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52화 (252/365)

252화. 그리고.

거대한 체격을 뒤덮은 잿빛 갑옷.

그 모든 걸 웃도는 거대한 중검.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경이가 느껴지는 그것은 살아있는 땅거미, 밤의 조각이자 달이 닿지 못한 어둠이었다.

기사 베르융.

그는 지금 단신으로 뱅그스의 본군 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치열, 그 사이를 가로지르듯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베르융은 이제 적 본진의 지척 앞에 멈춰 섰다.

단지 그랬을 뿐인데.

뱅그스 측 전열의 병사 대부분이 움츠러들었다.

이윽고 베르융이 한 손으로 거대한 중검을 치켜세워 뱅그스의 본진을 가리켰다.

“나는 너희들에게 하나의 무거운 파국보다 하나의 가벼운 패배만을 간직한 채 돌아갈 기회를 주려고 한다.”

이어 묵직하게 울려 퍼지는 베르융의 음성에,

주위에 심상치 않은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분명 질감은 산들에서 불어올 법한 부드러운 것임이 틀림없는데, 닿는 살갗마다 따끔함이 느껴지는 그런 이상한 바람이.

“나와라.”

재차 이어진 베르융의 말에.

전방에 진형을 갖춘 수백 뱅그스의 병력은 아무런 대답도 내뱉지 못했다.

누가 물어오는 죽음에 대답하겠는가?

아니, 있었다.

뱅그스 측 진영에.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바랠 대로 바랜 기사여!”

거대.

베르융의 그 장대한 체격조차 작아 보이게 만들 정도로 거대한 사내가 병사들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풍선처럼 잔뜩 부푼 모양이 인상적인 그의 흉갑엔 그간 극복한 역경들을 증명하듯 수많은 흠집으로 가득하다.

“나 뱅그스의 3기사, 비링! 그 불손한 결투의 신청을 받아주마!”

위협하듯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는 기사 비링의 호기에,

뱅그스 측 병사들의 눈빛에 자신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링의 그 거대한 호기에도 불구하고,

베르융의 투구는 기우뚱하며 기울어질 뿐이다.

“자네의 패배는 가벼운 축에도 못 낄 것 같은데.”

그리고 이어지는 베르융의 진심 어린 조언.

그 말에 비링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분노를 드러냈다.

그러면서 단지 몸에 힘을 잔뜩 쥐었을 뿐인데 그의 신체는 거기서 더 부풀어 올라 마치 곰처럼 거대해졌다.

“언제부터 기사의 결투에 무례가 있었는가?!”

직후 통렬히 맞받아친 비링의 말에,

베르융은 더욱 내리깐 목소리로 즉답했다.

“나는 승패에 따른 두 깃발 사이의 용인을 두고 결투를 말한 것이다, 들어본 기억조차 없는 기사여. 너 따위의 패배가 뱅그스 전체의 패배로 합의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내 진심으로 결투에 응해주마.”

“닥쳐라!”

비링이 거대한 메이스를 휘두르며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그 덩치만큼이나 들고 있던 메이스 역시 성관에서 뽑아온 기둥으로 보일 정도로 거대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비링은 메이스의 머리 부분을 빗물로 젖은 땅에 처박은 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37년, 카넬라프]

[터져 내린 산의 혈관, ‘거북한 토사’]

곧이어 그의 몸 주위에 만연하기 시작한 푸른 일렁임.

그것이 땅에 처박은 메이스의 머리 부분에 집중되자 빗물에 질어진 땅속 진흙들이 메이스 쪽으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마치 도금 작업을 한 것처럼, 메이스 겉에 들러붙기 시작한 진흙은 점점 부풀어 올라 이제는 고목의 허리만큼 거대해졌다.

카넬라프는 과거, 산이 간직하고 있던 물길이 터지며 쏟아진 산사태.

그것이 재림형 인챈트가 되어 지금,

산사태의 한 줄기 모습으로 비링의 손에 들려 있다.

그 중량은 감히 어림잡을 수 없다.

“결투의 성격은 후에나 따지는 것!”

쿵 쿵.

묵직한 중량을 들고도 거뜬히 베르융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비링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얹어졌다.

이내 비링은 베르융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었다.

후우욱 ─── !

바람의 뒷덜미를 잡아 끌어내리듯, 손에 들린 메이스를 휘두르기 무섭게 터져 나오는 괴악한 파공음.

단 한 번의 휘두름이었을 뿐인데,

비링의 몸 주위로 허옇게 질린 바람이 사방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베르융은,

조용히 허리를 숙이는 것만으로 비링이 그린 횡을 가볍게 피했다.

그리곤 땅에 박힌 중검을 뽑아 기민한 움직임으로 비링의 턱밑을 찌르고 들어왔다.

“어딜!”

이에 비링은 거대와 육중으로 점철된 모습과는 전혀 다른, 탄력 넘치는 반응으로 금세 베르융의 전진만큼이나 뒤로 물러섰다.

