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응보 (2)
자신의 진의는 왕조에 닿아 있다고,
그 남자는 내게 말했다.
그래서 더욱 흥미가 생겼다.
디안 베나즈라는 인물만큼이나.
자금은 흐름을 만들고 흐름은 길을 만든다.
그리고 길은 그 안에 담긴 흐름에 따라 주위에 수많은 것들을 건설한다.
그렇기에 나는,
그 남자에게 흘려보기로 했다.
그 남자를 길로 만들어 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해서 건설될 것은 더없이 희소하고 그래서 이상적인 것이겠지.
그러면,
그때는 디안 베나즈라는 인물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
점성술사 플라움이 말했던,
그 ‘운명’이라는 것에 대한 답까지 찾을지도 모르겠어.
사실 이상이라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개념이다.
결국엔 개인의 강렬한 소망이 뒷받침되어야만 그 이상이란 것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공통된 이상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거기다 누군가는 그 공통된 이상을 꿈꾼다.
저 기지어라는 남자가 그렇다.
그래서 나도 그가 꿈꾸는 이상에 손을 대보기로 했다.
어쨌든 나도 공통된 이상을 꿈꾸게 만드는 매개, 그 자체인 디안 베나즈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이니까.
한 차례.
기지어와의 만남 이후 짧은 시간 동안 위와 같이 수많은 생각의 범람 속에 헤엄쳐야만 했다.
그것은 결코 불쾌한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내 삶에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경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슬슬 끝나갈 때쯤.
마치 운명처럼 기지어는 나를 다시 찾아왔다.
비공식적인, 그저 개인으로서 날 만나러 온 그는.
첫마디만으로 나를 무자비하게 관통했다.
[내가 도달하려는 그 왕조에, 당신이 있소?]
그것은 아주 많은 의미를 담은 한 마디였고,
그 모든 의미를 이해한 나는 즉답했다.
있기를 소망한다고.
그랬더니 기지어는 내게 대뜸 손을 내밀어 보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어.
[그럼 흘리시오, 내게. 그 흐름에 철저히 깎여 끝내 거대한 폭포를 만들어 줄 테니.]
솔직히 황홀했다.
기사의 땅 아이베리아 위에서도 손꼽힐 만큼 낭만이 가득한 말이었거든.
그러면서 그도 알고 있던 것이다.
제리드 가문의 자본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그러니까 기지어는 그때 내게 배팅을 한 것이다.
대의라는 이름이 자신의 목숨을 건, 그런 배짱 넘치는 배팅 말이다.
그런 결정에 누가 감히 초를 칠 수 있을까.
해서 나는 그 앞에서 단언했다.
기지어 당신이 곧 제리드 가문의 자본 흐름이 될 것이라고.
다만,
쉽게 깎이지 말라고.
쉬이 깎여 호수가 되지 말고, 위태롭게 깎여 아래로 여지없이 쏟아낼 수 있는 폭포가 되라고 말이야.
그 말에 기지어는,
역시나 배짱 넘치는 모습으로 웃었다.
* * *
한창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깁슨의 뒤로.
뒷짐을 진 채 수행을 하고 있던 기수가 막 날아든 하얀 새를 손등으로 받아들였다.
그 발목에 묶인 작은 두루마리를 펼친 기수는,
“레프리길이 수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제리드 가문의 비공식적인 후원에 감사하다는 내용이 들어있군요.”
안에 적힌 내용을 깁슨에게 전달해 주었다.
“추신으로, 감사가 위법의 방패로 빚어질 일은 없을 테니 서운해하지 마시길…, 로 되어있군요.”
이후 짤막한 추신까지 덧붙인 기수의 말에,
깁슨은 마치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자네, 레프리길이 어떤 기업인 줄 아나?”
“회장님을 수행하면서 몇 번 들은 적은 있습니다.”
깁슨은 잠시 하늘에서 시선을 거둔 채 뒤돌아 기수에게 설명을 이었다.
“일말의 타협조차 통하지 않는, 그야말로 꽉 막힌 외골수 기업이야. 그 때문에 많은 나라가 그들을 외면했지. 오죽했으면 이 아이베리아로 건너왔겠나.”
“그 정도입니까?”
“한번은 반도 엔실리나에서 거대한 횡령 사건이 일어났었어, 하지만 횡령에 대한 처벌은 관례라는 이름으로 쉬쉬하듯 넘어갔었지. 그런데 하필이면 그 당시 엔실리나에 입점 된 법제 기업이 레프리길이었던 거야.”
