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68화 (268/365)

268화. 응보 (3)

기지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레프리길의 휘하 탐정이 벌이는 수사도 멀찍이 떨어져 방관했으며, 기사 조이가 가본 내쉬를 구속하는 과정에서도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단지 재상이라는 그 존재를 과시한 채 있었을 뿐.

그렇게 이틀이 지나자 기업 모나켈은 재상이 아닌 바깥 일에 정신을 몰두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자유민들의 시위는 날이 갈수록 격해졌다.

가본 내쉬의 구속, 거기에 더해 모나켈이 고용한 발언가들의 말에 슬슬 힘이 실리게 된 것이다.

티히트라의 지주들로 결성된 시위대는 이제 그 분위기에 편승하거나 그로 인해 밥을 얻어먹게 된 자유민들까지 합세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티히트라 내에서 일어난 사고이니 티히트라 자체에서 봉합해야 하는 것이 맞다.

이 사건을 계기로 티히트라에 개입해 깃발이 가진 주권을 침탈하려는 생각이다.

티히트라는 상호 조약을 통해 리케니엔과 동맹을 맺었다. 지금 이 일은 그 조약을 깨트리는 것에 해당한다.

연일 이어지는 시위 속 대명사는 바로 이것들이었다.

그렇게 세력이 커진 시위대는 급기야 가본 내쉬의 저택 앞까지 진출했고,

리케니엔의 정규군과 처음으로 맞닥트리기까지 했다.

사흘이 지났다.

기지어는 역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조이는 그저 병사들을 시켜 저택 입구를 단단히 막은 채 버틸 뿐이었다.

그렇게 늦은 저녁이 되었을 때쯤.

이 상황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던 테티르가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재상, 이만 돌아가는 게 어떻습니까.”

“아직 수사가 한창입니다.”

기지어는 이미 알고 있다.

테티르 론바즈는 보기완 달리 상당히 이지적이고 냉철한 사람이라는 걸.

오히려 베르융 쪽이 좀 더 딱딱한 무골 성향이지.

그렇기에 기지어의 입장에선 테티르는 공략하기 어려운,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베르융 같은 자를 공략하기 쉽다는 건 아니다.

아예 공략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재상의 명명으로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이상 어떤 차질이 생길 일은 없을 겁니다, 반대로 이렇게 티히트라 내에 머무르시길 고집하신다면 그만큼 자유민들의 반발 역시 계속해서 부풀 테지요.”

나긋한 듯하면서도 굵직한 테티르의 의견에 기지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맞는 말이니까.

물론 테티르가 전하려는 본질은 이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그 부분을 인지한 기지어는 되려 테티르의 속을 찌르듯 받아쳤다.

“테티르 경, 폴란의 일 때문에 그런 게 아닙니다.”

그 말에 테티르는 당황한 듯 까칠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마른 침을 삼켜야 했다.

“애초에 모나켈에게 그 부분에 대해 추궁할 명분도,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제가 뭘 하겠습니까.”

이어지는 기지어의 원통한 말투에 테티르는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했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궁금하시겠지요.”

기지어는 테티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눈엔 전투를 앞둔 기사의 열기 같은 것이 담겨 있었지만 테티르가 보기엔 분명 다른 것이었다.

“제가 앉은 이런 종류의 자리들은 약점과 강점이 공존합니다. 당장 지금과 같이 존재만으로도 여러 대상에게 적대 되는 상황은 분명히 이 자리에 대한 약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럼 강점은…?”

“약점을 공략당하는 와중에도 끝끝내 쓰러지지 않는다면, 그때부턴 오히려 강점이 됩니다. 주어진 상황에 어떤 작은 변화라도 일어났을 때, 그 변화로써 발생하는 명분들을 독식할 수 있으니까요.”

“변화하지 않으면요, 상황이 변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도태되는 거지요, 아니 도태되어야 합니다.”

단호히 단언한 기지어의 모습에,

테티르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재상을 근시안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구나!

뒤늦게나마 좀 더 넓게 보니 조금은 알겠다.

재상이 이곳으로 오기 전 펼쳐놨던 판의 크기가.

가만히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었어.

그는 만들어 놓은 판 위에 자신을 걸고 티히트라 전체와 일생일대의 배팅을 하고 있던 것이다.

해서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재상, 누구와 손을 잡은 겁니까.”

상황에 변화를 줄 그 패가 무엇이냐.

물론 테티르는 기지어가 순순히 대답해 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질문도 재상이라는 위치에 있는 기지어의 약점을 후벼 파는 것에 해당했으니까.

하지만,

“깁슨 제리드.”

