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비산한 것들 (2)
거대한 폭발 사고가 일어난 다음 날, 이른 새벽.
기업 모나켈의 대응팀이 파견되었다.
여기저기서 공수해 온 날씨 파편으로 채석장 일대에 거나한 소나기를 들이붓길 장장 반나절.
드디어 그 기세 좋던 열기가 팍 죽어버렸다.
그 소식을 들은 다겐과 간부들은 즉시 현장으로 출동했다.
기어이 오물까지 뒤집어썼음에도 결국 다겐은 채석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끼얹음을 당한 간부들도 마찬가지.
그들이 만든 밑바닥에서 굴렀던 노동자들의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 누구보다 저들이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끝내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막대한 손해를 입어가며 겨우 채석장의 열기를 진압한 대응팀 사이로,
다겐과 간부들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 들어갔다.
진흙이었던 모습 그대로 굳어버린 석재는 마치 깡깡 언 호수처럼 평평했고,
그 평평함 곳곳엔 누군지 모를 시체가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물론 다겐과 간부들은 그런 것 따위에 신경을 쏟지 않았다.
이내 채석장 중심부에 도달하기 무섭게,
다겐은 두 다리의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아야만 했다.
절반 이상이 부서져 내린 검은 기둥.
그 깨짐 사이에서 쏟아져 내린 상체 하나.
살가죽 위로 모든 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처참한 몰골을 한 시체는 이와는 달리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다.
삶에서 겪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 임종이었다는 듯이 말이야.
그래도 다겐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본질은 결국 인챈트다.
그것은 사용자가 죽어도 변치 않는 진리이기에, 천천히 기둥으로 다가간 다겐은 기업 모나켈의 가보인 인챈트를 찾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늘어진 시체의 살가죽을 뒤져가며 펜던트로 만들어진 인챈트를 찾으려 애써봤지만,
없다.
좀 더 뒤져보려고 애쓰던 다겐은 울컥했는지 분노를 쏟아내며 뒤에서 구경만 하던 자들을 쏘아붙였다.
“뭐해? 찾아! 찾으란 말이야!”
그제야 간부들은 부랴부랴 움직여 기둥 주위를 비롯해 샅샅이 수색을 벌이기 시작했다.
“회장님, 설령 찾는다고 해도 시전자가 죽어버린 마당에…,”
단순히 생각하면 인챈트는 현자가 기억이라는 매개로 새겨 넣은 글귀.
이러한 글귀에 서명이라는 확신을 넣을 수 있는 수단은 오직 피밖에 없다.
피는 두 발 걷는 자들이 할 수 있는 증명 가운데 확실하고도 고유한 것이었으니까.
해서 다른 누군가가 인챈트를 손에 넣었다고 하여도 그 인챈트에 이미 다른 서명이 새겨져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도 가질 수 없다.
서명의 원주인, 그 의지가 없는 이상은 말이다.
그렇기에 인챈트는 핏줄, 유대 따위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아이베리아에서의 이야기.
하지만 위에서 해당하지 않는 방법으로 내려오는 인챈트들이 훨씬 많은 게 현실이다.
당장 다겐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인챈트를 계승하지 못하게 된 이상…,”
어느 간부가 읊조리는 씁쓸함에 다겐은 눈을 부라리며 대꾸했다.
“왜 계승을 못 해? 이 새끼는 내 허락 없인 못 죽는다고, 알아? 탑에 의뢰를 넣을 거야. 이놈의 사념을 불러 제 입으로 계승을 부르짖게 만들 거란 말이다!”
“회장님…, 사념을 건드린 기업가 중에 무사한 이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사념을 불러내는 것만으로도 일대에 괴물의 창궐을 일으키기 때문에…,”
“닥쳐!”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일갈한 다겐은 서둘러 축 늘어진 시체를 뒤적이다가,
아차 싶은지 부랴부랴 부서진 기둥 밖으로 나와 깨진 파편 하나를 집어 들었다.
“담을 거 가져와, 담을 거!”
그의 말에 간부 하나가 허리춤에 달고 다니던 작은 술병을 내놓자,
다겐은 곧바로 시체의 손목을 깊게 벤 뒤 쏟아지는 핏물을 술병에 담았다.
그래도 그 와중에 서명에 가장 중요한 잉크를 떠올린 거다.
다만 그런 그의 모습이 아귀와 같이 추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작은 술병에 한가득 피를 담은 다겐은 다시 부서진 기둥 틈으로 들어가 시체를 뒤적거렸다.
그럼에도 나오지 않는 인챈트를 두고,
“아아아!!!!”
오랜 시간 동안 괴성을 지르면서.
* * *
종일 배 위에 있었더니 온몸의 근육이 뭉친 것처럼 무겁다.
