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59화 (259/365)

259화. 발단

“폴란님, 이렇게 직접 저를 찾아와 주시다니.”

벌떡 일어나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네는 다겐 모나켈.

그런 그의 인사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폴란이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청년에 불과한 다겐은 일말의 표정 변화 없이 유순한 얼굴을 유지한 채 따라 앉는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다겐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으면서도 옆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 턱짓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시종이 허겁지겁 밖으로 나가 미리 준비된 차를 내왔다.

폴란은,

조용히 다리를 꼰 채 대접받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다리를 꼬고 앉는 것은 기사의 땅 아이베리아에선 보기 힘든 행동이다.

그래, 이것은 바다 건너 기업과 조합들의 고향이라 불리는 매트로폴리아로부터 전파된 사업가들의 전형적인 행동거지.

그런 행동을 보란 듯이 다겐 앞에서 취한 폴란이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흘겼다.

“티히트라에서 벌이고 있는 당신의 사업 말입니다.”

그리곤 제법 위압감 넘치는 목소리로 운을 떼자,

그 천연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다겐의 얼굴이 움찔거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이에 벌어진 틈이 넓긴 하지만 아직 충분히 봉합할 수 있어요.”

폴란은 여유를 부리며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그 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직후 이어진 폴란의 단호함.

“채석장에서 벌어지는 일체 공정을 투명하게 공개하십시오.”

그 말에 다겐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즉답했다.

“폴란님, 저희는 베나즈 가문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 투신을 작정했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투명하게 공개해야지요.”

“폴란님, 저희 모나켈이 이곳에 들어선 직후 석재 생산량이 얼마나 증가하셨는지 아십니까? 무려 스무 배입니다. 그것이 베나즈 가문의 성벽이 되고 성체가 되어 쌓이고 있지요.”

다겐은 당당한 표정을 지으며 재차 폴란을 설득했다.

“티히트라의 영주이신 가본님께서 그리하라 하셨으니, 저희는 그분의 명을 따라 그러했을 뿐입니다.”

다겐의 말에 폴란은 눈썹을 찌푸렸다.

가본 내쉬라는 존재는 폴란에겐 치명적인 약점이었으니까.

다겐은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들먹이며 폴란을 압박했다.

“생산량을 비롯한 행정에 관한 것이라면 모두 폴란님의 소관이시니 저희가 성실히 보고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요.”

그러니까,

부여된 섭정일 외의 것에 눈길을 주지 말라 이 소리를 다겐은 둘러서 표현한 것이다.

그럼 이제 폴란은 다른 무기를 꺼내든다.

“채석장은 티히트라 전체의 재산이지요, 그리고 포괄적인 의미로 두었을 땐 베나즈 가문의 적법한 재산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에 처음으로 다겐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 귀사의 행태는 채석장을 독점 점유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섭정으로서 석재의 시세가 귀사의 입맛대로 조절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 값을 올린 석재를 다른 곳에 판매하는 것은 아닌지 명명백백히 조사할 의무가 있습니다.”

“폴란님.”

“내일 채석장을 시찰할 것이니 그렇게 아십시오.”

폴란은 단호히 단언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실 시세고 뭐고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단지 채석장 인근에 있을 티히트라의 주민들이 걱정되었을 뿐이지.

그리고 폴란이 짐작한 대로라면,

그들은 지옥과 같은 환경에서 착취되고 있을 것이리라.

그는 기사의 땅 출신은 아니었지만, 기사의 땅에 있는 티히트라를 위해 등용된 사람이다.

그러므로 티히트라를 위해서라면 배짱있게 목숨까지 내걸 자신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각오를 다겐에게 확실히 인식시키기 위해서일까.

폴란은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 전,

고개를 돌려 다겐을 쏘아붙였다.

“후회할 일은 애초에 저지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아이베리아는 당신 생각보다 훨씬 단호하고 무서운 곳이니까.”

쾅!

하는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을 닫고 나간 폴란을 뒤로.

다겐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다가 이마 위로 핏대를 세운 채 작게 웃었다.

* * *

티히트라의 영주,

가본 내쉬는 몽롱한 표정으로 여인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매력적인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젊은 여인의 품냄새는 가본에겐 쉽게 떨치기 힘든 것이었다.

그 여인의 정체는 다겐이 비싼 값에 공수해온 고급 창녀.

무려 두 개 바다 건너 ‘장미 별관’이란 곳에서 데려온 이다.

가본을 꾀어내기 위해 다겐이 직접 데려온 그녀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

이에 가본은 다겐의 기대 이상으로 그 여인에게 흠뻑 빠져있는 상태였다.

덕분에 다겐이 진행하는 사업엔 걸림돌이란 게 없었다.

