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불다
인챈트.
백 년이란 시간의 틀에 맞추어 기록한 재해.
자연스러운 기상이 거세된, 용의 시대 이후를 위해 만들어놓은 현자의 장치이자.
마법사를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힘.
결과적으로 인챈트는 힘의 한 종류이기에, 곧 두 발 걷는 자들에게 또 다른 방향성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 제시된 것들을 바탕으로 유감없이 휘날리길 작정한 땅이,
이곳 아이베리아.
지금.
그 인챈트의 한 종류인 바람이 맹렬히 몰아치고 있다.
바람,
그것도 장악형의 성격을 띠고 있는 인챈트는 이 아이베리아 내에서도 아주 강력하게 작용한다.
생각해보라.
말의 것이 아닌 외적으로 발생한 추력의 도움을 받아 질주를 계속할 수 있다면 그 기병대는 뚫지 못할 병력이 없을 것이다.
또 인지해보라.
기병대와 충돌하기 전에 이미 한바탕 분 바람에 적병들의 기세가 무너져 있을 거라는 걸.
그것을 지금,
“흐하하하하!”
테티르 론바즈와 휘하 사십의 기병이 증명해내고 있다.
난쟁이제 장비로 전신을 무장한, 말 그대로 바위와 같은 그들이 마주한 모든 것을 분쇄하고 있다.
그럼에도 말은 등 떠미는 바람에 가벼운 발걸음만을 놀릴 뿐이다.
2파로 나뉘어 몰아치는 테티르의 바람은,
선행된 바람이 적의 전열을 무너트리고,
후행의 바람을 타고 그 위를 뒤덮었다.
송곳의 끝처럼, 선두를 유지하는 테티르의 육중한 팔이 막 휘저어졌다.
그에 따라 벌의 날갯소리를 내며 휘둘려진 메이스가 적병 셋의 머리를 투구째로 으깨버렸다.
집결 과정에서, 아직 체계적인 재편을 마치지 못한 그 상황에서 적들은 반격의 의지를 상실했다.
물론 그것이 적군 전체의 의견은 아니었다.
테티르를 저지하기 위해 대형방패로 무장한 2중 방어선이 구축된 것이다.
물론,
테티르 역시 그것 따위에 막혀줄 생각은 없었다.
쾅!
굉음.
거대한 말발굽이 방패를 짓이기고, 그 위로 테티르의 메이스가 너울거린다.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장정 셋이 나가떨어지며 구멍이 생겨버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테티르는 등 뒤로 불어오는 바람에 말이 떠밀리도록 고삐를 잡고 재촉했다.
그렇게 테티르의 말이 단 세 걸음 만에 바람의 도움을 받아 전속으로 치달았다.
이내 방어선을 뚫고 그 너머로 나아가자,
막 뒤에서 파이크를 내세운 병사들이 보였다.
기병들에게 최대 저지력을 선사해줄 그 무기는 분명 위험한 것이었지만,
테티르가 방어선을 막 넘어 달려가는 그때.
그들은 선행된 바람에 휩쓸려 이미 대부분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테티르는 그저 그 위를 바람처럼 움직이며 짓밟고 나아갈 뿐이었다.
* * *
“저 괴물같은…!”
뱅그스의 기사는 턱이 갈라지도록 어금니를 씹었다.
그러다가 침착함을 부려,
테티르 론바즈의 진행 방향 그 측방에 있는 첨탑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동식 첨탑 위에는,
발느레 나무로 만든 발리스타 한 대가 있었지.
난쟁이제 갑주도 능히 뚫을 만큼, 그 장력의 힘이 무시무시한 무기가 말이야.
바람의 결을 볼 때,
측면에서 발사된 발리스타라면 충분히 저격해낼 수 있다.
생각을 마친 기사가 열 명 남짓한 병사를 이끌고 첨탑으로 향했다.
“너희는 근방에 낙오된 병사들을 규합해 이 첨탑으로 집결하거라! 내 직접 지휘하겠다!”
결사를 다짐하며 외친 기사의 말에, 병사들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예를 갖췄다.
이제 첨탑에 다다른 기사는 압도적인 근력을 과시하듯 사다리를 평지 달리듯 뛰어올랐다.
그에 맞춰 병사들이 땅에 떨어진 뱅그스의 깃발을 들어 일사불란하게 흩어진다.
“이쯤에서 멎어라, 괴물이여!”
이윽고 첨탑 정상, 그 위에 설치된 발리스타 앞에 멈춘 기사가 묵직한 도르래 손잡이를 돌리며 저 멀리 나아가는 선봉 기사를 조준했다.
드르륵.
돌아가기 시작하는 무쇠 톱니, 그 위에 맞물린 이빨이 덜덜 들리며 부딪히다가.
이내,
딱!
시위의 장력 한계를 알리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방아쇠에 손을 올린 기사는.
“…, 빌어먹을.”
순간 자신의 눈앞에 스치듯 흐르는 전류를 발견하고.
그대로 패색 짙은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지직.
