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의무 (2)
“기사의 땅과는 달리 서쪽 땅에선 세력 간의 전투가 끝나면 곧바로 그 현장에 고용한 원정 길드를 투입시킴다. 전쟁 이후에 나타날 괴물의 현상을 대비해서요.”
차출되어 토벌대와 동행하게 된 소여가 진지한 얼굴로 설명을 이었다.
“물론 서쪽 땅은 이곳처럼 대규모 전투가 그리 빈번히 발생하진 않슴다. 대부분이 기업 간의 전쟁이고 그마저도 그들이 고용한 용병들이 전투의 주축이거든요.”
“그런 소규모 전투라고 하더라도 사후 원정 길드를 동원하는 것을 보면, 방치할 시 꽤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한단 소리겠군요. 맞습니까?”
내 대답에 나란히 말을 몰고 있던 소여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맞슴다. 괴물은 통상적으로 3원칙이란 개념으로 이해됨다. 그 3원칙이란 ‘발단’ ‘전이’ 그리고 ‘증폭’ 이죠.”
“발단, 전이, 증폭…,”
“발단이 괴물을 만들고 그 괴물은 바탕인 환경에 전이되며 전이된 환경은 괴물의 증폭을 부름다. 그땐 창궐이라는 표현을 써야 할 만큼 걷잡을 수가 없어짐다.”
그렇다면,
“예컨대 그 발단이 죽고 사라진 자의 넋이라고 한다면, 뒤따라 올 후폭풍은 더욱 거대하단 소리겠군요.”
“정확히 이해하셨슴다. 사념은 발단 가운데서도 최고 등급임다. 이 등급으로 파생되어 나타난 괴물 놈들은 하나같이 골치 아픈 놈들이죠. 전염병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망울진 그림자와 뒤엉켜 말 그대로 일대를 작살 내버리는 괴물 그 자체가 될 수도 있슴다.”
그의 말을 들으며 자연스레 베빌리와의 만남을 떠올린 나는,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베빌리와 함께 마주쳤던, 어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모호했던 그 그림자 같은 괴물.
그것도 분명 어떤 죽음으로부터 나타난 현상이었거든.
만약 그런 괴물이 어느 작은 마을 한가운데에 갑자기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말 그대로 마을 하나가 증발해버리고 말 거다.
왜 전후 토벌이 기사의 의무인지,
다시금 뼈저리게 느꼈다.
“소여, 사념을 통해 나타나는 괴물들의 대략적인 종류가 무엇인지 기사 모두에게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잔뼈 굵은 기사들은 이미 수차례 의무를 다해봤기에 마주할 상황들이 익숙한 것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기사들도 분명 있기에 소여의 정보가 도움이 될 거야.
내 말에 소여는 별 고민도 하지 않고 즉답했다.
“여부가 있겠슴까.”
* * *
이미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그래도 환기 한 번 시켜보게씀다.
괴물은 각자의 생태, 그로 인한 파급력을 포함 해당 객체의 물리, 정신적 강함 따위를 분류하는 단위로 ‘트로피’라는 것을 사용함다.
짧게 기원을 설명하자믄,
트로피란 원정 길드 내에서 괴물 토벌의 상징적 증거인 머리를 의미하기 때문임다.
이런 트로피 앞에 숫자가 붙는데,
가령 해당 괴물에게 2 트로피라는 등급이 매겨져 있다믄,
그건 고놈이 통상적 개념의 괴물 두 마리 만큼 강하다는 뜻임다.
사실 길드 업계에선 숫자를 빗댄 전문용어를 쓰지만, 여기선 그냥 알기 쉽게 숫자 그 자체로 부르겠슴다.
자 첫번쨈다.
보통 전투가 끝난 직후 가장 먼저 나타나는 괴물은 등급 1 트로피 짜리인 ‘아피즈’ 임다.
정확히 말하면 요놈은 사념을 발단으로 일어난 녀석이 아닌 피 묻은 잔디나 흙 따위로부터 발생하는 놈인데…,
생긴 건 응어리진 토사 덩어리처럼 생겼슴다.
요놈들은 시체 따위를 뒤덮어 오랜 시간에 걸쳐 소화하는데 간혹 소화하지 못하는 무기 따위도 같이 삼켜 꿀렁거리는 것 자체만으로 위협이 되기도 함다.
요놈이 전이 되면 골치가 아픈데, 전이 되는 순간 증폭에 접어들어 하나의 거대한 늪지대가 되기 때문임다.
의도적으로 비를 쏟거나 하지 않는 이상 개선되지 않는 늪지대가 되어버려 주변 생태를 박살냄다.
아, 깊은 숲에서 발생하는 아피즈는 다름다.
걔넨 환경상 떨어진 나뭇잎과 간혹 있는 동물시체 따위를 주워 먹는데, 그런 놈들은 정상적인 생태의 늪지대가 되기 때문임다.
어쨌든 1 트로피인 만큼 기사님들 입장에선 애들 흙장난 수준에 불과할 검다.
두 번째는 마찬가지로 1 트로피에 해당하는 ‘보울’임다.
