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71화 (271/365)

271화. 의무

전투 이후,

남겨져 일어날 넋을 정돈하는 것은 마땅히 기사로서 행해야 하는 의무 중 하나이다.

이는 의무 가운데서도 상당히 중요한 것에 속했고, 그래서 해당 의무를 수행하는 자들에 한해선 누구도 어떤 명분을 들먹인들 공격을 감행할 수 없었다.

이것은 아이베리아 내에 몇 없는 불문율 중 하나로.

이를 어기고 만약 의무 수행 중인 기사를 공격했다면 해당 일을 주도한 깃발은 꺾임을 면치 못한다.

그만큼 적대에 대한 최상의 명분을 제공하는 행위였으며,

반대로 의무 수행을 빌미로 위장한 기사들이 다른 깃발을 공격하는 사례 역시 처참한 말로가 예정되어 있을 만큼 금기시되는 일이다.

그렇기에 해당 의무를 실행하기 위한 전제 조건 역시 까다롭다.

첫째,

토벌대 전원은 판금 종류의 갑옷을 입을 수 없다.

규정된 복장은 오롯이 사슬 갑옷과 그 위를 덮는 서코트 뿐이며, 서코트엔 자신의 소속이 어디인지를 확실히 표시해야 한다.

아이베리아에서 판금 갑옷은 명백히 깃발 간의 전투를 상징하는 전투복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전투 시에 서코트를 입을 수 없는 건 아니다.

서코트는 일종의 보험과 같은 개념으로 통했고, 해서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 그에 대한 몸값을 두둑하게 받을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해서 서코트는 자신의 소속을 가장 확실히 피력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였으니까.

해서 어느 가문의 외동, 또는 젊은 적장자들 대부분이 갑옷 위에 서코트를 입었다.

그렇다고 높은 자들의 전유물도 아닌 것이, 일개 병사들 역시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었기에 손수 만든 서코트를 입히기도 했다.

물론 이런 사례들과 무관하게 서코트를 입었다고 해서 전부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런 서코트를 기사로 이루어진 부대 전체가 입었다는 건,

말 그대로 의무를 수행 중인 기시단이란 뜻.

전쟁 이후 승자의 위치에 소속된 기사들이 전투가 아닌 의무를 다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므로 깃발 달린 자라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다.

이어서 토벌대 결성의 전제 조건 둘째는,

해당 토벌에 대한 공문을 근방 스물에 달하는 깃발에 보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런 그들이 감시역으로 보낼 새들과 임무 끝까지 동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의무라는 이름으로 상호 간에 불가침 영역을 만들기 위한 조약이었다.

* * *

토르킨 선생께 얼핏 들었던 내용 위로, 관련된 책의 지식을 뒤덮은 나는 이제 의무와 관련된 사정에 관한 모든 것을 꿰뚫을 수 있을 만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집사부가 조합에 직접 주문했던 서코트 한 벌이 저택에 도착했다.

마치 유리 겉면에 다닥다닥 붙은 물방울처럼,

특유의 반짝거리는 질감과 가벼움을 자랑하는 사슬 갑옷에 베나즈 가문의 인장이 박힌 검은 서코트로 이루어진 한 벌.

방어력은 판금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영롱한 모습 그 자체만으로 봤을 땐 확실히 전투만을 상정해서 만들어진 갑옷은 아니었다.

나무로 만든 상체 모형에 갓 들어온 서코트를 비치하던 바돈은 그러면서 날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토벌대에 참가하려는 기사들의 신청서가 막 전서구를 통해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습니다, 한 번에 모아서 올려드릴까요? 아니면 도착하는 대로 전달해 드릴까요?”

“도착하는 대로 전달해 주십시오.”

서코트 자락을 늘어놓던 바돈은 내 대답에 완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티히트라의 일도 끝나고,

우려했던 다른 깃발의 공격도 없는 이 상황에서 바돈의 저 미소만큼 어울리는 것이 또 있을까.

처리해야 할 일들은 많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나 역시 한시름 놓은 기분이다.

당장 눈앞에 전투 사후, 괴물에 대한 토벌의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택을 벗어나 바람을 쐴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참.”

막 자리를 뜨려던 바돈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가던 길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만찬은 빌로즈 가문의 가니아님께서 직접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그렇습니까, 늦지 않게 가도록 하겠습니다.”

