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사고 (2)
“안녕하십니까, 기업 모나켈 내 인사를 책임지고 있는 찰스 벌룬이라고 합니다.”
무릎에 이마가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리는 남자.
그런 그의 인사를 심드렁한 표정으로 받고 있던 기지어는 고개를 돌려 너머로 보이는 복도 쪽을 바라보았다.
“영주의 저택에 상주하는 건가?”
곧바로 티히트라의 영주를 만나러 온 기지어였지만 저택에 들어서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모나켈 쪽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본인을 찰스라 소개한 남자는 온화한 표정을 유지한 채 태연히 인사를 이어갔다.
“이렇게 재상님께서 티히트라로 직접 발걸음 해주셔서…,”
“야.”
아니, 찰스의 표정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입 닥치라는 듯 일갈하는 기지어의 말에 찰스는 고개를 든 채 쭈뼛거려야 했다.
“묻잖아, 영주의 저택에 상주하는 거냐고.”
“아, 아닙니다.”
“재상의 맞이를 일개 기업 나부랭에게 맡긴 건 누구 생각이지? 가본이 직접 지시를 내린 건가?”
“그…,”
“섭정은 어딜 갔는데? 넌 뭔데 날 맞이하는 거냐고.”
“섭정이신 폴란님은 업무로 인해 부재중이시고 영주님께선 개인적으로 급한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좀 더 시간이 필요하신 상태입니다.”
찰스의 말에 기지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인 수긍에 찰스는 그제야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아니,
안도를 내뱉기 무섭게 찰스는 다시 긴장감 가득한 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재상의 방문보다 급한 업무 때문에 섭정이 부재중일 정도면 티히트라 내 행정 대부분은 섭정에게 기대고 있다는 소리인데, 그 와중에 가본은 개인적인 업무 처리 때문에 당장 날 만날 수 없다고?”
“다시 한번 제가 영주님께 언질을 넣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최대한 침착함을 부린 찰스가 허겁지겁 복도 끝에 있는 영주 방으로 걸어가려던 찰나,
벌떡 일어난 기지어가 그런 찰스를 지나쳐 복도로 거침없이 걸어 들어갔다.
“재… 재상님!”
순간 당황한 찰스는 급기야 기지어의 어깨를 붙잡았다.
마치 불에 달군 쇠에 손을 얹은 듯, 찰스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어깨를 붙잡은 손을 얼른 떼었지만.
이미 늦었다.
기지어는 냉소적인 얼굴로 찰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겐 모나켈 데려와, 그리고 너는 이 이후 내 눈에 띄면 죽는다. 다겐이 10분 내로 이곳에 도착하지 못하면 기업 모나켈이 죽는다. 아이베리아의 베나즈는 적으로 인식된 것들을 절대로 살려두지 않아, 너도 펠테아의 기업가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겠지?”
찰스는,
파르르 떨리는 아랫입술을 간신히 깨문 채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곤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뭔 말이라도 내뱉었다간 그대로 명이 달아날 것만 같아서, 그래서 겨우 찍소리도 내지 못한 상태로 말이다.
* * *
기업 모나켈이 알 리가 없다.
그러니까 재상과 폴란 사이에 쌓여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야.
만약 그 둘 사이에 쌓인 게 유대감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면, 그들은 손해고 뭐고 지금 시점에서 바로 도망칠 궁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알 리가 없다.
베나즈의 공표를 통해 접근한 기업이,
그 안에 있는 인과관계를 모두 알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막 도망치듯 나온 찰스는 와중에도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보통 성격의 시찰이 아니다.
물론 기지어라는 인물이 굉장한 괴짜라고 듣긴 들었기에, 그에 걸맞은 성정을 부린 건 아닐까도 생각이 들어.
그렇다고 모나켈에 이렇게나 적대감을 드러내다니.
혹,
어디서부터 이미 단단히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야,
단지 자신의 행동 때문에 그런 괴팍함을 부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이후 모나켈에 생기는 모든 일은 전적인 찰스의 책임이 된다.
그 사실을 인지하기 무섭게 그의 얼굴에 한겨울이 내려앉았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느낀 찰스는 이제 급히 뛰기 시작했다.
* * *
시종 몇몇이 기지어의 뒤를 바삐 따른다.
그런 그들을 무시한 채 기지어는 절뚝거리면서도 남들보다 훨씬 빠른 걸음을 자랑하며 나아갔다.
그렇게 영주 가본의 방을 박차고 들어서자.
그 안에선 화들짝 놀란 여인의 비명과,
얼룩진 침대 안에서 허우적거리며 일어선 가본의 모습이 펼쳐졌다.
