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55화 (255/365)

255화. 지각변동 (3)

앙 실러 데우스의 섬광, 크녹스.

그의 작은 동공에서 황금빛이 일기 시작한다.

두꺼운 입술 끝은 절로 올라갔으며, 그만큼 솟은 광대는 빛나는 안광에 번들거렸다.

더할 나위 없는 점잖을 보였었던 그가 마치 숨겨왔던 본성을 드러낸 것처럼.

밝은 빛을 등에 업기 무섭게 매서운 광기를 드러낸 것이다.

“과연! 베나즈의 1차 원정이 이렇게 끝날 리가 없지!”

하지만 그런 광기를 드러내며 마차를 몰고 있는 크녹스는 한 가지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눈앞에 나타난 군세,

그것이 베나즈의 군세라고 생각한 것이다.

베나즈의 1차 원정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끝이 나버렸고,

그 과정에서 군세에 누적된 피로도 역시 낮았다고 한다면.

그래,

뱅그스를 끝으로 만족할 리가 없는 것이 인지상정.

그 너머 몇 깃발들까지 눈독을 들였을 테지.

이러한 가정들 때문이라도 크녹스는 크게 착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설마,

서로 다른 시기를 고른 두 세력의 착각이 같은 시기의 맞물림이 되었으리라곤.

그 역시 쉬이 상상하진 못했을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녹스는 마주할 후회 따윈 걱정 없다는 듯 더욱 거세게 고삐를 내쳤다.

애초에 후회를 마주할 일 그 자체를 만들지 않으리라 결심한 듯, 이내 크녹스가 자신의 무기인 대형 사브르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것은,

[7년, 풀고르크레]

[밤을 부정한 아침]

과거 용의 시대, 한 대륙 위에 펼쳐진 88일간의 아침.

영원의 백야라고도 불리는 그 재해가 막 그의 손에서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검 끝에 맺힌 빛이 곧 유리 깨지듯 여러 파편으로 터져 나가기 무섭게,

그의 등 저편에서 펼쳐지기 시작한 광활한 빛.

서쪽 하늘을 적신 그 빛 아래로 쏟아져 내리듯 전개되는,

크녹스의 군단.

귀 큰 자들의 벼림이 들어간 유리 갑주를 걸친 군단은 빛 아래 섬광처럼 번뜩였다.

이윽고,

펼쳐진 섬광의 선두인 크녹스가 막 마주한 군세의 전열과 부딪혔다.

쾅!

무자비한 폭음.

그리고 그 폭음 사이에서 들려오는,

“라아아아아아 메!”

앙 실러 데우스의 기도 끝맺음.

기도문도 없이 왜 끝맺음 말을 하느냐 묻는다면, 그건 크녹스의 기도문이.

쾅!

쾅!

바로 행위로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섯 군마가 병사들을 짓이기고,

황금 마차의 바퀴가 사선의 발목들을 절단하며,

마차 난간에서 선풍을 그리며 휘둘려지는 대형 사브르가 남은 목들을 말끔히 쳐낸다.

마차의 이동 경로가 곧 죽음으로 그려진 선이 되는,

동시에 전장에서 펼쳐지는 크녹스의 기도이기도 한 그것들의 이름은.

압도와 고압과 위엄.

누구도 그 마차에 대항할 수 없다.

방패로 벽을 세워야 할 병사들은 마주한 빛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으니까.

파이크를 내세워 진을 쳐야 할 병사들 대다수가 빛 앞에서 눈을 감아야 했으니까.

그렇게 한바탕,

크녹스가 적 병력의 전열을 휩쓸자 뒤이어 그의 군단이 재차 치달았다.

빛 앞에 황급히 시선을 치우는 적 군세와는 달리 유리 갑옷을 걸친, 말 그대로 섬광 덩어리가 된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적들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크녹스의 군단이 빛 앞에 자유로울 수 있었던 건,

번들거리는 유리 투구, 그 눈구멍 속에 발라진 밤의 물감 때문.

빛에는 늘 그것을 감당할 그림자가 필요하듯,

병사들 역시 섬광을 감당할 수 있게 갑옷 안쪽을 밤으로 칠해놓은 것이다.

이렇게 초장에 휘어잡은 기세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선두에서 종횡무진 적병을 휩쓸던 크녹스가 마차를 멈춰 세웠다.

그리곤 자신의 검을 치켜세워 한 방향을 조준한 뒤,

광기로 예열된 입술을 끌어올리며 묻는다.

“모습을 드러내라, 베나즈를 향해 치달은 위장자여!”

