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50화 (250/365)

250화. 반향 (4)

“다시 말해봐.”

서리가 내려앉을 만큼 한기가 도사리고 있는 방 안.

묵직하게 물어오는 음성 앞에서,

병사는 차마 제 입으로 다시 보고를 올릴 수 없었다.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기사 가든의 앞에서 어떤 말을 더할 수 있을까.

그러나 좌우에 앉아있던 부관들의 재촉이 이어지자, 병사는 결국 더욱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어야 했다.

“영주님께서 출정과 관련해 기사 소집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 말을 마친 직후,

병사는 온몸을 덜덜 떨었다.

두려운 것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성 전체를 뒤덮은 추위 탓이 컸다.

쾅!

병사의 보고가 끝나기 무섭게 울려 퍼지는 충격음.

두꺼운 주먹을 내리쳐 막 작은 탁상 하나를 부순 가든은 턱이 갈라지도록 어금니를 씹었다.

한껏 초췌해진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에 서린 분노는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과 같아서 감히 누구도 마주 보지 못했다.

그의 최측근인 부관들마저도!

급기야 보고를 올린 병사의 안위가 걱정되었는지 부관은 눈치를 보던 병사에게 급히 턱짓해 물러가도록 했다.

잠시 후,

겨우 분을 삭인 듯 가든의 입이 열렸다.

“빙벽을 덧씌우고 길 위를 얼음으로 뒤덮었다. 수성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냈단 말이다.”

과연 이 추위의 근원답게,

가든의 입에선 그 작은 입김조차 피어오르지 않았다.

아까보다 더 초췌해진 안색으로 입술을 꿈틀거리던 가든은 끝내 다시 한번 분노를 토해냈다.

“그런데 그것을 박차고 나가다니, 제정신이란 말이야!!?”

쩌렁쩌렁하게 소리치던 가든은 가슴을 부여잡고 거친 기침을 연달아 내뱉었다.

그 격한 기침에 부관들은 부랴부랴 일어나 그의 안위를 살피기 급급했다.

“괜찮으십니까!”

“가든 경!”

그러나 그들이 채 다가가기도 전에 가든은 고개를 불쑥 들어 손을 휘저었다.

“손 떼!”

부관들의 손길을 과격하게 뿌리친 그는 자신의 앞에 우뚝 세워져 있는 도끼 자루를 매만졌다.

[18년, 글리시 무스]

[열 오른 세상에 보낸 답장]

과거, 떠내려옴만으로 만 하나를 붕괴시킨 빙산의 일각.

그 재해가 담긴 도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추위에 함부로 손을 댔다간 큰 화를 입게 된다.

그런 근원을 쥔 채 이 순간까지도 추위를 휘두르고 있던 가든은 괜한 부관들의 관심이 부상으로 이어질까 두려웠다.

그러나 크게 역정을 낸 것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더욱 초췌해져 마치 서리가 낀 것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펠테아, 그 윗물 놈들이랑 모종의 거래를 한 거겠지.”

이어 가든은 한탄하듯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야망이 명예를 죽이고, 욕망은 기사를 죽이는구나.”

곧,

가든은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기사이기에 부름에 답해야 하겠지.”

쓸쓸한 목소리와 함께 밖을 나서는 그의 뒤로는, 착잡하지만 동시에 가든에 대한 충성으로 뭉친 부관들이 묵묵히 따랐다.

* * *

위엄.

그것을 표현한 자리 위에 당당히 앉아 있는 중년의 남자.

페튼.

그의 양옆으로 도열한 기사들의 수만 해도 스물이 넘는다.

지역 상공에 내려앉은 한기에 그들은 모두 속에 털옷을 껴입고 있었고, 페튼 역시 목에 고급스러운 털가죽을 두른 채였다.

“가든 경의 겨울은 찾아올 때마다 놀랍구먼.”

아직 공식적인 회의가 이뤄지기 전,

좌측 열에 있던 기사 하나가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그 옆에 있던 기사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반응했다.

“새벽부터 고드름을 쳐내느라 정신없었습니다.”

이어 반응한 기사 그 뒤편에 서 있던 자도 그 이야기에 껴들었다.

“영주님께서 이 겨울을 얼른 보내고 싶어 하시니 서둘러 가을을 되찾읍시다.”

작금의 상황을 제대로 인지한 것인지 모를 정도로,

그들 사이는 꽤 화기애애했다.

그들은 페튼의 외가 쪽으로 구성된 자들로서,

일찍이 페튼과 펠테아 사이에 있었던 거래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른 비장한 기사들과는 달리 그들은 털 옷을 여미며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가든 경께서 오십니다.”

