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44화 (244/365)

244화. 후폭풍 (2)

“영주는?”

“그야 승인을 기다리고 있겠지요.”

정돈된 수염.

그 위에 내려앉은 중후.

백금 줄의 단 안경을 막 벗은 중년의 남자가 두꺼운 연초를 입에 물었다.

그러자 방금까지 맞은편에서 보고를 올리던 남자가 부랴부랴 다가와 손가락을 튕겨 엄지 위로 불을 일으켰다.

연초를 태연히 불에 가져다 태운 중년 남자는,

바깥으로 보랏빛 연기를 한바탕 내뿜으며 말했다.

“다른 기업들도 같은 의견이라던가.”

그러면 손을 흔들어 엄지 위에 핀 불을 끈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만장일치입니다.”

이제 중년 남자는 연초를 손가락에 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가지.”

검은 양복, 머리 높은 검은 모자.

그리고 오른쪽 가슴에 박힌 금빛 인장.

장신의 중년 남자가 복도 밖으로 나서기 무섭게 같은 복색을 갖춘 무리 수십이 발을 맞춰 뒤따랐다.

그렇게 장엄한 저택 밖으로 나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몸을 실은 남자는,

창밖 거리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연초를 한 모금 길게 빨았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검은 장정들이 출발 준비를 마치기 무섭게 다섯 대의 마차는 일렬을 유지한 채 빠르게 거리를 가로질렀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내성,

그 내성으로 향하는 관문 위로는 거대한 팻말이 박혀 있다.

[펠테아]

이내 관문을 지나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다른 화려한 마차들이 속속 합류하기 시작했다.

중년 남자는 합류하는 마차 행렬을 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보랏빛 연기를 연거푸 내뱉었다.

이윽고 성관 입구에 멈춰 선 수십 대의 마차.

그리고 그 안에서 걸어 나오는 기업의 수장들.

아이베리아에선 보기 힘든 단정하고 수려한 복장의 그들은 보이지 않는 선민의식을 목에 두른 듯,

기풍만으로 오만을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조차,

막 마차에서 내리며 마지막 연초 한 모금을 내뱉는 중년 남자 앞에선 굽신거려야만 했다.

“오셨습니까, 의장님.”

방금까지 턱밑에 오만을 받치고 있던 기업가 하나가 그에게 넙죽 인사를 올린다.

그런 그를 뒤로 다른 기업가들 역시 그 앞에 넙죽 인사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멀뚱히 서 있던 중년의 남자는 다 태운 꽁초를 손가락으로 튕겨 버린 채 묵묵히 앞을 향해 걸어나갈 뿐이었다.

펠테아 내 유동 자산 기반 그 자체인 기업.

‘렌드 렐릭’의 회장.

아란드 렐릭.

그가 막 펠테아의 성관으로 들어섰다.

깃발의 주인을 섬기는 성관 내 시종들은,

그런 아란드를 주인 섬기듯 마주치는 족족 넙죽거리며 인사를 올렸다.

마찬가지로 아란드 역시 주위를 둘러보며,

“아무리 생각해도 저 그림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니 내일까지 치워두도록 해, 아. 뭐 그럴 필요까진 없겠군.”

태연히 벽에 걸린 그림 하나를 손짓하며 시종을 꾸짖었다.

그렇게 긴 복도를 지나 펠테아의 의회실로 들어선 아란드의 앞에는,

펠테아의 영주 에잔이 앉아 있었다.

에잔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이야기하던 시종장은 아란드가 입장하자 반색하며 얼른 그에게 달려갔다.

“오셨습니까, 의장님.”

“반갑네, 시종장.”

영주 앞에서 태연히 검은 외투를 벗은 아란드는 그것을 시종장에게 한 손으로 건넸다.

시종장은 그것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든 채 뒤로 물러났다.

이어 영주의 바로 오른편, 비어있는 자리에 대충 걸터앉은 아란드는 뒤늦게 에잔에게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올렸다.

“애석한 상황입니다.”

에잔은 눈썹을 움찔거리면서도 그의 인사 같지 않은 인사에 화답했다.

“그러게나 말이오.”

이후 기업가들이 속속 의회실로 들어섰고 얼마 안 가 만석이 되었을 때쯤.

에잔이 아란드의 눈치를 살폈다.

그 눈치에 아란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선, 이런 급한 시국에 다들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에 모인 기업가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완전히 사그라든 줄 알았던 반역의 잔불이 기어코 바람을 업고 커버렸습니다. 이제 그 화마가 우리에게 닥치기 직전입니다.”