[하늘 돋보기]

직후 대형 사브르에 휘감기기 시작한 빛 덩어리.

이에 맞물리듯 그 주변에 있던 아군 갑옷의 빛이 옅어진다.

이내 빛 덩어리가 검 끝에 맺혀,

────── !

강렬한 폭발음과 함께 한 줄기 빛으로 사출되었다.

과거의 기록을 통해 가진 재해를 모두 이해한 크녹스였기에 가능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공격.

그 모습은 말 그대로 의지를 가진 재해 그 자체였으리라.

사출된 빛줄기는 크녹스가 검 끝으로 조준한 곳을 향해 정확히 처박혔다.

이와 동시에,

쾅 ─── !

귀밑이 떨어져 나갈 만큼 무시무시한 폭음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고,

이 모든 장면을 목격한 적 병사들은 경이와 두려움이 공존하는 벙벙한 표정으로 입술을 떨어야 했다.

하지만,

폭발의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들고일어난 모래 먼지가 사방으로 해쳐져 흩어졌다.

그 흩어진 모래 먼지 사이로 일어선 것은,

거대한 깃발 하나.

“호오…, 레바르도….”

그것을 단번에 알아본 크녹스가 흥미로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중얼거리던 크녹스의 작은 눈동자 속엔,

깃발 아래 분노로 가득 찬 한 중년 남자의 모습이 맺혀있다.

* * *

[9년, 네빌리서스]

[크라타야 산맥을 우그러트린 아지랑이]

몸 주위로 아지랑이가 꿈틀거린다.

붉게 변한 눈, 그리고 얼굴 위로 도드라진 검은 핏줄.

가헨 레바르도는 물고 있던 입김을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

“광신도 크녹스.”

직전에 날아든 빛줄기에 의해 가헨이 서 있는 곳 주위는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그러나 그 그을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가헨은,

저 너머 황금 마차를 향해 소리쳤다.

“크녹스, 이곳에서 널 만날 줄은 몰랐는데. 앙 실러 데우스도 0을 노리고 있었다니 놀랍군.”

이에 화답하듯 크녹스가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다섯 기사가 글라디옴을 부러트렸다 들었는데, 그 글라디옴의 후손이 0을 들고 나타나 버렸군그래!”

비아냥 섞인 크녹스의 대답에 가헨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단지 눈썹을 살짝 찌푸렸을 뿐인데, 그의 몸 주위에 내려앉은 아지랑이는 더욱 커져 있었다.

하지만 이런 가헨을 진정시키려는 듯, 뒤에 있던 노인이 나서 타이르듯 크녹스에게 말했다.

“병사를 물러라! 그렇지 않으면 피차 서로가 깨짐을 감수해야 할 테니!”

물론 크녹스는,

“같은 목적 앞에 마주했으니 부딪혀 깨지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이미 광기에 젖어 더한 호승심을 내비칠 뿐이었다.

“애초에 이렇게 마주한 이상 서로 적이 되는 건 변함없는 사실,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 결착을 짓는 것이 좋겠지!”

이어지는 도발에도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외쳤다.

“결착이 아니라 공멸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겠군. 자네라면 우리 가문과 부딪혔을 때 얻게 되는 후유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

그의 침착함에 크녹스의 눈에 서린 금빛 안광이 살짝 옅어졌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노인이 살짝 강한 어조로 몰아세웠다.

“돌아가 상대를 도모할 궁리를 하는 것이 더 수지타산에 맞지 않겠나, 크녹스. 자네가 그 막대한 부를 쌓았던 방식처럼.”

크녹스는,

흥미가 떨어진 듯 식은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주도권을 가진 노인이 대화의 종지부를 찍었다.

“우리 역시 자네 같은 거물을 상대하려면 이런 공멸 적인 회전보단 뒤로 궁리하는 쪽이 편하거든.”

그 말을 들은 크녹스는 조용히 마차 뒤로 펼쳐진 광경을 훑었다.

처음의 기세로 들이닥친 것까진 좋았으나,

레바르도 가문의 악명 높은 대검 부대 ‘발리로트’가 막 전선을 유지한 채 역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상황.

이 상태라면 직후 이어질 싸움은 지독한 소모전일 게 뻔하다.

짧게 생각을 마친 크녹스는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만나서 반가웠소, 가헨 경. 다음에 또 볼 날을 고대하지.”

이어 위협적인 표정으로 가헨을 노려보며 인사를 건넨 크녹스는 조용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 모습은 위협과 여유로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크녹스의 마차가 되돌아가자 그의 군세 측에서 묵직한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레바르도 측 진영 역시 퇴각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며 한데 뒤엉켰던 양측이 분리되었다.

