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사고
눈 밑에 쌓인 밤이 몇 겹이던가.
하지만 상관없다.
이젠 한 겹씩 차근차근 벗겨내기만 하면 되니까.
막,
마지막 두루마리에 서명을 새긴 기지어가 홀가분한 표정을 지으며 등받이에 몸을 쏟았다.
가을 끝 무렵.
수확도 수월하게 끝이 났고 동시에 1차 원정 역시 큰 피해 없이 마무리되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베나즈 가문에 축적된 재산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지만,
아직까진 입점 된 기업과 조합이 가진 자본력과 비교하기엔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부분은 베나즈 가문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다짐으로서 견제하면 그만이다.
작금의 세율은 다른 깃발들과 비견될 정도로 낮을뿐더러,
경외의 대상이 여색이나 사치 따위를 즐기지도 않으니 자유민들에겐 말 그대로 이상적인 영주나 다름이 없거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건.
역시 0이라는 비대칭적인 힘의 존재가 가장 컸겠지만.
그 힘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 베나즈 가문의 꿈이라는 것도 간과해선 안 된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역시 불안감이겠지.
이렇게 구축한 것들이 언제든 무너질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니까.
역설적이게도 0을 이끄는 원동력인 베나즈 가문의 꿈은 아직 이 아이베리아에선 인정받지 못하는 불경한 종류에 끼어있잖아.
그래서,
디안 베나즈.
우리의 영주님이시여.
다음 착수는 언제, 그리고 어디에 이뤄지는 겁니까.
그렇게 나열된 착수 속에 거대한 집이 완성된다면, 그땐 내 기꺼이 당신을 주군의 자리에 앉히리라.
여러 생각에 허우적대던 기지어가 등받이를 빠져나와 한껏 기지개를 켰다.
몸은 확실히 피곤에 절여져 있었지만,
이상하게 잠은 오지 않는다.
차라리 이런 각성 상태에 놓였을 때 다른 일들까지 처리하면 좋겠다 싶어,
막 기지어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똑똑.
하고 누군가 문을 두들겨왔다.
그리고 기지어는 그 문을 두드리는 자가 누구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들어와, 조엘.”
조심스레 열린 문 너머로 초췌한 얼굴을 빼꼼 들이민 조엘은 그런 기지어의 말에 식은 웃음을 던진다.
“드디어 끝나신 겁니까?”
“그래, 막 끝낸 참이야. 자네는 어떤가?”
“이제 막 뱅그스의 지도를 작성 중이었습니다.”
“아직 멀었군.”
기지어의 단호한 말에 조엘이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날 찾아온 이유가 있을 거 아냐.”
“그냥 한 번 와 봤습니다. 왜, 같이 일하던 사람이 먼저 일을 끝냈을 때 느낄 수 있는 허탈감이 있잖습니까? 괜히 그것을 느낄까 걱정되어 괜히 염탐도 좀 해보고…,”
기지어와 마찬가지로 최근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일까,
조엘은 평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음흉함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그 음흉함은.
“하하하!”
기지어를 제대로 웃겼다.
“그래서, 막 허탈감을 느끼는 중이겠구만?”
“예, 아주 확실하게요.”
“하하하!”
한참 배꼽을 잡고 웃던 기지어는,
고작 그 짧은 시간 동안의 웃음 때문에 더욱 초췌해졌다.
행여나 각성 상태가 깨질까 봐.
기지어는 괴짜 같은 모습으로 웃음을 뚝 그친 뒤 맞은편 빈 의자를 가리키며 조엘을 바라보았다.
이에 조엘은 조용히 빈 의자에 앉아 동시에 내려앉으려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곧이어 기지어는 이번엔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조엘, 무슨 일이라도 있나?”
고작 그런 사소한 음흉을 위해 이곳을 방문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기지어는 진즉에 알고 있었으니까.
그 물음에 조엘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1차 원정에서 본군이 복귀하는 날, 폴란님이 이곳을 방문하셨었습니다.”
그러자 기지어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렇지, 폴란이 있었지. 직전까지 티히트라의 문건들을 확인했었는데…, 정작 그 문건들을 올린 폴란의 안부는 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어.”
메마른 눈동자 속에 제법 촉촉한 그리움을 드러낸 기지어가 이제 조엘에게 궁금증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행사엔 왜 참석하지 못했다던가? 그나저나, 그는 잘 지내나? 티히트라의 섭정으로 임관되었을 때 내 직접 가서 축하해주려 했는데…, 그때가 한창 공표식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릴 때였거든.”
그간 폴란을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한,
그런 인간적인 죄책감을 시인하듯 미안한 얼굴로 궁금증을 쏟는 기지어에게.
조엘은 좋은 사람 냄새를 맡은 듯 미약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여러 업무에 시달리고 계신 듯 보였습니다.”
그 말에 기지어는 그제야 편하게 웃었다.