이러한 광경에 기지어는,
조금은 맥이 풀렸는지 빳빳했던 목이 힘없이 내려앉았다.
“재상, 여긴 어인 일로…?”
언질조차 받지 못한 것인가.
한 깃발의 주인이라는 자가.
섭정인 폴란이 알려주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그 섭정 노릇을 흉내 내고 있던 모나켈이라도 대신했어야지.
권리는 누리고 싶으나 그 권리가 행사해야 하는 일은 하기 싫으니 그저 침해하기만 했단 방증이리라.
“가본, 참 정정하시오.”
기지어는 작게 비아냥거린 뒤 의자 하나를 끌고 와 가본의 침대 머리맡에 두고 앉았다.
그 광경에 얇은 이불을 뒤집어쓴 여인이 눈치를 보자,
다시 심기가 불편해진 기지어는 그녀를 쏘아붙였다.
“나가.”
헐레벌떡.
이불을 질질 끌고 방 밖으로 나간 여인.
그런 여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려오는 가본.
“내가 온 것도 몰랐나 보군.”
“공식적으로 보고받은 일정이 아니라…,”
“그건 그렇지, 내 무례를 용서하게.”
기지어가 자조적인 목소리로 대답하자 가본의 주름진 얼굴이 활짝 펴졌다.
“아… 아니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제 잘못입니다.”
“섭정은 무슨 업무를 보고 있기에 그대로부터 재상의 방문을 누락시킨 건가?”
“업무…, 말입니까?”
기지어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섭정은 자네 면피용으로 만들어진 직책이 아니야, 권리의 부담을 나눠 받는 직책이지. 고로 섭정의 일은 마땅히 자네의 일이기도 해. 그런데 그 업무를 몰라?”
한 치의 흔들림도,
한 치의 더듬음도 없이 속사처럼 쏟아져 내린 기지어의 말에 가본은 입술만을 쭈뼛거릴 뿐이다.
이에 기지어는,
글쎄.
앞뒤를 재는 짓 따윈 하지 않았다.
바로 한쪽 손을 번쩍 들어 올려,
짝!
가본의 뺨을 그대로 후려갈겼다.
“억!”
노인의 상체가 크게 꺾인다.
“일을 이따위로 하나?”
“재상…, 이는 도가 지나친 무례…,”
짝!
가본의 항변을 가볍게 후려친 기지어는 냉정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권리의 부담을 나눴으니 이제 안심하고 계집질이나 해도 된다 생각한 건 아닐 테지. 응당 사람 새끼라면 그런 짐승 같은 생각은 안 할 거야.”
기지어의 날 선 행동에 가본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길 수밖에 없었다.
이어질 질문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폐부를 진창 찔러넣는 비수일 게 뻔했거든.
“섭정은 어디 있지, 무슨 업무를 보고 있나? 대답해 봐.”
가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면 기지어는 당연하다는 듯 다시 손을 올려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짝!
“어흑…!”
가본은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침대 위에 이마를 쏟았다.
“모나켈의 하루 석재 생산량은 어느 정도 되지? 그 석재의 가장 큰 유통망들은 몇 개고, 승인되지 않은 반출 건수는 총 몇 건인가?”
이 역시,
가본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대답 대신 튀어나온 건 역시나 변명이었다.
“그건 모두 섭정이 헤아려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기지어에게 그런 변명이 통할 리가.
“그리고 그 섭정을 헤아려야 하는 게 네 일이야.”
퍽!
기지어는 이번엔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내리쳤다.
“오늘 자네의 공식적인 일정은 뭐지? 오입질?”
당연히 대답이 들려올 리가 없었기에 기지어는 더욱 맥빠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면피를 마련하기 위해 섭정을 둔 게 확실해지는 순간이군, 그렇지?”
얼굴을 감싸 쥔 채 신음하던 가본은 온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기지어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주먹질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으니까.
“모나켈에게 뭘 받았어.”
저 남자는 어디까지 꿰뚫어 본 것일까.
영주와 섭정 사이에 벌어진 부재만으로 모나켈과의 유착까지 도달한 기지어의 통찰은.
하늘과 땅을 가로지른 번개만큼이나 빠르고 강렬한 것이었다.
“제발 거창한 걸 받았다고 대답해줬으면 좋겠군.”
아니, 이미 뭘 받은 것까지도 간파한 듯 보인다.
“계집 하나에 몇 마디의 말을 판 건가. 자네 말 한마디가 초에 녹여 찍은 인장과 진배없다는 것조차 몰랐나? 이럴 거면 섭정에게 전권을 줬어야지.”
