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66화 (266/365)

266화. 응보

말끔한 정복,

반짝이는 구두,

반질거리는 실크 모자.

칼같이 다려진 복장을 한 사내가 마차에서 막 내렸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블레이저 아래 노출된 금빛 시곗줄이 출렁였다.

그렇게 정숙함 속 일말의 화려함을 쏟으며 발걸음을 재촉한 사내는 이내 거대한 성관 안으로 발을 들였다.

성관 곳곳엔 베나즈의 깃발이 걸려 있다.

그런 깃발 아래엔 오르테 가문의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성은 성주를 닮아간다더니, 그 화려하던 발리르도 많이 투박해졌군.”

주위를 둘러보던 사내는 심심한 소감을 혼잣말로 늘어놓으며 서둘러 접견실로 향했다.

사전에 약속이 된 듯,

시종들은 다가오는 사내의 발걸음에 맞춰 미리 문을 열어놓기 시작했다.

이윽고 접견실 안으로 들어선 사내는 얼른 모자를 벗어,

복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사의 예를 보였다.

“베르융 경.”

그러자 맞은편 책상에서 막 빠져나온 베르융이 손을 내밀며 화답했다.

“엘르길 경.”

이에 엘르길은 피식 웃으며 베르융이 내민 손을 얼른 맞잡았다.

“어째 인사 방식이 서로 뒤바뀐 것 같군요.”

이어지는 엘르길의 물음에 이번엔 베르융이 웃음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경의 복장을 보면 기사로서 온 건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것참 예리하시군요.”

짧게 주고받은 인사를 뒤로,

두 남자는 맞잡은 손을 한참이나 흔들었다.

이윽고 베르융의 손짓에 따라 엘르길이 자리에 앉는다.

곧이어 그 맞은편 자리에 베르융이 앉으려는 찰나, 엘르길은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본론을 꺼냈다.

“들었습니다, 리케니엔의 재상께서 테티르 경과 그 휘하 병력을 대동해 티히트라로 출발했다고요.”

막 자리에 앉은 베르융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티히트라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더군요.”

“그 부분에 대해선 테티르 경이 복귀한 뒤 이야기를 들으면 되겠지요.”

엘르길은 한 번 숨을 크게 고르며 옷매무새를 만지작거렸다.

직후의 이어질 이야기들은 그리 가벼운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리려는 듯이 말이다.

“베르융 경,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엇을?”

“여지는 티히트라가 내줬지만, 재상은 그 여지를 통해 다른 반등의 효과를 노릴 겁니다.”

엘르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흔히 재상이라는 이름을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그런 권력을, 지금의 재상께서 다수에게 상기시키려는 모양입니다.”

반대로 베르융은 가늘어진 눈매로 엘르길에게 재차 질문했다.

“그것이 문제가 됩니까?”

그럼 엘르길은,

오히려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문제 될 것이야 없지요.”

물론 그 웃음의 끝엔 송곳 같은 것이 있었지만.

“티히트라의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엘르길 경, 하고자 하는 말의 본질이 뭡니까?”

“우리는 기사입니다, 디안 공의 휘하에서 깃발 휘날리기로 작정한.”

엘르길은 허리를 꼿꼿이 편 모습으로 당당히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전에 나 엘르길 마스는 켄타나 자유민들의 대변자이자 그들의 말을 대신해 설파하는 발언가입니다.”

그래서 갑옷이 아닌 정복을 입었구나.

베르융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번 일은 분명 티히트라 측에서 여지를 준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다만 그 일로 인해 재상의 권력이 상기됨으로써 켄타나에도 그 영향이 미치게 되진 않을지 우려됩니다.”

“엘르길 경, 디안 공의 휘하에서 깃발 휘날리기로 작정했다면서 그 말은…,”

“맞습니다, 확실히 말씀드렸습니다.”

엘르길의 즉답에 베르융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다물어야 했다.

“켄타나는 디안 공의 휘하에서 깃발 휘날리기로 작정했습니다. 오롯이 디안 공의 휘하에서 말입니다.”

“그 재상은 베나즈 내부의 중추와 같은 자입니다.”