기수는 눈을 반짝이며 깁슨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레프리길은 엔실리나의 기초법에 의거 횡령범들에게 평균 140년에 해당하는 징역형을 선고했어. 이로 인해 그동안 관례라는 이름 아래 솜방망이 처벌을 받아왔던 기업가와 발언가들 사이에선 난리가 났지.”
“그들이 자본으로 쌓아 올린 길 하나가 무너져버린 거군요.”
“그래, 레프리길은 판결과 관련한 엔실리나의 기초법을 자유민 모두에게 공표함으로써 피고인들의 반박 여지까지 없애버렸다. 뒤늦게 자유민들은 관련된 법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엄청난 파문으로 이어졌어.”
“엔실리나가 자유국 중 하나인 것도 크게 작용했으니…,”
“횡령에 한해선 무지막지한 선례가, 그리고 자유민들의 엄중한 감시가 붙어버린 거야. 물론 그런 난리가 일어나고 3년 뒤 엔실리나의 법제 기업 심사에서 레프리길은 단박에 탈락했다.”
한바탕 이야기를 끝마친 깁슨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여러 의문점이 남았는지 기수는 입술을 움찔하다가 결국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프리길은 아직도 사방 곳곳에 건재한 모습으로 있지 않습니까?”
그럼 깁슨은 별생각도 하지 않고 그에 대한 해답을 술술 내뱉었다.
“용의 시대 이후는 엄연히 왕정이라는 개념이 살아 숨 쉬는 곳이기도 하니까. 역설적이게도 철권에 다다를수록 레프리길에게 있어선 더욱 편한 환경이 제공되겠지.”
“아…,”
기수는 그제야 수긍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보게.”
이어 깁슨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콕 찍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 맞물려 있는 것은,
막 녹색 빛을 내뿜기 시작하는 별.
“제리드의 별이 아니고 다른 별이군, 현장의 누군가가 별의 힘을 이용할 줄 아는 모양이야.”
이내 별로부터 저 너머 티히트라를 향해 빛줄기 하나가 흘러내렸다.
* * *
현장을 둘러보던 론은 벨트 주머니에 촘촘히 들어가 있던 유리병 중 하나를 골라 들었다.
그리곤 열기에 삭아버린 시체 앞에 앉아 유리병의 뚜껑을 열고 안의 내용물을 쏟았다.
그 내용물은 한 줄기 실바람.
그것이 시체 주위에 쌓인 먼지를 말끔히 걷어냈다.
그렇게 제법 윤곽이 드러난 시체 앞에서, 론은 이번엔 목걸이로 걸고 있던 작은 소라를 입에 대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현장의 시체는 두 부류로 나뉘어 있음, 한쪽은 생전 심각한 피부질환을 앓았던 자들이고 다른 한쪽은 지극히 평범한 자들로 이뤄져 있음을 확인.”
직후 좀 더 사고 현장 중심부로 걸어 들어간 론은,
인위적으로 파인 듯 보이는 구멍 앞에 다다랐다.
그리고 동시에 소라를 입에 댄 채 재차 혼잣말을 시작했다.
“폭발의 여파를 보았을 때 이곳이 유력한 근원지로 보임,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박아넣은 흔적이 있으나 관련된 증거는 보이지 않음. 폭발과 동시에 소실되었는지 아니면 사고 후 철거한 것인지는 추후 조사를 통해 가려내야 함.”
이어 소라를 내려놓은 론은,
한숨을 있는 그대로 푹 내쉬었다.
현장은 정말이지 교과서적인 방식으로 청소되어 있다.
모호한 이지 선다형 흔적만이 강요되듯 남아있을 뿐.
오롯이 수사 기간을 늘리기 위해서 가해진 이 청소는 굉장한 전문가들에 의해 이뤄졌다.
이 사고의 가닥이 모나켈 쪽으로 잡히는 건 이제 확실해진 것 같은데…,
그래봤자 진상을 파헤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혹, 생존자가 있을까?”
스스로 질문을 던져봤지만 글쎄.
론은 자조적인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폭발의 규모만 보면,
절대로 생존자가 나올 수가 없거든.
이 폭발이 인챈트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그 사용자가 무사할까 싶을 정도인데 말이야.
해서 이런 의심도 가능하긴 해.
저 진원지에 있는 인위적 구멍이 혹, 이 폭발을 일으킨 인챈트의 주인이 아닐까?
그런데 그렇게 되면 수사는 더욱 오리무중으로 치닫게 된다.
그 결정적 증거가 완벽히 소실되었으니까.
심지어 모나켈 수중에 들어갔다면 그들이 그 증거를 가만히 방치할 리가 없다.
