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비산한 것들
기지어는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하고 침착한 모습으로 말했다.
“저 폭음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 차후에 제대로 설명해야 할 것이오.”
직전의 폭음과 이어지는 기지어의 일갈에 채 정신을 추스르지 못한 다겐은,
그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러면서 다겐은 오히려 안심했다.
괴짜라 불리던 재상도 아까의 폭음에 정신이 나갔는지 먼저 한발 물러서는 모양새를 취했잖나.
그래서 그 안도감에 취한 다겐은 얼른,
“아무래도 사고가 일어난 것 같습니다, 제 선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수습하겠습니다.”
기지어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그런 그의 인사에,
기지어는 그저 묵묵히 저택 밖을 빠져나와 특유의 여유로운 모습을 끝까지 유지한 채 말을 타고 사라졌다.
그의 행동에 대한 다겐의 감상은,
“쯧…, 여유 부리긴.”
지금까지 억눌렸던 감정을, 그래도 대놓고 드러내긴 뭣했는지 작게 터트렸다.
“마차 준비시켜, 바로 출발한다.”
다시,
직면한 상황에 집중한 다겐은 창백한 얼굴로 시종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대관절,
티히트라 전체를 울리게 만든 저 폭발은 무엇인지 도통 알 길이 없었으니까.
그나마 유추해 볼 수 있는 부분이라곤,
“빌어 처먹을 용병 새끼들…,”
현장 정리를 시킨 용병들이 사고를 쳤다는 건데.
그렇다고 그들이 친 사고라기엔…,
“규모가 너무 크다.”
다겐은 간부가 막 가져온 고급진 외투를 대충 걸친 뒤 저택 밖을 빠져나왔다.
직후 자신의 걸음걸이에 맞춰 열린 마차 문을 향해 달려 들어가자 뒤늦게 타지 못한 간부들이 부랴부랴 따라온다.
물론 다겐은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출발해.”
다겐을 태운 마차는 곧바로 이동을 시작했다.
직전까지 따라가던 간부들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몇몇은 채석장까지 달려가거나 또 누군가는 시종을 시켜 마차를 끌고 오라 큰소리를 쳐댔다.
덜컹.
막 직면한 상황에 어리둥절한 티히트라를 대변하듯, 거친 길 위로 통통 구르는 마차 안에서 다겐은 조심스레 창밖을 살폈다.
폭음에 놀란 자유민들이 거리에 나와 있다.
그런 그들의 시선은 한 곳에 매몰되어 있었는데, 다겐이 그 시선을 따라 전방을 살펴보자.
“허…, 지랄…,”
드러난 거리 너머 채석장 쪽,
그 부근에서 세계수 정도 되는 규모의 버섯이 피어있다.
문제는,
그 버섯이 검은 연기로 이루어졌다는 거지.
지금도 이죽거리듯 꿈틀거리며 솟구치고 있는 그것은 순식간에 티히트라 상공을 잿빛으로 만들었다.
그럼 또 유추해 볼 수 있다.
기업 모나켈의 핵심 채석 장비.
그것이 저 무지막지한 폭발의 원인일 가능성이 크다는 걸.
문제는 채굴에 쓰이는 그 장비가 한낱 일반 장비 따위가 아니라는 거다.
어린 상속자이기 전에 다겐은 모나켈 가문의 장남이다.
그 모나켈 가문의 장남이,
가문의 ‘가보’를 모를 리가 없잖나.
그래,
19년, 칼라스피로
그것은 기업 모나켈 가문의 가보이자 그 존재 자체가 사업의 정체성이기도 한 힘이다.
아이베리아의 기사들은 자신이 곧 그 재해가 되기 위해 해당 인챈트를 이해하려 애쓰지만,
기업가들은 좀 다르다.
해당 인챈트에 깃든 재해를 이해하긴 하되,
그 이해가 사업적인 것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산 멜리칸이 폭발했을 때,
그 열기는 특이하게도 석질을 무르게 만들었었다고 한다.
이렇게 특수한 형질의 열기를 발산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화산 멜리칸 자체가 어느 용의 양막이었기 때문이었지.
다겐은 어렸을 적 읽었던,
가문의 값비싼 책 내용을 떠올렸다.
용의 시대를 주름잡던 기업들은,
용의 시대 쇠퇴와 함께 대부분이 몰락했지만.
몇몇은 용의 시대 이후에 발현된 인챈트로 다시 일어섰다.
그중 하나가 바로 모나켈.
그런 모나켈의 또 다른 이름이라 불려도 손색없는 칼라스피로가…,
손상되기라도 한 것인가.
“달려, 더 빨리 달리란 말이야!”
조바심이 난 다겐은 기수를 더욱 닥달했다.
이에 기수는 부랴부랴 말들을 재촉했고, 그 재촉에 마차 바퀴는 티히트라를 좀 더 힘껏 할퀴었다.
* * *
티히트라와 리케니엔 사이에 길게 늘어진 울창한 숲길을 달리길 한참.