곧이어 두꺼운 방한 복장을 두른 시종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직후 회랑으로 들어선 기사 가든.

그리고 그의 휘하 기사들.

그들이 이내 의회실 안으로 들어서자 주위 공기는 일변에 무거움에 젖어 들었다.

가든의 등장만으로 몇몇 기사들은 페튼 앞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극진한 예를 갖췄다.

이러한 기사들의 모습을,

페튼의 외가 쪽으로 구성된 기사들은 영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그렇게,

가만히 침묵을 유지한 채 앉아있던 페튼이 입을 열었다.

“기사들이여, 단도직입적으로 전하겠노라. 우리는 곧 찾아올 새벽, 깃발을 펼치고 군세를 전개해 들이닥친 반역자들을 몰아낼 것이다.”

그 말에 가든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막대한 힘으로 겨울을 빌려왔습니다, 그로 인해 뱅그스는 그 어느 때보다 막강한 방어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언제까지고 저들의 원정이 지속될 순 없는 노릇. 이는 시간으로 충분히 판가름낼 수 있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페튼은 턱을 괸 채 덤덤히 반문했다.

“반역자들의 원정이오, 그런 그들을 앞에 두고 시간에 기대어 보겠다는 말은 기사로서의 명예를 저버리는 짓이지.”

그 반문에,

가든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고 즉답했다.

“그 저버린 명예를 찾으려다 우리의 패배로 그들의 원정 종지부가 찍힐 수가 있습니다.”

날이 잔뜩 선 가든의 대답에 페튼의 외가 쪽 기사들이 단박에 들고 일어섰다.

“가든 경, 말이 지나치시오!”

“뱅그스의 겨울이 고작 철 지난 바람에 쓰러질 것 같소이까!”

그러자 이번엔 가든의 부관들이 반격하듯 들고 일어선다.

“철 지난 바람? 그것이 람비를 이틀 만에 무너트렸어!”

“뱅그스의 기사이면서 뱅그스의 겨울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가!”

“우리의 겨울은 몰아치지 않고 정적일 때가 가장 강력하오! 켜켜이 쌓인 추위라면 충분히 태풍을 이겨낼 수 있지!”

순식간에 치열로 치닫는 의회장.

그 사이에서 나른한 눈빛을 쏟고 있던 페튼은 한쪽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그러자 방금까지 불을 토해내며 열변을 나누던 기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뱅그스의 정적은 내 대에서 끝낼 것이다. 우리는 휘몰아칠 것이며 마땅히 반역자들의 원정을 수포로 만들어 근방 깃발들의 통합을 이끌 것이야.”

날카롭게 뜬 눈으로 다시 한번 선포하듯 말하는 페튼에게,

기사들은 뭐라도 내뱉을 기세로 입술을 움찔거렸지만 침묵하는 가든을 보며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페튼은 자신의 옆에 있던 양초 하나를 집어 안에 담긴 촛농을 은접시 위에 쏟았다.

이어 손가락에 끼워진 인장을 굳어가는 촛농 위에 꾹 찍어낸 페튼이,

기사들 사이로 보란 듯이 은그릇을 던졌다.

찰그락!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 위에서 짧게 춤을 추던 은그릇이 멈추고.

곧이어 그 안, 굳은 촛농 위에 찍힌 뱅그스의 인장이 모습을 드러내자 페튼의 외가 쪽 기사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이에 나머지 기사들도 마지못해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든은 꿋꿋이 일어선 채 페튼에게 물었다.

“영주님, 오랜 시간 동안 제 가문은 뱅그스를 위해 충성해 왔습니다. 그러한 충성을 봐서라도 제 마지막 질문에 사실을 대답해주십시오.”

“말해보게.”

“이 출정은 오롯이 뱅그스의 의지뿐입니까.”

그러니까,

가든은 이 출정에 구린내 나는 뒷바탕 같은 게 있느냐 물은 것이다.

이미 펠테아와 모종의 거래를 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눈치챈 가든이다.

그러니 이 질문은,

진정 자신이 모시는 주군이 최소한의 사실을 대답할 용기가 있는지 떠보는 것이었으리라.

그리고 그 용기를 내비친다면,

마땅히 기사로서 휘둘려줄 자신도 있었다.

그러기 위해 뱅그스에 가든이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페튼은 별 고민도 하지 않은 채 쉬이 답했다.

“없다, 오직 뱅그스의 의지 하나뿐.”

마치 가든이 고대해왔던 답을 들려주었다고 생각하는 듯, 당당하고 고고한 표정으로.

