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45화 (245/365)

245화. 후폭풍 (3)

뱅그스 북쪽, 절벽 끝에 세워진 고성.

사치스러운 거주만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그곳 난간에 한 남자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기대어 서 있다.

그는 난간 너머로 펼쳐진 기막힌 비경을 두 눈에 담으면서도 심드렁한 표정으로 연초를 태웠다.

보랏빛 연기를 거나하게 내뱉은 그의 뒤로는 기업가들의 화기애애한 담소 자리가 펼쳐져 있었다.

피다 만 연초를 난간 밖으로 던진 남자는 뒤돌아 그런 그들에게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슬슬 준비합시다.”

그의 말에 막 박장대소를 하던 기업가들은 헛기침하며 급히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왔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뱅그스 측 반응이 늦었군요.”

“이래저래 따지고 봐야 할 일이 많으니까 그렇겠지요.”

“따지고 들 게 뭐가 있습니까? 펠테아의 지분에 개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그러니 더 따져야지요, 그래도 아직 뱅그스의 바깥주인은 고지식한 기사 양반이니 어떤 협상안을 제시할지 모릅니다.”

여러 말들이 오가는 와중,

곧 시종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뱅그스의 영주, 페튼 공께서 오셨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크흠, 큼.

목을 가다듬으며 서둘러 옷매무새를 정돈하기 시작하는 기업가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는.

렌드 렐릭의 수장, 아란드.

그가 곧 시종에게 말한다.

“뭐 하고 있나, 귀한 손님이니 얼른 모셔오너라.”

그의 지시에 시종은 헐레벌떡 문밖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활짝 열린 거대한 문 사이로 여섯 장정이 걸어들어왔다.

아란드를 제외하고 이 자리에 모인 기업가들이 모두 난쟁이로 보일 정도로.

걸어 들어온 여섯 장정의 기골은 장대했다.

기업가들 사이에서 흔히 쓰는 기사의 멸칭,

살인 기계에 딱 들어맞는 그 기세는 순간 기업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아란드는 당당한 기세로 나아가 여섯 장정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무리 가운데에 서 있는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귀한 걸음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페튼 공.”

짧게 정돈한 흰 머리.

얼굴의 절반을 뒤덮은 까칠한 수염.

그 수염으로도 가리지 못한 강인한 턱.

검은 눈동자를 부라리던 페튼은 무리 사이에서 걸어 나와 아란드의 내민 손을 잡았다.

“그대들의 다급함을 외면할 수가 없었소.”

“자, 얼른 자리에 앉으시지요.”

서둘러 아란드가 상석으로 인도하자 페튼은 자연스럽게 그 안내에 따라 자리에 걸터앉았다.

뒤를 따르던 다섯 장정은 페튼이 앉은 자리 뒤편에 마치 성벽처럼 꼿꼿이 서 있다.

그 모습에 기업가들이 순간 얼어붙었지만, 이내 아란드의 눈치를 보곤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페튼 공께서 오시니 마음이 든든합니다.”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실 분이 생겼으니, 이제 걱정할 일도 없겠군요.”

그들의 말에 페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아란드에게 말했다.

“거두절미하고 나에게 펠테아의 지분을 얼마나 줄 수 있소?”

그것은 아주 단도직입적인 물음이었지만,

반대로 아란드는 그 물음에 되려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6할입니다.”

“6할? 에잔이 그걸 허락할까?”

아란드는 눈빛을 반짝였다.

“애석하게도 에잔 경에겐 펠테아의 결정권이 없습니다, 페튼 공.”

단 한 마디에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그 내포된 의미를 모두 파악한 페튼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어 보였다.

“그럼 이야기가 더 빠르게 진행되겠군, 어차피 베나즈는 선을 넘었고 명분은 우리에게 넘어온 상태요. 덕분에 근방 깃발들의 징집 역시 반나절 만에 수월히 이뤄졌지.”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늘어놓는 페튼,

그리고 그를 바라보며 회심의 눈초리를 나누는 기업가들.

그 사이에 미묘한 웃음을 짓는 아란드.

“페튼 공, 다만 베나즈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저희를 위해서라도 그 구제에 대한 방안을 마련해주셔야 합니다.”

“그리 돌려 말할 필요 없소, 요구 사항이 뭐요?”

