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65화 (265/365)

265화. 비산한 것들 (3)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바돈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동시에 그의 손에 들린 커피의 그윽한 향이 내 코를 간질였다.

“거의 다 끝났습니다.”

제법 바라왔던 향기였기에, 절로 누그러진 표정을 지으며 화답하자 바돈이 조심스레 내 앞에 잔을 내려놓는다.

직후 마지막 종이, 그 마지막 문단에 마침표를 찍어 넣은 나는,

그걸 고이 접길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이어서 접은 종이 위에 붉은 밀랍을 한 스푼 부은 뒤,

손가락에서 빼놓은 인장을 들어 꾹 찍어 눌렀다.

그렇게 완성된 편지를 집어,

그것과 똑같은 수백의 편지 위에 고이 올려놓는다.

이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바돈은 조심스레 내 맞은편에 앉았다.

“이 같은 일을 원정 때마다 매번 반복하실 생각입니까.”

“지금보다 변경이 몇 배는 더 커지면, 그리고 재상이 관리하는 목록이 심장의 혈관만큼 많아진다면. 충분히 그들 명의로도 같은 위로의 크기를 전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 대답을 들은 바돈은 픽 웃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패배가 없는 원정이 거듭된다면,

나와 함께하는 이들의 위상도 함께 올라갈 터.

그럼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이 그만큼 많아지겠지.

나뿐만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위로로도 부족함이 없어지겠지.

조용히 고개를 돌려 산더미처럼 쌓인 편지를 내려다보다가, 맨 위에 올라온 편지 세 개를 집어 펼쳐 보았다.

[슬로운 가문에게]

[존트 가문에게]

[타샤 가문에게]

애석하게도 난 그들이 누군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알았고, 그런 나를 위해 기꺼이 함께 싸우기로 했다.

그리고 그들이 맞이했을 숭고한 최후에,

적어도 답장 하나 정도는 해야 하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가 아닌가.

그래서 했다.

1차 원정을 마치고 같이 두 발로 걸으며 돌아오지 못한 자들에게.

리케니엔의 베나즈는 드리운 오명을 씻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연속해나가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이러한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건,

오롯이 같이 싸우기로 한 전사들의 맹세뿐.

그러니 전사들에 대한 마땅한 대우를 해줘야지.

“맥레인님께서 가르쳐 주신 겁니까? 아니면 마이스터 선생께 받은 가르침입니까?”

바돈의 물음에 나는 어렵지 않게 즉답했다.

“두 분의 가르침을 통해 얻은 내 결론입니다.”

결은 다를지 몰라도.

이 리케니엔은, 나아가 넓게 본다면 그 뱅그스마저도 베나즈라는 울타리 안에 있다.

울타리 안에 있다는 건 곧 가족이라는 뜻이다.

물론 시몬 바스티유라는 울타리 안에 재키라는 가족이 있었듯이, 베나즈라는 이 넓은 울타리 안에도 상충과 그에 비견되는 피비린내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 안에서,

시몬 바스티유 안에 있던 맥레인처럼,

맥레인이고 싶다.

존재만으로도 해결이라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이다.

동시에,

토르킨 선생께서 주신 가르침 또한 잊어선 안 된다.

이곳은 중립지역이 아니다.

기사의 땅 아이베리아.

그 위에 건설된 베나즈라는 울타리는 역설적이게도 중립지역의 울타리보다 더욱 위태로운 것이다.

그렇기에 수없이 둘러봐야 하고 수없이 보수해야 하며 수없이 넓혀가야만 울타리는 안정이란 걸 찾는다.

그런 울타리의 주인이라면.

주인이라고 불리는 자라면.

능히 맥레인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지.

“영주님?”

바돈의 물음에 퍼뜩 생각 밖으로 빠져나온 나는 멋쩍은 입술 모양을 그리며 조금 식은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집사부들을 시켜 하나하나 정성껏 편지를 발송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시종장.”

“혹여나 편지 전달 과정에 때아닌 불편한 밝음이 없도록, 뜨겁게 달군 달빛으로 검은 옷을 다려 입고 가야겠군요.”

편지 더미를 찬찬히 살피던 바돈은 슬쩍 감정이 울컥했는지 목구멍 너머로 굵직한 것을 쓰게 삼켰다.

“그나저나…, 재상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폴란이 사망했다는…,”

“티히트라 내부서 어떤 일이 벌어진 듯합니다.”

짧고 굵게,

쓴 커피를 한 모금 넘긴 나는 조용히 잔을 내려놓았다.

