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56화 (256/365)

256화. 상이

[뷰글스(외부 구독) – 리케니엔 9호]

첫 원정 그리고 첫 승리.

떠났다.

그리고 승리와 함께 돌아왔다.

베나즈의 깃발 아래 모인 기사들이 거듭된 전투에서 단 한 번의 패배 없이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태풍의 계보는 거룩할 정도로 정상적이었으며 이는 아직도 시인하는 자들을 설득시킨 중요한 장면이기도 했다.

처음을 보라,

모두가 과거에 매몰된 채로 베나즈라는 이름을 저주와 같이 취급했던 때를.

그리고 지금을 보라.

그 사이에서 묵묵히 일어나 주도한 첫 원정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쟁취한 결과를 가지고 돌아오는 베나즈 가문의 이야기를, 이젠 우리가 나서서 들어야 할 때일 것이다.

고급스러운 마감으로 처리된 신문.

그 첫 면에 적힌 기사를 한참이나 살피던 여인은 안도 섞인 표정으로 조용히 신문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놓인 신문 위로,

다다닥.

하는 작은 발소리와 함께 올라탄 작은 쥐가 좁쌀 같은 눈을 이리저리 흔들며 코를 움찔거렸다.

“세상에, 리케니엔의 신문을 구독한 거야? 거리를 생각하면 무지하게 비쌀 텐데!”

직후 신문 첫 문단을 살피던 쥐가 작은 앞니를 드러내며 찍찍거렸다.

“적어도 배달 부엉이를 세 마리 이상 고용해야 하는 거리라고!”

이어지는 쥐의 물음에 여인은 햇살 같은 금발을 늘어트리며 대꾸했다.

“새삼스럽기는.”

살짝 핀 미소.

그 속에 가득 차 있는 아름다움.

테리아 루스는 스케비의 잔소리에도 그저 흐뭇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그러한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스케비가 뒤늦게 신문의 내용을 살피더니, 곧 그 역시 앞발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세상에! 디안?!”

다다닥,

신문 속 빼곡히 들어찬 문단을 마치 발자취로 읽어내려가듯 이리저리 이동하던 스케비가 멍한 표정으로 테리아를 올려다본다.

“디안 베나즈가?!”

그 반응에 테리아는 입술 위에 내려앉은 촉촉함을 깨트리며 초승달 같은 미소를 그렸다.

“순식간에 아이베리아의 중원을 뒤흔들어 놓다니…,”

감탄을 거듭하던 스케비의 중얼거림에,

테리아는 문득 얼굴에 내려앉은 미소를 거둬야 했다.

“아마도 더 위험해지겠지.”

그런 그녀의 물음에 스케비는 코를 움찔거리며 테리아를 쭉 살피다가 제법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겠지.”

그러나 스케비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녀를 위로하듯 말을 보탰다.

“하지만 무려 베나즈라고, 게다가 네 손으로 다시 만들어진 그 검을 든.”

스케비는 그 말을 하며 궁금한 점이 생겼는지 테리아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그래서, 베나즈의 그 검 말이야. 정식으로 학회에 제출한 거야?”

그 말에 테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맞춰 윤기를 걸친 햇살이 반짝거리며 출렁인다.

“응, 이미 대외적으로 노출이 된 이상 학회는 내가 보낸 안건을 바로 수용할 거야.”

이에 스케비는 신문 위에 걸터앉은 채 다시 감탄을 내뱉었다.

“오랜 시간, 여덟 자루로 고정되어왔던 ‘별의 유산’이 다시 제자리인 아홉 자루로 정정되는 순간이로군.”

“거기에 더해 등급 내 다섯 자루에 불과했던 ‘오른손’에도 새비안이 추가될 거야.”

“오른손이면 무기류 가운데 최고로 치는 등급이잖아? 하긴…, 인챈트를 논외로 쳐도 그 자체만으로 최상급의 명품이긴 하지.”

흥미롭다는 듯 작은 눈으로 가득 집어 먹은 흥미를 반짝거리던 스케비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테리아에게 말했다.

“어쨌든, 너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의 핏줄은 생각보다 더 강하니까.”

“맥레인 베나즈. 그가 정말 그렇게 강했어?”

스케비는 단호한 얼굴로 즉답했다.

“그렇게 강했어가 아니야, 그는 최강이었다고.”

테리아는,

그럼에도 씁쓸한 미소를 지어야만 했다.

그 최강의 수식어가 당연했던 남자도 결국 무너졌잖아.

아이베리아에 절대란 없는 것처럼.

그런 그녀의 표정을 읽은 스케비는 얼른 화제를 전환시켰다.

“어쨌거나 디안은 거듭된 싸움을 치르게 될 거야, 그건 자신의 이름에 걸려있는 숙명 같은 거니까.”