기지어는 순순히 답했다.

그래서 그 담담한 포부에 테티르는 또 한 번 기지어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깁슨…, 제리드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손을 벌린 건 아니고 개인 간 모종의 거래를 한 셈이지요.”

“허…,”

“곧 제리드 가문이 전세 낸 별자리가 이 하늘에 위치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의 약점은 강점이 되겠지요.”

어느 순간 테티르는 인간 기지어에게 흠뻑 빠져버렸다.

물론 그것마저도.

기지어의 계산 속에 있는 것이었다.

* * *

론은 주머니 깊숙이 박혀 있던 안대를 꺼내 써야만 했다.

한동안 눈에 별빛을 담은 적이 없었기에, 안대를 쓰는 것 자체가 낯설었지만.

그마저도 실마리를 쫓는 상황이었기에 금세 적응해버렸다.

그러다 어떤 흔적을 발견한 그가 멈춰 선 채,

유리병에 담긴 추위를 흘려 진흙 위에 엉키듯 고인 물을 얼렸다.

그렇게 고인 물은 순식간에 바짝 얼었고, 그러면서 액자 속에 박제된 듯 선명한 진흙의 모양이 론의 눈에 담겼다.

이내 버릇처럼, 론은 소라를 입에 가져다 대고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흥미롭군, 현장에서 빠져나온 생존자가 흙바닥에 몸을 문지른 것으로 보인다.”

폭발의 규모를 생각하면 흔적도 없이 전소되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살아남았고, 심지어 흙바닥 위를 구른 흔적까지 있어.

최소한 화상이라도 입었을 텐데 피부를 문지르는 행위가 가능하긴 했을까?

그냥 딱 떠오르는 상황 절차는…,

어떻게든 폭발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심지어 무사히 보전한 신체를 이끌고 가다가,

단지 몸에 엉겨 붙은 열기를 식히기 위해 진흙 위를 구른 것처럼 보여.

“내가 괴물을 쫓고 있는 건가?”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

사념은 버섯의 포자처럼 어디든 달라붙어 괴물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으니까.

꿀꺽.

절로 마른침을 삼킨 론은 허리춤에 달린 서쪽 바다식 권총과 함께 매달린 작은 에스톡 자루 위에 손을 얹었다.

사건을 수사하면서 괴물을 퇴치해본 적은 많다.

그런데 저런 폭발로부터 태어난 괴물을 상대해본 적은 없어.

낙엽을 설득하듯,

죽인 발소리로 거듭해 앞으로 나아가던 론은 곧.

“흐윽…,”

어디선가 들려오는 신음을 쫓아 빠르게 접근했고,

“흐으윽…,”

곧 에스톡 자루 위에 얹은 손을 떼어야 했다.

“대체…,”

소년이다.

신체는 막 장성했지만, 겉에 묻은 태는 아직 앳된.

“너…,”

“흐으윽, 사… 살려 주세요.”

반나체인 상태로,

반쯤 웅크려 바닥에 누워 있던 소년은 론을 바라보며 애원했다.

서둘러 론은 양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난 네가 겪었을 그 상황과는 전혀 관련 없는 사람이다. 오히려 해당 상황을 파헤쳐야 하는 쪽이야.”

침착하고 온화한 론의 모습에,

소년은 경계심을 허물었다.

아니, 경계심을 드러낼 여유조차 없었는지 그는 아직도 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니?”

“이백… 사십칠… 아니 이백 이십… 오 아니…,”

론의 물음에 횡설수설하던 소년은,

굵직한 눈물을 쏟으며 흐느끼다가.

“이… 일… 일이에요, 일인가 봐요.”

흙 묻은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절규하듯 대답했다.

론은 직감했다.

폭발 사고가 일어났던 그 현장에 있었을,

과거의 얼룩이 무엇인지를.

단언컨대 그 얼룩의 이름은 피폐였으리라.

* * *

나흘째 밤.

한창 무르익어 융성을 폭발시킨 버드나무처럼.

시위대는 거대한 모닥불을 피우고, 횃불을 휘저으며, 그 열기보다 더한 함성을 내질렀다.

채석장 입구에 집결한 인원만 대략 사백여 명.

가본의 저택 입구에 집결한 인원들과 합치면 무려 육백에 달하는 숫자였다.

그들 중엔 티히트라의 자유민이 아닌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숫자를 불리기 위해 모나켈에서 몰래 쑤셔 넣은 끄나풀들이었고,

그 끄나풀들은 시위를 좀 더 자극적으로 이끌기 위해 일선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저택 입구에 대치한 리케니엔의 정규군에게 폭력을 행사한다던가, 레프리길에서 파견된 인원들이 채석장으로 들어가는 걸 가로막는 등.

