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재해충돌
땅이 울린다.
그 울림에 맞춰 하늘의 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개중에 몇몇 구름은 부름을 받고 몰려온 것이지만, 대부분은 자유롭게 유랑하다 맛있는 냄새를 맡고 온 것들이었다.
곧 피어날 재해들이야말로,
구름의 입장에선 극상의 성찬일 테니까.
한마디의 말조차 필요 없다.
언덕에서부터 내리지르는 뱅그스의 깃발은 서서히 움직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기마병을 필두로 재빠르게 진형을 갖춘 베나즈의 깃발 역시 그들을 맞이해 나아갔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 어떤 예열도, 그 어떤 준비 과정도 없다.
그저 부딪힘이 임박하기 직전까지 서서히 속도만을 올릴 뿐.
기사의 땅 아이베리아에는,
전술이라 불릴만한 것들이 많이 없다.
가진 인챈트, 그 특성에 따른 전투 형태까지 전술이라 지칭한다면 분명 가짓수는 많다고 볼 수 있겠지만.
순수한 병력의 이동 형태에 따른 전술만을 놓고 보자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적다.
따라서 아이베리아에서 만전을 기한 군세끼리의 전투 대부분은 회전으로 귀결되었다.
가진 재해의 특성을 가지고 상대의 재해를 깨트려 부수는 것만이,
가장 확실한 승리였으니 말이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재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했는가, 서풍과 동풍은 어디서 어디로 나부끼도록 설계했는가.
장악의 위치는,
본격적으로 재림하여 침투할 장소는.
이 모든 복잡한 것들이 단순한 회전 속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자,
이제.
막 베나즈 측 군세의 선두.
기사 베르융 오르테가 자신의 몸만 한 중검을 치켜세운 채 앞으로 빠르게 나아간다.
이에 뒤따르던 기마병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듯 속도를 맞춰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뒤로 줄줄이 쏟아지는 보병들은 자연스레 거나한 함성을 내뱉었다.
이와 마주한 뱅그스의 군세 역시 선두 측 기마대가 속력을 올리고, 그 뒤로 펼쳐진 수백의 깃발을 열렬히 휘날리며 함성을 질렀다.
두두 ──── !
땅의 울림, 그것이 극한에 치달은 그 순간.
두 군세는 열렬히 맞물렸다.
* * *
따가울 정도로 매서운 폭우가 쏟아지고,
먹을 품은 구름은 번쩍이는 기침을 내뱉었다.
쏟아진 빗물들은 미꾸라지처럼 땅 위를 스멀스멀 기며 누군가의 인챈트에 화답해,
작은 파도로,
작은 급류로 돌변해 병사들을 꿰뚫었다.
순식간에 극한으로 치달은 기상, 그 안에서 뒤엉켜 생과 사를 가름 짓는 휘두름이 이어지는 가운데.
말을 탄 기사 하나가,
쾅!
내리치는 벼락에 맞춰 좌우 병사 넷을 순식간에 베어 넘겼다.
신체에 딱 들어맞는 윤택한 은빛 플레이트 메일.
그 위에 뒤집어쓴 뾰족한 아멧 헬름.
발리르의 기사 가르웨.
그가 쏟아지는 장대비 사이를 가로지르며 다시 고삐를 재촉해 말을 몰았다.
이어 아밍 소드를 바짝 들어 올리자,
다시 한번.
번쩍!
하고 구름 사이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콰릉!
벼락.
그 찰나의 번쩍임 사이에서 가르웨의 육체는 초인의 것과 같이 움직였다.
대부분이 재림형으로 이뤄진 벼락의 인챈트는,
내리쳐지는 그 순간에 한해 사용자에게 그에 걸맞은 육체적 힘을 제공한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찰나의 벼락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렇게 번뜩이는 벼락을 등진 채 달려나간 가르웨는 눈에 보일 정도의 잔상을 그려내며 뱅그스의 병사 셋을 더 베었다.
“훅… 훅….”
벼락, 그 찰나의 재림을 겪은 몸은 격한 피로를 호소했지만,
가르웨의 눈빛은 더욱 선명해져 있었다.
이내 그가 다시 고삐를 고쳐잡고 보병들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박차를 가하려는 순간.
그의 맞은편에서 내리치는,
콰릉!
한 벼락.
검은 말을 타고 있는 뱅그스 측의 기사.
그가 벼락을 등에 업고 베나즈 군 다섯을 차례로 베어 넘겼다.
이 무슨 운명인지.
아니,
무릇 같은 재해끼리 끌리는 것이야말로 이치일 지도.
가르웨는 말없이 아밍 소드를 고쳐잡은 채 마주한 기사를 노려보았다.
마주한 기사 역시 모든 상황을 인지한 듯 들고 있던 사이드 소드를 내세워 가르웨를 가리켰다.
“뱅그스의 기사 ‘올레란도’다.”
이어지는 그의 물음에,
가르웨는 조용히 아밍 소드를 가슴팍에 가져다 댄 채 답했다.
“발리르의 기사, 가르웨다.”
그 대답을 들은 기사 올레란도는 꾸벅하고 작게 고개를 숙였다.