잠시 말의 숨을 돌릴 겸 속도를 줄인 기지어는 안장 위에서 이를 악문 채 분을 삭였다.
직후 남은 것은 분에 의해 재가 되어버린 감정 대신,
차가운 고드름 같은 냉철이었다.
티히트라에서 일어난 의문의 폭발.
그 사고가 벌어진 직후 기지어는 도망치듯 티히트라를 빠져나와야 했다.
그런 규모의 폭발은,
딱 봐도 기업 모나켈 전체를 두루 타격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으니까.
해서 사고의 규모를 파악하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다겐 모나켈은 사고의 진상을 파헤치려는, 그리고 능히 파헤쳐 책임을 물을 재상의 존재를 부정하려고 들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수틀린 다겐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이 말이다.
하필이면 재상은 혼자 티히트라를 찾아왔고, 그런 재상이 실태를 파악하고 리케니엔으로 돌아가면.
모나켈의 붕괴는 기정사실이 되잖아.
그렇담 차라리 재상을 한바탕 쑤시고 몰래 도망칠 궁리를 하는 게 그들의 생존에 더 도움이 되는 상황이다.
이런 결론에 도달한 기지어는,
그래서 급히 말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리고 그렇기에,
기지어는.
“…, 폴란…,”
냉철 속에 감춰두었던 뜨거움을 울컥하며 쏟아내었다.
지금까지 치달은 상황을 봤을 때.
티히트라의 섭정은 일찍이 모나켈에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 꿈많은, 자신을 열성적으로 따르며 감화되었던 젊은이는…,
너무나 허무하게 스러져버린 거야.
아!
“미안해, 미안하다.”
기지어는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지르며 숲에 대고 소리쳤다.
끅끅거리며, 콧물을 집어삼킨 그는 고개를 떨군 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어깨를 들썩였다.
내가 너를 적극적으로 비호 해줄걸.
내 너의 시선을 좀 더 열심히 쫓을걸.
왜 나를 안 찾아왔나.
아니 나는 왜 너를 찾지 않았나.
야속하다.
내가 야속하고, 널 보낸 내가 또 야속하다.
이내 기지어는 들썩거리던 어깨를 멈추었다.
눈물은 금세 말랐고, 뜨겁게 달아올랐던 목덜미도 제 색을 되찾았다.
다만 그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이글거리고 있었다.
“철저히.”
그 이글거림으로 기지어는 맹세했다.
“너의 분쇄되었을 넋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철저히.”
그것은 토르킨 선생의 가르침으로 완성된.
한 지식인의 처절한 선언이기도 했다.
“그들을 분쇄하리라.”
* * *
물러진 석재를 장작 삼아 지끈거리며 춤을 추는 불꽃들.
그 위로 길게 늘어진 채 아른거리는 검은 연기.
이러한 가운데.
곤히 잠이 든 듯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소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이상하다.
전신은 이질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는 느낌인데.
그래서인지 온몸에 힘이 넘친다.
상체를 일으켜 앉은 소년은 뭔지 모를 감각에 멍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몸을 살폈다.
없다.
직전까지 붕괴하고 있던 육신의 흔적이.
있다.
붕괴하여 쏟아졌었던 한쪽 머리 위 머리카락들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소년은 이번엔 눈앞에 반쯤 부서져 내린 검은 기둥을 눈에 담았다.
부서진 기둥 속엔 수많은 송곳에 꿰인 채 처절한 상태로 죽어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제야,
소년은 직전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두 팔을 부서트려가며 얻어낸 어느 뼈 파편으로 저 남자의 심장을 찔렀었지.
자신을 죽여달라는,
그 담담한 요청에 소년은 응했었어.
그리고 곧바로 섬광이 터져 나왔고, 직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그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소년은 이리도 윤택해졌는가.
게다가 왜 주위에 만연한 열기에 이리도 멀쩡한 것인가.
되물어봐도 대답해주는 이 없어서.
그래서 소년은 그냥 정처 없이 걸었다.
그래도 소년이라고 울상을 지으면서 말이다.
채석장 뒤쪽,
평탄화가 되어버린 산지 너머로 걸음을 옮기던 소년은 이내,
눈물을 휘날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가 살았던 지옥 일부가 보인다.
두 눈에 맺힌 것은 분명 절망과 두려움이었지만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일까.
일말의 반짝거림 속엔 왜인지 모를 그리움과 사무침이 깃들어 있다.
소년은 이제 고개를 돌려 너머로 걸었다.
이 지옥을 빠져나갔다.
* * *
이러다 얼굴 가죽이 흘러내리는 것은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입을 쩍 벌린 다겐은 메마른 신음을 내뱉어야만 했다.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
무저갱 속엔 켜켜이 고인 어둠이라도 있지, 저 아래 채석장엔 그마저도 없어 보인다.
“아아!!!”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쏟아내던 다겐은 눈길을 돌려 용병들이 주둔했었던 채석장 인근을 살폈다.
“도대체!!”
그러면서 뭔갈 쏟아냈지만,
그걸 받아낼 당사자가 보여야 말이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데!!”