“그러나 재상이 곧 디안 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기사는 기사로서 독립된 안전한 울타리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제 엘르길은 자리에서 일어나 베르융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지금은 비록 발언가의 모습으로 경 앞에 섰지만, 이는 그만큼 경께 호도하고 싶은 간절함이 크다는 방증입니다. 경의 위치가 곧 기사들의 울타리이니, 부디 우리들의 존재를 계속해 상기해 주십시오.”

“상충을 원하는 겁니까?”

“화합을 원하는 겁니다.”

“상호 간의 견제를 통해서?”

“그 견제로 얻어낸 존중을 통해서.”

이어지는 침묵.

베르융은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콧잔등을 어루만졌다.

이해된다.

엘르길 마스의 우려가.

재상의 권력으로 몇 기사들이 행정 처분의 도구로서 쓰임을 받기 시작하면,

그것은 곧 같은 기사들 사이의 균열로도 이어질 수 있다.

재상에게 쓰임을 받음과 동시에 신임을 얻은 기사들이 득세하여 급기야 재상파라는 권력층이 나타났다는 말은,

이 아이베리아의 역사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내용이니까.

하지만 반대로 기사라는 억제력을 쓰지 못해 처리해야 할 행정을 해결하지 못한 재상과 덩달아 무너져내린 깃발들 역시,

아이베리아의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다.

위대한 기사왕조차도 위와 비슷한 몇 줄을 역사에 새기며 무너져 내렸으니까.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베르융은 조용히 일어나 무릎 꿇은 엘르길을 손수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작심한 듯 그는 엘르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 * *

“사고의 규모가 매우 크고, 이로 인해 겪게 될 석재 공급에 대한 차질 역시 심히 우려되기에 베나즈 가문이 직접 개입을 결정했다.”

듣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사멸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으름장 뒤에 펼쳐진 건.

“또 인명 피해가 명백해 보이는 이상, 그에 대한 책임과 배상을 객관적이고 철저히 매기기 위해서라도 베나즈 가문의 개입은 반드시 필요하다.”

기계와 같이 차분한 설명.

그 상반된 모습에 오히려 다겐을 포함한 모나켈의 직원들은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여기서 어떤 반론을 꺼내는 순간, 분명 무슨 사달이 날 것만 같은 분위기였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그대로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니,

모나켈의 간부가 조용히 운을 떼었다.

“그렇다면 마땅히 티히트라의 영주인 가본 내쉬의 입회하에…,”

그런 간부의 의견에 기지어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가본 내쉬는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태다. 또 이 시간 이후로 내쉬 가문은 티히트라의 영주 자리에서 박탈되었음을 선언하는 바이다.”

무슨 벼락이라도 얻어맞은 듯.

기지어의 마지막 말에 다겐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벙벙한 표정을 그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후에 떨어져 내린 것은,

“위 결정으로 인해 공석이 되어버린 티히트라의 영주 자리는 이치에 따라 섭정인 폴란이 맡게 될 것이다.”

운석과 같은 것이었으니까.

졸지에 영주 시해범이 되어버린 다겐 입장에선 똥줄이 탈수밖에 없었다.

단숨에 모든 퇴로를 차단하고 자신의 본진에 둥지를 튼 기지어에게,

도저히 틈이란 게 없잖아.

그렇다면 빠르게 시선을 돌려.

틈이 나올 법한 부분을 공략하는 게 좋겠지.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던 다겐은 조용히 기지어에게 고개를 숙였다.

“모두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런 다겐을,

기지어는 그저 코웃음 치며 바라볼 뿐이었다.

* * *

다겐은 창백한 얼굴로 복도 밖을 나섰다.

그런 그의 뒤로 모나켈의 간부들이 여기저기 눈치를 보며 따랐다.

자연히 구석진 자리에 모인 그들은 머리를 맞대며,

“큰일 났습니다.”

“이러다 정말 큰 낭패를 보게 생겼어요.”

“차라리 본사를 통해 전쟁이라도…,”

“아이베리아의 기사를 무슨 수로 이기려고? 차라리 수뇌부들만 따로 구출하도록 본사에 작전을 구상하라 언질을 넣는 게…,”

가슴 속에 담아왔던 불안을 여지없이 쏟아내었다.

