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43화 (243/365)

243화. 후폭풍

“레테 경! 글라디옴과 그 기사들이 후미 엄호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랜 과거,

아들 갤렝이 어미의 품에 안겨 젖을 물고 있었던 때였다.

기사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 들어와 내 앞에 무릎 꿇은 채 올리는 보고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 대답은 행정관의 입에서 이뤄졌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반역의 잔당들이지 않은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내 끄덕임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모인 몇몇 기사들은 서로 분분한 의견을 가지고 혼란스러워했다.

“펠테아와 뱅그스는 어떤 선택을 했지?”

이윽고 고심하던 레테가 기사에게 물었다.

그럼 기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모두 글라디옴의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단호히 답했다.

이에 행정관은 손뼉을 치며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도 미리 합의된 내용대로 행동했군요, 레테 경. 이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아니 애초에 반역의 무리에게 여지를 둘 이유조차 없잖습니까?”

레테는 마른 입술에 급히 침을 발라가며 행정관에게 물었다.

“해서, 람비의 독립은 확실히 보장되는 것이오?”

“물론입니다, 기사왕께서 서거하셨으니 그분께서 유지하고 계셨던 균형 역시 재편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애초에 글라디옴이 그것을 노리고 반역을 꾀한 것 아닙니까? 위대한 앵거스 가문이 초기에 진압했기 망정이지…,”

행정관은 혀를 끌끌 차며 탄식을 내뱉었다.

“위대한 앵거스 가문이 근방 모든 깃발의 독립을 약속했습니다. 조건은 반역의 잔당들에게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니 명분상으로도 명예로운 일입니다.”

“그렇지, 그렇지…,”

레테는 고개를 살살 끄덕였다.

그리곤 분분한 의견이 심화 되어가기 시작한 기사들을 향해 선언하듯 외쳤다.

“우리는 글라디옴을 위시한 반역 잔당들의 추격에 원군을 보낼 것이다. 저들에게 응당 정의의 마침표를 찍어놔야 하지 않겠는가!”

그 발언에 기사들은 방금까지 내놓았던 의견들을 일축한 채 단호한 충성을 내비쳤다.

어차피 저울은 기울어졌다.

열세인 곳에 뻔히 무게를 두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

목숨을 걸고 이상을 구하는 건 옛말이야.

존립을 위해 이상을 편취 하는 것이야말로 작금의 정답이다.

행정관은,

그런 레테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람비의 독립을 경하드립니다, 경…, 아니 공.”

레테는 이에 직전까지 품고 있었던 불편한 감상들을 증발시키려는 듯 웅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덜덜,

막 과거의 일들을 시인한 레테가 진흙으로 범벅이 된 몸을 부둥켜안은 채 떨고 있다.

곧 기사 하나가 그에게 물이 담긴 컵을 건네주자,

레테는 그것을 받아들기 무섭게 벌컥벌컥 들이켰다.

컥컥.

얼마나 급하게 들이켰는지 목에서 몇 번이나 굽이진 개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어 깨끗하게 비운 컵을 두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레테는 주위에 서 있는 기사들의 눈치를 보다가,

자신에게 물을 가져다준 기사에게 넙죽 고개를 숙였다.

“고맙소, 고맙소.”

그러나 물을 가져다준 기사는 차게 식은 눈빛으로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방향을 잃은 시선은 떨고 있는 몸만큼이나 흔들리다가 이내 발밑으로 푹 꺼져버린다.

그런 그와 마주 앉아 있던 베르융은 조용히 일어나 옆 기사의 허리춤에 달려 있던 단검을 뽑아 그 앞에 던졌다.

내려 깐 시선에 단검이 들어오자,

레테는 화들짝 놀라 상체를 들썩였다.

“레테, 당신 역시 기사로서 우뚝 선 자이니 잘 알 것이다. 기사의 본분을 저버렸을 때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압니다, 알다마다요.”

레테는 떨리는 손으로 땅에 떨어진 단검을 주워들었다.

그의 떨림에 맞춰 요동치는 단검에선 시퍼런 은빛이 연신 뿜어져 나온다.

이내 단검을 역수로 고쳐 쥔 레테는 눈물을 쏟으며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나 곧,

짤그락.

쥐고 있던 단검을 그대로 쏟아버렸다.

그와 동시에 베르융은 차게 식은 얼굴로 말했다.

“레테, 너에게서 기사의 자격을 박탈한다. 람비는 베나즈의 이름 아래 예속될 것이며 해당 지역의 귀족들은 모두 자유민으로 강등될 것이다.”

