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70화 (270/365)

270화. 토벌대

절대로 잊을 리 없는,

기억 속 늘 선명한 맥레인의 검.

그리고 궤적.

연상한 그것들에 대적해 검을 휘두른다.

최고의 명검을 들어서일까,

그러한 명검을 통해 끌어올린 감각 덕분일까.

이제는 그의 검과 궤적이 그리 위협적이지 않다.

기억 속 쇄도하는 맥레인의 검을 수차례 쳐내길 거듭한 나는 기어코 맥레인의 목에 칼끝을 겨누었다.

아니지.

겨누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기억하는 맥레인은,

내가 상정하는 맥레인은 분명…,

나는 조용히 고개를 내렸다.

그럼 맥레인의 검이 내 무릎에 닿아 있다.

이제 기억 속 맥레인에게 나는 속으로 한 마디 푸념을 던졌다.

역시 못 당하겠네요.

이러면 맥레인은 내게 합격이라고, 거친 말과 함께 칭찬을 해줬었는데.

그립다.

그때가.

당신은 고작 낡은 검 하나를 쥐고,

최강이란 수식어를 가능케 해준 두 팔의 피를 끓여 그 안에 담긴 경지를 다 기화시켰음에도.

아직 내 기억 속에서 날 압도하고 있네요.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그러자 전신에 맺힌 땀의 감촉이 뒤늦게 느껴졌다.

저택 뒤편에 새로이 마련한 연무장.

집사부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이곳은 내게 있어 지극히 개인적인, 그리고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거기에 바돈의 편의까지 더해졌기에,

이곳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인원은 오롯이 나 혼자뿐이다.

막 훈련을 끝내고 나니 힘 빠진 몸이 절로 축 처져버렸다.

그래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는데,

정면 벽에 걸려 있는 플랑베르주가 눈에 들어왔다.

접견실 벽에 걸어두었었던 테리아의 선물을 이곳에 옮겼었지.

그 거대한 검을 눈에 담으니 자연스레 테리아가 떠올랐다.

그녀는 잘 지내고 있을까.

그녀도 문득 이렇게 날 기억해주고 있을까.

별생각이 다 들다가,

또 자연스럽게 별이 떨어졌던 밤이 떠올라버렸다.

그때.

젖은 실 두 개가 위태롭게 뒤엉켰던 그때를…,

서로가 서로에게,

처음의 것들을 나누고 교감하며.

그렇기에 더욱 두서없는 야성만을 내밀었던 그때 우리는 정말 불꽃이었다.

결국엔 나도 남자라서 어쩔 수가 없나 보네.

상상만으로도 몸 곳곳이 불끈거리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직전까지 맥레인과 대련을 했던 터라,

괜히 또 부끄러워서 얼버무리듯, 상상 속 날 마주 보며 비웃는 맥레인에게 검을 치켜들었다.

* * *

티히트라의 일이 아직 완전히 봉합되지 않은 와중.

사건의 중심에 있던 기업 모나켈의 회장과 그 수뇌부가 의문사를 당하는 바람에 일대가 들썩였다.

그러나 그들이 사라짐으로써 오히려 티히트라의 일은 손쉽게 봉합되었다.

대상을 잃은 증오는 빠르게 식었으며,

그 위로는 재상의 주도가 개입된 여러 보상과 해결책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이제 봉합된 티히트라에서 해결해야 할 건 적출된 부분뿐이었다.

이는 티히트라의 영주 가본 내쉬와,

아직 그 밑에 남아있는 권력의 잔재였다.

영주 가본의 구속 권한을 전임 받은 조이는 그를 탑 꼭대기로 호송하는 과정에서도 혀를 내둘러야 했다.

“가본, 그래도 한때 티히트라의 영주였으니 기본적인 예는 다 갖추도록 노력하겠소.”

갑옷을 차려입은 조이가 정중히 가본에게 고개를 숙이자,

그 모습을 본 가본은 되려 정신 나간 사람처럼 한 가지 말만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디 있어…? 어디로 갔냐고!”

병사 둘이 달라붙어도 꼼짝 않고 같은 말을 반복하던 가본에게, 결국엔 조이의 부관이 달라붙어 그를 한참이나 타일러야 했다.

해서,

“뭣 때문에라고 하던가.”

조이의 물음에 막 다가온 부관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했다.

“세실로스라는 이름을 반복해 부르며 계속 찾는데…, 들어만 보면 어떤 여인을 찾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조이는 허무한 표정으로 한숨을 픽 내쉬었다.

“허…,”

기지어가 말한 대로,

여색에 미쳐도 단단히 미쳐있었군.

조이는 굳은 얼굴로 직접 가본에게 향했다.

