지는 순식간에 침묵에 젖어 들었다.

그저 멍한 표정으로 하나둘 천막 밖으로 나와 눈 앞에 펼쳐진 경이를 목도 할 뿐.

임박할 전투를 대비하며 기사에 대한 담론을 나누던 켄타나의 욥과 데잘도 그 자리에서 넋을 놓아야만 했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그것은,

아이베리아의 과거이자 그 과거를 이어받은 현재였으니까.

원형으로 펼쳐진 쾌청,

그 경계선 너머로 휘날리는 잿빛의 경계.

과연 저걸 진정 바람이라고 불러야 할까 싶을 정도로 괴악한 꿀렁임이 풍경 일부를 문자 그대로 갈아엎고 있다.

저 멀리 경계선에 줄지어 서 있던 첨탑도.

그 첨탑 너머 작게 솟아있던 성벽도.

이젠 그 존재의 유무조차 파악하기 힘들다.

테티르 론바즈는 태풍의 눈 아래 무릎을 꿇고 작게 흐느꼈다.

과거,

본인의 명예가 가장 빛났었던 그 시기.

이 시선을 위해 유감없이 나부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서.

영원토록 감겨있을 줄 알았던 세상의 눈이, 지금 막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어서.

“아아…, 태풍이여.”

그 흐느낌 뒤로 멀찍이,

켄타나의 기사 엘르길과 가버트 역시 입술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이것이…, 기사왕이 휘둘렀던 태풍이란 말입니까.”

가버트의 물음에,

엘르길은 되려 멍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정말인가…?”

순수한 놀라움을 내뱉는 그들 뒤로, 조용히 풍경을 둘러보고 있던 베르융은.

저도 모르게 두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맥레인,

당신이 제대로 골랐다고.

이 못난 동료가 이제야 확신했다고.

자신의 믿음이 진실이 되는 그 순간을, 베르융은 기사답게 묵묵히 전율했다.

천이 넘는 병사들의 야영지 위로 얼마나 긴 침묵이 흘렀을까.

어느 병사 하나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길 봐!”

침묵 속 울려 퍼진 그의 목소리는 일대에 메아리쳐졌고, 이내 모두의 시선이 그 병사의 손가락 끝에 몰렸다.

그의 손가락 끝엔.

깃발 하나가 반쯤 찢어져 힘없이 나부껴 떨어지고 있었다.

저 너머 잿빛 바람에서 튕겨 나온 듯 보이는 그 깃발이 이내 땅에 떨어지자.

그것을 지켜보던 병사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람비의 깃발이다…,”

곧 결사를 다짐하고 상대할 줄 알았던, 두려움을 결의로 속여가며 싸워야 했던 그 상대의 깃발.

그것이 몰락을 묻힌 채 발 앞에 떨어졌다.

그제야,

“아…,”

병사들은 실감했다.

눈앞의 경이가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이내 깨달음의 탄식은.

“아…!”

함성으로 번져.

아아────── !

쾌청한 하늘을 가득 채웠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온몸을 쥐어짜 내뱉는 그들의 함성 속에는 전율과 승리에 대한 쾌감만이 가득했다.

막연한 불신이 불굴로 팽배해지는 순간이었다.

방패를 두들기고,

무기를 땅에 찍으며,

포효하는 그들에게 화답하듯 바람은 더욱 거세져만 갔다.

* * *

성내에 있던 갤렝은 이를 딱딱 부딪치며 좁은 창을 통해 밖을 엿보았다.

동시에 성관 내에 있던 곡창 하나가 뜯겨 날아가는 것이 그의 눈에 실시간으로 담겼다.

뒤이어 육중한 소가 뒤집힌 채 하늘로 치솟았고, 주인을 잃은 수많은 옷이 거칠게 나풀거리며 형형색색을 떨어트렸다.

이에 갤렝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이 상황에서 내뱉을 소감 따위가 있을까.

그저 압도적인 두려움과 무기력감만을 느낄 뿐이다.

과거, 역사의 흔적에서나 볼 수 있었던 태풍이 지금 이곳을 표적 삼고 있어.

인지 자체만으로도 부조화가 일어나는 그 현상 속에서,

갤렝은 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아야만 했다.

뭐라도 해야,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그 생각이 듦과 동시에 바깥에서 들려오는,

“아아악!”

“안돼!!!!”

생생한 절망들.

그것은 갤렝의 얼굴을 더욱 창백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도련님!”

마찬가지로 창백한 얼굴로 나타난 부관이 헐레벌떡 달려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어서 안쪽으로!”

“어찌….”

“도련님!”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부관은 갤렝을 업은 채 허겁지겁 만찬장이 있는 곳까지 달려 들어갔다.