레테는 다시 한번 땅에 이마를 처박은 채 절을 올렸다.

그리곤 진흙으로 더럽혀진 면상을 드러내며 베르융에게 갈구하듯 빌었다.

“한 번만…, 베나즈의 후손을 뵙게 해주십시오. 내 진심으로 잘못을 빌고 싶소.”

“네가 아직도 기사였다면 그분께 직접 잘못을 시인할 수 있었겠지. 그러나 지금 네겐 그 어떤 기회도 없다. 돌아가라.”

하지만 베르융은 한바탕 냉소를 쏟은 뒤 그대로 뒤돌아 사라졌다.

마찬가지로 레테 주위에 서 있던 기사들 역시 베르융의 뒤를 따라 묵묵히 따랐다.

그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고 있던 레테는,

진흙으로 새까매진 수의를 옆구리에 낀 채 노쇠한 말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하늘이 맑다.

직전까지 이 땅의 모든 구름이 집결했던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 맑고 공허한 공기를 가르며 레테는 람비로 돌아갔다.

* * *

심장이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전력으로 질주하듯 뛰는 심장은 내 몸의 체력을 빠르게 고갈시켰다.

시야는 전반적으로 흐릿해졌고, 그나마 온기가 느껴졌던 피부는 백옥보다 더 창백해졌다.

이런 비슷한 감각을 이전에 한 번 느껴본 적이 있다.

셀레어를 완전히 개방시켰던 그때.

그 후유증과 비슷해.

다만 비슷할 뿐 그 궤는 다르다.

셀레어 때는 한계를 상정하지 않고 폭주한 결과물이었기에 그 후유증 역시 죽음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지금은 엄연한 통제하에 부린 힘이었기에 그 후유증의 정도가 심하지는 않다.

애초에,

통제라는 단어가 우스울 정도의 힘이긴 했어.

극히 일부였다.

람비를 무너트렸던 그 태풍 말이다.

그저 내 작은 역량을 거대한 그릇인 새비안이 받쳐주었기에 발휘가 가능했었던 것이었고,

그 발휘의 영역이 0의 조각이라 불리기도 민망한, 그런 미미한 것이었을 뿐이야.

하지만 파급력 하나만큼은 절절히 체감했다.

죽음에 필적하는 후유증이 아닌, 그저 약간의 발휘만으로도 전황을 바꾸어내는 말 그대로의 재해.

이게 바로 0의 실질.

“…, 영주님.”

전혀 느끼지 못했다.

베르융이 천막 안으로 언제 들어왔는지.

감각조차 무뎌진 것인가.

“베르융 경.”

“람비의 영주였었던 자는 돌아갔습니다.”

“그렇습니까.”

“…, 그가 과거의 일을 시인했습니다. 근방 깃발들의 자치권 대부분은 제 예상대로 베나즈를 부정해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경이 이번 원정길을 정하셨겠지요.”

베르융은 내 눈빛을 읽곤 조용히 맞은편 자리에 걸터앉았다.

“괜찮으십니까.”

“낯설어 적응하기가 힘들 뿐, 버거워 일어나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내 창백한 낯빛을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베르융은 이내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 숙였다.

“영주님, 병사들의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0의 실체를 확인함으로써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의심 대부분이 거둬진 것으로 보입니다. 글라디옴…, 맥레인 경의 억울함이 작게나마 그들의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단 소립니다.”

좋다.

적어도 나와 함께 할 자들만이라도 그것을 느꼈으면 됐어.

“병사들의 사기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습니다, 각 깃발의 기사들 역시 이 천막을 마치 성지 보듯이 하고 있지요.”

베르융은 식은 웃음과 함께 자신 또한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음을 토로하듯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냉정함을 되찾은 그가 내게 조언했다.

“마찬가지로…, 이제 아이베리아가 알게 되었습니다. 진정 0이 베나즈의 이름과 함께 돌아왔다는 것을요. 그 말인즉 잠자코 있던 자들의 시선이 움직이기 시작했단 뜻입니다.”

그 조언 속엔,

진심 어린 경고가 포함되어 있었다.

“어쩌면…, 도중에 원정을 그만두고 돌아가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충분히 납득한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본격적인 전쟁이 막 시작되었다는 것을.

“영주님, 하루 정도를 더 머물고 출발하심이…?”

“아뇨, 바로 출발합니다.”

“그렇담 이후 개전은 저희 기사들의 선에서 해결하겠습니다.”

베르융은 날카로운 전의를 드러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나를 걱정해주는 그 따스함만은 오롯이 간직한 채였다.

* * *

“보았는가!”

