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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노래-248화 (248/365)

248화. 반향 (2)

“자매님,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뭐가요.”

은빛 갑옷, 등에 달린 날개 장식.

귀 큰 자들의 기술로 벼려진 얇은 판금은 마치 은 주괴를 잘 저며 만든 것 같이 아름다운 모습을 갖고 있다.

그런 무게감 느껴지는 찬란한 갑주 속, 질문을 던지는 소녀의 얼굴엔 천진함이 가득했다.

“베나즈 가문의 적장자인 디안 공의 외모 말이에요! 소문이 정말 사실인지 궁금해 죽겠어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상체를 이리저리 비틀어 앞쪽을 기웃거리는 소녀.

그런 소녀와 나란히 이동하던 조숙한 숙녀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궁금하다면 직접 가서 보지 그래요?”

숙녀의 말에 소녀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요?”

“궁금하시다면서요. 그럼 행렬을 이탈해 선두까지 말을 몰아 그분의 얼굴을 직접 확인하면 될 일이잖아요?”

소녀는 이내 풀이 죽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자매님은 정말 짓궂어요.”

그러나 소녀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호함을 유지한 숙녀는,

“심중에 가벼운 걸 들여놓지 마세요, 자매님. 우린 지금 나들이를 하러 나온 게 아니니까.”

비수로 쿡쿡 찌르듯 꾸짖었다.

이에 소녀는 십 대의 그 활발함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가슴을 움켜쥔 채 한바탕 소란스럽게 움찔거렸다.

그제야 못 말리겠다는 듯,

숙녀는 작은 웃음을 지었다.

* * *

서먹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와는 막 일면식을 나눈 사이에 불과했으니까.

아리나 에커즈.

장대한 키, 육중한 갑옷.

그 아래 안장에 가로로 채워져 있는 기다란 클레이모어.

지금까지 이동하면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무뚝뚝함과 더불어, 그러면서도 작은 몸집 하나하나에도 투박한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걸 보면…,

베르융 경이 여성이었다면 딱 저 모습이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래도,

베나즈 가문과 에커즈 기사단의 관계를 생각해보자면 대화의 운을 트는 것은 내 역할이겠지.

그래서 마지못해 상투적인 걸로 운을 떠봤다.

“부름에 이리 적극적으로 답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 그녀는 정말 기계처럼 그 말에 즉답했다.

“맹약 이행을 위해 마땅한 행동을 취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대화가 끝이 나나 싶었으나, 그녀는 슬쩍 고개를 틀어 내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전후 사정은 모두 들었습니다, 아이베리아의 기사라면 공분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더군요. 무릇 이 땅에서 업신여김으로 군림하려는 작자들을 토벌하는 것도 기사의 본분 중 하나입니다.”

멋있다.

짤막한 대화 속에서 느낀 감상은 그러했다.

그렇게 다시 이어진 어색한 침묵.

이어 그것을 깬 것은 다름이 아닌 아리나 쪽이었다.

“공, 허리의 그 검이 바로…,”

날카로운 눈매와는 어울리지 않는 순수한 호기심.

그것을 담은 채 물어오는 그녀에게 대답하듯, 자루를 당겨 보여주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 화답하는 별빛처럼 그녀의 두 눈이 반짝거린다.

“과연, 하늘의 방문자로 벼려진 것답게 영롱하군요.”

의외의 모습인걸.

방금까지 무뚝뚝했던 그녀의 입가가 슬쩍 올라가 있다.

“그의 이름은 어떻게 됩니까?”

검의 이름을 묻는 건가.

해서,

“새비안, 이 검의 이름입니다.”

대답해주니 그녀는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이쪽에서도 자연스레 물어볼 게 생겼다.

“무기에 대한 조예가 상당하신 것 같습니다.”

내 물음에 그녀는 활기를 띤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예라기엔 모래사장을 훑는 파도만큼 얄팍해서…,”

“그러나 파도가 멈추지 않는 것처럼 그 관심만큼은 진심인 것 같은데요.”

버릇처럼 튀어나온, 노래 가사의 비유를 빌린 내 대답에.

아리나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이어 이번엔 그녀의 안장에 매달린 클레이모어를 시선을 옮긴 채 물었다.

“이렇게 된 거, 그쪽의 이름도 궁금해지는군요. 딱 보아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데.”

내 물음에 아리나는 검자루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이쪽의 이름은 ‘귀네스’라고 합니다.”

막 용솟음치듯 자라난 가지처럼 위쪽으로 곧게 뻗은 가드와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은빛 강줄기 같은 검날.

딱 보아도 소위 명품에 해당하는 물건.