하며 보기만 해도 지끈거리는 전류가 발리스타 주위에 흐르고, 곧이어 그의 등 뒤로.
콰릉!
하고 쏟아지는 하나의 번개.
[33년, 메느레프]
기사 가르웨.
[가벼운 구름의 마지막 비명]
그가 내리쳤다.
“손 떼라, 기사여.”
가르웨의 살기 어린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기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뒤돌아 대꾸했다.
“기사에게 번복은 없다.”
“아쉽군.”
짧게 대답한 가르웨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들고 있던 아밍소드를 휘둘렀다.
목이 달아나 힘이 풀린 기사의 신체가 기울어지고,
그 반동으로 조준점이 위로 들린 발리스타에서,
팍!
하는 소리와 함께 표적 잃은 두꺼운 볼트 하나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첨탑 위에 우두커니 서 있던 가르웨는 급격하게 올라온 숨에 헐떡이다가도,
첨탑 뒤쪽.
파도처럼 범람해오는 베나즈의 2군을 바라보았다.
* * *
요함비크 비조스.
발리르의 3기사 중 하나인 그가 항아리처럼 생긴 통 넓은 갑주를 걸친 채 보병들의 선두에서 진두지휘하고 있다.
습격으로 인해 뱅그스의 진영 전방은 말 그대로 손쉽게 무너트릴 수 있었지만,
후방에 들어서기 무섭게 수습을 마친 적병들의 방어선에 가로막혀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깨부수기 위해,
요함비크는 특유의 우렁찬 목소리로 보병들을 독려했다.
“바람길이 열렸는데 그 위를 걸어야 하지 않겠는가!”
해서 패기롭게 들이닥쳤지만, 방패를 위시한 적들의 방어선에 부딪힌 채 한 걸음 물러나고 나아가길 반복할 뿐이었다.
방패 사이사이를 무차별적으로 찔러 넣는 아군과 반대로 방패 사이사이로 창대를 내미는 적들의 사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피가 튀고,
철과 철이 만들어내는 비릿한 불똥 내음이 만연한 그곳에서.
요함비크는 막 자신의 둥근 허리 갑옷 위로 미끄러져 빗겨 간 적의 창대를 놓치지 않고 잡았다.
“잡아! 잡아!”
그의 닦달에 뒤에 있던 병사 둘이 달라붙어 창대를 붙잡아 당기자,
곧 방패 벽으로부터 창대를 붙든 병사 하나가 뿜어져 나왔다.
그 찰나의 틈새를 놓치지 않은 요함비크는,
“밀어! 밀어!”
괴성을 지르며 병사들에게 소리쳤고.
그 외침이 닿은 아군 모두가 앞으로 힘을 쏟았다.
덕분에 단연 갑옷의 부피가 큰 요함비크가 눈에 띄게 사출되듯 밀려졌고,
적 방어선의 빈틈은 더욱 벌어져 버렸다.
“가자아앗!”
이제 요함비크는 요란한 함성을 지르며 그 벌어진 틈새를 향해 몸을 던졌다.
순식간.
적들의 진영으로 데굴데굴 굴러들어온 요함비크.
그 위로 쏟아져 내려오는 적들의 수많은 공격.
창, 검, 폴암과 철퇴.
까각!
쿵!
온갖 둔탁함이 그의 갑옷에 쏟아졌지만, 대부분이 미끄러져 땅에 박히거나 제대로 들어간 타격마저도 갑옷 그 자체에 흠집 하나 내지 못했다.
구의 갑옷.
비록 외형은 우스꽝스러워 보일지 모르지만.
특유의 방호력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을 증명하듯 요함비크는 적들 사이에서 우뚝 일어섰다.
“구우우우!”
경배일까,
광기일까.
양팔을 활짝 펼쳐 괴성을 지른 그가 들고 있던 워해머를 휘두르며 적 병사들을 하나씩 정성껏 타공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뒤돌아 몸을 들이밀어 방패 병들의 등을 들쳐 밀었고,
그로 인해 완벽히 열린 방어선 너머로.
“가자!”
“들어가, 들어가!”
베나즈의 병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인챈트의 힘없이, 간략의 신호와 재치만으로 적 일선을 무너트린 요함비크는 그제야 목을 풀며 뒤따라오는 병사들과 함께 미친 듯이 쇄도했다.
* * *
긴급한 상황을 알리는 종소리가 뱅그스 진영 전체에 시끄럽게 울려 퍼지고 있다.
그러나,
뱅그스의 동쪽 진영은 어째서인지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아니, 그들은 서쪽 근방에서 피어오르는 불기둥을 보고 나서야 부랴부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움직임 속에서 대부분이 느꼈다.
이 이질감은 뭐지?
두 귀에 내려앉은,
이 먹먹함은 도대체 무엇인가?!
선뜻 나타난 의심은 곧 확신이 된다.
자신의 무기로 방패를 두들겨 보고, 손뼉을 치거나 바로 옆 사람에게 고함을 질러대면서 말이다.
들리지,
않는다.
