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지각변동
페튼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통 베나즈의 깃발이다.
그러나 포기하기엔 아직 일렀다.
저 베나즈 깃발 바로 너머에 뱅그스의 본성이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길을 여는 데 성공한다면, 충분히 입성할 수 있다.
“전열을 가다듬고 돌파한다!”
페튼은 검을 번쩍 들어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런 페튼의 외침에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군세는 직전까지 보여준 뜨거운 열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방금, 비처럼 쏟아진 창들에 의해 대부분의 마음이 꺾여버린 것이다.
거기에 더해 한바탕 창을 쏟아낸 군세가 쏟아져 내려오고 있는 상황.
“가자, 뱅그스의 겨울로!”
페튼은 말을 몰아 선두를 자처했다.
그렇지 않고선 병사들을 움직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최후까지 남은 기사들도 마찬가지.
페튼의 실각은 곧 남은 기사들 전부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영주 가문의 뒷배를 끼고 오랫동안 다른 기사 위에서 군림했었던 자들이다.
그런 그들의 동아줄인 페튼이 앞을 나서는데 못 나갈 수가 있나.
“가자!”
와 ──── !
제법 커다란 함성.
그나마 페튼이 의도한 데로,
군세는 품에 안고 있던 아주 작은 불씨를 뒤척여 마지막 뜨거움을 발산했다.
사슬 갑옷,
그 위에 걸친 서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검과 창, 도끼를 내세운 채 베나즈 군을 꿰뚫으려는 페튼의 기마대.
그런 그들의 왼편에선 대륙을 난타했다던 폭력적인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고,
오른편엔 고막을 좀먹는 기압이 팽배해 있다.
또 군세의 바로 뒤편에선.
“으하하하! 가자!”
맹수와 같은 사내와 기마대가 바람에 등 떠밀린 채 최고속으로 따라붙는 중이다.
“가자! 가!”
페튼은 마른 침을 삼키며 창백해진 얼굴로 박차를 수없이 가했다.
그의 조바심에 흥분한 말이 심장이 터질 정도로 빠르게 치달아 나아가니 금방,
성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쾅 ──── !
하는 충격음이 뒤에서 울려 퍼졌다.
서쪽으로부터 나타난 베나즈의 영주와 기사단이 그대로 페튼의 군세 허리 부분을 끊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페튼 뒤를 바짝 쫓아온 기사들과 정예병들은 보전하였기에 그렇게까지 낭패는 아니다.
이어 페튼은 얼른 성문을 향해 소리쳤다.
“문을 열어라!”
성은,
영주의 외침에 답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뒤편에선 진형을 갈무리한 베나즈 군의 거침없는 진격이 벌어지고 있었다.
“문을 열어! 당장!”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재차 명령하는 영주.
그런 영주의 말에 묵묵부답으로만 응하는 성.
기사들과 병사들 역시 세차게 소리를 질러봤지만 두꺼운 성문은 전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 가든…!”
페튼은 직감적으로 가든의 부제를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배신을 당했다.
본래 저버린 자는 저버림 당한 자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던가.
“가든…! 아이베리아에 이토록 추악한 배신자가 기사의 탈을 쓰고 잘도 숨어 있었구나!”
당장 눈앞의 배신에 매몰된 페튼은 움직이지 않는 성문을 향해 온갖 욕지거리를 쏟아부었다.
정의로 포장한 거짓이 아닌 불편함이 담긴 진실 하나만 내비쳤어도,
저 성문은 분명 열렸을 것이리라.
참, 아이러니하지.
페튼과 몇 안 남은 그의 군세는 자신의 성을 등진 채 완벽한 외통수에 빠져버렸다.
베나즈 군은 빈틈없이 그들을 포위한 채 누군가의 지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졌다.
명확한 패배다.
그 어떤 이의도 제기할 수 없는.
이러한 사실 앞에 놓인 병사들은, 그리고 기사들은 이제 자연스레 페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현 상황에서 본인들의 생사를 결정지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에게 말이다.
페튼은.
조용히 말에서 내렸다.
이어 병사들과 기사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털털 걸어 나갔다.
죽음마저도,
포장하기에 따라 순교자가 될 수도 또는 명예자가 될 수도 있다.
하물며,
그 사후로 인해 뱅그스의 기조가 새롭게 다져질 수도 있지.
죽음이란 건 그런 거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높은 자의 죽음.
거기까지 머리를 굴린 페튼은 조용히 걸치고 있던 서코트를 벗어 던졌다.
이어 어깨 갑주에 묶인 매듭을 풀자 안에 입고 있던 셔츠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뱅그스의 병사들은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
사실 페튼의 의도는 따로 있다.
뱅그스의 병사들, 그리고 기사들의 앞에서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걸고 결투에 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결투에 패배하여도 승자인 베나즈 측은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본 뱅그스의 병사들과 기사들의 눈치 때문이라도 처형보다는 구원을 택할 테고…,
해서 명예와 구원을 등에 업고 성에 입성함과 동시에 나중에 불리하게 작용 될 수도 있는 ‘불편한 진실들’을 기사 가든의 배신 혐의와 함께 묻어버리기만 한다면.
