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74화 (274/365)

274화. 의무 (4)

“그게 무슨 소리인지…?!”

중년의 여인이 당혹한 얼굴로 항변한다.

이에 앞니 하나가 없는 초로의 남자가 맞받아쳤다.

“말했다시피, 본군이 빠져나간 지금 우리 초병들로는 저들을 막아낼 수 없어.”

남자는 그렇게 말하곤 대충 놋쇠를 두들겨 만든 투구를 고쳐 썼다.

“애초에 이 깃발은 이런 방식으로 무너질 운명이었던 거야, 소피. 그러니까 괜히 저들의 입성에 반발하지 마. 그러다 치르지 않아도 될 희생을 치를 수도 있어.”

남자의 말에 소피라 불린 여인은 턱이 갈라지도록 이를 씹으며 분개했다.

“막실라 가문의 초병이라면, 그 목숨을 다해서라도 깃발 아래 자유민들을 지켜야 하는 게 의무 아니야?!”

그 말에 남자는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그렇다면 애초에 무리한 출병은 하지 말았어야지, 나 말고 막실라 가문 놈들에게 따져! 뭐 돌아와봤자 여기 깃발은 한참 전에 바뀌었을 테지만.”

“끝까지, 다 같이 항쟁해야 하는 거잖아. 이렇게 손 놓고 포기해 버리면 안 되는 거잖아!”

거친 일을 해온 듯, 피부가 다 일어난 그 억척같은 두 손으로 남자를 붙든 소피는 이제 애원하기 시작했다.

“이런 씨발, 어쩌라고! 어쩌라는 건데! 고작 초병 이백으로!”

남자는 소피를 매몰차게 내팽개쳤다.

“솔직히 말해서, 네가 초병 대장인 나와 이렇게 겸상할 수 있는 것도 같잖은 부녀회장이란 자리 덕분이잖아? 그렇게 며칠을 광장에서 개지랄 떨어 행정에 꼽사리 낀 주제에!”

바닥에 쓰러진 소피는 그 위로 쏟아 부어진 힐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억척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성을 지키는 초병이 자유민 모두를 버리고 도망치려 하고 있지. 작금의 개지랄은 누구의 것일까?”

“이 쌍년이…!”

짝!

남자는 망설임 없이 소피의 뺨을 후려갈겼다.

우악스러운 사내의 힘에,

상체 전반이 들썩일 정도로 나가떨어진 소피는 입안에 고인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그 두 눈엔 더한 표독을 담고 있었다.

“눈 안깔아…?!”

“이젠 초병 대장조차도 아닌 놈의 명령을 내가 왜 들어야 하지?!”

소피의 도발에 남자는 순간 이성을 잃은 듯,

초점 잃은 눈으로 그녀를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흐트러진 그녀의 옷매무새를 보던 남자는 묘한 표정을 지은 채 바깥에 대고 소리쳤다.

“두 놈만 들어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 안으로 들어온 초병 둘.

“저년 붙잡아.”

그의 매서운 명령에 쩔쩔매던 병사 둘은 서둘러 소피의 양팔을 붙잡았다.

“이거 놔!”

그녀가 애처롭게 몸부림쳐 봤지만,

둘의 붙들림은 더더욱 단호하기만 하다.

이어서 초병 대장은 그녀의 허리를 들쳐 책상 위에 패대기쳤다.

직후 끝단이 다 헤진 그녀의 치마를 걷은 그가 이어서 자신의 낡은 벨트를 매만졌다.

“어차피 지척까지 다가온 벨난드 놈들에게 당할 바에야, 같은 깃발 사람에게 먼저 당하는 게 좋지 않겠어? 안 그래?”

“이… 미친 놈…!!”

그렇게 하의를 다 벗은 사내가 그녀 위로 엄습하려던 찰나,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혔던 문이 박차고 열렸다.

그 너머로 쏟아져 들어온 건 세 명의 여성.

이들의 손에 들린 것은 쟁기와 빨래 몽둥이, 그리고 곡괭이였다.

“이 새끼들이…!”

“소피!”

이내 셋 가운데 가장 덩치 큰 여인이 매섭게 달려들어 초병 대장을 밀쳤다.

그다음 뒤따른 여인 둘이 몽둥이와 곡괭이로 그를 곤죽으로,

퍽!

쩍!

아니, 곤죽보다 더한 것으로 만드는 그 과정에서.

소피를 붙들고 있던 두 초병은 얼음처럼 굳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직후 피칠을 한 여인 하나가 뒤돌아 초병 둘을 노려보았다.

“꺼져.”

여인의 쏘아붙임에 두 초병은 서로가 먼저 나가겠단 일말의 실랑이 끝에 겨우 밖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소피, 괜찮아?”

“기어코 일이 벌어졌군.”

두 여인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난 소피는 담담하게 입안에 고인 끈적한 침을 퉤 뱉었다.

“리아가 막 정찰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벨난드의 군세가 정말 코앞까지 닥친 모양이야.”

“역시나 본군이 다 빠져나간 걸 알고 공성에 쓰일 자재들을 미리 후방에 빼놓기까지 했다던데.”

쏟아지는 우려 그리고 걱정.

그러나 그 가운데 소피의 헝클어진 치마를 정돈하던 한 여인만이 벌떡 일어나,

“괜찮은 거지, 소피…?”

심심한 위로를 던졌다.

그러자,

소피는 얼굴에 묻은 억척스러움을 잠시 거둔 채.

정말 처량한 모습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 모습에 세 여인은 조용히 서로를 가득 껴안았다.