“펠테아를 기업지구로 전환 시켜 주십시오, 이미 흉터는 베나즈에 의해 선명히 새겨졌으니 그것을 하루라도 빨리 치유하려면 이 방법밖엔 없습니다. 물론 페튼 공의 치하 아래 있는 건 변함이 없겠지요.”

“에잔과 그 휘하 기사들이 동의할까?”

“페튼 공, 에잔 경은 지금 들고 있는 채권 몇 장을 팔아 아주 호화스러운 요양을 하고 있을 겁니다. 선택권도 없을뿐더러 원한다면…,”

페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축출이라도 하라 이건가?”

“명분이야 차고 넘치니까요.”

“그래서, 펠테아를 자네들의 회계 내에 상정하고 나면 그다음은? 뱅그스로 사업을 확장할 생각인가?”

페튼의 날 선 질문에 아란드는 물러서지 않고 되려 맞섰다.

“가능하다면요.”

“가능하다면?”

“페튼 공, 공께서는 에잔 경과는 다른 분이십니다. 아이베리아의 진정한 기사인 공께서 정하신 선을 저희가 넘볼 만큼 멍청해 보이십니까.”

그의 발언에 페튼이 무릎을 치며 크게 웃었다.

“하, 지금 대화로 잘 알겠군. 자네가 영리한 친구라는 걸.”

“펠테아를 기업도시로 조성하고, 거기서 만들어진 상업적 윤택함을 뱅그스로 유통하는 것입니다.”

“돌려 말하지 말고.”

“공의 치하 아래 저희를 사업의 수단으로 둬 주십시오.”

아란드의 후퇴 없는 돌직구에,

장내는 침묵에 휩싸였다.

기업가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알을 굴리며 마른 침을 삼켜대기 바빴다.

그 가운데 눈썹을 여러 번 꿈틀거리던 페튼은,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풍은 한 번 저물면 다시 부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법이지, 그때를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해.”

“페튼 공, 잘 생각하셨습니다.”

“출정은 내일이 될 걸세, 그때에 맞춰 자네들은 에잔의 인장을 내게 가져와. 동시에 펠테아의 수복에 온 힘을 쏟아부어야 할 거야.”

아란드는 얼른 고개를 숙여 그에게 예를 갖췄다.

그렇게까지 고개를 숙여도 되지 않았음에도, 그는 페튼이 밖으로 나설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표정을 들키면 안 되거든.

아란드는 웃고 있었다.

거두절미는 무슨,

결국엔 돈이 걸린 문제였고 페튼은 그것을 돌려 말한 것일 뿐이다.

기사,

아이베리아 위에 꽃핀 그 찬란한 명칭은 솔직히 이상적인 것이 맞다.

충성으로 위아래를 다지고, 명예로 좌우를 다지는 그 말도 안 되는 관계도를 형성시킨 명칭이니까.

근데 결국 이상이잖나.

이룩됨이 없기에 이상이라고 불리는 거잖나.

위아래를 다지는 충성은 힘으로 귀결되는 것이고, 좌우를 다지는 명예는 개인적인 위신의 번지르르한 포장지에 불과해.

기사는 단지 다른 이들보다 고고한 척하지만, 누구보다 본질을 탐하는 족속들이다.

그렇게 페튼이 떠나고,

뒤늦게 고개를 든 아란드는 승리감에 젖은 표정으로 양손을 펼치며 말했다.

“그럼, 기업도시 펠테아의 조성 건으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해 봅시다.”

* * *

“보고 내용은 이것이 다입니다.”

베르융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그의 보고를 듣는 내내 나 역시 몇 번이나 올라오려는 욕지기를 참아야 했다.

모두 알았어.

전후 사정의 과정과 그 연결고리까지.

“정찰대의 보고에 의하면 뱅그스 남쪽 평원에 군사들이 속속 집결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수는 얼마나 됩니까.”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2천에 가까운 수로 보입니다. 지금도 원군이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어 그 기세만 볼 때 최종적으로 3천에 가까운 군사가 집결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적의 수가 많을뿐더러 허울이지만 보기 좋은 명분으로 모였으니 지휘체계 역시 일치단결되었겠지요.”

베르융은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애석하게도 태풍이 멎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 그 후유증을 절절히 느끼는 중입니다.”

그런 그를 향해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베르융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고취되어 있습니다, 영주님께서 원정 둘째 날 보여주신 ‘증명’으로서 말입니다.”

그 옆에 잠자코 있던 테티르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영주님께 ‘증명’할 차례입니다.”

보이진 않지만,

그 무엇보다 단단한 버팀목처럼 느껴지는 그들에게.