그래서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휴게 부표’에 멈출 때마다 간간이 내려 몸을 풀어야 했다.
물론 휴게 부표에서 파는 음식을 먹는 게 주목적이었지만.
특이하게도 휴게 부표는 저마다 파는 음식이 각각 다르다.
찌든 술 냄새가 나는 육지의 교역로와는 달리, 이곳은 바닷길 위는 먹는 것부터 심지어 그곳에서만 파는 특색 있는 옷들까지 다양하다.
매일매일,
가르드 대륙의 일들을 해결해왔던 터라 더 그런가.
생소한 바닷길 위의 마주치는 모든 것들이 선녀처럼 보여.
여름, 장마를 대비해 몸집을 불린 구름처럼.
토실토실한 게의 집게 살을 집어 든 나는 다른 빈손으로 가죽 가방 안에 접어놓은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곤,
왁.
하고 크게 입을 벌려 한 움큼 베어먹은 집게를 내려놓으며 꺼낸 종이에 집중했다.
[레프리길 – 파견 요청서]
가르드 대륙 토박이에 가까운 내게,
본사에서 굵직한 지침을 내려왔다.
이 때문에 나는 지금 바닷길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이국으로 향하는 묘한 긴장감과 더불어, 내게 파견을 요청했을 그 발단은 무엇인지에 대한 호승심이 들끓는다.
레프리길은 법제 기업이다.
해당 지역의 유서 깊은 법을 중심으로 그곳에서 벌어지는 위법과 합법을 판가름 내주는 곳이지.
누가 보면 가장 손쉽게 타락할 것만 같은 기업처럼 보이겠지만,
글쎄.
레프리길의 주축이라 불리는 판사들 모두가 고블린인 터라 그런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는다.
그 거의라는 것도 레프리길이 제시한 판결에 불복한 쪽에서 난동을 부려 재판 자체가 불가능해진 사례들뿐이야.
이렇게 생각하면 좀 웃기긴 해.
두 발 걷는 자들의 법을 가장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게 같은 두 발 걷는 자들이 아닌 숲속의 어느 종족이라니.
하긴, 그도 그럴 수밖에 없겠다 싶어.
두 발 걷는 자들의 사회에서 법이란 건 잡고 휘두를 수 있는 손잡이가 달리기 마련이거든.
나도 많이 봐 왔어.
같은 재질, 같은 무게의 위법임에도 천칭 위에 다른 무게추가 얹어지는 사례들을.
그런데 레프리길은 고지식할 정도로 그런 게 없어.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고블린들이니까.
그들은 마치 은행원처럼, 땅이 제시하고 있는 법에 입각해 죄라는 무게추를 정확히 입력할 뿐이야.
그래서 더없이 단호한 터라 레프리길 자체적으로 변호단을 꾸려 운용하는 실정이지.
아무튼..,
슬쩍 덜 베어 먹은 집게를 들어 다시 크게 한 입 베어 문 뒤 종이에 적힌 내용을 차례로 내려다본다.
[파견지 – 아이베리아의 리케니엔]
다시 읽어봐도 놀랍네.
세상에 파견지가 무려 아이베리아다.
깃발이라 불리는 자들의 군림이 이뤄지는 세상 말이야.
기사의 땅이라고도 불린다지?
가르드 대륙에 유통되는 동화 가운데 5할 이상이 아이베리아에 관한 내용일 정도로.
다른 땅과는 이질적인 곳.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좀 신기해.
아이베리아는 법 위에 깃발이 군림하고 있는 세상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
알 게 뭐야.
레프리길도 따지고 보면 기업인데.
그래도 앞으로 레프리길이 발휘할 파급이 절대로 작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이번 파견은 절대로 심심치 않겠어.
“형씨, 곧 배 출발할 것 같은데.”
다시 종이를 고이 접어 넣으려는 데, 상점 주인이 내게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어온다.
그 말에 집게 속에 숨어있던 살들을 쏙 빨아먹은 나는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다.
“다음에 구름이 가장 높게 떠오르는 10월쯤 방문하라고! 그때쯤이면 빙 캐러반이 우리 쪽 상공을 경유 하니까!”
이어지는 상점 주인의 말에 또 혹해 가슴이 두근거린다.
언제 한 번,
“기억했다가 꼭 들르지요!”
가르드 대륙의 은화 한 개를 식탁 위에 얹어놓고, 막 묵직한 고동을 내뱉는 배를 향해 달려갔다.
바람 기름을 제대로 두른 돛이 다시 한번 펴진다.
이윽고 치달아 나아갈 때를 대비해,
나는 얼른 차창 자리에 뛰어들어 앉아야 했다.
