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47화 (247/365)

247화. 반향

아란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마 남지 않은 술잔을 기울였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유쾌한 분위기였었다.

그러나 지금, 아란드 주위에 모여 앉아있는 기업가들은 초조한 표정으로 굳어 있다.

아무런 말도,

아니 그 어떤 소리조차 감히 내지 못한 채.

서로의 눈치만 살펴보고 있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내심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아란드,

이 새끼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그러니까 나까지는 어느 정도 참작의 대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곧 아란드는 빈 술잔을 탁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의 오른편, 방금 막 보고를 올린 시종에게 되물었다.

“다시 말해봐.”

“뱅그스 측 진영이 크게 패하여 본성으로 후퇴했다고 합니다, 베나즈 측의 기습으로 전사자만 오백에…,”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보고를 올리는 시종에게,

아란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내 지끈거리는 듯 눈썹을 찌푸린 아란드는 품에서 작고 화려한 머스킷을 꺼내,

탕!

주저 없이 시종의 가슴팍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

화약이 내지른 비명에 두꺼운 침묵이 와장창 깨지고, 몇몇 기업가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움찔거린다.

그 가운데 연기를 뿜어대는 머스킷을 탁상 위에 던진 아란드는 태연한 표정으로 연초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

그리고 주위에 앉은 기업가들에게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기업가들은 아직 벙벙한 어안을 유지한 채 뻐끔거릴 뿐, 누구도 반응하는 이가 없어.

“불!”

아란드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 질렀다.

그제야 오른편에 앉아있던 후덕한 사내가 부랴부랴 보석 박힌 부싯돌을 긁으며 연초에 불을 붙여 주었다.

흠뻑,

연초를 빨아드린 아란드는 코와 입에서 보랏빛 연기를 토해내며 심신을 달랬다.

그리곤 연초를 쥔 손으로 이마를 긁적거리던 그가,

되려 침착한 표정으로 되돌아와 기업가들에게 말한다.

“잘 됐어.”

그의 그 말에 방금까지 죽을상이었던 기업가들의 얼굴엔,

하나둘 회심의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직전까지 당사자들의 참작 여부만을 걱정하고 있던 그들이 말이야.

아란드는 연초를 한 모금 더 빤 뒤 보랏빛 연기와 함께 담담한 이야기를 내뱉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 벌어진 상황은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회나 다름없어.”

그 말에 후덕한 남자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의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페튼, 그놈이 베나즈에게 보기 좋게 깨져버렸으니 그들에 대한 우리의 개입 여지가 더 생겼다는 뜻 아니겠어?”

“그게…, 정확히…,”

아란드는 눈썹을 찌푸리며 후덕한 남자를 한참이나 째려보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페튼이 우리에게 걸었던 전제, 그 밑바닥엔 본인의 승리가 깔려있었다고. 그런데 지금은 성에 틀어박힌 신세가 되었잖아? 놈의 전제 자체가 완전히 뒤집혀 졌다 이 말이야. 그 말은 곧 거래의 내용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게 되었단 소리지.”

그제야 기업가들은 눈길을 주고받으며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베나즈의 태풍은 이미 한 번 몰아 쳤고, 그 휘하 기사들의 재해 역시 한바탕 휘둘러졌으니 군사적 피로도가 매우 쌓여 있을 거야, 그 상태에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뱅그스를 구원하기 위해 움직인다면.”

“거래 내용, 그 주도권의 향방 자체가 달라질 수 있겠군요.”

“아이베리아의 기사, 그 위에 군림하게 되는 거지.”

다 태우고 남은 꽁초를 탁상 위에 비벼 끈 아란드가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좌중을 압도했다.

그에 매료된 기업가들은 순식간에 의기를 투합했다.

“이곳에 주둔한 사병이 총 몇이지?”

아란드의 물음에 좌측에 앉은 노인이 장부를 들추며 보고했다.

“850 정도 됩니다.”

“틈을 만들어내기엔 충분한 숫자군.”

아란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실상 펠테아의 전군이나 다름없는 그들을 움직이는 것으로,

충분히 판도를 바꿀 수 있겠다는 확신을 얻었으니까.

* * *

피해, 그리고 오해는 서로를 끌어당기는 강력한 기폭제다.

그것들이 만나 섞이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굳은 아카멜산 아교보다 단단히 고착되어 하나의 부정할 수 없는 인지가 된다.

그 인지의 범위가 넓으면 넓을수록,

진실은 외면받기 쉬워진다.