“우리 같은 자들이 다 똑같지 뭐, 밤에 눈 뜨고 아침에 짧게 눈 감는…,”
“그런데…,”
이어지듯 나오는 조엘의 망설임에,
기지어의 눈썹이 슬쩍 들렸다.
“왜.”
“재상님께 드릴 말씀이 있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만나러 오지 않았다?
그 말은 곧 그럴 생각이었다가 직전에 바꿔 고칠 정도의 고민이었을 터.
그럼,
섭정의 일과 관련한 고민이었을 거다.
폴란의 성격을 생각했을 때, 먼저 그 위치에 서 있는 본인의 의지로 고민을 해결해보기로 작심한 걸 거야.
순식간에 판단을 내린 기지어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내 직접 만나러 가면 될 일이겠지.”
“지금 말입니까?”
“아니, 그가 올린 티히트라의 서류들을 다시 한번 검토해가야겠어. 그래야 그와 나눈 대화를 여러 번 곱씹어 해석할 필요가 없지 않겠나.”
몇 겹의 밤으로 누적된 피로를 비웃듯.
정력적인 눈빛을 내뿜으며 움직이는 기지어를 바라보며.
조엘은 묵묵히 일어나 그의 서류 정리를 도왔다.
* * *
이틀이 지났다.
모든 준비를 마친 기지어는 베나즈 저택의 접견실을 찾았다.
이미 집사부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받은 디안은 찾아온 기지어에게 별다른 절차를 들이밀지 않았다.
“다녀오십시오.”
그 며칠 새 못 봤다고.
디안 베나즈는 좀 더 빛나는 존재가 되어있었다.
수많은 기사와 엮이면서 자연스레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기품을 모두 빨아들인 듯 보여.
이러니,
베나즈 가문의 이름이 꽤 높은 깃발들 사이에 걸쳤을 때쯤이 기대될 수밖에 없다.
그때부터는 사교계가 곧 뒤 판의 정치장이 되거든.
저런 인물이 그런 사교계에 등장했을 때 미치는 파급력이 얼마나 클지,
그 상상만으로도 짜릿하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기지어는 예를 갖춰 디안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리곤 모두 마무리 지은 서류를 건넨 뒤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저택 밖을 나섰다.
그를 보조해 줄 수행원 따윈 없다.
애초에 모든 정보가 그의 머릿속에 다 담겨 있었기에 되려 수행원들의 존재 자체가 그에겐 방해였다.
불편한 한쪽 다리가 무색하게 말 위에 오른 기지어는 곧바로 박차를 가해 리케니엔을 빠져나갔다.
어제,
티히트라에서 온 문건들을 검토하면서 여러 문제를 꼬집을 수 있었다.
우선.
석재 대부분을 티히트라에 기대고 있다는 것.
베나즈의 영토 내 유통되는 석재 가운데 9할이 모두 티히트라 산 석재일 정도로 압도적인 점유율을 자랑한다.
비록 동쪽으로 변경을 확장했다고는 하나 석재는 발전이라는 단어 아래 필연적으로 깔려야 하는 소재이다.
섭정의 자리에 폴란이 있었기에,
어쩌면 그의 고민을 뒤로한 채 그만을 과신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어.
당연하게도 가본 내쉬를 대신해 석재 생산의 일체를 맡은 기업을 휘어잡을 줄 알았거든.
근데 행정에서 가장 위험한 게 바로 당연함이라는 걸.
내 폴란이라는 소중한 사람의 과신으로 뒤덮고 있었다는 거다.
이건 명백한 실수다.
틈을 내서라도 들여다봤어야 해.
폴란이 보고 있는 것을 나도 같이 봤어야 했어.
아무튼,
베나즈 가문 내 석재 유통망을 꽉 잡은 기업 모나켈을 좀 더 알아봐야 한다.
이 부분은 폴란을 통해 모두 다 해결할 수 있을 것이고…,
가장 큰 문제는.
으레 그렇듯 모나켈이 눈앞의 숫자에 매몰되었느냐 되어있지 않느냐겠지.
알고 있다.
기업은 필연적으로 숫자를 쫓아야만 한다는 걸.
하지만 숫자를 어디까지 쫓을 수 있는지, 그 길과 선을 제시해야 하는 것은 기지어와 같은 자들이 가진 필연이다.
둘의 상충이 이뤄져야 만이,
건실한 내용을 가진 숫자와 사업이 될 수 있다는 건 막 입교한 신입생들도 아는 사실이니까.
그런데 행정이 기업에게 그 길과 선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당연하게도 기업은 제멋대로 길과 선을 그려 나간다.
두 발 걷는 자가 공구가 되고,
생명 없는 것들이 생명 가진 이보다 더 값진 취급을 받는 비정상적인 역전이 그려진다.
모나켈이,
그런 역전을 그리진 않았을까.
괜히 걱정이 치솟은 기지어는 말의 고삐를 더욱 놀렸다.
* * *
“리케니엔의 재상이 이곳으로 온다고 했지.”