“일이 벌어졌음에도 봉합은커녕 벌려져 방치되어있는 것을 재상이 발견했다면, 그 말인즉 티히트라 자체적으로 일을 해결할 의지가 없다는 소리겠지요.”

이어지는 내 말에 바돈은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넋 놓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내뱉는 그의 감탄에,

“살면서 궁정 생활이란 걸 해보진 않았지만, 지금 공께서 하시는 말씀이나 거기서 느껴지는 기품을 보면 흡사 궁정 안에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나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 보니 이후 티히트라의 처분과 관련해 공께서 얼마나 냉혹한 처분을 내리실지…, 조금은 알 것 같아 벌써 두려워지는군요.”

조금은 착잡해진 바돈의 말을 들어보니 그 궁정과 관련된 말이 결코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 * *

저 멀리,

베나즈의 깃발이 목격됨과 동시에 티히트라의 거대한 방책이 개방되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방책을 개방하는 자들은 티히트라의 얼마 되지 않는 경비병들.

서투른 관리 탓에 곳곳이 헤진 가죽 갑옷,

검집에서 오랫동안 뽑히지 않았는지 자루 위 가드에서부터 느껴지는 퀴퀴함.

기사 몰룬의 전사로 그 휘하 병사들이 베르융의 산하로 편제된 바람에,

작금의 티히트라엔 이런 오합지졸들밖에 남지 않은 형국이었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티히트라는 치안을 위한 경비대 외엔 병력의 배치가 필요 없는 곳이다.

기업들이 입점 되면서 티히트라의 역할은 리케니엔을 뒤에서 밀어주는 상업지구로 변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중심에 서서 휘어잡아야 할 영주의 소양은 오래전부터 배제된 상태였다.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한 열정적인 젊은이가 섭정을 자처해 동분서주했지만.

이미 아가리를 벌린 짐승에게 머리를 내민 상태였던 티히트라는,

당연한 순리대로 잡아먹혀 버렸다.

그러니,

이제 티히트라를 삼킨 그 짐승에게도 순리란 게 무엇인지 가르쳐줄 때다.

그보다 더한 괴물이 막 아가리를 벌려 그 속에 짐승을 집어넣으려 하고 있었으니까.

리케니엔에서 출발한 근 오백에 달하는 병력.

그 행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용만으로도 티히트라의 경비대들은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걸 체감해야 했다.

체급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수준의 차이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곧이어 행렬 선두,

재상이 좌우의 두 기사와 함께 티히트라의 정문을 지나쳤다.

경비병 하나가 얼른 다가와 그 앞에 넙죽 엎드렸다.

그럼 재상은 그를 깔보며 말했다.

“경비대를 모두 철수시켜라, 베나즈 가문의 명이다.”

그 말을 들은 경비병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주위 동료들과 시선을 나눈 채 일말의 고민 없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어서 계속되는 행렬.

재상과 두 기사가 지나가기 무섭게 뒤따르던 베나즈의 병력이 티히트라의 방책을 아예 뒤집어 까버렸다.

“재상, 어떻게 하면 되오? 그냥 다 뒤집어엎어?”

“테티르, 힘 좀 빼지 그래.”

흥분한 테티르와 핀잔을 던지는 조이, 그 사이에서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던 기지어는 이내 둘에게 작게 말했다.

“군을 세 갈래로 나눠야겠습니다, 하나는 자유민의 통제를 다른 하나는 모나켈을, 마지막은 영주 가본 내쉬의 저택을 각각 포위해야 합니다.”

기지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테티르는 건틀릿 낀 손을 맞부딪히며 외쳤다.

“모나켈의 포위는 내가 한다!”

이에 조이는 눈살을 찌푸리다가도 기지어에게 예를 보이며 대답했다.

“자유민의 통제와 영주는 제게 맡기십시오.”

* * *

티히트라 서쪽에 마련된 기업 모나켈의 저택.

그곳은 본사에서 파견된 용병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곳이 티히트라의 성관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앞서 방책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과는 그 무장의 질이 천지 차이였다.

그런 그들을 지휘하는 자는,

모나켈의 간부 카이슨.

테 얇은 단안경에 코끝이 뾰족한 구두.

그 위로 펼쳐진 한 치의 구김 없는 양복.

날카로운 눈매에 걸맞게 냉정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그는, 막 군사를 이끌고 찾아온 자들을 보며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나 얼른 표정을 고친 그는 검지로 단안경을 고쳐 쓰고는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인사를 이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외부과의 카이슨이라고 합니다.”

그 모습에,

중무장한 기사 하나가 놀란 듯한 표정을 짓는다.