그래서 다겐은 허공에 대고 아무 의미도 없는 신경질을 쏟아야 했다.
그런 그의 뒤로,
막 속속들이 도착한 간부들이 뒤뚱뒤뚱 올라오고 있다.
“회장님!”
“이게 무슨…!”
다겐의 안위를 걱정하던 간부들이 끝내 엎어져 있는 그를 발견했지만,
이후 누구도 다겐의 안위를 걱정하는 이는 없었다.
너머로 펼쳐져 있는 채석장의 모습을 봤으니까.
간부들이 모두 온 걸 확인한 다겐은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보란 듯이 고급스러운 외투를 벗어 던졌다.
그럼 다겐이 그토록 기다려왔던 말들이 뒤에서 들려온다.
“회장님!”
“뭐 하시는 겁니까?!”
이러한 반응에 다겐은 처절한 목소리로 즉답했다.
물론 그 목소리에 깃든 다급함은 진심이었다.
“들어가야지! 모나켈의 전신이 저기에 있어! 내 직접 가서 살펴야 해!”
아,
이 얼마나 숭고한가.
기업 모나켈의 젊은 수장,
다겐이 가문의 문제에 진심을 발휘하는 이 순간을 간부들이 본다면.
능히 그들이 대신 발 벗고 나서리라.
다겐의 그 기대는.
불과 몇 초 만에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그 누구도,
일언반구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 모인 자들은 그 누구보다 다겐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이다.
모나켈의 전신이라고 떠들어댔지만,
그가 기업의 인챈트를 언제 한 번 거들떠보기라도 했었나?
그저 공업용 장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취급을 하며 그걸로 인해 쌓아온 기업의 재력을 과시하기 바빴지 않나?
채석장의 모든 문제를 외주로 맡겼으면서,
이제야 와서?
간부들의 눈엔 다겐이 뻔뻔해 보일 뿐이다.
반대로,
다겐 역시 허탈한지 코웃음을 치며 경멸 담은 시선으로 간부들을 훑었다.
악취가 난다고 채석장 근처에도 안 가던 새끼들.
사업을 물려받기 무섭게 어떻게든 날 올려치기 위해 혀 운동을 하던 작자들.
모나켈의 후광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던 그들이,
정작 그 후광에 그림자가 지니 시치미를 떼잖나?
그 모습이 역겹다.
“뭐 하는 거야? 니들은 모나켈의 따까리가 아닌가?”
다겐이 다그치듯 외치자,
“모나켈 가문의 가보이니 마땅히 그 가문의 일원인 당신이 처리해야지.”
“난 임원이 아니야, 당신네 채권을 많이 가지고 있는 주주일 뿐이지.”
기다렸다는 듯 간부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어 몰아치기 시작한다.
결국,
폭발한 다겐은 자리에서 일어나 간부들 사이를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그리곤 저 멀리 얕게 고여있는 수액을 퍼 담아 자신의 몸에 끼얹었다.
이야,
참으로 역겨운 거였구나, 이거.
작금의 분노마저 식을 정도로, 그 역함에 몸 둘 바를 모르던 다겐은 금세 토악질을 해댔다.
처음 채석장으로 내몰렸던 노동자들의 모습을,
지금 그가 제대로 흉내 낸 것이다.
다겐은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큰 바가지를 들어 토악질이 섞인 수액을 한가득 푼 그는 그대로 간부들에게 달려들어,
“으악!”
“이런 씨…!”
한바탕 끼얹어버렸다.
“전부 다 채석장으로 간다 이 새끼들아! 그래도 내가 선장이야. 결국엔 노를 젓는 건 니들이라고.”
* * *
기지어는 시간 낭비 따윈 하지 않으려는 듯,
복귀하기 무섭게 베나즈의 저택에 들이닥치듯 찾아왔다.
시종장 바돈은 그런 기지어의 모습을 보곤,
열 마디 말 대신 한 번의 끄덕임을 보이곤 곧바로 영주님이 있을 접견실로 달려 올라갔다.
이내,
“재상, 영주님께서 들라 하시네.”
얌전히 내려와 말을 전해주는 바돈에게, 기지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쿵쿵.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불규칙적으로 계단을 밟고 올라간 기지어는 이제 바랬다.
나의 이상이여.
그대는 나의 이상이니.
마땅히 이상임을 증명해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렇게 비장한 표정으로 들어선 기지어는, 눈앞에 좀 더 고귀한 모습으로 변한 것 같은 남자 앞에 섰다.
긴말은 하지 않았다.
“영주님, 폴란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티히트라와 그와 손을 잡은 기업 모나켈이 그 범인입니다.”
기지어의 짧은 보고에,
깃펜을 휘날리며 무언가를 적고 있던…,
디안 베나즈.
그가 조용히 입을 연다.
“조이 경과 테티르 경을 위시한 오백의 군사를 지원해줄 테니 재상이 그들을 직접 이끌어 진상을 명백히 밝히십시오.”
기지어의 이상 역시,
그리 긴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기지어가 그토록 염원하던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