아직 한 번 정도 공격을 더 할 수 있다.

그 틈을 노린 비링은 메이스를 번쩍 들어 베르융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꽝!

어디서 바위가 쏟아졌나.

엄청난 파괴음과 함께 터져 나간 일대 지반.

얼마나 강력했는지, 그 흙 파편이 뱅그스의 전열 보병들에게까지 튈 정도였다.

하지만,

한바탕 튀어 오른 흙더미 너머로 보이는 것은.

“끄….”

메이스를 든 쪽의 팔꿈치가 안쪽으로 꺾인 채 신음하고 있는 비링의 모습이었다.

그 팔꿈치 옆으로는,

베르융의 중검이 맞닿아 있다.

이미 그의 잿빛 갑주 주위엔 보기만 해도 시선이 갈릴 것 같은 폭력적인 바람 줄기가 휘감긴 상태.

[19년, 바렌투스]

[대륙을 난타한 바람]

비록 테티르와의 일전에서 보여주었던 것만큼의 파급은 아니었지만.

단지 지금 드러낸 수준만으로도 그 파괴력은.

비링이 가진 것의 ‘배’ 이상.

재해에 담긴 모든 바람을 이해하고 다룰 줄 아는 베르융이었기에 할 수 있었던 완벽한 완급.

그것에 팔 한쪽이 무력화된 비링은 짧은 신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끄으윽!”

문제는,

비링은 그럼에도 멈출 생각이 없었다는 거다.

꺾인 팔꿈치를 근육으로 지탱한 채 기어코 메이스를 다시 들어 올린 비링의 모습에,

“가상하고 훌륭하다, 뱅그스의 비링이여.”

베르융은 극찬을 전하며 채 메이스가 떨어지기 직전,

중검을 휘둘러 정확히 비링의 목을 베었다.

이런 과정에도 불구하고,

바위 같은 근육으로 가득 차 있던 비링의 목은 떨어지지 않았다.

단지 풀린 힘을 주체하지 못한 채.

쿵.

두 무릎을 꿇었을 뿐.

“쿠헉… 헉!”

걸쭉한 피를 한바탕 토해낸 비링이 조용히 베르융을 올려다보았다.

이에 베르융은,

“확실히, 바래긴 바랬어. 미안하네.”

조용히 중검을 다시 고쳐잡고, 정확히 비링의 목을 향해 크게 휘둘러…,

“그만.”

모든 것이 결착되기 직전.

갑작스레 퍼진 오한.

그 철저한 한기에 베르융은 방금까지 달아올랐던 신체가 급격히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덕분인지 중검은 비링의 목 근처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드디어 나왔나.”

베르융이 투구 속, 붉은 안광을 드러내며 고개를 든다.

그곳엔 거대한 군마를 타고 나타난,

기사 가든이 있었다.

최근까지 뱅그스에 겨울을 오게 만든 그의 얼굴은,

지어진 위엄과는 달리 많이 초췌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었기에 베르융은 더욱 긴장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만하지.”

가든은 고삐를 잡은 손을 놓으며 베르융에게 손바닥을 내보였다.

비어있는 손의 바닥을 내보이는 것은,

싸울 의지가 없다는 신호.

베르융은 다시 한번 투구를 갸우뚱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 전투는 이것으로 그만하지.”

“그 의견은 알겠으나, 그러는 와중에도 주위는 아직 치열이 튀기고 있는데.”

베르융의 물음에 가든은 말없이 고삐를 옆으로 당겨 타고 있던 말에게 옆걸음을 시켰다.

제법 잘 길들인 명마다.

속으로 감탄을 남긴 베르융은 막 사선으로 비켜난 가든의 너머, 뱅그스의 본진을 바라보며 깨달았다는 듯.

“음.”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쪽이 본진으로 보고 있는 이 군세는 모두 내 직속 휘하의 병력이다.”

“영주를 배신한 것인가.”

“아니, 받은 배신을 되돌려줄 생각이야.”

베르융의 투구는 더욱 갸우뚱 기울어졌다.

그러나 더 캐묻지는 않았다.

이 이상의 일은 자신의 권한이 아니다.

속내를 들여다보며 뒤엉킨 현을 조율하는 것은 오롯이 베나즈 가문만이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일.

베르융은 군말 없이 비링의 목에 가져다 댄 검을 거두었다.

“훌륭한 기사를 밑에 두고 있군, 가든 경.”

베르융은 자비로운 모습을 보인 채 조용히 뒤돌았다.

“뱅그스의 깃발은 이제 뒤바뀌는 건가.”

그러면서 이어진 질문에 가든은,

“모르지. 선택은 그곳 자유민의 몫이니까.”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토로하듯 대답했다.

“만일 깃발이 바뀌게 된다면, 그 휘날릴 방향은 서쪽이 되었으면 좋겠군.”