백색의 의회장.

거대한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 가운데 백발의 지긋한 노인이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왼편에 앉아 있던 중년의 남자가 답한다.

“아주 선명히 보았습니다, 기사왕이 휘두르던 것보단 훨씬 규모가 작았으나 위력 하나만큼은 과거 생각이 날 정도로 절륜했지요.”

이어 오른편에 있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러자 백발노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젊은 사내가 대꾸했다.

“어떻게 하기는, 마치 선택지가 여러 개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그 비아냥에 여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코웃음 쳤다.

“근시안적인 시선으로 고고한 척하려 애쓰지 마라, 보는 내가 애잔하니까.”

이에 젊은 사내가 벌떡 일어나 극렬한 반응을 보였다.

“이 썅년이…!”

“아서라, 경이라는 칭호를 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러다 오늘 경 친다.”

여인은 사내의 무시무시한 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잔뜩 희롱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중년의 남자가 사내를 노려보았다.

“앉아.”

순간,

그 말을 하는 중년 남자의 눈가에 검은 핏대가 울컥거리며 솟았다.

살기 그 이상의 흉흉함에 사내는 겨우 분을 삭이며 자리에 앉아야 했다.

그럼에도 중년의 남자가 내뿜는 그 기운이 어찌나 박력 넘치는 것인지 한참 동안 주위가 일렁거렸다.

이에 백발노인은,

“가헨, 너답지 않게 흥분했구나.”

중년 남자에게 심심한 핀잔을 던진다.

“하긴, 베나즈의 후손이라니…,”

곧이어 헛웃음을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백발노인에게, 가헨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열변했다.

“분명 내 창이 그년의 배를 관통했었는데…!”

“이놈, 입에 문 걸레부터 내뱉어라.”

노인의 꾸짖음에 가헨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찌 되었든, 소실된 것이 돌아왔으니 응당 그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아마 이 생각을 가헨 너 말고도 네 명의 기사 역시 하고 있겠지.”

노인의 말에 젊은 사내가 금세 들끓는 호기심을 드러내었다.

“히야, 글라디옴을 무너트린 다섯 깃발이 다시 재회하는 겁니까?”

그러자 여인이 또 이죽거린다.

“재회 같은 소리, 글라디옴이 무너진 그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뿔뿔이 흩어진 게 다섯 기사였어. 그들 모두가 우리 가문의 경쟁자다.”

사내는 이번에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그러니까 재회라고 하는 거야, 씨발 재회가 꼭 눈물 질질 짜면서 껴안는 그런 게 아니잖아?”

결국엔 여인은 혀를 내두르며 대꾸하길 포기했다.

“대체 동생이라는 새끼가…,”

“다 들려 누나년아.”

“조용!”

노인의 불호령이 떨어지니 그제야 둘의 실랑이도 끝이 났다.

“요는 제자리가 바로 이곳이어야 한다는 거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깃발은 네 기사 가문이 아닌 앵거스 가문이다.”

노인의 말에 젊은 사내가 곱슬한 금발을 손가락으로 꿰며 흥얼거렸다.

“위이대한 씨입새끼들.”

그 경박함에 결국 참지 못한 노인이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이에 젊은 사내가 부랴부랴 항변하기 위해 입을 벌렸지만.

동시에 노인의 오른손 검지, 그곳에 걸린 반지가 빛나기 무섭게 그에게서 나오는 모든 소리가 차단되었다.

“헤렌나, 놈의 혓바닥을 다시 개간시킬 수 있도록 유모에게 말해놓아라.”

이어 노인이 여인에게 지시를 내리자, 헤렌나라 불린 그녀는 목소리 없이 허공에 뻐끔뻐끔 무언가를 내지르는 사내를 흘겨보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잘 들었지? 우리 귀여운 붕어.”

사내는 억울한 표정으로 온갖 쌍욕을 내뱉었지만,

영락없는 어항 속 뻐끔거리는 붕어의 모습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래서, 나서는 겁니까? 위험 부담이 좀 크게 느껴지는데요.”

몸부림치는 사내를 뒤로 가헨이 노인에게 묻자.

노인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답했다.

“낙과를 기다리는 벌레보다, 융성한 과실을 탐하는 새가 나은 법이니라.”

가헨 레바르도.

과거 기사왕의 2등 기사이자 글라디옴을 처단한 다섯 기사 중 한 명.

그와 그 가문의 일원이 제법 지저분한 담론을 마치고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와중에도 젊은 사내는 이마에 핏대를 세워가며 한참을 뻐끔거렸다.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단 하나도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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