그럼에도 가본은 그저 허공에 대고 한 여인의 이름을 부르짖을 뿐이다.

“세실로스…! 어디 있는 게야…!”

그 모습이 참으로 애처로워 보였지만,

그따위 애처로움이 면죄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본.”

어찌 되었든 조이의 신분은 기사.

아직 정식으로 처분되지 않은 지금, 가본은 티히트라의 영주 자리에 있는 자다.

그렇기에 응당 기사로서 예를 갖춰야 하겠지만,

그리고 방금까지 본인의 의지로 예를 보여야겠다고 생각했었지만.

결국엔 조이는 생각을 바꿔버린 것이다.

그런 그의 태도에 같은 말만 중얼거리던 가본이 퍼뜩 반응했다.

그래도 지금 수중에 티끌만 한 권위정돈 있다고 하는 듯이 말이야.

가뜩이나 가본을 마뜩잖게 보고 있던 조이는 그 행동을 보곤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거리낌 없이 표독을 내뱉었다.

“이제 일어나, 처분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재차 이어지는 조이의 단언에,

가본은 그제야 힘이 탁 풀린 듯 경직되어 있었던 상체를 쏟았다.

하지만 끝내 포기할 수 없다는 듯.

“경, 그녀를 찾아주게. 끝까지 나와 함께하겠다, 그런 진심을 내게 속삭여주던 사람이었어! 혹…, 이번 일로 어떤 해코지를 당하진 않았을까 걱정이 되네.”

처절하게 읍소하는 그에게,

조이는 진심으로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녀가 정말 그렇게 말하던가? 첨탑 꼭대기까지 함께 하겠다고?”

그 물음에 가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기업에서 고용한 창녀를 깃발의 권위와 맞바꾼 네게 애써 정신 차리라 말하진 않겠어. 애초에 차려질 정신조차 없을 테니까.”

이윽고 조이의 비수 같은 일갈에,

가본은 방향 잃은 동공을 아래로 쏟았다.

보이지 않았을까.

자신의 지위와 자리만을 보고 달려들었을 그녀의 맹목이.

그리고 그것이 사라지기 무섭게 거짓말처럼 증발하듯 사라진 그녀의 마음이.

그것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접점조차 발생하지 않았을 인연을.

그는 왜 그렇게 붙잡고 있었나.

아니,

지금 와서 후회해봤자 소용없다.

가본은 병사 둘에게 붙들린 채 저택에서 쫓겨났다.

사실 첨탑은커녕 바로 목을 베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기지어도 아마 그것을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디안 베나즈가 베푼 자비 덕분에 적어도 날붙이 따위에 눈을 감지는 않게 되었다.

그래도 여생을 첨탑의 꼭대기에 갇혀 지내야 하는 건 변함이 없었지만 말이다.

비록 실각을 면치 못했지만,

가본의 숨이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티히트라 내에선 큰일로 작용했다.

그렇게 한 권력의 추락이 첨탑 꼭대기에 박제됨으로써,

이후에 세워질 권력층에게 경직을 선사하였고 그 사이에서 홀로 유연함을 발휘할 수 있었던 기지어는,

정말 어렵지 않게 티히트라 전체를 흡수할 수 있었으니까.

앞서 말한 일련의 과정이 없었어도 기지어는 충분히 티히트라 전체를 장악할 수 있었겠지만,

현 티히트라 서쪽 권력의 대명사인 베나즈가 직접 적으로 관여함으로써 일말의 불협한 여지조차 불식시켜버린 것이다.

이 사실을 조금 뒤늦게 알아차린 기지어는,

그날 저녁 리케니엔을 향해 거듭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폴란의 상실로 인해 감정을 조절하던 족쇄가 잠깐 풀려있었던 그에게,

디안의 결정은 어쩌면 지금 가장 절실했던 것이었으리라.

* * *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시작된 조찬.

잔뜩 신이 난 세라가 궁금했던 바돈이 짬을 내 주방을 찾았다.

“왜 그렇게 신이 났어?”

그의 물음에 세라는 막 발행된 오늘 자 뷰글스 신문을 펼쳐 보였다.

[베나즈 가문의 품격은 소박한 그릇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틀 전 공개 만찬 자리에서 쓰였던 식기들은 베나즈 가문의 품격에 걸맞은 소박함과 무거움을 자랑했다.]

[베나즈 가문이 사용해 유명해진 식기는 하루아침에 그 판매량이 40배 가까이 폭증했다.]

“이번에 아주 제대로 잘 바꾼 것 같아요, 식기.”

한쪽 큼지막이 떼어 나눈 그녀의 행복에,

바돈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베나즈 가문의 가풍은 집사부에서 만들어지기 마련이지, 그것도 세라 당신과 같은 유능한 인재에게서.”