부우 ─
이내 힘 빠지는 소리와 함께 뚝 그친 뱃고동.
동시에 발바닥 밑에서부터 느껴지는 미약한 진동.
아,
이제 차창 너머 모든 풍경이 손으로 쓸어내린 듯 뭉개졌다.
* * *
폭발 사고가 일어난 지 나흘이 지난 시점.
바다 건너 모나켈 본사에서 파견 나온 직원들이 저택 복도를 활보하고 있다.
그 가운데엔 다겐이 있었다.
이미 그들 사이에서 모든 협의가 끝난 듯.
대부분이 안도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이 머리를 맞대고 내놓은 결론은,
제법 긍정적이었다.
일단,
증거가 없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채석장과 그 주위에 즐비했던 증거들이 모조리 증발해버렸기 때문이다.
시체는 모나켈의 대응반이 모두 치웠고, 생존한 용병들은 이미 포섭이 된 지 오래.
설령 있다고 해도 증거 채증을 위해선 값비싼 기구를 동원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 일은 티히트라 내에서 일어난 일.
이미 영주 가본에 의해 이 사건은 산업 사고로 규정지어졌다.
이것을 리케니엔 측에서 개입해 바꾸려 한다면, 티히트라 내에 반감이 조성될 것이다.
지금의 가본이라고 해도,
그를 끝까지 믿고 지지해주는 자유민들이 있는 이상 가본이 가진 영주의 위상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역으로 재상의 월권을 빌미로 배상금을 얻어낼 구실까지 있다.
또,
이 사고로 인해 석재 생산에 차질이 생겼으니 석재의 시세가 오르는 건 뻔한 사실.
운용비가 부담스러웠던 난쟁이들의 기계를 써먹어도 될 만큼 이익을 거둘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인챈트는 실종된 상태지만,
그 상황에서 모나켈은 반등의 기회를 어떻게든 찾아내었다.
이제 가장 불안한 것은,
이 땅이 기사의 땅 아이베리아인 것이고.
그 아이베리아의 중원에서 가장 큰 화제이기도 한 베나즈 가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관건이다.
“참, 회장님. 티히트라의 섭정 폴란은 정확히 어떻게 된 겁니까?”
안경을 쓴 본사 직원의 물음에,
팔짱을 낀 채 의자에 상체를 묻고 있던 다겐이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모르지, 그자도 영 탐탁지 않은 인사였던 건 틀림 없어. 예상하건대 영주님이 따로 우리 측 용병들을 시켜 섭정을 묻은 것 같아.”
지어낸 말이지만 상관없지.
가본이 명령 ‘그 자체’를 내린 건 명백한 사실이니까.
다만, 그 명령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느냐가 문제일 뿐.
“어찌 되었건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티히트라의 채석장을 무조건 끌어안고 가야 해. 그러니까 니들이 열심히 굴려댄 머리대로 움직이란 말이야.”
이어지는 다겐의 말에 둘러앉아 있던 본사 직원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리케니엔.
그 초입에 집결한 두 기사.
조이 크레비디와 테티르 론바즈.
그들이 갑옷을 차려입은 모습으로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그러나 그들 위용 못지않게,
대단한 위엄을 두른 자가 말을 타고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나타났다.
그럼 조이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다.
“오셨소, 재상.”
“조이 경, 테티르 경. 저와 함께 해주셔서 영광입니다.”
테티르는 껄껄 웃으며 기지어에게 화답했다.
“베나즈 가문의 뜻이니 마땅히 따라야지! 그곳이 지옥이라 할지라도!”
그 화답에,
기지어는 그저 말없이 웃는다.
“참.”
조이는 옆구리에 낀 투구를 고쳐잡으며 물었다.
“뒤쪽에 레프리길 사람들이 붙었는데, 사전에 협의된 내용입니까?”
그럼 기지어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테티르는 이번에도 쾌활한 목소리로 말을 늘어놓았다.
“말 들어보니까, 먼 곳에서 탐정까지 데려온 것 같던데. 말로만 듣던 탐정을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어. 내 어린 딸아이가 읽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 탐정들이 나오거든?”
이에 조이는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테티르의 옆구리를 찔렀다.
“테티르 경, 그만하고 출발이나 하지.”
조이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테티르는 허허실실 웃으며 따라 외친다.
“허허! 그래 출발이나 하지!”
이제,
디안의 명령에 의거.
기지어를 필두로 두 기사와 수백의 병사가 티히트라로 출발했다.
테티르가 말했지,
지옥이라 할지라도 간다고 말이야.
그 말에 기지어가 그저 말없이 웃었던 건.
지옥으로 가는 게 아니라 지옥을 만들러 가는 길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