그러나 그렇게 고착된 인식을 공감이라는 단어로서 녹여내는 자들이 있다.

모두가 납득할 때까지 쉬지 않고 진실을 설파하는, 그런 자들이 있다.

세상은 그런 자들을 ‘발언가’라 불렀다.

물론 지금이야,

위에 말한 의미와 같은 순수한 발언가가 있을 거라 기대하는 자는 거의 없다.

작금의 발언가들은 철저한 정치가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런 그들이 신경 쓰는 건 본인들이 세운 울타리 그 안쪽뿐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발 걷는 자들은 발언가의 말에 반응한다.

왜냐고 묻느냐면.

믿음으로서 보장된 울타리를 약속받을 수 있으니까.

설령 약속받을 수 없어도 그 기대라는 것이 있으니까.

마찬가지로 발언가들은 그 기대를 얻지 못하면 도태되기에 더욱 절실해질 수밖에 없다.

만약,

수많은 자의 기대를 받은 발언가가 있다고 쳐보자.

자,

어떤 깃발이, 어떤 귀족이.

그 발언가의 말을 무시할 수 있을까?

펠테아.

아직도 곳곳이 불에 타고 있는 그 아수라장 속에서,

막 베나즈의 후군이 입성했다.

이에 살아남은 주민들의 불안감은 하늘을 찔렀지만.

후군의 지휘관은 침착하게 화재를 진압하는 것 외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렇게 화재 대부분을 진압한 이후엔,

제리워드 은행의 주도하에 보급된 물건들로 잃은 자들을 충족시키는 데에 애썼다.

그러면서 굳게 닫힌 성관의 문을 열어 주민들에게 개방하고, 그곳에 만연한 평화를 적나라하게 노출해 펠테아에 대한 배신감을 심었다.

자, 그리고 이틀이 지났다.

초반.

격렬하게 저항하던 주민들은 이제 베나즈의 군사들에게 순응하기 시작했다.

이어 처참하게 죽은 주민들의 수습과 장례가 빠짐없이 치러지고 난 후엔.

펠테아의 주민들은 이제 기다리기 시작했다.

베나즈 측에서 들려줄 이야기를.

그 적절한 시기를 놓치지 않은,

후군의 지휘관.

켄타나 의회에서 가장 막강한 정치력을 가졌으며,

동시에 켄타나 민중의 대변자라 불리는 발언가.

엘르길 마스.

펠테아에 입성한 지 사흘째 되던 날 새벽.

그가 드디어 간이로 만들어진 단상 위에 올라섰다.

수천에 달하는 펠테아의 주민들은 연단에 선 엘르길 마스에게 집중했다.

“여러분.”

엘르길은 앞에 쌓아놓은 작은 산,

절벽에서 캔 메아리 덩어리를 향해 크게 말했다.

절제되고 진중한, 그러면서도 근엄한 그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펠테아 전역에 퍼졌다.

“틀렸습니다, 여러분이 아니라 이곳에 휘날리는 깃발이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의 생각보다 강했고, 강한 만큼 단합되었으며, 또 언제든 다시 일어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이어지는 사근사근한,

그 따듯한 목소리에 나이 든 주민들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흐느꼈다.

젊은 여인은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안고 있던 아이를 더욱 끌어안았고,

초췌해진 아버지와 아들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이들이 엘르길의 말에 공감하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며칠 전에 람비가 그들의 손에 의해 무자비하게 유린당했었으니까.

하지만 엘르길은 보란 듯이 그 사례를 인용하며 말했다.

“람비는 소수의 고집으로 전체가 고통받았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펠테아 역시 소수의 배신으로 전체가 고통받았습니다.”

이제 엘르길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열변을 토했다.

“여러분, 베나즈가 그랬습니다. 베나즈가 그렇게 무너졌었습니다. 소수의 고집이, 소수의 배신이 그 이름을 이 땅 위 최악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호소력 짙은 그 목소리에 좌중은 이제 완벽한 침묵으로 답했다.

“보십시오, 베나즈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단지 그 베나즈가 일어섰을 뿐인데 람비는 왜 고집을 부렸으며 펠테아는 왜 여러분들을 배신했습니까?”

쿵.

엘르길이 연단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그들의 과거가 베나즈를 무너트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과거가 지금의 여러분들을 무너트렸습니다!”

하나둘.

좌중의 눈빛들이 점점이 빛나기 시작한다.