켄타나의 귀족임에도, 그녀는 베나즈 가문의 집사부가 되기로 결심 한 사람이다.

그런 그녀를, 그리고 그녀의 가문을 보다 신경 써야 하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의무다.

이런 내 마음을 전달받았는지,

바돈은 싱긋 웃으며 인사를 올린 뒤 자리를 떴다.

* * *

베르긴 오르테는 묵묵히,

또 흐트러짐 없이 눈앞의 장작을 깨트리는 데 열중했다.

그가 유독 이렇게 열성을 다하는 이유는,

그만큼 최근에 마음이 흐트러질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주님께서 곧 토벌대를 꾸리신다고 들었다.

내심 베르긴은 그 토벌대에 들어가 영주님과 함께 친목을 도모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베나즈의 깃발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던 때.

새벽에 우연히 마주친 영주님과 검을 맞대어 대련했을 때가 그에겐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었거든.

하지만 형식상 베르긴은 아직 견습에 불과했다.

이미 그의 실력은 일반 기사에 버금갈 만큼 출중했지만, 그것이 견습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진 못했다.

거기에 더해,

아버지인 베르융 오르테의 위치를 생각한다면.

베르긴의 토벌대 참여는 여러모로 다른 기사들에게 불편한 감정을 유발 시킬 수 있다.

그 모든 것을 이해한 베르긴은 그저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는 것만이 자신의 할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한참,

온몸을 땀으로 적셔가며 장작을 나누던 그의 뒤로 베르융이 걸어 들어왔다.

지위와 걸맞지 않게,

그의 사택은 참으로 소박하고 조촐했지만.

그런 조촐함이 되려 웅대해 보일 정도로, 마당에서 빨래를 널고 있던 아네즈는 존경을 잔뜩 담아 베르융을 맞이했다.

“오셨어요?”

베르긴 역시 도끼를 내려놓고 영락없는 아들의 모습으로 정답게 인사를 올렸다.

“아버지, 오늘은 어떠셨습니까?”

베르융은 가죽 튜닉을 벗으며 미간에 얹힌 피로를 떨구려는 듯, 얼굴을 제법 익살스럽게 찌푸리고는.

“늘 똑같았지.”

바깥에선 보기 힘든 엄살을 퍽 부렸다.

땀에 찌든 리넨셔츠를 나풀거리던 베르융은 곧이어 마당에 놓인 탁상에 걸터앉은 채,

“베르긴, 이리 와 봐라.”

아들을 손짓해 불렀다.

그렇게 베르융 만큼이나 장성한 아들이 옆에 다가와 걸터앉으면,

“곧 토벌대가 출발한다는 건 알고 있느냐?”

베르융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에 베르긴의 두 눈이 반짝였다.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 아비는 이번 토벌대에 참가하기 어려울 것 같구나.”

이어지는 베르융의 말에 베르긴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직 변경엔 정비할 것들이 산재해 있어, 그것을 두루 살피고 정비하는 것도 기사의 의무이기에 저버릴 수가 없구나.”

“하지만…, 아버지.”

베르융은 투박한 손을 들어 베르융의 어깨에 얹었다.

“그러니 오르테 가문을 대표해 네가 다녀오도록 해라.”

순간,

젊은 것의 활달함이 끓어 올랐는지.

베르긴은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숨기지 못했다.

그것을 본 베르융은 털털히 웃으며 아들의 머리가 헝클어지도록 쓰다듬었다.

“영주님은 세대 차이 나는 이 늙은이보다, 같은 또래인 너를 더 좋아하실 거야.”

“정말 그렇게 결정하신 겁니까?”

“그래, 그리고 토벌대의 의무가 끝나는 대로 너는 리케니엔으로 가거라.”

“아버지…,”

베르융은 어질러진 아들의 머리카락을 손수 정돈해주며 정답게 말했다.

“네게도 꿈이 있을 것 아니냐, 그런데 아비의 그늘이 꽤 크구나. 벗어나 한번 뿌리를 내려 보아라. 다만 그렇게 작심했다면 오르테 가문의 후광 따위는 바라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래도 특유의 투박함을 내비친 베르융이었지만.

베르긴은 오히려 담담하게 맞받아쳤다.

“그리하겠습니다, 아버지.”

* * *

“이게 말로만 듣던 켄타나의 토속 음식이군요.”

설탕물에 삶은 밤을 으깨 만든 눅진한 소스.