직후 그들은 고삐를 붙잡아 서로를 향해 맹렬히 나아갔다.
쾅!
콰릉!
연속으로 쏟아지는 두 개의 벼락.
그 반짝거림 사이에서 벌어지는,
둘의 충돌.
총 몇 번의 합을 주고받았는지, 주위 병사들의 입장에선 가늠할 수 없다.
다만 한 차례 충돌을 마치고 서로를 지나친 두 기사의 검날 모두 붉게 물들어 있었을 뿐.
* * *
[68년, 다티오]
[높은 산에서 굴러떨어진 바위 바람]
티히트라의 기사, 높바람 몰룬.
그가 의수에 고정된 라운드 실드를 휘둘러 막 전방의 적병 하나를 저 멀리 내쳤다.
신체 주위에 엉키기 시작한 바람.
그 엉킨 바람의 반동을 이용한 신체적 움직임은 파괴 그 자체.
벼락의 재림이 찰나의 절대를 제공해 준다면,
바람의 재림은 지속적 강함을 제공한다.
그것을 증명하듯 몰룬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주위 적병 몇몇이 나가떨어졌다.
그가 가진 인챈트, 다티오는 그 바람의 질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었기에,
마찬가지로 위에서 아래로 찍어 누르듯 베는 것이야말로 몰룬의 가장 강력한 공격이었다.
그리고 지금 궁지에 몰린 베나즈 측 병사들을 발견한 그가.
“으아아!”
괴성과 함께 검을 높이 치켜든 채 적 진영으로 뛰어들어,
힘껏 땅을 향해 내치듯 휘두르자 그의 주위로 폭발에 가까운 풍압이 터져 나왔다.
펑!
주먹만큼의 화약이 불을 만나 터진 양, 몰룬의 움직임으로 터져 나온 바람결이 적병을 한바탕 휩쓸자.
와 ──── !
주위 아군들의 사기는 더욱 치솟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몰룬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전방에,
인챈트의 힘을 느꼈기 때문에.
그렇기에 손짓으로 병사들을 뒤로 물린 그가 라운드 실드를 내세운 채 경계하자.
보란 듯이 상대는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자락이 긴 검은색 브리간딘.
투구는,
끼고 있지 않다.
“이런…, 터무니없는…,”
그런 상대의 모습을 확인한 몰룬은 당황을 집어먹을 수밖에 없었다.
인챈트를 휘두르는 기사라고 해도 머리에 볼트가 박히면 죽는 건 똑같다.
초지일관 재해로 온몸을 두를 자신이 있지 않고서야..,
“뱅그스의 기사, 피에르비요.”
잿빛의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던 젊은 남자는 초연한 표정으로 몰룬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이에 몰룬은 라운드 실드를 두들기며 호쾌하게 화답했다.
“티히트라, 높바람 몰룬이다.”
이윽고 피에르비가 기묘한 모양을 한 도검을 양손으로 고쳐잡았다.
몰룬은 그에 대비해 라운드 실드를 턱 밑까지 끌어 올린 채 눈빛을 날카롭게 다듬었다.
어디에서 건너온 검일까.
외날의 초승달 모양을 한 그 기다란 검은 보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몰룬 경, 악의는 없소. 우리는 피차 명예라는 이름으로 동반한 작은 재해이니…, 이해해주시오.”
자세히 보니,
피에르비의 눈매엔 붉은 화장이 칠해져 있다.
남자인 주제에 거북한 고혹을 흘리는구나.
“이미 이렇게 마주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이해는 끝났다.”
몰룬이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천천히 피에르비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피에르비는 상체를 살짝 틀어 현 기온에 어울리지 않는 입김을 내뱉더니,
곧 그의 주위로 운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17년, 벨라메 간츠]
[세상을 무대로 만든 막]
없어졌다.
몰룬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진 피에르비를 쫓아 눈알을 바삐 굴렸다.
운무 속에 증발하듯 사라진 그의 존재감은,
지금껏 쌓아온 오감 전부를 부정시켰다.
장악형 인챈트인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물리적인 충돌 면에서 우위에 있는 건 결국 자신.
판단을 마친 몰룬이 더욱 단단한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무색하게도.
[비전]
[벨니케의 나비]
운무를 꿰뚫고 나온 피에르비의 검.
그것이 정확히 몰룬의 허리를 가로질렀고.
그 가로지름이 끝나기 무섭게 몰룬의 뒤쪽으로 피에르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 반응할 수 있었다.
턱밑까지 끌어올린 방패를 바로 내렸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음에도.
몰룬은 그러지 못했다.
피에르비의 비전은,
그의 유연한 견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검이 상대에게 닿기 직전, 견갑을 뒤로 빼거나 앞으로 밀어 공격 시기 그 자체를 속여내는 기민 그 자체의 검술이었기 때문에.
“가시오, 잘.”
검을 고쳐잡은 피에르비의 말을 끝으로.
몰룬의 상체가 아직도 꼿꼿이 서 있는 다리 옆으로 쏟아져 내렸다.
천천히, 뒤돌아 최후를 맞이한 기사를 눈에 담던 피에르비는.
