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54화 (254/365)

254화. 지각변동 (2)

깃발들의 꺾임이 전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서쪽을 주시하고 있던 자들에 의해 그 소문은 베나즈의 공표 때 보다 더욱 빠르게 퍼졌고,

이내 그 소식은 한 기사회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했던 모든 예상보다 빠르군.”

활활 타오르는 듯 밝게 빛나는 금발, 그 아래 푹 꺼진 눈두덩이 속 새파랗게 빛나는 작은 눈동자.

“과연 태풍은 태풍이로다.”

바위를 짊어지고 있는 듯한 단단한 육체를 가진 그가 팔짱을 낀 채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다면 그 속도에 맞춰 움직여 줘야겠지!”

호쾌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남자는 천천히 뒤를 돌아 그 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을 눈에 담았다.

“고로 지금! 출정이다!”

순수한 육성임에도 천지가 울릴 정도로 거대한 목소리.

그것이 그 앞에 도열한 무수한 군세를 한바탕 휩쓸고 나면, 곧이어 화답하듯 군세는 열기를 가득 품은 사기를 소리로 표현해냈다.

앙 실러 데우스의 섬광이라 불리는 남자.

크녹스.

그가 양옆에 나란히 서 있는 기사들을 지나쳐 당당히 걸어나갔다.

그에 맞춰,

끝없이 펼쳐진 군세는 진형을 고쳐잡고 뒤돌아 차례로 출정을 시작했다.

그들 병사 개개인은 모두 에커즈 기사단에 필적하는, 지휘권자가 쥐고 있는 재해와 맞물릴 수 있을 만큼 출중한 장비로 무장하고 있었기에.

실제로 마음만 먹는다면 어느 깃발이든 능히 꺾어낼 수 있었으리라.

그렇게 크녹스가 자신의 앞에 대기하고 있던 황금 전차 위로 발을 올리자,

옆에 따라붙어 있던 소르자가 품에 안고 있던 투구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고맙소, 소르자 경.”

예를 갖춘 채 기품을 흘리며 인사를 건넨 크녹스는 그 투구를 받아든 뒤 자신의 머리에 썼다.

코린토스 식 투구.

얼굴 전체를 덮는, 둥글둥글한 모양을 한 투구 위로는 거대한 붉은 깃이 일자로 뻗어 있다.

이러한 투구의 모양만으로도 크녹스 특유의 쨍쨍한 위엄이 뿜어져 나왔다.

물론 그가 입고 있는 어깨가 드러난 흉갑.

로리카 역시 그 위엄에 한몫 보태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직후 크녹스가 손에 들고 있던 기다란 공작 깃 지휘봉을 휘젓자, 황금 마차에 연결된 여섯 군마가 발을 구르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일반 말보다 두 배는 더 큰 군마들은 그 발구름 만으로 주위를 울리게 만들 정도였다.

이윽고,

군세를 가로질러 선두로 나아간 크녹스를 뒤로 병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 긴 행진을 이어갔다.

* * *

켄타나의 기사 가버트가 막 외부 임무를 마치고 복귀해 펠테아의 성문을 지나쳤다.

그의 등장에 소문을 듣고 모인 사람들이 몰려들자,

가버트는 위엄 넘치는 목소리로 그들에게 소리쳤다.

“죄인을 호송 중이다, 모두 비켜라.”

이에 슬슬 분노를 드러내던 사람들은 군말 없이 가버트의 앞길을 비켜주었다.

천천히 말을 몰아 이동하는 가버트, 그 뒤로 2열을 유지한 채 이동하는 병력.

이들의 행렬 사이엔 두 마리 말이 이끄는 이동식 감옥이 함께 있었다.

양옆으로 물러나 잠자코 있던 사람들은 그 감옥 안에 갇힌 사람을 보자마자,

기꺼이 가진 분노를 모두 드러내며 온갖 모욕을 쏟아냈다.

“이 개새끼!”

“죽어라!”

“팔 게 없어서 펠테아를 팔아!?”

흙, 돌, 따로 말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오물.

그것들이 모두 감옥을 향했다.

그런 감옥 안, 쇠사슬에 사지가 묶인 채 앉아 있던 남자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펠테아의 영주, 에잔.

그가 섬김받던 땅으로 돌아와 이제는 치욕을 받는다.

기사 가든과의 협의가 끝난 지 이틀이 지났다.

디안의 배려로 베나즈 측 기사 모두가 회담에 참관할 수 있었고, 그 회담은 서로가 납득 할 수 있는 결과들을 나눈 채 제법 순탄히 끝났다.

가든의 의견에 따라 뱅그스는 자치 독립되었지만 베나즈의 동쪽 변경 직무를 수행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되었다.

람비와 펠테아는 베나즈의 영토로 귀속되었지만 후에 봉토로 운용해 제2차 원정에 대한 독려 자원으로 삼았다.