“그래.”

“그러다 보면 자연히 그 대단한 새비안마저도 흠결이 생기기 마련일 테고, 그럼 바로 너를 찾아오겠지.”

특유의 유려한 말솜씨로 건네진 위로에,

테리아는 덜컥 기대감 어린 표정을 드러내야만 했다.

디안이,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그것은 부끄럼을 타며 막 암술을 드러낸 꽃봉오리가 꿀벌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두 발 걷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한 설렘이었다.

* * *

베나즈의 집사부 전원이 바쁘게 움직인다.

깁슨 제리드가 선물한 종을 막 가지고 들어온 바돈은 시종들과 함께 저택 꼭대기에 그것을 매달았다.

청명한 종소리는 곧,

승전을 알리는 또 다른 목소리였기에.

그들은 모두 부푼 맘을 안은 채 종 매달기에 집중했다.

그 아래, 저택 홀에 모인 집사부는 세라와 가니아를 필두로 눈코 뜰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고.

막 저택에 들어선 기지어는 돌아올 영주를 위한 서류를 정리하기 위해 곧장 접견실로 향했다.

이어 외부 순찰을 돌고 온 조이와 베르긴이 복귀하는 본대를 맞이하기 위해 채 쉬지도 못하고 다시 밖을 나섰다.

그렇게 모두가 이마에 맺힌 땀조차 훔치지 못할 만큼 바쁜 와중,

그사이에 우두커니 침묵을 지킨 채 서성이는 한 남자가 있다.

폴란.

그는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손에 꽉 쥐고 있던 것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먼저 복귀한,

기사 몰룬의 휘장.

그 육중하고 장대한 자가 이리도 작고 가벼운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 너무나 허탈해서.

감정을 어떻게든 추스르기 위해 폴란은 다시 손에 담긴 휘장을 꽉 쥐어야만 했다.

동시에 조금 일그러져 있던 그의 얼굴에도 잔뜩 힘이 들어갔다.

“폴란님.”

그런 그를 뒤에서 누군가 부른다.

“조엘.”

앳되고 순수한 청년, 그러나 그 인상 속에 날카로운 이지를 간직한 남자.

조엘.

최근에 봤었을 때와는 달리 그의 눈 밑은 꽤 짙은 땅거미가 내려앉아 있었다.

직전까지도 새벽까지 일 한 것으로 보이네.

“소식 들었습니다, 어떤 위로를 건네드려야 할지…,”

심심한 위로를 건네는 조엘에게, 폴란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장 위로가 필요한 건 아모랑 가문의 사람들이지.”

하지만,

벅차오르는 것은 막지 못했는지 그의 콧잔등이 심히 붉어진다.

“그분의 죽음에 내가 위로받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목에 걸린 사과처럼 묵직하기 짝이 없는 슬픔을 꾸역꾸역 삼킨 그는 다시,

차분한 표정으로 조엘에게 물었다.

“기지어님께선 어디 계시는지 아는가?”

“아마도 접견실에 가 계실 겁니다, 최근 벌어진 원정으로 인해 해결해야 할 추산이 산더미거든요. 그나마 거들어 주셨던 조이 경께서도 방위 업무로 빠지시는 바람에…,”

폴란은 조엘의 말을 애써 멈추게 했다.

“나도 같이 거들었으면 참 좋았을걸, 이거 미안한 마음이 드는군.”

“폴란님은 티히트라의 섭정이시지 않습니까, 절대로 미안해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맞지.

티히트라의 섭정.

그런데 그게 몸에 묻은 무늬 따위에 불과하다는 게 문제겠지만.

폴란은 툭 하고 내뱉고 싶던 충동을 겨우 억눌러야 했다.

이런 폴란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은 조엘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폴란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원하신다면 제가 어떻게 해서든 기지어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의 물음에 폴란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지금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야지. 그래야 서로를 확인할 수 있을 때쯤에 발휘될 합심도 더 위력적이지 않겠어?”

폴란은 진심 어린 응원을 잔뜩 담아 조엘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그런 고로 아무래도 나는 영주님의 환영 행사에 참석하지 못할 것 같아.”

“참석 못 하시는 겁니까…?!”

“급히 해결해야 할 일이 있거든, 그래야 행사가 끝난 그 말미에 맞춰 재상을 뵐 수 있을 테니까.”

폴란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조엘을 지나쳐 걸었다.

“조엘, 자네가 잘 말해주게. 이놈의 불충을 잘 좀 포장해줘.”

그러다 우뚝 걸음을 멈춰 유쾌한 목소리로 말하면,

조엘은 그런 그의 유쾌함에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상하지.