그곳엔 이미 람비의 귀족들과 기사, 그리고 영주인 레테까지 모여있었다.

넋이 나간 갤렝을 겨우 빈자리에 앉힌 부관은 조용히, 만찬장 위로 오가는 이야기를 엿들었다.

“외곽의 마구간이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곡창 역시 성내의 것을 제외하면…,”

“가바엘 경을 비롯한 휘하 파수병들과의 연락이 모두 두절 되었습니다.”

두려움이 섞인 기사들의 보고 뒤로,

이번엔 귀족들의 신경질적인 의견들이 날아들었다.

“이대로 가다간 람비의 존속은 고사하고 우리가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평탄화되겠소!”

“항복합시다! 귀족들이 만장일치로 합의하면 되는 거 아니오!”

“항복?! 제정신이야! 설령 베나즈가 받아준다고 한들, 그들이 우릴 끝까지 책임져 줄까?”

“그전에 먼저 항복부터 권유하는 것이 이 아이베리아의 도리가 아니오?! 어찌 이런 무시무시한 공격을 감행할 수 있단 말이오!”

그 난장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부관은,

저들의 물음에 대신 답해주고 싶었지만 이내 꾹 참고 삼켜야만 했다.

곧, 경직된 표정의 레테가 기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에겐 없는 것인가, 태풍의 눈을 찌를 기사가!”

그 발언에 기사들은 서로,

침묵을 가득 베어 문 채 서로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화악!

하고 외벽을 때리는 무지막지한 바람 소리가 성내를 가득 채웠다.

그 반동으로 촛불 몇 개가 쓰러졌고, 여러 집기가 쏟아져 깨졌다.

이내.

“소신, 람비의 1기사로서 직접 태풍의 눈을 찌르겠나이다.”

기사 하나가 자리에서 우뚝 일어서 외쳤다.

“발손, 자네가 할 수 있겠는가.”

“목숨을 걸겠습니다.”

발손은 훌륭한 기사다.

평생 람비를 위해 봉사해온 기사.

그런 기사가 모두를 대신해 나서려 하고 있다.

갤렝의 부관은 속으로 탄식했다.

발손은 희생을 자처함으로써 항복의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영주 레테의 그 부담을 나서서 부둥켜안은 것이다.

귀족들은 발손의 외침에 환호를 보냈다.

그 환호를 뒤로한 채 발손은 레테에게 인사를 올린 뒤,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던 자신의 투구를 집어 들었다.

그런 그의 전우인,

몇몇 기사는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그 뒤를 따랐다.

그것만으로도 발손이 얼마나 훌륭한 기사인지를 반증하는 것이었다.

* * *

“나를 믿고 따라주어 고맙다.”

투구를 눌러 쓴 발손이 앞에 도열한 오십 장병들에게 소리쳤다.

“무겁게 가자, 난쟁이가 만든 갑주를 입어라. 둔중한 둔기가 되어 꿋꿋이 나아가 눈을 찌르자.”

그의 담담한 연설에 자리에 모인 기사들, 장병들은 모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로 어긋남은 중요하지 않다.

그 아래 위치를 지켜야 하는 자에겐 말이다.

발손은 그런 위치를 지키는 기사로서 마땅히 출정했다.

성관 내, 곧 쓰러져 무너지기 직전인 마구간에서 얼마 남지 않은 말 위에 올라탄 그들은.

이내 바깥을 향해 고삐를 치댔다.

후욱!

바람이 분다.

아니, 분다기보단 때리듯 쏟아졌다.

발을 떼기도 전에 바람을 마주한 병사 둘이 그대로 땅에 짓이겨지듯 매쳐졌다.

그러나 발손은 선두를 지킨 채 앞으로 나섰다.

그 뒤를 몇 기사와 병사들이 바짝 따랐다.

성문 밖으로 뛰쳐나와, 녹음이라곤 발견할 수 없는 갈변된 땅 위를 치대어 달려나간다.

어느새.

출정한 오십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다.

그럼에도 발손은 나아갔다.

“람비 최후의 기사들아! 가자!”

몰아닥치는 바람 속, 제아무리 외쳐도 기어가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뒤따르는 병사들이 목청껏 소리친다.

그러나,

후욱!

들려오는 것은 태풍의 이죽거림 뿐.

이윽고 저 멀리 경계 지어진 쾌청이 발손의 눈에 들어왔다.

진정 닿겠다.

해서 더욱 박차를 가하는 그 순간.

“허… 윽…?!”

발손은 사타구니 쪽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안장의 감촉이 사라지고,

이어 자신이 타고 있던 말과 눈을 마주쳤다.

이후 말은 더욱 높은 곳을 향해 발사되듯 저 까마득한 위로 치솟아 올랐다.