결론은…,
현장에서 건질 것이 더는 없다 정도.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나.
혹시라도 생존자가 있다면?
그래봤자 모나켈이 그 생존자마저도…,
처리했겠지.
그 사실을 확인해서 혐의 하나를 추가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결국 생존자였던 시체를 발견해야만 가능한 이야기.
하지만 알아야겠어.
결심한 듯,
론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두 눈을 감은 채 오른쪽 눈만을 크게 떠,
밤하늘에 박힌 어느 별 하나를 동공 안에 담아냈다.
그러자 곧 그의 눈이 녹색 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한다.
눈매 주위엔 새까만 문양이 두드러기 일어나듯 번졌고, 동시에 극렬한 통증을 느끼는 듯 상체는 파르르 떨렸다.
론 에브리타즈.
별의 계약자이기도 한 그는 지금 정신을 심지 삼듯 별빛에 태움으로써 계약자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을 발휘했다.
그가 계약한 별의 이름은,
포착자 카프티스.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남긴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능력.
다만 그에 대한 반동은,
특히 정신적으로 치명적인 것에 해당했다.
두 발 걷는 자의 인지를 초월한 어떤 사물의 시야로 대체되는 것이기에,
반동이 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
물론 별의 능력을 통해 어떤 증거를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수사에 직접적인 증거로서 개입될 순 없다.
혼자서 보고 혼자서 말하는 것이 공공의 증거가 되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
론은 그저 가능성.
그 일말의 것조차 놓칠 수 없어 자신의 정신을 살짝 태우기로 작정한 것이다.
“크윽…!”
이내 론의 오른쪽 눈이 더욱 크게 떠졌다.
그에 맞춰 녹색섬광이 그의 시선으로부터 뿜어져 나온다.
그렇게 한바탕 섬광에 젖은 오른눈의 동공 속으로, 사건의 현장이 뿌옇게 비치기 시작해.
점점 선명해지더니,
그 위로 녹색의 무수한 족적이, 어떤 행동의 윤곽들이 찍혔다.
그것들은 다양한 방향으로 출렁이는 실루엣처럼 보였지만,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시에 취했던 자세가 어떤 것인지 보일 정도로 적나라한 것이었다.
한쪽 눈으로 녹색섬광을 쏟으며 걸음을 옮기던 론은,
한참을 고통 섞인 신음을 내뱉으면서도 꿋꿋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끝내 어느 한 지점에 멈춰 섰다.
어느 순간 모두 다 멈춰 사라진 실루엣과는 달리,
단 하나.
그것도 또렷한 족적 하나가 사건 현장을 벗어나 있다.
그 방향도.
폭발의 진원지에서 시작해 저 숲을 향해 있어.
틀림없다.
생존자다.
* * *
티히트라의 채석장 입구는 난데없이 들이닥친 자유민들로 빈틈없이 가로막혀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티히트라 내 유력한 지주였으며,
하나같이.
“우리 영주님의 주권을 회복하라!”
“이건 월권이다!”
“명명백백! 진실규명!”
“티히트라의 내쉬 가문을 사수하라!”
열성적인 모습으로 시위를 이어나갔다.
그들 대부분은 제지하려는 병사들에게 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물론 기지어가 이끌고 온 테티르와 그 휘하 병사들은 그저 멀리서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을 뿐이었다.
뭔가 행동을 취했다간,
저들이 더 광분해 날뛸 명분을 주는 꼴이 될 수 있으니까.
그래서 티히트라에 몇 안남은 경비병과 모나켈에서 차출한 인원들이 그들을 말리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물론 기지어는 알고 있었다.
모나켈의 차출한 인원들과 저 지주들이 작당을 일으켰다는걸.
그러나 알고 있다고 한들 기지어로선 그들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티히트라의 자유민들을 건드는 순간,
그것은 정말 월권에 해당하는 일이었으니까.
다겐 모나켈이 머리를 잘 굴렸다.
가본 내쉬를 가지고 티히트라의 자유민들을 리케니엔과 아주 잘 갈라 쳐냈어.
“재상, 일단 리케니엔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습니까?”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저들 중 누군가가 날 건드려줬으면 좋겠군.”
기지어는 헛웃음을 지으며 하소연했다.
차라리 그렇게 됐으면 명분이 이쪽으로 넘어오기라도 할 텐데, 저들이 미쳤다고 그런 짓을 저지르겠는가.
단지,
언제 해소될 지 모르는 이 답답함 속에서 기지어는.
작게 푸념해 볼 뿐이다.
“아, 왕권 마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