채 어떤 소감을 내뱉기도 전에.
“크… 윽…!”
소리소문없이 내질러진 창에 승모근이 꿰어버렸다.
피에르비는 서둘러 붉게 충혈된 눈으로 창대 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 시선 끝에 맺힌 것은,
잿빛 갑주의 기사.
* * *
먹먹하게 내려앉은 공기.
그 안에서 소리소문없이 이뤄진 한 차례의 공격.
이내 승모근에 박힌 창을 말없이 뽑은 기사가 말을 몰아 피에르비 주위를 위협적으로 맴돌기 시작했다.
“인사가 거칠군.”
“켄타나의 가버트다.”
잘도,
저만한 기사가 그 작은 서쪽에 숨어 있었구나.
눈썹을 움찔거리며 당황을 곱씹던 피에르비는 금방 태연해진 표정으로 가버트에게 답했다.
“뱅그스의 피에르비요.”
짤막한 인사만을 주고받았을 뿐인데,
이미 피에르비의 머릿속은 가버트에 대한 통찰로 가득 차 있었다.
장악형.
그것도 절망적인 기압 차를 발생시키는 재해.
상대의 귀를 흔들어 균형을 배제하고, 그 위에서 철저하게 유린하는 방식.
정말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아니 같은 재해끼리 끌리는 것이니 이치라고 할 수밖에.
피에르비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연달아 대단한 기사를 만나 기쁘군, 그 기쁨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이윽고 다시 긴 도검을 양손으로 고쳐 잡은 그가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
그런 그의 모습에,
가버트는 말없이 안장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곤 창을 한바탕 둥글게 휘두르더니 피에르비 쪽으로 날을 세워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렇게 해야 할 거다, 내 어깨에 방금 스러진 기사의 명예가 짊어졌으니까.”
이윽고 담담히 상대에게 다가가기 시작하는 가버트.
그것을 비웃듯, 피에르비의 입에서 다시 한번 입김이 흘러나온다.
곧 운무가 주위 모든 풍경을 집어삼켰다.
그러나 가버트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그저 계속해서 앞을 향해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잠시 후,
가버트 왼편의 운무를 찢고 나온 피에르비의 손에서.
[비전]
[벨니케의 나비]
그가 가진 고유의 검술이 뿜어져 나왔다.
유연한 견갑골의 움직임으로 공격의 시기를 조율해내는, 그 모호하기 짝이 없는 공격을.
쾅!
가버트는 창을 휘둘러 정확히 맞받아쳤다.
거기에 더해 순간 중심을 잃고 뒤로 물러난 피에르비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창을 휘둘러 그의 가슴팍 갑옷을 그대로 베어버렸다.
“큭…!”
무시무시한 충격을 온몸으로 체감한 피에르비는 삽시간에 누더기가 되어버린 브리간딘을 얼른 벗어버렸다.
갑옷이 망가짐으로써 적절하게 분산된 무게감 역시 어그러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드러난 그의 상체는,
더없이 다부진 조각 같은 것이었다.
특히 그의 등.
마치 화려한 나비 한 마리가 등에 앉은 듯, 발달한 그의 견갑은 조금만 움직여도 용암처럼 꿈틀거렸다.
“어떻게…!”
피에르비가 이를 씹으며 당황을 중얼거리더니.
이내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가버트를 노려보았다.
갑옷 때문에 균형이 어그러진 게 아니었어.
이미 놈에게 찔린 그 순간부터, 그 고압에 짓눌리기 시작한 것인가.
판단을 마친 피에르비의 이마에 식은땀이 한 줄기 흘렀다.
그러나 반대로 그의 몸은 점점 뜨겁게 달아올랐다.
가버트라는 강자와 싸울 수 있다는, 기사로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쾌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버트.
그는 등 위로 일어나려는 소름을 간신히 억누른 채 피에르비를 상대로 다시 창을 고쳐잡았다.
그의 공격을 쳐내는 데에 성공하긴 했지만,
아직도 양팔의 저림이 멈추지 않는다.
강하다.
가진 재해의 모든 기술을 다 펼쳐야 만이 승산을 볼 수 있는 적.
양팔의 저림은 곧 심장의 박동이 되고.
그 박동에 맞춰 먼저 피에르비를 향해 나아가려던 찰나.
부 ───── !
뱅그스 측 진영에서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피에르비는 슬쩍 피리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눈알을 굴리더니, 이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미루지, 그다음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윽고 뒤돌아선 피에르비는 황망한 표정으로 저 먼 곳에 펼쳐진 풍경을 눈에 담은 채 급히 뱅그스의 진영 쪽으로 달려갔다.
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고 있던 가버트는,
거친 숨을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저 너머 펼쳐진 풍경을 눈에 담은 가버트는,
“… 허.”
벅차오르는 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바람인가.
무슨 바람이길래 하늘에서 명주실을 뽑아 꿰어내고 있는가.
“베르융…, 오르테…,”
거대한 회오리 하나가 하늘로부터 쏟아져 내리고 있다.
그리고 그 바람은 분명,
베르융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