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73화 (273/365)

273화. 의무 (3)

“그래, 아버지를 대신해 왔다고?”

막 메이스를 거꾸로 쥔 테티르가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다.

그 물음에 베르긴은 테티르와 마주 선 채 마찬가지로 거꾸로 잡은 대검을 치켜들었다.

“그렇습니다.”

직후 대답이 이어지고,

둘은 눈을 마주친 채 어떤 신호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러한 신호가 나뉘기 무섭게, 둘은 치켜든 무기를 무서운 기세로 내리찍었다.

파박!

그러자 걸쭉하게 뭉쳐져 있던 진흙 덩어리가 흙탕물을 토해내며 격렬히 꿈틀거렸다.

“하긴, 바쁘긴 할 테지. 새롭게 확장된 변방만 해도 골치가 아플 거야.”

그들이 방금 찔러 죽인 것은 ‘아피즈’

1 트로피에 해당하는, 죽은 피로 발단된 진흙 덩어리였다.

그것의 꿈틀거림이 멈춘 걸 확인한 테티르는 곧바로 인근에 있는 또 다른 아피즈에게 걸어갔다.

그런 그의 뒤를 베르긴이 바삐 쫓았다.

“어떻게, 잘 지내고는 있는가?”

이어서 다시 메이스를 거꾸로 쥔 테티르의 질문에, 그와 마주 선 베르긴은 은은한 미소와 함께 즉답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베르융의 자식답게, 그 베르긴의 기골 역시 장대하기 이를 데 없었음에도.

테티르와 마주 선 지금만큼은 영락없는 앳된 청년에 불과했다.

이는 베르긴 역시 절절히 느끼고 있었는지, 아버지 앞에서 보였던 당당함은 어디 가고 쑥스러움에 쩔쩔매기 급급했다.

“나중 일은 잘 설계되어 가고 있고?”

테티르 역시 같은 걸 느끼고 있었는지, 유독 어울리지 않는 자상함을 내비치며 질문을 계속했다.

“글쎄요, 제 기준에선 잘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와중에,

파박!

둘은 다시금 합세해 아피즈 하나를 제거했다.

아피즈는 1 트로피에 해당하는 괴물 가운데서도 비교적 약한 축에 속한다.

그렇다고 해도,

괴물은 괴물이기에 충분히 위협적인 존재임은 틀림없다.

가령,

갯벌에 빠졌다고 쳐보자. 그런데 그 펄이 체중과는 별도로 스스로 스멀스멀 기어올라 얽매인다면?

성인이라도 그것에 당황하는 순간 목숨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 아피즈를 처치하는 것도 상당히 골치다.

점도가 상당한 그 덩어리를 양분할 만큼 외부에 큰 충격을 가해야 하는데,

그게 또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위 문제는 지금 같은 상황에선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자들 모두가 기사였으니까.

“하하, 확실히 베르융을 닮았군.”

호탕하게 웃은 테티르는 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뒤를 베르긴은 제법 근성을 부려가며 쫓았다.

“어떤가.”

그렇게 또 다른 아피즈 위에 선 테티르가 방금 마주 선 베르긴에게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내 밑에서 일해보지 않겠는가, 종자가 되어 볼 생각이 있어?”

그의 말에 베르긴의 두 눈이 커졌다.

그의 밑에서 종자 생활을 시작하는 것만큼 영광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기사로서 살아가길 맹세한 자라면 아마 다른 의견은 쉬이 내놓지 못할 것이다.

“그 나이쯤이면 이미 오르테의 검술 대부분을 익혔을 테고, 하면 하급기사 자리를 바로 줘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이어 다시 눈빛을 주고받은 둘이,

파박!

아피즈 하나를 제거하고 나면.

베르긴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테티르의 눈치를 살피기 바쁘다.

“문제는 베르융이가 자기 자식을 내게 보낼지가 관건인데…, 사실 자네만 괜찮다면 난 상관없거든.”

“기회가 주어진다면.”

헐레벌떡.

베르긴은 막 걸어가던 테티르를 붙잡듯 입을 열었다.

그의 그 열성적인 반응에,

등 돌아 서 있던 테티르의 입가엔 작은 미소가 번졌다.

“말씀하신 그 기회가 제게 주어진다면,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베나즈의 깃발 아래,

시기상 본 세대를 주무르게 될 2세대 기사의 첫 출발이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아서.

* * *

“저 새들 말이야, 아까부터 거슬린단 말이지.”

발리르의 기사 요함비크가 짙은 콧수염을 실룩거리며 불평을 던졌다.

그럼 그와 함께 있던 발리르의 기사 가르렝은 피식 웃으며,

툭툭,

풍만한 요함비크의 배를 두들긴다.

“그럼 자네가 맨날 뜯는 그 육포라도 좀 던져주던가, 아무리 교육을 받았다곤 하지만 짐승은 짐승이야. 먹이 주는 자에게 기기 마련이라고.”

“내 것을 왜 줘? 그것도 어디서 날아왔을지 모를 새에게! 그리고 저놈들은 짐승이 아니라 어딘지 모를 깃발들의 눈깔이야. 저놈들에게 먹을 걸 주는 건 적국과 내통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가르렝은 곧장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요함비크, 모든 걸 비약하려 들면 너만 피곤해져. 이 모든 건 그저 아이베리아의 전통이라고.”