요놈들은 전쟁터에서 미처 회수하지 못한 장비 가운데, 생전 사용자의 애착이 강한 것들로부터 발생함다.
지나치는 모든 걸 체류시키고 또 엉키게 만드는 사념 특성상, 뭉쳐진 바람 따위로 일으켜져 전쟁터에서 보였던 적대 의지를 계속해서 내비치는 놈들임다.
사념에 의한 발단치곤 그리 위협적이지 않지만…,
만약 보울의 발생 시발점이 투구라면 이야기는 달라짐다.
투구로부터 발생한 보울은 따로,
3 트로피에 해당하는 ‘디보울’로 명명됨다.
디보울은 투구를 뒤집어쓴 채 일어나 주변 장비들을 누더기처럼 기워입어 자신을 보강하기까지 함다.
요놈들이 전이되어 증폭하게 되면,
하나의 작은 소대 규모가 되어 움직이는데.
이는 5 트로피인 ‘디보울 에페’라 불림다.
“죽어간 병사들의 넋이 그리도 서글픈 게야, 우리가 달래줘야지.”
네, 테티르 경께서 말씀하신 대롬다.
이들은 엄밀히 말하면 죽어서까지도 생전의 전쟁을 위해 움직이는 사념이니 그들의 안식을 위해서라도 꼭 쓰러트려야 함다.
간혹…,
그럴 일은 거의 없지만 미처 회수하지 못한 기사의 투구를 발단으로 보울이 발생할 때가 있다고 들었슴다.
이건 저도 길드 생활을 할 당시 선배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그렇게 발생한 보울은…,
13 트로피, ‘움브라’라 불린다고 함다.
아무래도 원정 길드 전체적으로 아이베리아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없다 보니 저 역시 움브라만큼은 무성한 소문으로밖에 접하지 못했슴다.
“버려진 망국이나 배신을 당해 사후 처리조차 받지 못한 기사가 이 땅 어딘가에 있긴 할 거요, 이렇게 말하는 나도 직접 보진 못했지만…,”
그렇슴까, 조이 경께서도 보지 못하신 거라면 제가 이를 소문으로만 접했던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감다.
다음으론 이번 토벌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주적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놈임다.
5 트로피 ‘무스카’
발단과 동시에 전이와 증폭이 이뤄지는 놈임다.
여기 계신 기사님들 대부분은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함다.
무스카는 밤을 집어먹은 여러 사념을 지칭한 것으로, 환한 대낮에도 특유의 짙은 땅거미를 만드는 녀석임다.
마치 파리 떼처럼, 두 발 걷는 자의 형상인 그것들은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에 게걸스레 달려듬다.
호전성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이번 토벌에서 가장 많이 부딪히게 될 괴물일 검다.
“그것들은 보통 밤공기 따위로 엮여 있으니, 그 기류의 역방향으로 베어 넘기면 상대하기 수월하지.”
엘르길 경의 말씀이 딱 맞슴다.
그럼 설명은 대충 여기까지 하겠슴다.
아차, 놓친 게 있슴다.
‘논’에 대해 말씀드리지 못해씀다.
논은 두 발 걷는 자들의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 중립적인 존재를 말함다.
동시에 거의 토벌이 불가능할 정도로 그 존재감이 엄청난 녀석들인데,
전투 사후에 나타나는 논으로는 25 트로피 ‘멜소르’가 있슴다.
왜 트로피가 붙었냐 하면,
25 트로피는 업계 내에서 상식적으로 토벌 불가한 것들을 뜻하기 때문임다.
해서 편의상 논으로 추정되는 존재들도 모두 25 트로피에 해당시킨검다.
아무튼 멜소르는 거대한 산의 그림자가 살아있다면 딱 그 모습이지 않을까 싶은,
무지막지한 덩치를 자랑하는 녀석임다.
만약 우리 목적지에 멜소르가 먼저 와 있다면 이는 오히려 좋은 일이기도 한데, 녀석은 지나가는 모든 곳의 사념을 증발시켜버리기 때문임다.
“한번 본 적이 있소, 의무를 다하기 위해 파견을 나갔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그곳만 유독 어두운 밤처럼 보였었지. 알고 보니 밤이 아니라 어떤 밤의 장막 같은 게 유유히 지나가고 있더군. 심지어는 형상은 있으나 실체는 없는지 뒤늦게 알아차렸을 땐 나도 이미 녀석의 품 안이었소”
“그래, 그때가 생각나는군. 구경나온 인근 아이들과 나란히 서서 그저 넋을 놓고 봤었지.”
가르렝 경, 요함비크 경께서 보셨던 게 바로 멜소르임다. 아마 의무를 반복해오신 기사분들이라면 쉬이 보셨을 거라 생각함다.
다만 그것이 그저 게으른 구름의 그림자로 착각해 별것 아닌 것처럼 넘기는 사례가 많은 탓에,
젊은 기사들은 아직도 그 존재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함다.
* * *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일 것임에도,
중년의 기사들은 소여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리곤 새로운 감회를 유감없이 밝혔다.
전문적인 길드, 그러니까 업계에 몸담아왔었던 인물의 설명이 그들에게 새로움을 선사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쪽으론 거의 알지 못하는 내겐,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흥미로웠다.