능히 보장될 수 있겠다.
보전이.
페튼은 그것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초연한 얼굴로, 마치 눈앞의 죽음에 의연한 자와 같이 베나즈 측을 향해 나아갔다.
이내 치켜세운 검으로 포위한 병력을 한차례 훑은 그가 결사를 다짐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들은 뱅그스의 아버지이자 그 자식들이다! 이상 그들을 무의미라는 명패 아래 묻을 순 없는 노릇이니 내 직접 나와 싸우겠다!”
그 외침에 뱅그스의 병사 몇몇은 고개를 숙이거나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직후.
베나즈의 군세가 양옆으로 갈라지고, 그 사이로 말로만 듣던 베나즈의 후손이 말을 타고 유유히 앞으로 나섰다.
윤택한 흑색의 갑옷.
그리고 허리에 채워져 있는, 람비를 말 그대로 증발시켰던 태풍이 담긴 검까지.
아이베리아의 영원한 배반자로 낙인찍힌 것과는 달리 누가 보아도 신성함이 느껴지는 그 모습에.
페튼은 슬쩍 고개를 돌려 뱅그스의 병사들을 살펴야만 했다.
누가 보아도 홀릴 만한, 그런 위용을 두르고 나타났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뱅그스의 병사들은 베나즈의 후손이 등장함과 동시에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이에 질세라 고개를 잠시 돌렸던 이유를 항변하기라도 할 겸, 페튼은 결연한 눈짓으로 뱅그스의 병사들을 훑어보았다.
“괜찮다, 괜찮아.”
덤으로 그들에 대한 격려까지.
덕분에 뱅그스의 병사들은 페튼의 명예로운 희생에 더욱 집중하였다.
말에서 내린 베나즈의 후손은,
갑옷을 벗은 페튼의 행색을 살펴보더니 조용히 투구를 벗었다.
흑요석을 녹여 실을 뽑는다면 저런 모습일까.
약간 긴 검은색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드러낸 그의 얼굴은,
무결이란 단어를 형상으로 표현해낸 것 같았다.
저자가 바로 베나즈의 후손.
디안 베나즈.
과거 맥레인의 얼굴을 딱 한 번 스치듯 본 적이 있는 페튼으로선 절로 고개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용모.
그 유명한 메리안 베나즈의 외모를 빼다 박은 것이겠지.
곧이어 디안 베나즈는 말없이 갑옷을 벗기 시작했다.
몸통을 뒤덮은 브레스트 가드,
어깨에 착 달라붙어 있던 폴드런.
그리고 건틀릿 까지.
하나의 조각과도 같은 그의 갑옷이 하나둘 벗겨지고 밤색 리넨 셔츠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역시 페튼이 의도한 것 중 하나.
무릇 기사라면 같은 조건에서 결투하는 것이 하나의 미덕이다.
페튼은 먼저 갑옷을 벗어 상대에게 같은 조건을 제시했고, 디안은 이에 따른 것이다.
일말의 가능성.
디안 베나즈를 베었을 때, 그 경우를 확실히 하기 위해 미리 갑옷을 배제시킨 페튼의 수였다.
이런 생각을 한 이유는,
그리고 그런 의도를 배짱 있게 내밀 수 있었던 기저에는,
페튼 본인이 검술에 일가견이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또 그 역시 뼛속까지 기사라서,
한 번쯤은 시험해보고 싶은 것이다.
대단하다던 베나즈의 검술이 어느 정도인지를 말이야.
그 맥레인은 세상의 모든 검술에 통달한 자라고 했었지.
그렇게 도달한 통달 하나만으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비전을 완성한 검사.
후손이라고 해도 그런 터무니 없는 검술을 익히지는 못했을 테지만, 그래도 베나즈이기에.
이 기회에 얼마나 통할지.
한 번 내질러 본다.
“그대가 베나즈 가문의 적장자인가.”
“그렇다.”
“아직도 이렇게 많은 세력이 베나즈 가문을 비호 할 줄은 몰랐는데.”
“그들도 진실이 궁금했으니까.”
“진실? 어떤 진실? 진실이란 이름으로 포장한 거짓인가, 아니면 그 힘을 휘둘러 거짓이었던 것을 진실로 바꾸려 하는 것이 아니고?”
디안은 일말의 표정 변화 없이 즉답했다.
“결투하러 나온 게 아니라 담론을 하러 나온 건가.”
“왜, 설명하지 못할 이유라도 있나?”
“당신은 설득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상대가 아니거든.”
디안의 냉소적인 발언에 페튼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베나즈의 깃발이 공표될 때, 몇몇은 들어보기를 결정했고 또 몇몇은 방관하길 결정했으며 대다수는 그대와 같이 적개심을 드러냈었지.”
디안은 조용히 턱을 든 채 페튼을 깔보며 말을 이었다.