이런 내 예상을 확정 짓듯.

“백색 모루에서 만들어졌지요, 바위 정령의 낙석으로 두들겨졌고 산사태로 날을 세웠답니다.”

아리나는 신이 난 얼굴로 자신의 검에 대한 설명을 주르륵 이어나갔다.

난쟁이,

그 가운데서도 가장 고위에 해당하는 기술력으로 벼려진 검이로구나.

맥레인이 그랬지.

난쟁이 제 무기를 상대할 땐 그 무게를 조심해야 한다고.

저 귀네스 역시 보기엔 가벼워 보이지만 그 외양과는 동떨어진 무게감을 가지고 있겠지.

그 말인즉슨 그녀가 구사하는 검술의 무게감 역시 상당하다는 뜻이겠고.

어쨌든 나도 검을 휘두르는 사람이었기에.

자연히 그녀의 검과 맞부딪히면 어떨까 하는 상상에까지 닿아버렸다.

이런 내 눈치를 알아차렸는지,

아리나 역시 묘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한참이나 말을 아꼈다.

* * *

초저녁.

유독 해가 빨리 저문 하늘엔 미처 줍지 못한 석양빛이 진하게 얼룩져 있다.

덕분에 그 아래 길게 펼쳐진 천막들은 쏟아지는 주홍에 잔뜩 염색되었다.

그 사이사이에 박혀 있는 베나즈의 깃발 역시,

주홍빛으로 잔뜩 달궈져 있었다.

이렇듯 길게 펼쳐진 야영지 저 너머로 보이는 성은,

야영지에 내려앉은 따스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창백함으로 물든 채였다.

뱅그스.

기습을 당해 한껏 움츠러든 채 입성한 그들은 급히 겨울을 끌어당겨 왔는지,

이내 하늘 위로 작은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베나즈 측 병사들 몇몇은 상반된 계절에 경이를 내비쳤고,

다른 몇몇은 코끝으로 느껴지는 어색한 한기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다양한 감상 아래엔,

하나의 공통된 뜨거운 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0의 발현으로서 완성된 명분.

그것으로 완성된 고양감은 한낱 추위 따위로 식힐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리라.

디안의 공백으로 통솔권을 쥔 베르융은,

소집된 기사들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쉬게 하라.”

고립된 뱅그스가 끌고 온 겨울은 결국,

고갈될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내린 지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융은 사실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향후,

그 단어 안에 담겨 있는 불확실성 때문에.

사실 눈앞의 뱅그스보다 그 뒤에 가려져 있을 제2, 제3의 깃발이 더욱 큰 문제다.

충분히 말려 죽일 수 있는 뱅그스도 그러한 미지의 적들을 상정하고 보면,

되려 위협적인 존재가 되거든.

비록 뱅그스의 기사 가든이 인챈트의 힘을 다루는데 미숙한 자라고 한들.

[18년, 글리시 무스]

[열 오른 세상에 보낸 답장]

그가 가진 인챈트는 장악형.

발휘만으로 추위를 발생시키는 것이었기에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위력적이다.

따라서 초조함을 못 이겨 적들의 겨울이 사라지기도 전에 공성을 시작한다면 막대한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시간적 간극을,

어떻게 적절히 이용해야 하는가.

그 시기는 어떻게 판가름해야 하는가.

베르융은 이미 그것을 저울질하며 끝없이 고심하고 있었다.

다만.

그의 고심이 담긴 저울 속엔 또 다른 선택지가 하나 있다.

펜테아의 기만적 망명자들.

그들을 심판하러 출발한 디안 베나즈.

거기서 얻어진 결과가 아주 무거운 무게추로 작용할 수도 있으니까.

아니, 그렇게 될 것이다.

베르융의 생각은 어느새 확신으로 귀결되어 있었다.

* * *

“막 뱅그스 측에 언질을 넣어놨습니다.”

식은땀을 흘리며 보고를 올리는 시종에게,

아란드는 대답 대신 손을 휘휘 저었다.

자리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던 기업가들 사이에선 안도와 함께 이야기꽃이 피기 시작했다.

“이걸로 안심입니다.”

“날이 밝는 대로 우리 측 병사들이 베나즈 군의 후미로 들이닥치게 되겠지요.”

“혹여나 다시 태풍이 불어닥치진 않겠지요? 휘하에 있는 바람들 역시…,”

“그 기사왕도 태풍을 다시 휘두르는데 최소 나흘이 걸렸다지 않습니까, 거기다 막 전투를 끝마친 그들에게 가진 바람을 휘두를 만한 힘이 남았겠습니까?”