그 안에 푹 절인 다진 고기와 겉을 그을린 파.

달 것 같지만 담백하고, 물릴 것 같지만 계속해서 물고 싶은 푸짐한 음식에 칭찬을 아낄 수가 없었다.

이런 내 칭찬을,

가니아 빌로즈는 기꺼이 받아들고 크게 기뻐해 주었다.

“아직 부족한 솜씨입니다, 그런데도 좋게 봐주시니 감사해요.”

세라에게 영향을 받은 것인지 가니아는 단출한 튜닉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 덕분에 그녀의 화사한 외모가 더욱 부각 되었다.

테리아가 아침의 파편 그 자체라면,

그녀는 아침을 받고 일어난 한 송이 꽃 같아.

“켄타나에는 제법 규모가 큰 수수밭이 있습니다, 덕분이 자유민들 모두가 값비싼 단맛을 잘 알고 있지요.”

“그렇습니까, 언제 한 번 켄타나에 들러보고 싶군요.”

내 대답에 가니아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봄의 꼬리가 걸쳐진 여름쯤에 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사실 켄타나의 수수는 날씨 파편으로 철저하게 재배되는 것이라서요.”

“그럼 엄밀히 말하면 이 음식은 제철 음식에 해당하겠군요.”

“네 맞아요.”

둥글게 솟은 광대에서 금방이라도 잘 익은 복숭아 두 알이 떨어질 것만 같다.

그러나 그렇게 얼굴을 붉히면서도 가니아는 곧잘 내 눈을 마주쳐왔다.

“참, 곧 토벌대를 꾸려서 나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이윽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가니아는 이쪽으로 화제를 전환했다.

“그렇습니다.”

“엘르길 경 역시 토벌대에 참가하실까요?”

“아무래도 그런 자리에 빠져선 안 되는 분이시니, 반드시 참여하실 겁니다. 또 그분의 신청을 제가 반려할 일도 없을 테고요.”

내 말에 가니아는 은은한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부디 모두가 무탈하시길.”

* * *

만찬을 마치고 접견실로 돌아와 바돈이 미리 올려놓은 두루마리들을 펼쳤다.

그럼 두루마리마다 찍혀 있는 기사 개개인의 인장이 눈에 들어온다.

가버트 로셀란.

엘르길 마스.

가르렝 멜리즈.

요함비크 비조스.

가르웨.

그리고 조이 크레비디.

테티르 론바즈.

음,

두루마리를 넘기다가 제법 반가운 이름을 발견해 덜컥 기대를 품는다.

베르긴 오르테.

이어 각 기사의 이름들을 확인하는 와중.

조금은 이질적인 내용을 가진 두루마리 하나를 발견했다.

아직 중립을 지키는 깃발이지만, 그럼에도 귀공의 깃발에 관심이 있어 새는 아니지만 가지게 된 새의 이름으로 직접 동행할 기회를 접할 수 있을지 감히 여쭙겠습니다. 빠른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 네드릭 나르드. 추신, 백로 -

특이하군.

백로라는 이명을 단 자라니.

중립을 지키는 깃발이라면 순전히 베나즈의 깃발에 대해 그 어떤 적대도, 호의도 가지지 않았다는 뜻일 거다.

하면 그들을 동행시키는 것으로 끝내는 포섭의 장까지 맞닿을 수도 있다는 거겠지.

설령 적으로 돌아선다고 해도 이 토벌이 계기가 되진 않을 것이고, 동시에 적에 대한 정보를 미리 만나 알게 되는 것일 수도 있으니.

이것의 승낙에 따른 손해는 없어 보인다.

여러 고민을 거듭한 뒤 마지막 장으로 넘기자,

역시 이번에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과 인장이 박혀 있다.

솔직히,

지금 막 생각하고 보니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이름이기도 해.

어쨌든 결정적으로 1차 원정에 도움을 받았던 입장이니까.

그러니 당신의 신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리나 에커즈’

* * *

햇빛 한 줄기조차 눈뜨지 못한 새벽.

서코트를 입은 기사들이 속속들이 저택 앞으로 집결했다.

그 수는 눈동자만으로도 셀 수 있을 만큼 적었지만,

이러한 소수가 가지고 있는 힘은 상상으로도 감히 품을 수 없을 만큼 거대했으리라.

이제 그들 사이를 가로지른 나는,

뒤돌아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출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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