“베나즈 가문은 그런 적개심을 드러낸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야만이로군.”
“아이베리아이니까, 똑같은 것으로 갚아 주는 것이 이 땅의 미덕이 아니었나?”
디안은 조용히 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러다가,
벨트 자체를 풀어 0이 물린 검집을 뒤쪽으로 내던졌다.
이윽고 고개를 살짝 돌려 베나즈 군 측을 바라보자, 기사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와 자신의 검을 건네주었다.
이에 페튼이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 하는 거지?”
디안은,
“정식 결투니까,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공정함을 지키려는 것뿐이야.”
태연히 받아든 검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답했다.
뭘까,
페튼은 직감적으로 느껴져 오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
임박한 맹수 앞에 놓인 초식의 동물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런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있잖나.
그것도 그건데.
저 0과 직접 맞부딪혀야만 앞서 말한 페튼의 의도에 걸맞은 당위성이 강하게 실린다.
하지만 디안이 그것을 사전에 차단해버렸어.
여러모로 자신의 수를 내다보며 희롱하는 디안에게,
페튼은 조용히 어금니를 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변함이 없는 건, 뒤쪽.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병사들의 맹목.
그것만으로도 디안 너는 내게 자비를 베풀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어쨌든 뱅그스를 정복해야 하는 입장이니까.
페튼은 조용히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이에 맞춰 디안 역시 검을 치켜세운 채 페튼을 노려보았다.
자세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렇다고 어디서 들어본 적도 없는 것이다.
아마도 그 맥레인이 후손을 위해 바다 건너에 있을 법한 생소한 검술을 알려 줬나 보군.
조금이나마 아이베리아에 통할 만한 그런 검술을 말이야.
페튼은 입꼬리를 작게 올렸다.
적어도 그가 가진 검술이라면 그런 생소함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까.
왜냐하면,
그가 가진 검술은 ‘갈뤼베히’
검 절단기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아이베리아에서 악명 높은 검술.
스릉 ─
서슬 퍼런 소리와 함께 페튼의 뒤쪽 허리끈에서 뽑혀 나오는 단검 하나.
그 단검의 한쪽 날 부분은 깊숙한 톱니의 형태를 띠고 있다.
쇄도하는 검을 단검의 톱니에 엮어 상대 관절을 꺾거나 검 그 자체를 파쇄하는,
갈뤼베히는 말 그대로 짐승의 주둥이 같은 검술이다.
직후,
페튼이 먼저 빠른 발놀림으로 디안에게 접근했다.
“하!”
작게 내지른 기합과 함께 오른손에 들린 아밍소드를 크게 휘둘러 디안의 공간을 자른다.
직후 비좁은 공간으로 피해 들어간 디안의 검을 향해 단검을 내질러…,
“음…!”
페튼은 따끔거리는 감각을 느끼곤 서둘러 발걸음을 물려야 했다.
다만,
신체의 정확히 어느 부분이 따끔거리는지는 아직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찰나의 시간이 흐른 뒤.
페튼은 떨리는 눈동자로 자신의 눈앞에 떨어진 손가락 세 개를 내려보았다.
인지하기 무섭게 타오르듯 느껴지는 왼손의 격통.
급히 왼손을 살펴보니 단검을 쥐고 있던 손가락 중 세 개가 깔끔히 잘려나가 있다.
그나마 검지와 엄지가 남아있는 덕에 단검을 놓치진 않았지만,
“윽…!”
페튼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베나즈다.
진짜 베나즈구나.
이길 수 없다.
이길 수 있는 그런 종류 아니,
그런 가능성 자체를 따지는 것조차 불가능한 영역.
어디서 어떻게 휘둘러 베었지?
보지 못했다.
그 궤적조차도.
지금 바로 패배를 인정할까?
그럼 본인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진 않을까?
베나즈라면 한 번 더 희롱하듯 벨 테니 좀 더 살을 내주고 쓰러지는 게 맞는 걸까?
오만가지 생각이 페튼의 머릿속을 스친다.
그러는 와중에 이번엔 디안이 그림자처럼 페튼에게 쇄도했다.
반사적으로 반응한 페튼은 즉시 시선을 디안의 검에 고정했다.
그 상태에서 휘두를 궤적을 예상해 검을 내지르면.
어느새 페튼의 왼팔이 말끔히 잘려있다.
눈앞에서 펼쳐진 신비를 고찰하느라 당장 고통조차 느끼지 못한 페튼은,
벙벙한 표정으로 두 무릎을 꿇었다.
아,
이쯤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패배를 인정하는 게 좋겠다.
해서 페튼이 입을 벌려,
“졌…,”
뻑!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디안은 손등으로 페튼의 뺨을 후려쳤다.
“뱅그스의 영주 페튼은 펠테아의 자유민을 학살한 기업가들과 사주 및 모의를 한 혐의로 공식 처형 될 것이다.”
직후 디안은 페튼에게 일말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
명예 없는 죽음을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