전체적으로,

1차 원정은 생각보다 빠르게 그리고 예상보다 덜 떨어진 곳에서 깔끔히 매듭지어졌다.

이제부터는 람비와 펠테아의 복구,

그리고 전체적으로 넓어진 베나즈 가문의 영토를 재정비하여 2차 원정에 대한 준비와 동시에.

방관하고 있던 깃발들의 공격을 대비해야 하는 시기를 앞두고 있었다.

* * *

조금은 씁쓸한 감이 없잖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담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은 나는 바로 옆, 뒤따라 앉은 테티르의 쾌활한 인사에.

“공, 어제는 잘 주무셨는지요.”

애써 밝음을 내비쳤다.

“리케니엔의 침대가 벌써 그리워지는군요.”

“핫하하! 벌써 침대에 다른 누군가의 침입을 허락하기라도 하신 겁니까?”

익살스러운 테티르의 물음에 바로 뒤에 앉아 있던 엘르길의 귀 끝이 움찔거렸다.

“그런 거 아닙니다.”

“공! 베나즈의 바깥이 다져지고 있는 만큼 그 내실도 단단히 다져야 하는 법입니다. 그것이 바로 군림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지요.”

테티르는 괄괄하게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발리르의 귀족 가운데 디안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처녀들이 아주 많습니다. 말씀만 해주신다면 베르융과 상의해 만남 주선을…,”

그리곤 열의 가득 찬 얼굴로 설명을 늘어놓았지만, 그것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크흠.”

뒤에 있던 엘르길이 기침을 내뱉으며 테티르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나저나 가니아 아가씨께선 적응을 잘하고 계신 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공께서 충분히 신경을 써주고 계시겠지만…,”

이어 엘르길이 내게 슬쩍 고개를 내밀어 말을 걸어오자 테티르가 펄쩍 뛰며 그에게 되물었다.

“뭐라? 이미 저택에 아가씨를 들이셨다는 겐가?”

“뭐, 그렇다네. 빌로즈 가문의 가니아님이시지. 자네는 소문으로 들어서 이미 알고 있겠지만, 서쪽의 장미라 불리는 그 가니아님이 맞네.”

“하지만 공! 발리르에도 세타이아 가문이나 울레니 가문 아래에도 걸출한 이들이 많습니다!”

늘어지다시피 한 그 둘의 실갱이 속에 시달리길 한참.

“그만하지. 공께 무슨 결례인가.”

막 나타난 베르융이 그들을 단숨에 중재시켰다.

“공,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늦었습니다.”

“괜찮습니다, 베르융 경.”

덕분에 살았어요.

베르융은 곧바로 내 오른편 자리에 앉아 테티르와 엘르길을 한 번씩 찌르듯 노려보곤 말을 이었다.

“이야기도 자리를 봐 가며 해야지, 뭐 하는 짓들인가.”

괜히 나까지 머쓱하게 만들 정도로 베르융은 그 둘을 심하게 꾸짖었다.

그러고 이어,

“우린 태풍 아래 다시 모인 기사들일세, 정략이란 이름 아래 깃발과 깃발 사이 다리를 놓는 형태의 범람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 말이야.”

긴긴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한 베르융이 인자한 미소로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저 성실히 살아가는 자유민이라고 한들, 공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었다면 우린 그분을 베나즈의 내실로서 마땅히 모셔야 하네. 알겠는가?”

베르융은 말을 마친 직후 날 보며 시원한 미소를 보였다.

일전에,

그가 내게 해주었던 말이 떠오르네.

아네즈님과의 만남, 그 인연이 성립하게 된 이야기 말이야.

그걸 생각했을 때.

앞서 해준 그의 말은 참 그다운 것이로구나.

하지만 어쨌든,

이런 이야기는 지금의 자리에선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기에 내가 직접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가 왔다.

“말씀들은 모두 고마운 마음으로 간직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면 글쎄요. 되려 경들에게 실망했습니다.”

“송구합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차분하게 이어진 내 토로에 테티르와 엘르길, 그리고 베르융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얼른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우린 지금 원정을 통해 어느 씁쓸한 결론의 목도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 마지막 앞에선 다들 결연을 내비치십시오.”

“바로 받잡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어 베르융의 어깨에 손을 얹는 것으로,

그들은 모두 일어나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사실은 잘 모르겠다.

뼛속까지 기사들인 그들에게 지금의 이 자리는 어쩌면 승전이라는 마지막 결론의 마침표일 수도 있었을 테니까.

그럼으로써 약간의 흥이 돋아 있을 수도 있는 일일지도 몰라.

아마도.

2차, 3차로 원정이 거듭되어 간다면 나도 그 마음가짐이 바뀔지도 모를 일이지.

그래도 지금은 아니기에.

슬쩍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그 위로는 넓은 대가 차려져 있다.