몸에 휘감긴 바람을 거둔 채, 한껏 누그러진 말을 건네는 베르융에게.

마찬가지로 가든은 주위에 만연한 한기를 거둔 채 처음으로 화답해주었다.

“이런 나도 되돌이킬 수 없는 길에 서 있다네,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라면 아무래도 서쪽밖엔 답이 없지 않겠는가.”

* * *

페튼은 곳곳에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뱅그스의 깃발을 바라보며 황망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약속한 펠테아의 원군은?

그 본질적인 의문은 곧이어,

기업가 놈들이 베나즈와 나를 사이에 두고 저울질을 했구나!

제 발 저리는 듯한 의심이 되었다.

거기다,

“어째서 추위가 느껴지지 않는 것인가! 가든은 어디로 간 거야!”

언제부터인지 입에서 뿜어져 나오던 허연 입김도 멎어버렸다.

순식간에 몰린 수세에,

전방에서 고군분투하는 병사들이 눈에 보일 리 없던 페튼은 기수를 가리켜 소리쳤다.

“피리를 불어라! 다시 성으로 복귀한다!”

“겨우 유지한 전선이 급격히 무너져내릴 수 있습니다!”

“불어! 당장!”

부관의 만류에도 페튼은 기어이 윽박질러,

부 ───── !

후퇴를 알리는 피리 소리를 전군에게 전파 시켰다.

“피에르비는 어디로 갔는가!”

직후 기사 피에르비를 찾기 시작한 그의 눈빛은 점점 광기에 젖어 들기 시작했다.

“애초에 놈을 ‘명예기사’로 임명하는 게 아니었어, 천한 용병 출신 놈을 거둬줬더니…!”

한참 찾던 이가 보이지 않자 페튼은 신경질적으로 힐난을 이어갔다.

“방패 병들을 후미에 배치해! 기사들의 보전이 우선이다, 모두 나를 따르라!”

그렇게 피리 소리를 듣고 몰려든 기사와 병사들을 가늠한 페튼은 신속하게 명령을 내려 퇴로를 열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뒤에서부터 휘몰아치기 시작한 매서운 바람.

그 결이 한두 개가 아니다.

저 먼 곳에선 누군가의 굉음이…,

“내 이름으으은…!”

그리고 다른 한쪽에선 말 그대로 모든 걸 집어삼키는 광풍이 몰아치고 있어.

“돌아가 뱅그스의 겨울로 태풍을 버티는 수밖에 없겠어, 개 같은 기업가 새끼들. 피에르비에게 놈들의 처형을 맡겨야겠다! 모두 퇴로로 집결해 이동한다! 이동!”

부랴부랴 병력을 갈무리해 퇴로의 선두로 나선 페튼,

그 뒤를 따르는 기사들.

가진 인챈트의 힘을 모두 흩뿌리며 처절할 정도로 베나즈 군을 저지하던 뱅그스 군은,

의외로.

손쉽게 성 쪽으로 돌파할 수 있었다.

물론 의외라는 건 순전히 페튼의 생각이었을 뿐이다.

진의는 뒤따르던 기사들의 희생.

그것이 베나즈 군의 발목을 제대로 잡은 것일 뿐.

그 와중에도 우스운 건,

페튼의 외가 쪽 기사들은 모두 다 멀쩡했다는 것.

그들을 제외한, 뱅그스를 위해 기꺼이 싸우기로 작정한 기사들만이 강요에 가까운 희생을 치른 거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자, 뱅그스의 전사들아! 우리는 늘 그렇듯 해낼 것이다! 이 순간까지도!”

페튼은 병사들을 독려한답시고 우렁차게 외쳐댔다.

자,

이제 성이 코 앞이다.

조금만 더 가면,

더 가면 된다.

그렇게 기수들이 성문 개방을 알리는 피리를 불기 무섭게.

갑자기 하늘 위로 뜨거운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아무리 뱅그스에 내려앉은 겨울을 물리쳤다지만…,

심지어 이 햇살은,

가을의 것도 아니다.

이건…,

의도적으로 개안 된 하늘로부터 쏟아진 시선.

뱅그스의 기사들, 병사들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페튼 마저 하늘에 펼쳐진 이변에 시선을 빼앗겨야만 했다.

직후 들려오는,

부우우 ───── !

날카로운 뿔피리 소리.

그것이 점점 중첩되어 일대 전체를 묵직하게 울린다.

자연스레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향했고,

그렇게 향한 그들의 시선에 맺힌 것은.

디안 베나즈.

그리고 그의 양옆에 펼쳐진 은빛의 기사단.

“쏟아져 휩쓸어라.”

하늘을 찌르듯 치켜세운 0의 끝이 정확히 페튼을 향하고.

이에 화답하듯, 은빛 군세로부터 수백의 창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이제,

결착이다.

제1차 원정의.

결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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