가든은 조용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페튼에게서 자신의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런 가든의 표정을 알 리가 없는 페튼은,

“경들이 내비치는 명예를 위해서라도 끝까지 물러서지 않겠노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팔을 활짝 펼쳐 외쳤다.

그 외침 아래 가든은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지은 채 생각했다.

‘저 개새끼.’

수십 년의 봉사보다 한순간의 거래를 더 우선하는 자에게,

지금껏 바친 충성이 아까워서라도.

그렇게 불러줘야 하지 않겠는가.

* * *

이른 새벽.

뱅그스의 거대한 성문이 열렸다.

쏟아진 겨울로 인해 거의 빙벽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던 성벽은,

그 성문의 움직임과 함께 켜켜이 쌓였던 겨울들을 모조리 쏟아내었다.

개선을 알리듯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뱅그스의 군세.

수많은 깃발이 위로 솟구친 채 휘날리고, 털옷을 벗어던진 채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는 병사들의 발소리가 박자를 이루며 땅을 짓밟는다.

그것을,

마치 놓칠 리가 없다는 듯이.

저 멀리서 별빛 묻은 두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한 기수는, 군말 없이 말머리를 돌려 베나즈 군의 주둔지 쪽으로 향했다.

“대장, 점마들이 갑자기 왜 나오는 검까?!”

그 뒤를 급해 따르던 귀 큰 자,

소여의 물음에 선두에서 바삐 고삐를 놀리고 있던 사내가 대답한다.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들의 움직임엔 분명 이유가 있겠지. 우리는 그저 목격한 상황을 전달할 뿐이다. 추론은 지휘관의 영역이니까.”

베나즈 가문의 정찰대.

대장.

할리 멜르아.

그는 눈가 사이로 별빛을 흘리며 매섭게 박차를 가했다.

* * *

할리의 복귀와 동시.

베르융은 쉬고 있던 군세를 일깨워 후방을 경계했다.

뱅그스의 갑작스러운 출정,

그 이유를 쫓아가다 보면 자연히 이뤄지게 될 움직임이었다.

거한 기습 작전을 펼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그간의 정비과 휴식을 통해 베나즈의 군세는 다시 한번 누군가를 찔러 가를 만큼 날카로워져 있었다.

“베르융, 진정 뱅그스의 원군이 나타나 우리의 후미를 칠 거라 생각하는가?”

근질거리는 어깨를 들썩이며 뜨거운 콧김을 내뱉는 테티르의 물음에 베르융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주님께서 나아가신 길이네, 적의 원군은 오지 않을 거야.”

“그런데 왜 군세를 뒤로 가다듬어 경계하는 거지?”

“누구나 결국엔 본능을 믿기 마련이잖는가.”

베르융은 식은 웃음과 함께 테티르를 바라보았다.

“그저 떨어지는 낙엽일 뿐인데 작은 짐승은 천적의 움직임인 걸 상정하고 먹는 걸 멈춘 채 귀를 세우지.”

“생명의 유구한 생존 본능, 그런 걸 말하는 건가?”

“그래, 어쨌든 수많은 상정 속엔 기정사실이 하나쯤은 섞여 있기 마련이니까.”

“다시 생각해봐도 자네와 난 잘 안 맞는 것 같아.”

테티르가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젓자,

베르융이 식은 웃음을 내뱉는다.

“그건 나도 같은 의견이네.”

이윽고 베르융이 말머리를 반대로 돌렸다.

그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군세의 기수들은 깃발을 뒤로 젖혀 군세의 시선을 전방으로 돌렸다.

저 멀리,

평야 끝에 맞물린 수평 너머로 뱅그스의 군세가 하나둘 밀려들기 시작한다.

“참, 원정을 모의했었던 그 날. 엘르길이 했던 말 기억 나나?”

퍼뜩,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질문을 던지는 베르융.

이에 의아함으로 맞받아치는,

“뭐가?”

테티르.

곧 베르융이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람비에는 그 유명한 여우비 레테가 있고, 펠테아에는 지식인 크롬이, 뱅그스에는 귀신 피에르비가 있다고 했었지.”

그 말에 테티르는 피식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직접 마주쳐 본 것은 레테밖에 없었는데. 가만 보면 우리가 지나쳐온 곳들은 지식인이 있을 장소가 아니었었지.”

“그럼 그 귀신 피에르비가 저 군세 속에 있을까?”

“글쎄, 하지만 그냥 귀신이라면 곧 생기지 않을까?”

결이 다른 여유.

아이베리아의 전설로 통용되는 두 기사의 대화는 이제.

“준비됐나.”

“언제나.”

늘 같은 것으로 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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