인사가 끝난 뒤에는 아주 자연스럽게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고지식한 람비가 무너졌고, 지금 그들은 우리의 지척까지 도달한 상황입니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지금 우리는 결론을 지어야 합니다. 아니 이미 결론은 지어졌으니 그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짝짝.

짝짝짝.

연설이 끝나자 기업가들은 열렬한 박수로 화답했다.

그 가운데서도 에잔은 무표정한 얼굴로 눈썹을 꿈틀거릴 뿐이었다.

아란드는 이제 냉정한 표정으로 챙겨온 두루마리 하나를 펼쳐 안의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펠테아의 중추인 기업가들은 현 의결이 끝나는 즉시 가문의 보존을 위한 행동을 개시한다. 오해의 청산이란 명목으로 불문율 적 무력을 휘두르는 그들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펠테아의 깃발들은 모든 성문을 봉쇄하고 ‘사전에 정의’한 대로 자유민들을 통제한다.”

그 읽어내려감에,

자리를 채운 기업가들은 탄복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각 기업 내 발언가들은 위 통제 결과를 가지고 반역자들의 진상을 뱅그스에 설파할 것이며 최종적으로 뱅그스를 위시한 후방 깃발들의 공식적인 원군을 지원받아 펠테아를 수복할 것이다.”

기업가가 아닌 자라면 누가 들어도 헛웃음이 나올 것만 같은 내용이었으나.

에잔은 그저 침묵을 유지했다.

애초에 펠테아의 실 지배권자는 기업 렌드 렐릭의 것.

기업들을 통해 가문을 배 불리려 했던, 보장받은 자치권에 취해 있었던 선조들로 인해.

이미 이곳의 주도권은 저 남자, 아란드에게 모두 몰려 있다.

“기업가들의 모든 의견은 만장일치로 통일되었습니다, 이제 영주님이 결정을 내리시기만 하면 됩니다.”

아란드는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에잔에게 말했다.

그것은 부탁이 아닌 요구였다.

어쨌든 표면상으로 보여줄 인장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그리하도록 하시오.”

에잔은 심드렁한 얼굴로 그들의 의견을 수용했다.

피는 못 속이는 법.

애초에 그에겐 뭔가 바꿔야겠다는 의지 따위는 없었다.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기업가들이 대주는 재물과 여인, 그것들을 채워 넣을 환경에만 집중해왔던 자였으니까.

그렇게 의결은 속전속결로 끝이 났다.

그리고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기업가들은 물 떠내려가듯 서둘러 의회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 * *

“의장님, 오늘 연설 정말 멋졌습니다.”

아란드의 마차에 합석한,

작지만 거대한 풍채를 가진 남자가 꾸벅 아부를 전했다.

그러나 아란드는 연초를 꺼내 물며 시시함을 내비쳤다.

“그리 거창한 표현을 쓸 만큼의 자리는 아니었지.”

맞은편 남자는 아란드가 연초를 꺼내기 무섭게 보석 박힌 부싯돌을 꺼내 비볐다.

“자네 기업이 몇 년 됐지?”

이어 아란드가 맞은편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막 아란드의 연초에 불을 붙인 뒤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대답했다.

“150년이 채 안 됐습니다.”

“한창 소란스러웠던 시기에 만들어진 기업이로군. 그런데 자네를 보면 영락없는 용의 시대 때의 기업가 같단 말이야.”

아란드는 보랏빛 연기를 내뿜으며 걸걸하게 웃었다.

맞은편 남자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그에 맞춰 경박한 웃음을 지었다.

“다 의장님 밑에서 보고 배운 덕이 아니겠습니까.”

“자네는 참 똑똑한 것 같아, 용의 시대 이후 기업가란 놈들은 말이야 거의 다 낭만이란 게 없거든.”

후,

하고 보랏빛 연기를 한가득 내뿜으며 고개를 가로젓던 아란드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아이베리아도 마찬가지야, 용의 시대 이후를 대표하는 땅이잖나.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 만연한 고지식함은 우리 같은 자들이 낭만을 펼치기에 가장 좋은 무대이기도 하단 말이야.”

“애초에 소수의 개개인이 물리적으로 강력한 무기를 휘두르는 땅입니다, 바꿔 말하면 소수의 고지식함이 곧 이 땅의 기조가 되는 셈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자네 말이 맞네. 기조를 바꿔야 해 기조를. 언제까지 기사 놀이를 하며 명예 팔이 할 거냐 이 말이야. 이참에 근방 깃발 놈들에게 기업 물을 들여놔야겠어.”