* * *

직전의 모습은 어디 갔는지,

크녹스는 뜨거웠던 광기가 식자 다시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런 그가 기품 넘치는 목소리로 모인 기사들을 향해 묻는다.

“피해는 어떻게 됩니까?”

이에 젊은 기사 소르자가 즉답했다.

“아직 정확히 파악되진 않았습니다만 적진 않을 겁니다.”

굵은 턱 끝을 긁적거리던 크녹스는 덤덤한 표정으로 평야 너머를 바라보았다.

“가다가 한 번쯤 작은 돌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겠다 생각했었는데, 그 오만함이 이렇게나 크게 번졌군요.”

이어지는 크녹스의 자책에 기사들은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

특히 소르자가 가장 큰 열의를 내비쳤다.

“능히 싸워 꺾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무의미한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강행할 이유가 없었을 뿐.”

크녹스는 그런 소르자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경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한결 놓였습니다.”

아직,

눅진한 금빛에 얼룩진 하늘.

그것을 한참이나 올려다보고 있던 크녹스는 재정비를 마친 군을 둘러보며 말했다.

“돌아갑시다.”

* * *

“처음엔 무슨 생각으로 대대적인 공표를 던졌나 싶었는데, 바로 이걸 노리고 있었던 것이었군.”

간이 천막 안,

다리를 꼰 채 불편한 심기를 있는 그대로 내놓는 가헨의 말에 옆에 앉아있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을 공공의 적으로 만드는 자충수인 줄 알았으나, 그 공공의 적을 노리는 자들 역시 서로가 적이었던 게지.”

노인의 그 말에 헤렌나가 긴장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이 모든 게 그저 0의 존재 하나만으로 이뤄진 일이라니, 확실히…,”

그 덧붙임에 항상 비아냥을 일삼았던 사내가 처음으로 동감을 내비친다.

“자체만으로 하나의 엄청난 수단이란 거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명분이 되는 미친 물건이라고.”

이후 감도는 짧은 침묵.

그 속에서 가헨은 병사가 가져온 두루마리를 펼쳐 읽어내려갔다.

“섬광 크녹스라, 이런 지긋지긋한 놈이 경쟁자라니.”

두루마리엔,

어림잡아 200에 가까운 수가 사망자로 기재되어 있었다.

단시간에 이뤄진 전투였으나 그 잠깐 사이 일어난 파급은 엄청난 것이었다.

“가헨, 돌아가야 한다. 아직 알지 못하는 미지의 경쟁자들 몇몇이 오늘 일어난 일을 알게 되는 건 시간 문제니 그것에 대한 대비를 서둘러야 해.”

노인의 조언에 가헨이 지끈거리는 듯 손가락으로 이마를 한참이나 문지르다가,

“베나즈는 이러한 공백을 통해 거듭 성장하겠지요.”

노인에게 조언을 구하듯 물었다.

“그들은 지금 시기를 만끽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공표를 통해 많은 아군을 얻었듯이 그만큼 많은 적을 만든 것도 사실. 기어코 틈을 노리고 공격을 감행하는 깃발은 있을 거다.”

그런 가헨에게 노인은 통찰을 드러내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베나즈는 언제나 상대방의 침공을 기다리고 대비해야 하는 신세지. 그럼 틀림없이 소모만이 반복되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노인의 눈이 일순간 번뜩인다.

“분명 딱 맞는 시기가 우리에게 찾아올 거야.”

노인의 이야기를 들은 가헨은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바로 복귀한다, 각 군에게 전달해.”

* * *

유독,

오늘 하늘은 해가 저물었음에도 밝게 빛나고 있네.

그 빛이 참으로 영롱해서 정말 한참이나 넋 놓고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내려보면,

엘르길 경이 주도해 벌어진 펠테아의 축제 현장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이곳 자유민들에게 베나즈라는 이름을 긍정적인 것으로 인식시키기 위해 벌어진 축제는,

다행히 아무 일 없이 마무리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벌어진 축제를 또 한참이나 내려다보다가 뒤를 돌아보면.

기다렸다는 듯 원정을 함께한 기사들이 내 앞에 고개 숙였다.

“모두 충분히 휴식했습니다.”

“이제 이동하셔도 될 듯합니다.”

직후 베르융과 테티르의 보고를 들은 나는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럼 기사들은 자연히 양옆으로 갈라져 내가 가로지를 길을 만들어 주었다.

“자, 돌아갑시다. 각자의 고향으로.”

리케니엔으로.

분명 잃은 것도 있겠지만.

그 잃은 것들을 통해 얻은 승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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