하지만 요함비크는 물러서지 않고 반문했다.

“그래 전통, 원래대로라면 저 새는 상호 간 암묵적 감시를 통한 의무의 고결함을 지키기 위한 것이겠지.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저들이 그런 이유로 새들을 보냈을까?”

“그럼?”

“그럼이라니? 적대 관계인 우리를 염탐하기 위해 새들을 보낸 거잖아! 만약 여기서 인챈트의 힘을 휘두른다면 저들은 해당 힘의 공백을 계산해 즉시 우리 땅을 침공할 거야.”

“요함비크, 이건 그냥 으레 있는 기사의 의무야. 반대로 우리의 이 의무를 적들이 증명해주는 꼴이라고. 저 새로서 말이야.”

잘 정돈된 턱수염을 한 차례 쓰다듬으며 늘어놓는 가르렝의 논리적인 말에,

요함비크는 말없이 입맛을 다셔야만 했다.

“전투가 격렬하긴 했어, 그렇지.”

이어서 그런 요함비크의 마음을 이해했다는 듯, 너그러운 가르렝의 말에.

“그랬지, 그때 나를 위해 공간을 만들어줬던 매키는 창에 목이 꿰어 즉사했어.”

“매키라…, 내가 알던 그 매키가 맞나? 발리르의 바구…,”

요함비크는 슬쩍 고개를 숙더니 씁쓸히 웃었다.

“맞아, 바구니 집의 차남이었지. 원정 닷새 전에 결혼한 새신랑 비욘은 오른팔을 절단했어.”

“그렇구먼.”

그 씁쓸한 웃음에 전염이라도 된 듯, 가르렝은 같은 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번엔 요함비크가 퍽 웃으며,

“으레 있는 일이지.”

다가가 가르렝의 등을 두들겼다.

직후 요함비크는 방금 자신이 보였던 태도가 부끄러웠는지 한동안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둘이 마주 선 채 도끼와 창으로 아피즈들을 제거해 나가는 와중.

눈치를 보던 가르렝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결코 그 모든 게 헛된 일은 아니야.”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요함비크는 살짝 의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그렇지, 맞지? 명분은 우리에게 있는 거지?”

그의 의심에 가르렝은 슬쩍 고개를 틀었다.

곳곳에 땅거미가 진,

불과 보름 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평야 위.

저 너머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보기 위해.

아름답고, 고결한 그의 모습을 확인한 가르렝은 이제 요함비크에게 자신 있게 대답했다.

“명분은 우리에게 있네, 그러니 그 명분에 죽어간 자들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겨야 해.”

* * *

조이는 알고 있었다.

아닌 척하지만,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한 것을.

엘르길 마스.

켄타나를 주름잡은 발언가이자 기사인 그의 그 능구렁이 같은 처세는,

조이도 쉬이 당해낼 수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구태여 그것을 경계할 필요는 없었다.

어쨌든 엘르길은 디안 베나즈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였으니까.

뭐 위치상,

먼저 말문을 트는 것은 베나즈 가문의 서기 쪽이 해줘야겠지.

겸사겸사 그 위치만이 가질 수 있는 정보력도 드러낼 겸.

조이는 살짝 우스꽝스러운 콧수염을 실룩거리며 마주 선 엘르길에게 말했다.

“최근 가니아 빌로즈님이 영주님께 만찬을 대접했다고 들었습니다.”

엘르길은 기다렸다는 듯 반색했다.

“아, 서기관께서도 알고 계셨군요! 영주님께서 굉장히 만족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켄타나의 토속 음식이 어딜 가도 빠지지 않긴 하지요.”

거기서 조이는 한 차례 더 속으로 안도했다.

진정 기뻐하며 답하는 엘르길의 저 얼굴 속에서 그 어떤 의도도 건질 수 없었으니까.

그 말은,

엘르길에겐 지금 어떤 정치적인 일보다 베나즈 가문에 대한 일에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 조이는 이제 생각을 아예 바꾸기로 작정했다.

일말의 경계를 느껴가며 거리를 두기보다는, 아예 서로 어깨를 맞댈 수 있을 만큼 아군으로서 가까워져야겠다고.

“그러고 보니 영주님께선 켄타나를 한 번도 방문하지 않으셨었지요, 이참에 의무를 마치고 바로 켄타나에 들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조이 경, 그거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말 나온 김에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켄타나에 새를 보내겠습니다.”

엘르길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화답했다.

“가니아님도 고향이 그리우실 테니 방문 일정에 맞춰 켄타나로 오시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어쨌든 가니아님도 집사부의 일원이시니 직접 영주님을 안내하는 게 서로가 더 편하지 않겠습니까?”

엘르길,

자네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군.

말을 마친 조이는 내색하진 않았지만, 활짝 웃는 엘르길의 얼굴을 보며 그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서기관, 여러모로 정말 장점밖에 보이지 않는 일정입니다. 원정으로 인한 케케묵은 갈증적 감정들도 모두 해갈시킬 겸, 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좋은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겠소.”