바쁜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지르는 남자,
다겐 모나켈.
그를 뒤따르는 간부들이 그 물음에 동시다발적으로 대답했다.
“정찰대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붉은 머리와 수염, 거기다 수행원 없이 혼자라고 합니다.”
그러자 다겐은 잠시 한쪽 눈썹을 치켜뜨다가.
“수행원이 없으면 그냥 시찰에 가까운 방문이겠네.”
가벼운 미소를 그렸다.
“놈의 처리는 어떻게 했지.”
이어지는 다겐의 물음에 간부들 가운데 가장 다부진 신체를 가진 용병이 조용히 대답했다.
“돼지 먹이로 줘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겁니다.”
“좋아. 무려 리케니엔의 재상이다. 그의 심기를 건드리면 우리뿐만 아니라 이 땅 전체가 크게 체할 수 있으니까 조심조심하자고.”
다겐은 뒤따르는 간부들에게 냉철함을 쏟았다.
그러는 가운데,
간부 하나가 앞으로 걸어 나와 다겐을 은근한 말투로 물렀다.
“참, 회장님.”
“왜.”
“그게, 오늘 새벽에 채석장으로 작업을 들어간 인원들이 있어서요.”
그 말에 다겐의 표정은 순간 일그러졌지만,
“작업 중단시켜, 안에 박아놓은 장비도 빼놓고. 채석장이 식으려면 몇 시간이 걸리지?”
다시 차분함을 발휘하며 간부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작게 대답을 이어갔다.
“바로 작업을 중단시키면 노동자 대부분이 할당량을 채우지 못할 겁니다. 그…, 아시잖습니까. 회장님께서 이곳에 와서 직접 설계하신 노동 강령…,”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벌목을 당한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규칙을 세운 당사자인 다겐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간부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예?”
“규칙이 그러면 그 규칙대로 하면 되잖아.”
“그게…, 아무리 그래도 작업을 강제로 중단시키고 그에 따라 처분을 하시면…,”
“지금은 재상이 더 문제야, 알아? 분명 채석장을 둘러보려 할 텐데 광산 전체가 용암지대처럼 눅진해져 있으면 무슨 생각이 들 것 같아? 아 난쟁이의 기계가 아니라 두 발 걷는 자들을 갈아 넣어 석재를 캐고 있었구나 하겠지?”
“그… 예.”
“사업이라는 게 말이야, 강단이란 게 있어야 해. 재상의 시찰을 넘기면 우린 최소 년 단위로 안정적인 사업을 굴릴 수 있어.”
다겐은 냉소하기 짝이 없지만, 그만큼 이지적인 눈빛을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년 단위의 사업 지속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자본이 얼마일 것 같아? 또,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그들의 불투명함 속에 이 투명한 사업이 언제쯤 사장될까? 촉박해, 시간이 촉박하다고 이 사람아. 우린 그사이에 극한의 결실을 얻어내야 해.”
“그 말씀은…,”
다겐의 눈이 일순간 번뜩인다.
“년 단위 안정적인 사업을 하고 나면 자연스럽고 안정적인 사업 철수 길이 열린다 그 말이야.”
“베나즈 가문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는 말씀입니까?”
“아이베리아의 대부분이 적인 상황이야, 그 상황에서 저들이 끝까지 남을 수 있을 것 같아?”
말을 마친 다겐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곳곳에 찔러넣듯 턱짓하며 시종에게 각종 화려한 물건들의 배치를 지시했다.
* * *
티히트라의 서쪽,
작은 관문을 통해 들어선 기지어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에서 내렸다.
그런 그의 앞엔.
가슴팍에 기업 모나켈의 인장을 단 장정 수십이 서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살피던 기지어는 대놓고 혀를 찼다.
“쯧.”
섭정이고 자시고,
애초에 이곳의 영주 가본 내쉬가 모나켈에게 티히트라를 손수 떠먹여 준 것인가.
“불편을 느끼셨다면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재상님께서 이리 귀한 발걸음을 옮겨주신 터라 저희로선 이리 호들갑을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거 고맙군.”
무장한 용병 놈의 혀 놀림에,
벌써 똥구멍이 간질거리는 게 꽤 기분이 나쁘다.
“그럼, 모시겠습니다.”
“자네들의 수행은 필요 없어.”
“하지만…,”
“어, 불편하네?”
“예…?”
당황한 장정들에게,
기지어는 괴팍한 표정을 지으며 몰아쳤다.
“불편하다고, 다 비켜. 가본을 만나러 갈 거니까.”
자신의 위치에서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위압감을 내뿜으며 걸음을 옮기는 기지어에게.
용병들은 그저 얼음처럼 굳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티히트라의 영주, 그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먹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일개 기업의 용병이 제지를 가할 수 있었을까.
건드는 순간,
기업 자체의 존망에까지 이를 수 있다.
그 어떤 무지한 자라도 느낄 수 있는 위기감에, 용병들은 기지어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길을 터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