곧 대 옆으로 서 있던 병사들이 내 눈치를 살피고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직후 병사들이 두 사람을 붙든 채 대 위로 끌고 올라왔고, 대 위에 설치된 기둥에 말려 있던 끈을 풀어 늘어놓았다.

그것은,

처형대.

늘어진 두 개의 끈 아래 무릎을 꿇은 두 남자.

펜테아의 영주 에잔과 뱅그스의 영주 페튼.

병사들은 곧 그들의 목에 줄을 감았고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할 말이 있는지, 그들에게 묻고 싶었지만 글쎄.

바로 생각을 바꿨다.

어쩌면 침묵이 그들에게 있어선 가장 명예로운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고갯짓을 해 병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병사는 대 위에 설치된 막대를 당겼고,

즉시.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마지막을 맞이했다.

* * *

“진정…, 베나즈의 후손이 생존해 돌아온 것인가.”

투구를 옆에 낀 채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노인.

그 나이가 무색하게 걸친 갑옷은 바위처럼 두꺼운 것이었다.

옆으로는 중년의 남성이 고삐를 쥔 채 다음 행선지인 구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과실이 빨리 익었습니다. 어쩌면 이미 다른 누군가에 의해 떨어졌을 수도.”

가헨 레바르도.

그가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뒤돌아 펼쳐진 병력에 손짓했다.

그럼 육중한 무장을 갖춘 전군이 그들을 지나쳐 먼저 구릉으로 길게 늘어진 채로 진입한다.

노인은 가헨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토록이나 원정이 빠르게 끝날 줄은 말이다.”

“이제 베나즈라면 지긋지긋합니다, 무슨 망령도 아니고 끈덕지게…,”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었을 때 처리했어야지.”

가헨은 자조적인 미소를 띠면서도 가학적인 눈빛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그보다 더 확실할 순 없었습니다, 무려 다섯이 그녀를 정확히 관통했어. 피를 끓은 맥레인의 씨앗이 있었다고 한들…, 그 땅이 완벽히 사멸했었단 말입니다…!”

“맥레인 그자를 말하는 거다. 피를 끓였다고 한들 한때 절대로서 군림했던 글라디옴. 그 씨앗이 어디에 심기든 비슷한 걸 품고 솟아오르는 건 매한가지지.”

노인은 냉정한 시선으로 가헨을 노려보았다.

“한순간의 정복감이 많은 걸 그르치게 만든 게야.”

그러나 가헨은 되려 히죽거리며 흥얼거렸다.

“어차피 똑같이 짓밟아버리면 될 일입니다.”

그리곤 말을 몰아 그대로 노인을 지나쳐 이미 반쯤 구릉지로 들어선 군세를 따랐다.

* * *

가헨의 군세가 서쪽으로 이동하길 한참.

드디어 유의미한 관문 앞에 멈춰선 그들이 군세를 가다듬고 곧 임박할 도착을 대비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넘어가면 뱅그스가 나오고,

그다음이 펠테아, 람비.

그 람비마저 넘어서면 켄타나다.

그렇게 켄타나만 뚫는다면 리케니엔을 정복하는 건 시간문제.

애초에 막 원정을 끝마친 베나즈의 본군은 펠테아 혹은 뱅그스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 초전에 박살을 내고 천천히 병력의 피로를 회복하며 남은 베나즈 잔당을 유린하면 될 일.

생각을 마친 가헨은 서둘러 이동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 뒤를 바짝 쫓던 여인, 헤렌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말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좀 이상합니다.”

“왜 그러지?”

“그냥 촉이라는 게 있잖아요, 아버지.”

가헨은 식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촉은 상당히 무딘 편이었지. 서둘러 이동해 완전히 해가 지기 전 결착을 낸다.”

헤렌나의 불안감을 가벼이 취급한 뒤 곧바로 이동을 시작한 가헨,

그 모습을 보며 뭔지 모를 착잡함을 느끼는 헤렌나 그녀에게, 막 뒤에서 어슬렁 기어오던 사내가 찐득하게 이죽거렸다.

“촉이뢰는괴 이쫘놔요, 아부지. 아주 웃겨. 응?”

시간이 더 지나,

드넓은 평야에 들어선 가헨의 군세는 이제 뱅그스까지 언덕 하나만을 남겨둔 채였다.

이미 해는 많이 기울어 진홍으로 물든 상태.

그런데 이상하다.

가헨은 저물어가는 해의 반대편에서 느껴지는 따듯함에 별안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저문 해 반대편으로,

‘또 다른 해’가 뜨기 시작하는 것처럼.

동쪽으로부터 피어난 밝은 빛.

그곳으로 고개를 돌린 가헨은, 막 빛 사이를 헤집고 나오는 어느 낯선 군세를 목격했다.

선두의 황금 전차.

그 위에 군림하듯 앉아 있는 어느 광기.

“빛이 있으라, 라아아아아아아 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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