“헉… 헉… 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허우적대던 발손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본인이 어느 정도 높이까지 휩쓸려 왔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다.

보이는 것은 출렁이듯 휘몰아치는 잿빛 바람결뿐.

오감마저 유린당한 채 한참을 허공에서 유영하던 발손은 끝내.

“허… 허… 헉…!”

잿빛의 바람 더미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쨍한,

그리고 따듯한 햇빛이 그의 안면을 두들겼다.

아직.

발엔 닿는 것이 없다.

그제야 깨달은 표정을 지은 발손은 주변을 쭉 살폈다.

발아래엔 구름으로 만들어진 잿빛 바다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위로는 푸른 하늘 위 떠오른 태양만이 덩그러니 반짝인다.

압도적인 침묵, 그리고 약간의 체공.

직후.

발손은 엄청난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흡… 흡…!”

거친 숨을 몰아쉬며 쏟아져 내려가는 감각을 온몸으로 받아든 발손은,

곧 찰나의 순간 눈에 들어온 바닥을 향해.

쿵!

* * *

꼬박 하루가 지났다.

람비의 성벽은 절반 이상이 부서졌고 성체 역시 뼈대만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가장 튼튼한 성의 최심부.

창고 안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레테는.

태풍으로 무너진 잔해에 다친 듯 이마를 붕대로 감싼 모습이었다.

곧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넝마를 뒤집어쓴 채 잠을 청하는 귀족들 사이를 가로질러 창고 밖을 나섰다.

그 뒤를 아들 갤렝이 따랐다.

“아버지…!”

“아들아.”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갤렝의 목소리를 들은 귀족들 몇몇이 자리에서 일어나 레테를 올려다보았다.

레테는,

“틀렸구나, 이 애비는. 틀렸음에도 틀리지 않았다는 믿음으로 죽였구나, 이 땅을.”

“아버지!”

“아들아, 이 애비는 시인하러 간다. 이 애비의 판가름으로 태풍이 끝나길 바랄 뿐이다.”

초췌해진 얼굴로 조용히 창고 옆, 수척해진 말 위에 간신히 올라탄 레테는 흰 수의를 목에 두른 채 고삐를 당겼다.

갤렝은 그런 레테를 말리기 위해 달려 나왔지만,

바람에 휩쓸릴 뻔한 그를 부관이 간신히 달려들어 막아냈다.

휘익!

더욱 매서워진 바람.

그 사이를 위태롭게 가로지르던 레테는 무너진 건물들을 둘러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몇몇 지하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그것만으로도 위안을 얻은 레테는 완전히 무너진 성벽 잔해를 넘어섰다.

이상하게도.

바람의 세기는 점점 옅어져 갔다.

아니, 정확히는 레테가 가로지르는 곳에만 그 바람이 유순해졌다.

천천히,

비척거리며 나아가는 말 위에서 레테는 곧.

저 멀리 꿈같이 펼쳐진 쾌청을 눈에 담았다.

그림을 그린 듯 선명하게 경계 지어진 태풍의 눈.

그곳을 향해 더욱 앞으로 나아가면.

어느새 저 쾌청의 경계선 부분에 누군가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흑색의 보석 같은 갑주를 입은 기사였다.

말 위에 올라탄 그 기사 뒤로는 위엄이 느껴지는 기사들이 도열 해 있었다.

더욱 나아가 드디어 쾌청에 발을 들였을 때, 레테는 눈부신 따듯함을 느끼며 눈물을 쏟아야만 했다.

그리곤 두려움에 떨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베나즈의 후손은 말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머리 뒤로는 마치 무지개와 같은 후광이 반짝였다.

역사에 기록된 대로, 태풍의 근원임을 증명하는 현상이었다.

또 그것을 반복해 증명하듯.

그의 허리춤엔 보석만큼이나 빛나는 검자루가 보였다.

레테는 이제 말에서 내려.

그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진흙으로 범벅이 된 손으로 목에 두른 수의를 움켜잡은 채 말이다.

“받아주시오, 실로 패배했다는 우리의 시인을. 부디 자비를 보여주십시오.”

읍소하는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정말 거짓말같이.

태풍은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었다.

귀 뒤의 예민한 감각으로 그것을 알아차린 레테는,

자연히 고개를 들어 조심스레 베나즈의 후손을 올려다보았다.

아,

아직 남아있는 후광 탓에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대의 패배를 받겠다. 그리고 그것을 결코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겠다.”

그는,

젊은 목소리로 레테에게 말했다.

그것은 참으로 자애로운 것이어서, 레테는 다시 땅에 이마를 처박아야만 했다.

베나즈,

1차 원정.

3일 차.

람비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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