기지어의 핀잔에 가본은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을 내뱉듯 길게 항변했다.
“티히트라엔 이제 인챈트를 가진 기사가 없소, 이 깃발 아래 섭정 자리에 앉힐만한 핏줄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이 말이오. 그리하여 외부에 차출된 인물인 폴란을 앉힐 수밖에 없었지.”
“그렇게 특별한 상황이었음에도 너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던 거야.”
“이런 특별한 상황이 마련된 기저엔 베나즈의 원정이 있었소!”
“그럼 처음 베나즈와의 전투 때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어야지. 네 결정으로 티히트라의 존속이 이뤄졌어. 이건 기사의 땅 아이베리아에서 이뤄진 협의야. 너는 깃발의 주인이다. 존속하기로 협의했다면 필시 깃발 아래 이뤄진 상실을 메꾸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그런 깃발의 주인.”
압도적인 논파.
가본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무궁무진한 채석장을 쥐었음에도, 딛고 설 거대한 발판을 품었음에도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인챈트를 가진 기사가 없었다고? 그럼 너는 대체 뭔데? 바꿔 말하면 애초에 그런 기사들 없인 자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란 거야?”
맹수의 으르렁거림과 같이, 말로써 가본을 흠씬 씹어버린 기지어는 지친 얼굴로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러는 와중에,
똑똑.
하고 들려오는 공손한 두들김.
기지어는 쓰레기 보듯 가본을 깔보며 작게 대답했다.
“들어와.”
쪼르르.
문이 열리기 무섭게 들어오는 젊은 남자와 기업의 인장을 단 수십의 간부들.
그들이 하나같이 기지어 앞에서 허리를 숙인다.
“재상님, 부름을 받고 급히 달려왔습니다.”
앳된 청년으로 보이나 쭉 째진 눈매를 보아하니 사업 머리가 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그가 제법 미워할 수 없는 미소로 기지어에게 재차 인사를 올렸다.
“다겐 모나켈이라고 합니다, 언제나 동분서주하는 처지에 놓이다 보니 생각이 짧아졌나 봅니다. 재상님의 환영에 대리인을 시키다니,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각설하고, 그쪽은 아나? 섭정이 어디에 있는지.”
기지어의 물음에 다겐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폴란님은 채석장의 유통로를 검토하기 위해 새벽 일찍 떠나셨습니다.”
“얼마나 신용을 주지 않았으면 자네들이 해야 할 일을 섭정이 하러 간 건가.”
“면목이 없습니다.”
“잘 아네, 그럼 추후 대가를 치르면 되겠지.”
단호하게 말을 마친 기지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채석장으로 가보자고.”
그의 말에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다겐과는 다르게, 뒤에 있던 간부들의 얼굴은 면면이 다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그 모든 상황을 담은 기지어의 눈이 가늘게 떠지자,
마찬가지로 가늘어진 기지어의 눈을 본 다겐이 슬쩍 뒤돌아 간부들에게 살기 어린 표정을 짓는다.
“재상님, 모쪼록 저희가 모시도록 해주십시오. 채석장까지 가는 길이 멀고 험합니다.”
다겐은 입맛을 다시며 슬쩍 기지어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불편하신…,”
“필요 없다, 티히트라의 민생도 살필 겸 걸어가지.”
휙,
모나켈의 간부들 사이를 가로질러 밖으로 나간 기지어.
그런 그를 따라 부랴부랴 나서는 장정들.
그 사이에서,
다겐은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그에게,
막 저택의 비밀 문을 통해 나타난 용병 하나가 달라붙었다.
그럼 기다렸다는 듯 다겐은 그 용병의 귓가에 대고 억척스럽게 속삭인다.
“어떻게 됐어.”
“그게…, 놈들이 눈치를 채고 채석장 안으로 들어가 농성을 하는 바람에…,”
“이… 씨발….”
다겐은 용병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럼 인챈트의 시동을 끄면 되잖아!”
“그게…, 무슨 영문인지 외부 장치로는 듣질 않아서….”
“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들의 실랑이가 이어지는 와중에.
사건은.
벌어졌다.
확!
하고 갑자기 불어닥친 엄청난 풍압에 저택 전체가 크게 흔들린 것이다.
유리와 집기들이 깨지고 쏟아져 한바탕 난리가 난 와중에, 기지어를 포함한 저택 내부에 있던 전원의 얼굴이 휘둥그레졌다.
한바탕 풍압이 휩쓸고 지나간 직후 내려앉은 침묵.
그리고 그 침묵은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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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비명과도 같은.
극렬한 폭발음에 의해 깨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