가본의 결제가 필요할 때면 여인의 아양을 한 번만 바쳐도 됐으니까.

결정적으로 채석장 인근 토지를 거머쥔 채 그곳 주민들을 노동력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도,

여인을 곁에 두는 조건 하나만으로 얻어낸 결실이었다.

그래서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옆에서 설쳐대는 놈 때문에 골치가 아파.”

마차 안,

마주 앉은 시종에게 한껏 짜증을 드러낸 다겐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직접 마차 문을 박차고 나왔다.

이어 영주가 기거하고 있는 저택을 향해 나아간 그는,

별 거리낌 없이 그 문을 열고 성큼성큼 들어섰다.

그래도 이곳을 관장했던 영주의 저택이다.

일선에서 물러나 섭정을 두고 있다고 한들, 그 지위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음에도.

다겐은 일말의 예도 갖추지 않은 채 영주의 침실 방문을 발칵 열고 들어갔다.

그 안엔,

막 여인의 젖가슴을 주무르며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본이 있었다.

그는 들이닥친 다겐을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덕분에 안면에 빼곡히 박힌 주름은 더욱 깊어져 얼굴 전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처럼 보인다.

비록 지긋한 나이에 정신도 많이 쇠퇴했지만,

그럼에도 가본은 화들짝 놀란 반응을 보이며 안고 있던 여인을 놓아주었다.

“다겐 공.”

이불을 뒤집어쓴 채 막 찾아와 제멋대로 자리에 걸터앉은 다겐을 부르는 가본.

이에,

“아, 영주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다겐은 다리를 꼰 채 뻣뻣하게 굳은 목을 이리저리 비틀어 풀었다.

“다름이 아니라 진행하는 사업에 차질이 좀 생길 것 같아서요. 피차 우리 사이에서 흘러간 거래가 리케니엔의 재상에게 들어가면 피곤해지지 않겠습니까.”

리케니엔, 그리고 재상이란 단어에 혼탁한 빛이 감돌던 가본의 두 눈에 제법 맑은 이채가 서렸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두 단어는 모두 베나즈와 아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거든.

“무슨 일이라도 있소?”

“영주님께서 임명한 섭정 있잖습니까. 거, 외지 학교를 졸업하고 나온…,”

“폴란을 말하는 거요?”

“영주님, 결국 티히트라의 모든 결정권은 영주님이 쥐고 계시지 않습니까? 섭정이라고 한들 영주님이 가진 그 자리에 대한 선을 넘을 수는 없는 겁니다.”

가본은 푹 패인 볼을 긁적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대외적으론 섭정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있는 법이지…,”

다겐이 매서운 눈으로 가본을 노려보았다.

“그게 싫단 말입니다.”

그리곤 가차 없는 표정으로 턱짓을 이어간 다겐.

그의 그 행동에 맞춰 영주의 침실로 발칵 들이닥친 거대한 장정 하나.

그는 곧바로 가본 옆에 잠자코 앉아 있던 여인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꺄악!”

여인의 비명에 가본의 얼굴이 차갑게 질렸다.

“다겐 공, 잠깐!”

황급히 다겐에게 손을 뻗치느라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이 훌러덩 내려앉는다.

“영주님, 확실히 합시다. 저년은 단지 영주님과 함께하게 되었을 뿐 아직 정확히 제 소유입니다.”

다겐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급스러운 면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여인을 붙든 장정에게 재차 턱짓했다.

그러자 장정은 단검을 빼들어 여인의 붉은 머리카락 끝 한 줌을 잘라낸다.

“공! 멈추라니까!”

“내 물건을 내 마음대로 하는데 왜 멈춰야 합니까, 아!”

다겐은 가본에게 다가가,

드러난 그의 볼품없는 상체를 가려줄 겸 손수 이불을 뒤집어 씌워줬다.

“영주님께서 가진 그 권한으로 제게 공식적인 명령을 내려주신다면, 예. 저는 그에 따르겠습니다.”

그리고선 다겐이 무정한 얼굴로 벨트에 채워진 작은 머스캣을 뽑아 들어 여인의 이마를 조준했다.

“그렇지 않으신다면, 제가 가진 물건에 이상이 생긴 것이니 폐기를 해야겠습니다.”

가본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린다.

그러다가 알몸인 상태로 붙들려 있는 여인을 살피던 그가 마지못해 바짝 갈라진 입술을 움직인다.

“다겐 공, 멈추게. 티히트라의 영주로서 내리는 명령이야.”

그 말에 다겐은,

조용히 들고 있던 머스캣을 내렸다.

“예, 명 잘 받들겠습니다.”

말을 마친 다겐은 여인을 붙든 장정에게 다시 턱짓했다.

그럼 장정은 붙든 여인을 가본 옆에 내팽개친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영주님.”