뭔가 씁쓸해 보이는 폴란의 뒷모습을.

조엘은 한동안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봐야만 했다.

* * *

땡 ─────

땡 ─────

리케니엔 전역에 울려 퍼지는 청명한 종소리.

파도에 깎인 유리의 빛깔을 악보로 뽑아 연주하면 저런 소리가 나지 않을까 할 정도로.

땡 ─────

그 소리가 참 맑고 곱다.

그러나 그렇게 차분하고 아름다운 종소리가 거듭될수록 듣는 이들 모두의 눈빛은 뜨거워지기만 한다.

꽃바구니를 든 아이들은 부풀어 오르는 흥에 떠오르는 몸을 주체하지 못했고,

가족과 연인을 기다리는 이들은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굴렀다.

땡 ─────

거듭되던 종소리가 점점 강해진다.

그렇게,

길게 늘어진 환영 인파.

그 초입에서부터 우레와 같은 것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머리를 맞댄 성냥 위로 스친 마찰제와 같은 것이어서.

이내 모두에게 번졌다.

급한 마음에 아이들은 바가지에 담긴 꽃을 마구마구 던져대며 파안대소한다.

별안간 늦가을, 리케니엔에서 봄비가 내렸다.

이제 저 멀리 베나즈의 깃발이 보인다.

참다못한 여인 몇몇이 달려 나와 행렬을 유지한 병사 몇몇을 붙잡고 끌어안는다.

살아 돌아온 자신의 연인에게,

그것보다 더 좋은 인사가 있을까.

행렬의 선두에 선 디안 베나즈는,

이젠 어떤 경이로운 것과 같은 존재가 되어서.

마주한 뭍 사람들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예를 갖췄다.

어느 부모가 건넨 인사에,

옆에 있던 꼬마 아이가 어수룩한 자세로 따라 해본다.

그런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디안의 머리 위로.

땡 ─────

다시 한번 유리의 윤택함 같은 것이 음율로 써져 퍼진다.

아,

방금 막 어느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있던 노인이 흥얼거리며 노래를 부른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디안이 알고 있는 노래기도 했다.

[종이 울리네.

종 아래 군중들도 따라 울리네.

돌아오리라 약속했고.

약속한 대로 돌아왔네.

만인이 올려보고,

하나가 내려다보네.

오래된 것 위로 내려앉은 새것을 보게.

사방의 새야 본 것을 지저귀며 날아가라.

오, 오, 오].

* * *

시끌벅적함을 등진 채,

저택 지하로 내려가.

우뚝 서 있는 석상 앞에 섰다.

“다녀왔습니다.”

메리안님.

차분히 인사를 건넨 뒤, 석상 손에 쥐어진 인장을 보며 제법 까불거려본다.

“다녀왔어요, 맥레인.”

짧게 인사를 마친 뒤,

정감 가득한 내음이 물씬 풍기는 시끌벅적함 속으로.

나는 다시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 * *

유독 오늘이 짧다.

승리라는 건 그런 것이었다.

만끽을 짧게 만드는 것.

반대로 패배는 통감의 처절함을 아주 길게 늘여놓겠지.

왁자지껄한 술자리, 난장판이 된 식탁.

그 주위로 기사들이 어깨동무하며 노래를 부른다.

투박하고 단단한 그들의 몸짓에 자리 곳곳은 덜컹거렸고,

무겁고 흔들거리는 그들의 건배는 술잔의 욕지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그게다,

부드럽고 여린 애환이라는 걸.

이젠 안다.

한참이 더 지나,

한바탕 병사들과 놀다가 들어온 베르융이 자연히 내 옆자리에 앉더니 비어있는 내 술잔을 발견했다.

그러더니 무서운 표정으로 식탁 위를 내치며 일어선다.

“기사들아! 어찌 영주님의 술잔이 비어있는가!”

그 말에 방금까지 유쾌함을 쏟고 있던 기사들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이에 나는 오히려 베르융에게 능청을 부르며 술잔을 들이밀었다.

“베르융 경의 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베르융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허겁지겁 내 잔에 술을 따른다.

지켜보고 있던 기사들은 그제야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베르융 경! 영주님을 기다리게 하시다니요!”

“이미 영주님께선 우리 모두의 술을 다 받으셨습니다!”

매사 진지한 분위기를 풍기던 베르융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기사들의 유쾌한 먹이가 되어주기로 작정한 듯,

제대로 굽히며 머쓱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것에 그의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와 재밌었다.

그렇게 베르융이 내 술잔을 채우기 무섭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득 찬 술잔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기사 모두가 또렷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같이 술잔을 내민다.

그사이에 오가는 것은 침묵뿐.

직후 그들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을 때.

나는 그들에게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우리의 승리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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