최근에 티히트라의 일이 해결되면서, 저택에 만연했던 무거움도 사라져 버렸다.

그 홀가분함에 바돈은 세라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그의 칭찬을 통해 무거웠던 분위기가 완전히 해결되었음을 알아차린 세라는,

몰래 뒤돌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레프리길이 보낸 보고서를 모두 읽은 나는,

한동안 여러 생각 속을 허우적거리며 헤엄쳐 다녀야 했다.

특히 폭발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

그의 사례가 나를 혼란에 빠트렸다.

뒤늦게 진행된 레프리길의 조사에서 채굴에 쓰였던 장비가 인챈트였단 사실을 전달받았다.

그리고 해당 폭발은 인챈트의 폭주로 인한 것이었어.

그런데도,

유일한 생존자는 몸에 그 어떤 흉터도, 심지어 생채기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레프리길은 티히트라 외곽에서 기업에게 내몰려 생활하고 있던 채석장의 1기수 노동자들까지 찾아내었다.

그들의 증언을, 그리고 증거를 통해 채굴 노동 중에 겪어야 했던 부작용까지 모두 확인한 상태였기에.

유일한 생존자의 멀쩡한 외관은 더욱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너무,

너무 비슷하잖아.

보석으로 세공되었던 내가 사람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로 다시 다듬어졌던 것과 말이야.

유일한 생존자도,

폭발의 과정에서 나와 어떤 비슷한 행동을 했던 걸까.

그를 통해 내가 겪었던 과정을 교차로 검증해보고 싶어.

그럼 알 수 있지 않겠어?

그중에 단 하나라도 일치되는 것이 있다면, 내 풀리지 않은 과거의 실마리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지도.

하지만,

나는 조용히 정돈된 서류를 책상 한쪽에 내려놓았다.

지금은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

티히트라에서 일어난 사고 결과를 기다리며 연무장에서 몸을 풀었던 그때가 내 유일한 자유 시간이었을 정도로.

눈앞에 산재해 있는 일들이 한둘이 아니야.

특히 지금이 더욱 그렇다.

시종장을 통해 오늘 저녁,

급한 일정 하나가 잡혔다.

각지의 기사들이 모두 이곳에 모일 정도로,

그 일정의 규모 역시 컸다.

일단은 그 일정의 내용부터 파악하고 해결해야만 이후 뒷일을 처리할 수 있겠지.

찌르르.

마침 회중시계에서 시끄러운 새소리가 울려 퍼진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시계를 매만져 달랜 뒤에 외투를 걸치고 접견실 밖으로 나서자, 이미 문밖엔 집사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의 수행을 받으며 내려가면,

그 넓은 홀이 수많은 깃발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깃발 아래엔,

스물 남짓한 기사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공께서 내려오십니다.”

바돈의 목소리와 함께 기사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의 장대함은,

겹겹이 새워진 어느 성벽을 보는 것 같았다.

이제는 익숙하게 그들을 지나쳐 자리에 앉은 나는, 맞춰 따라 앉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운을 뗐다.

“바쁜 걸음을 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그러니 더욱 사안을 빠르게 나누어봅시다.”

내 말에 오른편에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기사 베르융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주님, 슬슬 괴물들이 범람할 시기입니다.”

그 베르융 바로 뒤에 앉아 있던 엘르길도 한마디 보탰다.

“하여 베나즈 변방의 점검도 할 겸, 기사들을 대동해 토벌대를 꾸리심이 어떨까 합니다.”

괴물의 범람이라.

아니나 다를까, 티히트라에서 급히 달려온 기지어가 왼편에서 불쑥 튀어나와 설명을 이었다.

“최근 서쪽에 많은 전투가 일어났었습니다. 그 전투로 인해 수많은 사념 역시 생겨났지요, 괴물들에게 가장 강력한 빌미인 사념이 사방에 흩어졌으니 곧 문제를 대두시킬 괴물 무리가 나타날 겁니다.”

언젠가 한 번,

토르킨 선생님께 들은 적이 있다.

전투를 끝마치고 그것을 말끔히 매듭짓는 것 역시 기사의 몫이라고.

이 일도 그 매듭에 해당하는 일 중 하나겠지.

기지어의 설명에 이어 테티르가 경쾌한 말투로 하나를 보탰다.

“발생한 괴물들의 소재는 병사들 전반의 무장에 아주 큰 보탬이 되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확실히,

급한 사안이네.

다만 덕분에 조금은 환기할 수 있겠어.

여태껏 많이 답답한 감이 없잖아 있었으니까.

그래서,

“좋습니다, 그럼 이번 주 내로 토벌대를 꾸려 출발하도록 합시다.”

나는 자리에 모인 기사들에게 사안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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