* * *

“불평은 하지 않겠소, 어쨌든 아이베리아의 전통을 어긴 건 내 쪽이니 말이오.”

말의 갈기처럼 거칠게 뻗은 갈색 머리.

적색 눈동자를 간질이듯 침범한 짙은 속눈썹.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드리워진 특유의 나른함 때문인지 오히려 헐렁해 보이는 인상이 가득한 그 남자의 말에,

머리 하나만큼 더 큰 아리나 에커즈는 그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렇게 남자는 무안함을 느꼈는지,

“사실 불평이랄 것도 없지, 당신과 같은 미녀와 이렇게 마주 보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요.”

넉살 좋게 머리를 긁적거리며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 붙임에도 불구하고,

아리나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다가 한참 뒤에 그 입을 열었다.

“네드릭 나르드, 당신이 서쪽 깃발의 의무에 관심을 보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녀의 말에 네드릭은 주근깨가 가득한 광대를 움찔거리다가, 아까와는 달리 은근한 말투로 맞받아쳤다.

“아이베리아의 열강 중 하나라 평 받는 에커즈가 베나즈의 깃발을 동행자로 고를 줄도 누가 알았겠습니까.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이에 아리나는 일말의 표정 변화 없이 순수히 궁금증을 드러냈다.

“그토록 움직임 없이, 잔잔한 물결 위에 있던 백로가 어찌 파문을 일으키는 날갯짓을 했을까요.”

그 말에 네드릭은 바로 우측,

걸어 나가고 있는 디안 베나즈를 눈에 한가득 담은 뒤 다시 아리나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리나는 그런 네드릭을,

전보다 더 살기 어린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로, 그 눈에 저분을 함부로 담지 마십시오.”

“진정하시오, 마주 선 이가 에커즈였기에 한 번 바라볼 수 있었던 거였습니다.”

네드릭의 순수한 웃음에, 아리나는 김이 팍 샜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아리나 경, 아무래도 그분을 직접 뵈어야겠습니다.”

“이유는.”

“여덟 자루의 검과 관련된 일입니다.”

“그곳의 공백을 채울 생각입니까.”

“글쎄요, 이 아이베리아에 저 깃발을 기다리고 있는 공백이 한둘이 아니라서…,”

“그럼.”

“궁금하니까요.”

네드릭은 처음으로 얼굴에 내려앉은 나른함을 벗고 날카로운 눈으로 아리나를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우아한 백로보다는,

강렬한 맹금에 가까운 것이었다.

“쥔 자루를 놓지 않으리라 맹세한 자들은 고질병이 하나 있습니다, 같은 맹세를 한 자들에 대한 궁금증이 바로 그것입니다.”

“저분이 갖고 있을 비전이 궁금하다, 그겁니까.”

“아리나 경, 그쪽도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베나즈’…, 한때 이 땅의 정점에 서 있었던 이름입니다. 그것도 강함이라는 단어 안에서 말입니다. 그 이름으로 만들어진 계승은, 그 비전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네드릭의 말에 아리나는 쉬이 부정하지 못했다.

“제 가문을 잘 알고 계실 테니, 제가 이곳에서 허튼짓하지 않을 거란 것도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네드릭의 설득에,

아리나는 갑자기 고개를 반대로 돌리더니,

조금은 허탈한 미소와 함께.

“애초에 이쪽의 허락이 필요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나직이 대답했다.

그녀의 그 고갯짓을 따라 움직인 네드릭의 두 눈엔,

막 다가온 디안 베나즈가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진흙으로 범벅이 된 부츠.

그 위로 흙탕물 자국이 선명한 서코트.

방금까지 격렬히 휘두른 흔적이 선명한 망치 한 자루와,

허리에 채워져 있는 명분의 증거.

네드릭은 이제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이렇게 동행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신 나르드 가문의 네드릭이라고 합니다.”

바로 디안에게 도장을 찍듯 네드릭은 인사를 올렸다.

그럼 디안은 마찬가지로 예를 보이며 그에 화답했다.

“반갑습니다, 이참에 서로 긍정적인 걸 가지고 돌아가 크게 부풀릴 수 있기를.”

하지만 디안은 곧바로 단호함을 부렸다.

“그 전에, 마땅히 주어진 일을 먼저 해결해야겠지요. 아리나 경?”

그의 부름에 아리나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버트 경이 절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니 같이 가시죠.”

“명 받들겠습니다.”

직후 아리나는 시원시원한 걸음으로 디안의 옆에 섰다.

네드릭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엔,

뭔지 모를 묘한 승리감이 깃들어 있다.

“그럼, 일 마치는 대로 대면의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디안의 배려에 네드릭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디안과 아리나가 사라진 뒤에야,

네드릭은 다시 나른함을 뒤집어쓴 얼굴로 근처 그루터기 위에 걸터앉았다.

“이야, 뭘 해도 서른 합 전에 둘 다 나가 떨어지네…, 역시 직접 보기 전까진 자세한 수읽기는 무린가.”

그리곤 태연히 어떤 말을 중얼거리고는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