그렇게 쓰임 받길 원하는 기사에게.

마땅히 들려줘야 할 말 같아서.

“그럼 증명하십시오, 단호하게.”

그래서 말했다.

이에 두 기사는 군말 없이 기사의 예를 보였다.

* * *

천막 밖을 나선 베르융의 뒤로,

테티르가 바짝 따라붙어 나왔다.

이어 테티르가 베르융을 멈춰 세우려는 찰나,

베르융이 뒤돌아 테티르에게 말했다.

“테티르, 새벽에 1군과 2군을 끌고 적들을 급습할 것이네. 적들의 규합 시점이야말로 가장 여지가 많을 때이니.”

“급습? 그저 완벽해진 놈들의 전방을 까부수는 것이 정당…,”

테티르가 반론을 제기하려는 그 순간,

그는 입을 자연스레 다물 수밖에 없었다.

베르융.

그의 이마에 굵직한 핏대가 울컥거리며 치솟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당, 좋지. 그런데 그건 사람 내지 두 발 걷는 새끼일 때나 베푸는 것이고.”

테티르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였다.

“베르융, 옛날 성격 나오는구만.”

“난 지금까지 늘 한결같았다, 테티르.”

테티르는 두꺼운 눈썹을 치켜세우며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것은 전율이었다.

“좋아, 기사들에게 지시하지. 작전의 세부 사항은 따로 있나?”

테티르의 물음에 베르융은 짧게 답했다.

“없다, 그냥 다 찢어 죽인다.”

* * *

뱅그스 남쪽.

끝없이 펼쳐진 전초 기지.

그 위로 송곳처럼 솟아오른 천에 가까운 천막.

계속해서 도착하는 원군들에 의해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 본진 내엔.

이미 승리를 상정한 듯 유쾌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모닥불을 사이에 끼고 식은 맥주를 나누며, 먼 거리에서 온 친우와 재회의 회포를 푸는 분위기가 만연했기에.

남쪽 전방,

경계 지역의 분위기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임시로 지어진 첨탑 아래 기대어 모닥불을 쬐고 있던 병사들은 벌써 전쟁을 치른 듯 보상금의 사용처를 가지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갈 때쯤.

갑자기 들이닥친 북풍에 얌전했던 모닥불이 벌떡 일어나 불똥을 사정없이 토해냈다.

“악!”

“씨발 눈에 들어갔어!”

“이런…!”

꽤 거센 바람에 몇몇이 술을 쏟고, 첨탑에 대충 기대놓은 병장기들이 굴러다녔지만.

그들은 자리 정돈에만 전념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의아함을 느낀 병사 하나가 바람이 불어오는, 그러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심야를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바람이야…?”

그 중얼거림에 어떤 작은 두려움이라도 있었을까.

깨끗한 물 위에 물감 한 방울 떨어트린 듯 주위의 병사들 역시 미약한 두려움을 느끼며 의아함을 내비쳤다.

그리고 그들의 의아함이 조금씩 부풀기 시작하던 그때.

다시 한번.

훅!

하고 나부끼는 강력한 북풍.

그것은 전보다 더욱 강한 것이어서 병사 하나는 아예 바닥 위를 몇 바퀴나 나뒹굴 정도였다.

이내 심상치 않음을 간파한 그들이었지만.

[22년]

이미.

[훌리가트]

늦었다.

[열 개의 산을 정형한 바람]

일대에 들이닥친 북풍.

그 강력한 풍압을 등에 업고 나타난 사십의 기병.

재해 일부로서 훈련을 마친 그들은 이미 일반 범주에 드는 병사 따위가 아니었다.

전신을 난쟁이 제 갑주로 무장하고, 몸집과 지구력이 가장 큰 군마 페나독스를 타고 나타난 그들은.

말 그대로 재해 그 자체.

육중함에 걸맞지 않은 압도적 속력으로 치달은 그들이 문자 그대로 눈앞의 병사들을 해체한다.

그리고 그 맨 앞에는,

“내 이름은 ─── !”

바람의 근원이자 전설이라 불리는 기사.

“테티르 론바즈으으 ─── !”

그가 막 메이스를 휘둘러 쳐 전방의 천막 스무 개를 뒤집어엎었다.

이어 들려오는.

아 ────── !

벼락같은 함성.

막 테티르가 열어젖힌 길 위로 베나즈의 깃발 수십 개가 휘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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