말없이 연초를 태우던 아란드는,

그들 사이에서 쏟아지는 낙관에 취한 듯 작게 미소지었다.

이어 후덕한 사내가 눈썹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그나저나 기사의 땅이라더니 그 말도 다 옛말인 것 같습니다.”

이에 마주 앉은 기업가 하나가 보석 박힌 단추를 풀어 편한 자세로 고쳐 앉은 뒤 묻는다.

“왜 그러시오?”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할 만큼, 베나즈의 배반을 그렇게 경멸했으면서 어찌 그들을 단죄하려는 기사가 하나도 없는 거요?!”

후덕한 남자의 발언에,

몇몇 기업가들이 통감한 듯한 탄식을 내뱉으며 동조했다.

“깃발이니 기사니 하면서 목만 뻣뻣이 세우고 다니더니, 정작 나서야 할 때가 되니 눈치만 보는 게 같잖지 않습니까?!”

“다 똑같지, 그들도 아마 치열하게 눈치싸움을 하고 있을 거요.”

“참나, 생각해보면 애초에 베나즈의 배반이란 것도 몇몇 깃발이 모여 공사 친 것 아니오? 그러니까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눈치만 보고 있는 것 아닌가?!”

우스갯소리로 내뱉은 그들의 대화는,

백 번의 통찰로도 꿰뚫지 못한 본질을 찌르고 있었다.

물론 그 기저엔 오만함이 깔려있었지만 말이다.

“결국엔 기사의 땅이니 뭐니 해도 결정적인 결착은 바다 건너온 우리 기업가들 손에서 이뤄지는군요. 거국적으로 건배 한 번 합시다!”

그 오만의 끝을 찌르는, 한 기업가의 건배사에.

나머지 기업가들은 유감없이 잔을 부딪쳤다.

* * *

멀지 않은 곳,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 끝에 맺혀있는 고성.

아리나는 무덤덤한 얼굴로 막 날아든 새를 한쪽 팔로 받아든 채 복귀한 여기사와 이야기를 나눴다.

직후 그녀는 내게 다가와 보고했다.

“적지 않은 병사들이 주둔해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애초에 소수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구나.

기업가들이 펜테아의 병력 전체를 운용하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대체,

펜테아의 영주는 어떤 작자이기에.

조금,

끓어오르는 분기에 나도 모르게 어금니를 씹었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마저도 금방 식어버렸다.

곱씹어봤자 바뀌는 것은 없어.

그러니,

차라리 씹을 것들을 한시라도 빨리 찾아내는 게 나으리라.

“경.”

짧은 부름에 아리나는 기사의 예를 갖췄다.

“성으로 진입할 수 있겠습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즉답했다.

“일망타진해 길을 열겠습니다.”

이어 그녀가 한쪽 손을 활짝 들어 올려 뒤쪽으로 수신호를 보내자 각 기수가 그것을 똑같이 전달했다.

직후,

완성된 하나의 조각처럼 에커즈 기사단은 완벽한 제식으로 대열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은빛을 쏟아내는 그 찬란한 움직임에,

“아…,”

나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엘르길 경이 말했던,

인챈트를 중심으로 완벽하게 완성된 부대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일까.

최후방에 있던 짐 마차들을 2열로 끌어올린 뒤,

그 문을 열어 안에 담긴 창들을 전방 1열의 보병들에게 보급하기 무섭게.

그들은 당장 투창할 기세로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이렇게나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투창 공격이 성립할까 싶었지만,

그들의 손에 들린 이지창의 특이한 모양을 확인한 나는 속으로 거듭해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창대 곳곳에 구멍이 파여 있다.

마치,

공기가 통과할 수 있도록 말이야.

이내 아리나가 주먹 쥔 손을 올리자 기수로 보이는 기사가 1열 보병대 왼편에 나섰다.

그 여기사의 손엔 깃발이 묶인 창이 들려있었는데,

단박에 느낄 수 있었다.

인챈트가 걸린 물건이라는 것을.

곧이어 여기사가 하늘을 향해 찌르듯 창을 내지르자,

후욱!

하고 전방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상승기류.

[93년, 아지이에르]

[고산을 측량한 9월의 바람]

그 솟아오른 상승기류에 맞춰 주먹 쥔 손을 앞으로 내지르는 아리나.

그에 맞춰 이뤄진 보병들의 투창.

그렇게 손에서 떠나간 백에 가까운 창이 상승기류를 타고 높이 솟아오른다.

은빛으로 자잘하게 빛나던 창대는 이내 정확히.

성을 향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창대 곳곳에 난 구멍에서 울려 퍼지는,

맹금의 지저귐 같은 소리와 함께.

휘이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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