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응보 (4)
별들이 보여주는 증거는 아주 강력하다.
용의 시대 이후로 들어서면서 별은 세상에 아주 확실하고 강력한 수단으로서 자리 잡았고,
몇몇 대륙은 특정한 별을 신으로 추앙할 정도다.
그런 별들이 보란 듯이 증명한,
채석장에서 벌어진 일련 과정에 대한 기억의 재현은 티히트라를 문자 그대로 양분해버렸다.
모나켈과 영주 측 지주들이 일으킨 갈라치기와는 그 규모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영문도 모르고 채석장으로 끌려갔을 아들, 남편, 아버지.
그들의 가족들이.
상대적 소외계층이자 약자들이었던 그들이 순수하고 담백한 분노로 들고 일어선 것이다.
그건,
어떻게 말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채석장 사건이 일어난 지 육 일째 되던 날.
영주 측 지주들과 그 시위대는 완전히 와해 되어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는 자신이 그 시위대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이미 그것은 티히트라 내에서 일종의 낙인과 같은 것이었으니까.
가본 내쉬의 저택 앞을 지키던,
그 열렬한 지지자들은 이제 한 명도 없다.
모나켈과 손을 잡고 가장 적극적으로 시위 행동에 임했던 지주들은 공공의 적이 되었다.
비교적 덜 노출된 지주들은 이를 기회 삼아 시위의 주역들인 지주들을 공격하며 자신들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주류가 바뀌고 있다.
오랜 세월, 한 깃발 아래 깊숙이 뿌리내린 그 주류는 생각과는 달리 너무나 쉽게 뽑혀버린 거다.
이런 여러 과정이 정신없이 지나가는 와중,
칠 일째 되던 날.
채석장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 그런 그들을 잃은 상실자들은 뜻을 하나로 규합시켜줄 자를 원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기지어가 그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단 한 번의 진실로 약점이 뒤집히며 그 뒷면에 있던 강점이 드러난 것이다.
리케니엔의 재상, 기지어는 곧바로 모나켈과 관련한 모든 자를 구속했다.
모나켈과 결탁해 채석장 인근 지역 자유민들에게 노동을 부과했던 지주들 역시 모두 구속되었다.
아이베리아의 법엔 이런 내용이 있다.
같은 민족을 팔아 자신의 부귀를 도모하려는 자.
이 땅에서 살 수 없다.
팔 일째 되던 날, 혐의가 인정된 지주들은 모든 재산을 박탈당했다.
재산이 아무리 많다 한들 상관없다.
애초에 박탈이라는 말 그대로,
실행되기 무섭게 가진 재산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니까.
이런 과정에서 기지어는 어떤 묘한 감정을 느꼈다.
명분상으론 결국 같은 법이었을 것이거든.
그 옛날.
7년.
앙 실러 데우스.
빛의 기사라 불리는 그가 자행했던 일들 말이야.
어쨌든,
이제 지주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개뿐이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추방을 당할 것이냐.
아니면 초연히 죽음을 선택해 적어도 뿌리 내린 곳에 묫자리 하나 정돈 받아낼 것이냐.
레프리길은 아이베리아의 해당 법을 근거해 정말 단호하기 짝이 없는 심판을 가했다.
지주 33명 가운데 절반은 추방을 택했고,
나머지는 죽음을 택했다.
적어도 티히트라 내에 자신의 묫자리가 보장된다면, 남은 자식들이 그 묘지기로서 연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운이 좋게, 혹은 전혀 개입하지 않았던 지주들은 당연히 모든 권력의 중심이 된 기지어의 수족이 되기 위해 벌벌 기었다.
* * *
창백하고 거대한 얼굴.
그에 걸맞지 않은, 두 눈을 겨우 가리는 작은 안경.
레프리길의 판사.
고블린 에쿨.
그가 티히트라 광장에 세워진 높은 연단 위로 올라섰다.
자유로운 방청이 허락된 재판이었기에 일대엔 수백에 가까운 자유민들이 함께였다.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엄숙한 분위기, 그리고 이어지는 에쿨의 선언.
동시에 입장하는 베나즈의 정규군들,
그리고 그들에 의해 이끌려 나오는 열댓 명의 사람들.
그들의 등장에 방청객들은 마른 장작을 씹으며 일어난 불처럼 뜨겁게 들고 일어섰다.
──── !
적어도 수십 개의 실타래가 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여기저기 비난과 비판이 뒤엉켜 쏟아져 내린다.
원색적인 욕설은 물론, 정말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의 순수한 저주까지도.
에쿨은 그런 그들에게 어떤 제지도 가하지 않았다.
지금 벌어지는 재판의 성격은 피해자를 위해 가해자에게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는 것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러니 피해자인 그들의 쏟음을 말릴 이유도, 근거도 없다.