그러다 리케니엔의 정규군 하나가 중태에 빠지는 바람에 순간 분위기가 험악해지기도 했다.

지주들도 돌머리는 아니었기에 이대로 가다간 큰일이 날 것을 우려해 모나켈에게 언질을 넣어 끄나풀들을 자제시킬 정도였다.

그래도 상황이 과열될 대로 된 것은 맞았기에.

언제 어디서 또 어떤 파급이 촉발될지 모를 상황.

그때,

여태껏 침묵을 유지하던 기지어가 행동에 나섰다.

그는 대범하게도 채석장 쪽 시위대 쪽으로 향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정규군을 시켜 시위대 앞에 연단을 설치하기까지 했다.

그것을 막기 위해 시위대가 거칠게 달려들었지만,

테티르를 위시한 정예병들이 만든 벽을 뚫진 못했다.

재상의 움직임을 보고받은,

다겐과 간부들은 하던 모든 일을 중지하고 급히 채석장 쪽으로 향했다.

물론 다겐은,

“어떤 말을 한들 그들이 들을까? 시위대에게 오히려 모욕만 듣게 될 텐데 말이야. 거기서 얻은 비웃음이 갈까마귀를 타고 사방으로 흩어진다면 리케니엔의 재상이라는 위치는 업신여김의 대명사가 될 텐데.”

지금까지 지켜본 상황을 토대로,

승리를 확신한 듯 차후 저렴하게 지불할 배상금의 액수만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래도 금화 20만 개 정도는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돼지 사룟값으로 5천 개는 빼 줍시다.”

“하하하하!”

그러다 보니 간부들 역시 가벼운 농담까지 나눌 정도로 여유를 되찾은 상황.

자,

이제 막 다겐과 간부들이 채석장 입구가 훤히 보이는 언덕 위에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물러가라!”

“티히트라의 주권은 내쉬 가문과 그 가문을 지지하는 우리의 것!”

연단 위에 막 올라선 기지어에게,

시위대는 격렬함을 한껏 쏟아내고 있었다.

* * *

기지어는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도 하늘 위로 박힌 별들은 뭐가 그렇게 바쁜지 이리저리 쏟아지고 움직이기 바쁘다.

그 와중에.

오각형으로 수놓아진 다섯 개의 별이 슬슬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을 인지한 기지어는 시선을 내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반목들을 마주쳤다.

꿋꿋이 목을 가다듬고,

마음을 다잡은 그는.

속으로 떠나간 이에게 하소연하듯 말해본다.

‘폴란 보게, 내 자네보단 서툴지만 그래도 티히트라를 보기 좋은 매듭으로 묶어놓겠네.’

이윽고 기지어는,

우렁찬.

목소리로.

“들리시오 ──── !”

시위대 전체의 귀를 흔들어놓았다.

순간의 침묵.

그 앞 연단 위에 선 기지어가 당당히 말한다.

“잘 들리는 것 같구먼, 그럼 눈으로 보는 것도 잘 보시겠구려!”

거창한 연설 같은 건 할 생각이 없다.

기지어는 애초에 그 붉은 머리와 수염처럼,

화끈한 기질이 다분한 괴짜니까.

“듣고, 보고 판단하시오. 그대들의 이목구비가 밤하늘의 별처럼 뚜렷한데 뭐가 두려운 거요!”

꾸짖듯 이어지는 기지어의 엄포.

그리고 소문을 듣고 저택으로부터 추가로 몰려온 시위대까지.

자,

기지어는 이제 손을 번쩍 들어 올려 하늘을 찍었다.

그러자 시위대는 홀린 듯 그 손가락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엔,

오각형으로 이뤄진 다섯 개의 별이 체류한 채 반짝이고 있다.

그것은 이내 유성처럼 빛을 쏟아내었고.

쏟아진 빛은 그대로 채석장 위로 맺어진다.

별자리의 이름은 ‘펜타그로제’

안에 담긴 뜻은,

‘엊그제의 거울’

그리고 그것을 반증하듯.

채석장 위로 맺어진 빛 망울들이 수많은 모습으로 정형된다.

보인다.

수백의 무리와 그들을 핍박하는 무리의 모습이.

짓물러지고 무너져가고, 그 위에 군림하고 내리찍는 적나라함이.

약점을 공략받던 기지어는,

이제 판을 뒤집어 강점밖에 남지 않은 리케니엔의 재상으로서.

무겁고 무자비한 마지막 수를 두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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