그 가운데 잠자코 있던 다겐은 끝내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침묵 탓에,

직전까지 열렬히 의견을 내놓던 간부들의 시선이 자연히 다겐에게 쏠렸다.

그럼 다겐은 기다렸다는 듯, 특유의 날 선 카리스마를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늘 하던 대로 하자고, 하던 대로.”

그 말에 간부들은 서로 오묘한 눈빛을 나눴다.

그래도 기업의 상속자다.

어렸을 때부터 제왕학을 학습하며 커왔던 다겐의 그 한마디 말로 어떤 묘한 돌파구가 생긴 것이다.

“내쉬 가문에 충성했던 티히트라의 지주들을 끌어모아, 그러면 그 지주들에 매달려야 하는 자유민들도 넝쿨째 굴러오겠지. 그들에게 먹인 돈이 얼마인데, 이미 우리와 운명 공동체인 이상 필사적일 거야.”

다겐의 지시에 간부 몇몇이 일사불란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본사에서 나온 발언가들 몇 꾸려서 사고 현장으로 나가도록 해, 살아남은 용병 놈들이랑 입을 맞춰 호소하는 내용으로 하자고. 최선을 다해 구조 활동을 하려 했으나 끝내 용병 대부분도 목숨을 잃고 사망했다는 식으로.”

이어지는 지시에 이제 남은 간부는 두 명.

“나는 그 레프리길인지 뭔지 하는 기업과 접촉할 거다. 어차피 이 사건, 진상을 파헤치려면 별빛까지 끌어다 써야 할 정도의 비용을 치러야 할 테니 조사 시간은 물론 그 자체도 원활히 진행되긴 힘들 거야. 너희들은 노동자들과 관련된 자들에 대한 입단속을 진행하도록 해. 어차피 지주들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낼 테지만.”

그 두 명마저 지시를 받고 움직일 때쯤.

다겐은 조용히 품에서 가늘고 긴 연초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곤 사치품인 성냥을 꺼내 불을 붙인 그는,

“후.”

숨통이 트였다는 듯 크게 연기를 내뿜었다.

그렇게 다시 한번 연초를 크게 빨아들인 그는 과거, 아버지에게 배웠던 가르침을 기도하듯 읊었다.

“본질 흐리기엔 갈라치기만 한 것이 없다. 갈등은 상대에 대한 맹목적인 원망만을 낳기 때문이다.”

* * *

“와…, 이거 완전 진창이 났구먼.”

눈 앞에 펼쳐진,

끝이 보이지 않는 잿더미 앞에 한 남자가 서 있다.

최근에 건너온 바다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그의 외투는 보기만 해도 짠내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잿더미야. 너는 내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거냐?”

나른해 보이는 듯하지만, 잔잔한 열의를 드러낸 남자는 이제 밑창을 철제로 대체한 구두를 이끌고 잿더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 그의 뒤로,

아주 작은 그림자 하나가 일어선다.

“론! 단서가 될 만한 건 다 머릿속에 집어넣고 와라.”

그 작은 그림자의 정체는 기업 레프리길의 인장을 가슴팍에 달고 있는,

몸보다 큰머리를 가진 고블린이었다.

그의 외침에 론이라 불린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손으로 칼같은 경례를 보냈다.

레프리길이 자랑하는 탐정.

‘세 개의 돋보기’라 명명된 세 명 가운데 하나인,

론 에브리타즈.

그가 막 사건 현장 안으로 들어가 수사를 시작했다.

* * *

“이쯤에서 내리지.”

점잖은 말투.

점잖은 손짓.

그로 인해 멈춘 묵직한 마차 한 대.

곧이어 방책 같은 마차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중후함을 뚝뚝 흘리는 남자 하나가 내렸다.

그 남자는,

깁슨 제리드.

그가 마차 안에서 구겨져 있던 몸을 풀기 위해 작게 기지개 켤 때쯤.

마차를 몰던 기수가 나지막이 말을 걸어왔다.

“굳이 티히트라 인근에까지 오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 말에 깁슨은 매력적인 주름을 드러내며 기수에게 화답했다.

“그냥, 간만에 별빛 구경도 하면 좋잖나. ‘그자와의 약속’도 상기할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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