그 가운데서,
움브라를 설명하는 대목은 제법.
내 마음을 시큰 거리 게 만들었다.
해당 내용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던 조이 역시 말을 다 마친 뒤 조용히 나를 보며 눈빛을 보내왔었다.
배신을 당한, 엄밀히 말하면 이제는 망국의 기사인 맥레인.
그의 의지와 사념은 지금 나라는 그릇에 담겨있다.
만약 그가 끝내 좌절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그 그릇은 내가 아닌 움브라라는 괴물이 아니었을까.
람비를 지나 펠테아로 향하는 교차로 직전.
토벌대는 두 번째 휴식을 취했다.
기사들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허드렛일 역시 모든 기사의 몫이었기에,
“영주님, 왼쪽으로 조금만 더!”
“조이, 이 정도면 됐습니까?”
“예!”
나도 그들 틈에 섞여 한참 천막 치는 대에 열중했다.
그리고 그건 꽤 즐거운 경험이었다.
“불은 제가 지피겠습니다.”
막 천막 중앙의 지주를 올린 조이가 다른 기사가 모아온 장작 앞에 쭈그려 앉았다.
이어 중지와 엄지를 여러 차례 부딪치던 그는,
딱딱거리는 손가락 사이로 힘없이 튀어나오는 불똥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벌써 연금술사를 찾아갈 때가 됐나…?”
그런 그의 옆에 나란히 쭈그려 앉은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깜짝아!”
화들짝 놀란 조이는 곧장 내 모습을 보곤 흐뭇하게 웃으며 친절히 자신의 손을 펼쳐 보여주었다.
“엄지와 검지에 그려진 검은 그림이 보이십니까? 연금술사가 새겨준 것입니다.”
“단지 그것만으로 손가락을 튕겨 불을 붙일 수 있단 말입니까?”
“산불 재를 빻아 만든 염료로 그려진 것이거든요, 다만 손가락을 튕기면 튕길수록 새겨진 그림도 닳아 없어져 버립니다. 그럼 지금처럼…,”
딱!
다시 한번 맹렬히 손가락을 튕겨보지만, 역시나 조이의 손가락 사이엔 힘없는 불똥 몇 개만이 튈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신기한 구경 했다.
그래서 은연중에 미소를 짓고 있는데,
막 우리 둘 앞에 기사 하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의 등장을 눈치채고 고개를 든 나는,
“어…,”
멋쩍은 어색함을 표출해야만 했다.
“아리나 경.”
인형 같은 외모 속, 강인한 심지 같은 걸 드러낸 그녀는 그대로 우리와 마주한 자리에 쭈그려 앉아 손가락을 비볐다.
그러자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작은 전류.
그것이 장작 끝을 검게 칠하더니 급기야 작은 불꽃으로 일어났다.
“이야, 벼락이라니. 그런 세련된 각인을 해주는 연금술사가 이 땅에 있단 말이오?”
순전한 호기심을 내비친 조이의 말에,
그녀는 슬쩍 나를 보더니.
내가 짓고 있는 호기심 어린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슬쩍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마리아의 것을 잠시 빌려왔습니다. 사념은 밝은 것으로 풀어줘야 의미 있는 것이니까요.”
그때 그,
줄벼락을 내리치기 만들었던 여기사의 인챈트를 빌려온 것인가.
손가락으로 저런 미세한 분출까지 하는 걸 보면,
이미 그에 대한 인챈트의 숙련도 역시 상당한 수준으로 보여.
* * *
짧은 휴식이 끝났다.
테티르는 커피가 든 잔을 쏟아 모닥불을 죽였다.
다른 기사들은 합세해 천막을 거두었고, 최후방에 있는 마차에 실었다.
어느새 그 마차의 뒤로는 많은 새가 따라붙어 있다.
“이제 바로 펠테아를 지나 의무를 다합시다.”
내 말에 바로 옆에 있던 조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산자락,
빼꼼 고개를 내민 약초를 캐던 두 아이는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에 화들짝 놀라 하던 행동을 멈춰야 했다.
그러다 둘 중 어린 사내아이가 한 곳을 가리키며 흥분한 듯 외쳤다.
“형아! 저기!”
그러면 큰아이는 작은아이의 손가락 끝을 따라 눈동자를 굴린다.
그곳엔,
막 서코트로 무장한 기사 무리가 큰길을 가로질러가고 있었다.
아마도 바람은 저곳으로부터 나부낀 거겠지.
그저 존재들의 움직임만으로도 주위의 기류를 일으킨 거겠지.
“기사님들이다!”
작은아이의 외침에 큰아이는 내색하진 않았지만, 속으로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 땅에서 기사는,
특히나 어린 아이에게 기사는 선망의 대상 그 자체였으니까.
두 소년은 기사 무리가 막 펠테아를 지나쳐 고개를 넘어가는 순간까지, 고개를 번쩍 든 토끼처럼 한참을 내다보았다.
그러곤 퍼뜩 정신 차린 큰아이가 작은아이의 어깨를 감쌌다.
“오늘은 내내 바람이 셀 거야, 일찍 들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