그 사실을 인지한 병사들의 얼굴이 하나둘 창백함으로 물들어간다.
그런 그들의 창백함 뒤로.
두두 ──────
백에 가까운 발굽이 땅을 두들기며 다가온다.
[27년, 프리스모스]
[흘러버린 고산의 고인 바람]
켄타나의 기사.
가버트 로셀란.
고산의 한기를 머금은 그가 투구 너머로 뿌연 입김을 내밀며 들이닥쳤다.
그와 그를 따르는 기마병들은 창대를 겨드랑이 사이에 단단히 물린 채였다.
그것은,
거대한 건물의 지주와 같은 것이었다.
이윽고,
기마병들이 침묵에 젖은 야영지를 한바탕 휩쓸었다.
고압에 먹힌 귀,
그 먹먹함 속에서 처절하게 짖기는 병사들의 비명.
들리지 않는다.
누구도 들을 수 없다.
이미 일대는 가버트의 인챈트로 장악되어 있었으니까.
* * *
뱅그스 중앙군.
4중의 방어선을 구축한 그곳의 수문장은 기사 가든.
[18년, 글리시 무스]
[열 오른 세상에 보낸 답장]
그의 거대한 도끼에 깃든 인챈트는 과거, 웅대한 만 하나를 붕괴시킨 빙산의 조각.
공허한 가을 아래,
그 동토의 추위를 발현한 가든의 지휘 아래.
보병들의 물 먹인 특수 방패는 하나로 연결되어 문자 그대로 장벽을 구성하고 있었다.
방어선 그 자체가 과거, 그 당시 떠내려온 일각을 보는 듯.
그들의 무결점한 모습에 그 테티르마저 쓴맛을 다시며 말머리를 돌려야 했다.
추위를 상정한 복장이 아니었을뿐더러, 방어에 치중된 가든의 인챈트를 무리해서 뚫었다간 아군 측의 피해가 더욱 커질 것이 뻔해서였다.
뱅그스 최후의 보루.
가든의 그 위용 앞에 직전까지 진격하던 베나즈의 1군과 2군 모두가 자리에 멈춰 서 대치를 강요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랬었다.
막 해가 떠오르기 시작할 시점.
베나즈 측 진영에서 시커먼 갑주를 걸친 기사 하나가 걸어 나왔다.
그런 그의 손엔 본인 몸보다 거대한 중검이 들려 있었다.
모를 수가 없다.
적어도 아이베리아에서 살아온 자들이라면.
전설이라 불리는 기사,
베르융 오르테.
빙벽 뒤에 있던 뱅그스의 병사들은 그 한 기사가 내뿜는 기세에 온몸을 벌벌 떨어야만 했다.
추위를 막기 위해 햇살을 뿌려놓은 안감 옷을 입은 그들이 말이야.
이제 베르융은 중검을 앞으로 내세워 적진을 향해 고했다.
“남은 건 결착뿐이다.”
이에 뱅그스 측 방어선 안쪽으로,
백마를 탄 기사 하나가 응했다.
“둘의 이치가 어울려야 결착이 성립되는 것이지.”
기사 가든.
전개한 방어선의 주인.
그가 고개를 까딱이며 베르융에게 대꾸했다.
“놀랍군, 아이베리아의 기사라는 작자가 이런 짓도 저지르고 말이야.”
이어지는 가든의 날 선 비난에,
베르융은 코웃음을 쳤다.
“뭐 어쩌겠나, 변명은 패배자의 몫인걸.”
“누가 패배자인가?”
“보통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는 자가 패배자라던데, 그 말이 맞는 것 같군.”
“이 상황을 보고도?”
가든이 턱짓으로 자신의 방어선을 가리키며 말했지만,
“이 상황을 보고도.”
마찬가지로 베르융도 담담히 턱짓으로 상대의 방어선을 가리키며 물었다.
“곧 해가 뜨겠군, 동토와는 어울리지 않는 높은 해가.”
베르융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가든에게 처한 상황을 친절히 알려주었다.
이에,
“녹을성싶은가, 아니. 원한다면 이 자리에 거대한 성 하나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가든이 발끈하며 대답했지만,
베르융은 투구를 벗어,
이마에 솟은 핏대를 드러낸 채.
“야, 객기 부리지 마.”
경고했다.
“진심으로 하는 조언이다.”
가든은 순간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소름에,
표정을 일그러트려야만 했다.
가든이 가진 인챈트는 확실히 베나즈 전체에게 위협이 될 정도로 위력적이야.
하지만 결국 인챈트는,
휘두르는 자에 의해 그 강함이 결정되는 것.
일각이 토해낸 오한으로 방어선을 구축하는 자와,
그 당시 바람을 걸쇠처럼 몸에 건 채 그 자체로 나부끼는 자와는,
성립이라는 단어 자체가 어불성설이 아닌가.
“네 성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우리와의 공성을 기다려라. 여기까지가 내가 베풀 수 있는 자비다.”
베르융은 자신의 말만 내뱉고 무던히 뒤돌아 버렸다.
그 뒤에 대고 가든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