황소같이 생긴 것이, 기사의 땅이라 불리는 아이베리아가 어떤 곳인지 알 것도 같다는 듯.

카이슨은 좀 더 목을 꼿꼿이 세운 채 말을 이었다.

“최근 기업에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자체적으로 조사 중에 여념이 없는 상황입니다. 모쪼록 기다림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황소 같은 기사는 또다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로 옆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가,

되려 기사는 측은한 눈빛으로 묻는다.

“이 땅을 처음 밟는 건가? 그렇다고 해도 윗머리가 일러주지도 않던가?”

그게 뭔 말이야?

하는 표정으로 카이슨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깔보듯 내려다보고 있던 기사 옆의 남자가 느긋한 말투로 말한다.

“꺼져.”

이에 카이슨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뭐라고 했나?”

결국,

참다못한 테티르가 이마에 핏대를 세운 채 일갈한다.

“미친놈아, 재상이시다.”

그 말에 살짝 놀란 듯 뒷걸음질 치던 카이슨이었지만,

회장의 전신인 본사가 개입한 이상 물러설 이유도 없다.

일단 표면상으론 기업 내에서 일어난 사고니까.

적어도 본인이 있었던 땅 위에선 그 개입 지점을 정하는 건 오롯이 당사의 권한이었기에,

그래서.

“그렇다고 해도 예외는 없습니다.”

단호하게 말했지만.

그는 몰라도 너무 몰랐다.

아이베리아가 어떤 곳인지를.

불편한 다리를 끌어안은 채 말에서 겨우 내린 재상은 마찬가지로 말에서 내린 기사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럼 황소 같은 기사는 성큼성큼 다가와 카이슨의 어깨에 손을 얹어 밀어낸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모나켈의 용병들이 살기를 드러내며 품에 있던 자루 위에 손을 얹기 시작했다.

창날은 정확히 기사에게 향해 있었으며,

어깨가 밀쳐진 카이슨 역시 품에 있는 단검 자루에 손을 얹은 채 기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일련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기사는, 최후까지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테티르 론바즈는.

끝내 참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 씨벌새끼들이.”

그야말로 무자비한 살기.

동시에,

“아아악!”

자리에서 주저앉아 비명을 내지르는 카이슨.

그의 한쪽 어깨는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었다.

동시에 후방에 있던 베나즈 군이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제아무리 기업의 외부를 담당하는, 그래서 실력 있는 용병들이 고용되었다고 한들.

한 깃발 아래의 정규군을 당해낼 수는 없다.

그것도 아이베리아의 기사를 위시한 군대를 말이다.

테티르는 불같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카이슨을 불태워버리려는 듯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아이베리아에 왔으면, 마땅히 너에게 어울리는 처신을 해라. 알겠냐?”

그의 물음에 한창 눈물을 찔끔거리며 울먹거리던 카이슨은 덜덜 떨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테티르는 건틀릿을 낀 손 그대로 내질러 카이슨의 턱주가리를 날려버렸다.

빡!

하는 돌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뒤로 까무러친 카이슨,

그 너머로 성큼성큼 나아가 문을 박차고 연 테티르는,

아직도 자루에 손을 얹고 있는 주위 용병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손 내려라, 그러다 니들 용병단 족보 끊긴다.”

그건 경고가 아닌 하나의 가정을 알려주는 예고였다.

직후 테티르는 고개를 숙여 막 박차진 문 너머로 걸어 들어가는 재상에게 고개 숙였다.

이런 장면에 위압 당하기라도 했을까.

몇몇 용병들도 덩달아 지나가는 재상에게 고개를 픽 숙였다.

저택에선 내쉬 가문의 시종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그런 시종들을 모나켈의 간부들이 당연하다는 듯 부리고 있었는데,

그 사이를 재상이 거침없이 지나가자 그들은 괴물을 본 듯 당황해하면서도 얼른 그 뒤를 바짝 따르기 바빴다.

이윽고,

다겐 모나켈이 있는 거대한 방에 도달한 재상은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성큼성큼 나아가.

방 안에 마련된 상석 옆에 서서,

그곳에 앉아있는 다겐을 내려다보았다.

“비켜.”

이어지는 재상의 말에 다겐은 튕겨 나가듯 자리에서 얼른 비켜야 했다.

자연스레 상석에 앉은 재상은 이제 완벽히 깔린 판 위에 제대로 된 지옥을 마련하기 위한 수를 펼쳤다.

“지금부터 베나즈 가문이 이 사고를 규명할 것이다. 이에 반하는 자, 사멸을 면치 못할 것이니 명심하라.”

재상의 그 한마디에 다겐은,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멍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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