“과거 속에서 일어나는 것만이, 그것만이 목표인 베나즈가 지금 여러분들에게 같이 일어나자 말하고 있습니다! 그 안엔 고집도, 배신도 없습니다. 오롯이 함께 일어나는 것, 그것 하나뿐!”

엘르길이 손을 번쩍 들었다.

“일어나시겠습니까! 함께!”

엘르길 마스,

그의 외침에 펠테아 그 자체가 화답했다.

* * *

“엘르길 마스, 무시무시한 남자로군.”

전서구를 받은 기지어가 식은 웃음을 지으며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을 재차 정독했다.

그리곤 만족한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내려놓은 채.

“푸핫!”

속에서부터 들끓듯 우러나온 웃음을 적나라하게 터트렸다.

“푸하하하하!”

흥분된다.

본인이 점찍은,

맹목을 쏟기로 한.

그 이상이 생각보다 더 강하고 크다.

디안 베나즈,

그가 0의 존재에 대한 아이베리아의 불신을 보란 듯이 날려버렸다.

마치 동서남북 그 모두에게 경고하듯이 말이야.

내가 돌아왔다, 개자식들아!

하고 말하는 것처럼!

이후 뒷감당은 깃발 아래 모든 자의 고민이 될 테지만,

뭐 고민은 그때 하면 그만이고 지금은 있는 그대로 전율해 줘야 제맛 아니겠어?

그건 그렇고,

과연 켄타나의 제일가는 정치가인가.

펠테아를 구워삶은 것도 모자라 그들 주축 세력에 대한 적대감까지 증식시키다니.

기지어는 순간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등 뒤로 올라오는 소름을 느껴야만 했다.

생각해보면,

켄타나는 충분히 서쪽의 패자가 되고도 남을 세력이었다.

말도 안 되는,

고압을 휘두르는 기사와 그 기병대.

그런 그들을 뒤에서 든든히 받쳐주는 엘르길 마스를 떠올리면 말이야.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테티르 론바즈라는 기사가 발리르에 있었기 때문에 그 켄타나가 지금껏 억제되었다는 소리겠지.

괜히 전설이라 불리는 게 아니라니까.

“자, 그럼 이제 결착을 지어볼까.”

기지어는 붉은 수염을 긁적이며 특유의 우스꽝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한 건진 모르겠지만, 엘르길 마스가 기어이 펜테아의 내부 정보에까지 손을 댄 모양이다.

펜테아를 이용해 거국적 사업을 펼치려던,

그 머리 좋은 놈들이 숨어있는 곳을 알아낸 걸 보면.

이렇게 되면 못 참지.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어지잖아.

지금으로선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그 거대한 기사단.

에커즈가 말한 충성이 사실인지 시험해 볼 수 있을 테니까.

* * *

공, 뱅그스와의 결착은 기사 베르융 경에게 맡기시고 잠시 북서를 올려다보시어 펜테아의 숨은 기망자들을 잡아 들이십시오.

이 중대한 임무를 수행할 적절한 인원을 보내겠습니다.

-기지어-

짤막하게 온 편지,

동시에 기지어에게 또 다른 언질을 받았는지 내게 찾아온 베르융은 늘 그렇듯.

“그저 계속해 증명하겠습니다.”

투박하지만 서도 나에 대한 걱정을 드러내며 기사의 예를 갖췄다.

덕분에 든든한 마음으로 야영지를 벗어난 나는 기지어가 일러준 대로 북서쪽 길목을 향해 서둘러 이동할 수 있었다.

태풍의 재현으로 인한 후유증은 거의 다 사라진 상태였고,

이미 이틀 전부터 전력으로 검을 휘두를 수 있을 만큼의 기력까지 회복한 상태였기에.

가능하다면 혼자서라도 펜테아를 재물 삼은 그들을 단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도 역시 뒤를 봐줄 수 있는 아군이 있는 것이 좋겠지.

이제 베나즈는 외로운 이름이 아니니까.

그래서,

누구일까.

베르긴?

그간에 쌓인 서먹함도 깨트릴 겸, 그와 함께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이윽고 북서로 향하는 길목에 다다르기 무섭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허어…,”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와버렸다.

벤투스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여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이런 내 당황이 무색하게.

북서쪽 길목을 가득 채운 은빛 무리 그 선봉에 선 기사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

베르융보다 무뚝뚝한 모습으로 내게 인사했다.

“에커즈 기사단, 부름에 응답해 이곳에 집결했습니다.”

아리나 에커즈,

그녀를 위시한 에커즈 제1 기사단.

1,050명.

전원 집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