이윽고 다겐은 장정과 함께 유유히 영주의 침실을 빠져나갔다.

* * *

“확실히 노친네가 여인에게 단단히 미치긴 미쳤나 보군.”

침실 밖을 나서기 무섭게 날카로운 비아냥을 내뱉는 다겐.

그런 다겐의 비아냥에 맞장구치듯.

“하, 세월이 제아무리 짓눌러도 그것만큼은 아직까지 빳빳한가 봅니다.”

비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다겐이 처음으로 활짝 웃으며 시종의 어깨를 두들긴다.

“하하하! 그거 듣기만 해도 고막에서 역겨움이 느껴지는군.”

그렇게 영주의 저택을 빠져나온 다겐은,

“자 그럼, ‘영주님의 명령’을 받았으니 그 명령대로 해야겠지.”

여인을 볼모로 잡아 얻은 명령을 구실삼아,

미리 생각해두었던 한 가지 계략을 떠올렸다.

이번 일 역시 아주 순탄하게 흘러갈 것이다.

마치 운명처럼,

시기적절하게 아모랑 가문의 몰룬마저 죽어버린 이 상황에서 기업 모나켈을 제지할 수단은 이제 이곳에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 * *

이른 새벽,

폴란은 시종들과 함께 시찰 준비를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채석장에서 벌어지는 실태를 낱낱이 파헤쳐,

그곳으로부터 티히트라를 지켜내기 위해서.

물론 모나켈에게 시간을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어제 미리 리케니엔의 재상께 서신까지 보내놓았다.

혹시 모를까.

새벽엔 전서구까지 몰래 보냈으니 분명,

연락이 닿을 것이다.

“자, 출발하자.”

폴란은 시종들을 대동한 채 거리로 나섰다.

티히트라의 시장은 이미 기업 모나켈이 반절 이상을 주도하고 있는 상황.

당장 눈앞에 보이는 매대 위 물건들도 전부 모나켈산이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잠식이 되었는가.

이런 수준에까지 이르러 기업 모나켈이 취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또 무엇인가.

이제 그것들이 속속 밝혀질 것이다.

광장을 거쳐 채석장으로 향하는 길목에 들어선 폴란은,

막 떠오르는 햇살 아래 유독 어두운 골목 앞에서 왜인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그래서 발걸음을 딱 멈췄는데,

그에 맞춰 골목의 어스름으로부터 열에 가까운 장정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잿빛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신상을 알아볼 순 없었지만,

굳이 알아볼 필요도 없지.

모나켈이 드디어 미쳤구나.

“옆길로 가자.”

폴란은 황급히 샛길을 통해 티히트라 동쪽 마구간을 향하고자 했다.

바로 말을 타고 리케니엔으로 가 재상을 만난다면,

이곳에 베나즈의 인장을 갖고 돌아올 수 있을 거다.

그렇게 되면 이 미쳐버린 모나켈의 뿌리는 발악조차 하지 못하고 뽑힐 터.

그래서 시종들과 함께 옆길로 향했지만.

폴란의 얼굴은 다시 한번 창백해졌다.

이미 그가 빠져나가려던 골목 역시 같은 복색을 갖춘 장정들에 의해 가로막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직후.

모든 일은,

참으로 무덤덤하고 순조롭게 이어졌다.

도끼와 단검, 각종 끌로 무장한 장정들은 물밀 듯이 들이닥쳐 폴란의 시종들을 도륙 내기 시작했다.

배를 가르고,

목을 찌르고,

도끼로 내치며,

쓰러져 죽어가는 이들을 재차 짓밟은 그들은 이제 폴란을 에워싸고 있다.

그 사이에서 폴란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다.

장정 하나가 폴란에게 들이닥쳤다.

짧은 단검이 건실한 계획을 담고 있던 가슴을 향해 여러 번 박혀 들었다.

푹,

푹,

푹,

그 사이 여러 방향에서 쇄도한 장정들이 든 무기를 가지고 폴란을 무너트렸다.

수십의 날이 몸을 가르는 와중에도 폴란은,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다 끝나고, 본인의 체온이 담긴 피 웅덩이 속에서.

“꺽… 꺽…,”

짧게 핏방울을 토해내며 천천히 죽어갔을 뿐.

* * *

화살 하나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끝내 하늘 위, 화살을 맞은 무언가가 힘없이 추락했다.

막 리케니엔 근처까지 도달했던 작은 새 한 마리.

그 발목에 둘둘 말린 두루마리엔,

폴란의 표식이 작게 새겨져 있었다.

모나켈의 용병은 새의 사체를 바닥에 던진 뒤, 발목에 둘둘 말린 서신을 태워버렸다.

그리곤 조용히 말머리를 돌려 티히트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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