사실 이러한 에쿨의 행동은,
아이베리아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색깔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기지어는 광장 끄트머리 구석에서 조용히 재판을 지켜보았다.
이제, 레프리길 측 인사가 걸어 나오자 에쿨은 작은 손으로 망치를 들어 두들겼다.
덕분에 차려진 정숙.
그 위에 서 있던 레프리길 측 인사는 눈앞에 일렬로 서 있는 피고인들에게 말을 이었다.
“자유민들의 권리를 무시한 가혹한 노동 환경, 그 가공할 만한 척박함으로 일어난 사고의 원인은 분명 모나켈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모나켈의 본사에서 나온 변호인이 차분히 반박했다.
“득세하는 베나즈 가문의 기세를 따라가기 위해 당사는 실적에 관해 굉장한 압박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위험한 공법을 통해 생산량을 늘려야 했으며…,”
하지만 그 반박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
레프리길 측 인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히 말을 이었다.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아야지만 비로소 추구하던 생산량이 충족되는 겁니까? 기업 모나켈에서 자행한 단축, 절감은 말 그대로 칼날처럼 노동자들을 베어왔습니다.”
“하지만 해당 공법을 통해 생산된 석재는 이미 한 차례 굽기를 통해 경화 작업까지 마친 상태에다가, 성형 직전까지 무른 특성으로 인해 리케니엔을 비롯해 여러 요충지에 빠른 건설을 할 수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계속해서 생산한 석재를 통해 얻어낸 결실만을 이야기하는데, 이 자리는 그 방법 자체가 잘못되었고 그래서 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이야기하는 자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결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당사가 이런 위험한 작업방식을 고수해야만 했던 결정적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조용히,
둘의 팽팽함을 지켜보고 있던 에쿨이 조용히 물었다.
“베나즈 가문이 직접 적으로 당사를 압박한 사실이 있습니까?”
그럼 모나켈의 변호인은 입을 꾹 다물다가 마지못해 답했다.
“공식적으로 그런 적은 없습니다.”
“공식적으로?”
에쿨의 재차 이어지는 질문에, 레프리길 측 인사가 끼어들어 반박한다.
“확실히 말씀하세요, 일말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이는 베나즈 가문을 비방하려는 의도로 비추어질 수 있으니.”
그러자 에쿨은 단호한 얼굴로 레프리길 측 인사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에쿨의 단호함을 받은 남자는 멋쩍은 표정으로 한 발짝 물러서야 했다.
한참 뒤.
모나켈의 변호인은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 적은 없습니다.”
이에 에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처절하다시피 이어지는 변호, 그리고 그 변호를 무참히 찢어발기려는 듯 쏟아지는 추문.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결론이 막.
에쿨의 입에서 떨어져 내렸다.
“기업 모나켈은 티히트라에 징벌적 성격이 들어간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
직후 선고를 알리는 망치가 두들겨진다.
동시에 만족하지 못한 방청객들의 고성이 터져 나왔다.
어찌 되었든 별들이 보여준 채석장의 기록에선,
사고를 촉발한 결정적 원인이 어느 노동자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채석장의 기록도 결국엔 빛무리 따위로 보이기만 하는 것이었기에 그 해석의 한계도 명확했다.
다만,
레프리길은 이미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에게서 증언들을 모두 확보한 상태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존자를 증인으로 내세우지 못한 것은.
피해자라고 보기엔 그의 상태가 너무나 말끔했기 때문이다.
생존자라는 증거 역시 개인이 가진 능력으로 선별한 것이었기에 그것이 별의 힘을 이용한 것이라도 공신력이 없었고.
그런 생존자가 나서 증언한다 한들 사고 당시의 흔적이 하나도 없는 그의 말이 증언으로서 힘을 발휘될까도 의심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모나켈에게 명분을 주는 행위일지도 모르니 과감히 접어둘 부분은 접은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을 상정했을 때.
레프리길은 모나켈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선고를 내렸다.
이는 모나켈에게도 한 줄기 빛처럼 내려온 기회였다.
물론 굉장한 손해를 보긴 했지만, 최악과 차악 가운데 하나를 고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이익이었으니 말이다.
위 벌어진 모든 판결을 지켜본 기지어는,
붉은 수염을 몇 차례 움찔거리다가, 이내 경직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떴다.
* * *
다겐 모나켈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막 들어온 남자에게 꾸벅 인사를 올렸다.
“오셨습니까, 다시 한번 이번 사고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젠 그저 머리를 박고 사죄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판단했는지, 다겐은 저자세로 철저히 기어들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남자.
기사 조이 크레비디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를 따라 맞은편 자리에 앉은 다겐은 조금은 초조한 얼굴로 조이의 눈치를 살피기 급급했다.