“그런데…, 람비가 그렇게 쉽게 무너질 정도라니 조금은 놀랐습니다.”

아란드는 코웃음을 치며 꽁초를 창밖으로 던졌다.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기사왕이란 그 전설 같은 작자도 그렇게 쉽게 무너져 내린 걸 보면 결국엔 다 같잖은 것들 아니겠어?”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는 소매로 땀을 훔치며 작게 웃었다.

그 웃음에 아란드 역시 차게 식은 웃음을 터트리며 조용히, 창밖에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 * *

이른 새벽.

펠테아의 유력한 가문과 기업가들의 마차가 줄을 지어 성문 밖을 빠져나갔다.

마지막으로 펠테아의 영주, 에잔이 식솔들과 4중 마차 2대 분량의 채권을 싣고 빠져나간 뒤로 남은 건.

펠테아의 자유민들과 정규군을 제외한 징집된 병사들, 그리고 그 병사들을 책임지는 소수의 기사뿐이었다.

그리고 그 소수의 기사는 모두 기업 소속이었다.

해가 막 떠올라 눈꺼풀을 두들기는 시간이 되었을 때.

천진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몇 번씩 들려오기 시작했을 그때쯤.

기사들과 징집된 병사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했다.

성내 관문을 모두 걸어 잠근 그들은 제일 먼저 빈민층이 사는 곳을 향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악!”

“불이야!”

그곳에서 검은 연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 시점부터 기사들을 비롯해 징집된 병사들은 입은 갑옷을 모두 벗어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채였고,

그 상태에서 불을 피해 달아나는 자들을 가차 없이 죽였다.

해당 구역에 소강이 찾아오면, 그들은 다음 구역으로 넘어가 다시 불을 질렀다.

아이들의 천진한 목소리는 처절한 비명이 되었고,

누군가를 잃은 어른들의 통곡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그들은 걸레짝이 된 시체의 목을 매달아 광장에 내걸었고, 자른 손목들을 따로 모아 전시하듯 사방에 나열시켰다.

또 희생자의 피를 이용해 돌담마다,

[베나즈가 돌아왔다.]

[모든 것은 우리의 뜻대로!]

[남은 것은 복수뿐!]

보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글들을 휘갈겼으며 그 주변엔 아이와 노인들의 시체를 의도적으로 쌓아놓았다.

참으로 애석하게도.

이미 다 떠나고 텅 빈 성관을 비롯한 인근 고택들은 저들의 아비규환과는 끝까지 동떨어져 있었다.

같은 시각.

뱅그스의 영지 남쪽에 있는 거대한 시장에선 펠테아의 유력한 기업 내 발언가들이 충혈된 눈으로 격정을 토해내고 있었다.

“학살자 베나즈를 보라! 이번엔 펠테아다! 그들의 증오는 이미 도를 넘었다!”

“그곳은 학살의 현장 되었다! 이 순간, 깃발 간의 경계는 무의미하다! 명예로운 자들이라면 모두 모여 막아야 한다!”

“같이 일어나 싸웁시다! 아이베리아 사람이라면 응당 해결해야 할 공동의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뱅그스의 시민들은 모두 사색이 되어 항간에만 떠돌던 사실 위로 들려오는 소문을 덧씌웠고.

그곳에 있던 정규군들은 서둘러 보고를 올리기 위해 본성을 향해 고삐를 당겼다.

* * *

람비에서 출발한 지 이틀째 되던 날.

정찰을 마친 할리가 황급히 복귀해 베르융을 찾았다.

이어 할리의 보고를 들은 베르융이 경직된 표정으로 휴식 중인 병사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렇게 간이로 설치된 천막 안으로 들어온 베르융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영주님, 보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사들과 한 대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보석 같은 남자는 별 같은 눈을 반짝이며 그를 따랐다.

베르융과 단둘이 말을 타고 앞으로 나아가길 한참.

곧 보석 같은 남자의 두 눈에,

검은 연기로 유린당한 성이 들어왔다.

그것을 본 베르융은 마른 입술을 적시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고를 들은 순간, 이곳이 진정 아이베리아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남쪽 군도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이…,”

남자는 그대로 말 머리를 돌렸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베르융이 급히 물었다.

“영주님…!”

이에 잠시 말을 멈춘 남자는 고개를 돌려,

초연한 분노를 드러냈다.

그것은 베르융마저 얼릴 만큼 살기등등한 것이었다.

“후군을 입성시켜 수습하도록 지시하십시오, 우리는 뱅그스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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