이윽고 조이의 품에서 나온, 베나즈 가문의 인장이 박힌 두루마리 하나.
그것을 받아든 다겐이 조심스레 펼쳐 그 내용을 살폈다.
사실 내용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말미에 쓰여 있을 숫자가 중요한 거지.
거나하게 꼬장부리던 재상의 성격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배상액이 예상보다 훨씬 클 게 분명했으니까.
그렇게 안에 적힌 숫자를 눈에 담은 다겐은,
저도 모르게 눈두덩이를 파르르 떨어야만 했다.
[총 배상액]
[금화 2,460,000개]
간부들과 우스갯소리로 나눴던 그 금액의 10배 이상에 해당하는 액수.
무슨 전쟁 배상금도 아니고,
하긴.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징벌적 배상은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으니까.
배상액의 실체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보니,
다겐은 혀끝이 쓰라릴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 지출은 기업이 감당할 수 있다.
되려 사고 과정에서 모나켈 가문의 가보를 잃은 게 더 뼈아프게 느껴진 것이다.
해당 인챈트가 발휘하는 역량만 있었으면, 그 어떤 사업으로도 진출할 수 있는데 말이야.
저기 다섯 바다 정도 건너에 있는, 제도권에 해당하지 않는 미개한 곳에 인챈트를 처박아 작정하고 빨아들이면 더한 액수를 벌어들일 수 있었을 텐데.
엄청난 상승세를 보이던 베나즈 가문에 눈이 멀어 투자했더니만,
물렸어.
아주 제대로 물렸다 이 말이야.
속으로 겨우 투덜거림을 씹어 삼킨 다겐은 최대한 온화한 모습으로 해당 합의서에 서명을 새겼다.
* * *
합의가 끝난 이틀 뒤.
조이가 기사와 병사들을 대동해 직접 모나켈에게서 배상금을 징수했다.
대형 마차로 두 대 분량에 해당하는 그 거액은 재상을 통해 리케니엔에 묻은,
영겁의 상실에 대한 터무니 없이 작은 보상이 되겠지.
이 일로 티히트라의 사업권을 잃은 모나켈은 서둘러 돌아갈 준비를 했다.
길만 걸어도 티히트라의 자유민들이 언제 달려들어 칼침을 놓을지 모를 상황이었으니까.
그렇게 도망치듯 다겐과 그 간부들은,
그마저도 호화스러운 마차에 올라탄 채 바삐 남서쪽 항구로 향했다.
그리고 그 항구 인근의 길목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만났다.
기사 테티르 론바즈.
그리고 그의 휘하 병사.
족히 백은 훌쩍 넘어 보이는 그들이 중무장을 한 채 다겐을 가로막고 있다.
“뭐… 야?!”
당황한 다겐이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본다.
이거,
상황이 절대로 심상치 않다.
그래도 뭔가 서로 간 어떤 말이라도 주고받겠지.
하고 잠자코 기다리고 있던 다겐은 곧,
절망을 맛봐야만 했다.
그 어떤 지시도 내려지지 않았지만,
병사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활시위를 당겨 일말의 망설임 없이 놓았다.
빗발치는 화살은 말을 쓰러트렸고, 마차를 기울 게 만들었으며.
그 안에 타고 있던 간부 몇몇을 벌집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도 값비싼 마차라고, 그 견고함 덕분에 목숨을 건진 자들은 안에서 벌벌 떨며 신음을 내뱉을 뿐이다.
물론,
그들이 겪고 있을 생존 또한 찰나에 불과한 것이었다.
“쳐라.”
테티르는 무미건조한 말투로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병사들은 철퇴와 파이크를 꼬나쥔 채 마차로 달려가 박차고 찌르고 휘둘러 쳐부쉈다.
끌려 나온 간부들은 타작을 당하며 꽥꽥 비명을 질렀고,
마지막까지 그 상황을 목격하던 다겐 역시 병사 둘에 의해 끌려 나왔다.
“헉… 헉… 헉…!”
한마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저 오들오들 떠는 것밖엔…,
그런 그의 앞에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해서 고개를 들어보면,
“재상…! 재상 재상!”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기지어가 다겐을 내려다보고 있다.
“어디 가, 폴란과 관련한 일도 끝맺음을 지어야지.”
“재상…! 재상…!”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말들은 많은데.
정작 나오는 말은 오직 한 단어뿐이다.
기지어는 조용히 다겐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직후 병사들이 그에게 다가갔고,
다겐은 그런 병사들 사이에서 조용히 고개를 들어,
탑의 변덕인지 모를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상황이 모두 끝나고.
기지어는 명을 기다리는 테티르에게 짧게,
“굶주린 산의 먹이로 쓰면 좋겠습니다, 경.”
말하곤…,
한번 크게 휘청이더니 곧 힘없는 뒷모습과 함께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