방금 살인을 저질렀다는 실감도 그제야 몰려왔을까, 남자를 곤죽으로 만들던 두 여인의 피 묻은 손도 파르르 떨려왔다.

이들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가족을 위해 치열히 평범을 직조하던 어머니들이다.

평범을 이루는 그 실들은 하나같이 거친 것임에도, 그 고왔던 손을 찢어가며 빚어가던 그녀들이.

서로를 끌어안고 잠깐의 슬픔을 나눈다.

이윽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은 듯, 부어오른 한쪽 뺨을 움찔거리던 소피는 천천히 경비대 건물 밖을 나섰다.

밖은 한창 눈이 내리고 있었다.

탑의 변덕이라기보단,

북쪽 리시론에서 벌어진 전쟁의 여파였다.

그게 아니면 무너진 에르앵의 깃발 위로 쏟아진 겨울의 여파가 지금까지 이어진 것일 수도.

사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소피는,

난간 아래 운집한 여인들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그 수만 해도 족히 수백에 달한다.

대다수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이 거대한 성 내에 일상을 만들어가던 직조공으로서.

이윽고 소피가 한쪽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버리지 않는다!”

퉁퉁 부어오른 한쪽 뺨 때문에,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어눌하고 웃긴 것이었지만.

글쎄.

그것은 운집한 자들의 결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 뿐이다.

“우리는 버리지 않을 것이다, 해서 싸우라면 싸울 것이다!”

그렇게 소피의 처절한 결의 아래.

에커즈라는 이름으로 결성된 부녀회가 다가온 전쟁을 위한 항전을 개시했다.

* * *

“…, 에커즈의 기반이 그러했기 때문에 지금 기사단이라는 이름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이군요.”

한참,

잔잔한 바람 소리처럼 이어지던 아리나의 이야기가 끝나고.

그에 대한 감상을 담백하게 내놓았다.

그럼 그녀는 자부심 어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쑥스러운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기사단의 이름을 얻는 과정도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거머쥐었고, 그것을 지금 아리나 경이 몸소 증명하고 계신 것이고요.”

“과찬이십니다.”

그녀는 나와 나란히 걷다가,

이내 뭉친 토사를 사이에 두고 자연히 마주 섰다.

“항전을 마친 뒤엔 어떤 일들이 있었습니까?”

내 질문에 그녀는 부무장으로 챙겨온 에스톡을 거꾸로 잡은 채 흔쾌히 답했다.

“보름 뒤, 전투에 나갔던 막실라 가문이 복귀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막실라의 행정은 에커즈가 장악한 뒤였고 때문에 막실라 가문은 에커즈의 전공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렇게 해서 기사단으로서 재창단 된 것입니까?”

“아뇨, 에커즈를 이끌었던 대모 소피가 막실라 가문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일이 많이 어그러졌습니다.”

“…, 내전으로 번진 것이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태연한 눈빛으로 내게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에 맞춰 망치를 내리치면, 그 망치 끝부분에 에스톡이 정확히 맞물려 꽂힌다.

“네, 하지만 막 전투에서 복귀한 막실라 가문의 군세는 기본적인 정비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고 반대로 에커즈는 치열한 항쟁을 통해 수많은 장비와 경험을 축적한 상태였습니다. 거기다 조직의 지주까지 상실한 터라 그 분노가 구름을 가를 정도였지요.”

“결국엔 막실라 가문을 끌어내리고, 에커즈가 일선을 장악한 것이로군요.”

“그렇습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이 외부에 알려지고 나서부터 우리 기사단은 그리 곱지 못한 시선을 받아야 했습니다. 어쨌든 정통을 물리친 사통이었으니까. 해서 명예는 둘째치고 교역 부분에서부터 문제가 생기다 보니 기사단임에도 용병 일로 삶을 꾸려나가야 했죠.”

막 양분된 아피즈를 발로 툭툭 차던 아리나는,

무뚝뚝하면서도 조금은 맹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용병 일을 하도 하고 다녀선지, 자연스레 전투적 소양이 거듭해 쌓이더군요. 어느 순간 아이베리아 중원 내에서도 손꼽힐 만큼 말입니다.”

“그 정도의 명성에 다다랐음에도, 베나즈의 깃발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슬쩍 본론을 내비치자 그녀는 숨김없이 털털히 대답했다.

“명성이 명예가 될 수는 없습니다. 에커즈 기사단에게 필요한 건 정통성. 거기로부터 나오는 명예. 그리고 아이베리아라는 땅의 인정입니다.”

“베나즈의 깃발이 그 갈증을 해갈시켜 줄 거라 믿습니까?”

“믿음은 행동을 만들고 행동은 결과를 만들지요. 에커즈 기사단은 늘 그래왔던 것을 반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베나즈의 이름으로서 마땅히 할 일을 하겠습니다. 에커즈 기사단의 그 바람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에커즈.

솔직히 직전까지는 안에 담긴 속내가 어떤 것일지 짐작도 되지 않았었다.

그들의 군세와 그 군세가 흘리는 카리스마는,

베나즈의 깃발 아래 군세의 것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냉정히 말해 베나즈의 군세는 몇몇 맹장이라 불리는 기사들을 필두로 이뤄지는 위압, 그리고 압박이 다야.

에커즈처럼 마치 한 몸같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그런 군세를 아직 베나즈는 갖지 못했다.

그러니 더욱 값지다.

에커즈 기사단은.

그리고 그들의 의도마저도.

나는 조용히 아리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공표식 이후 으레 마주해 나눈 소회와는 다른 것이었다.

같은 기사로서 보내는 경의.

그래, 그것이 맞을 것이다.

이미 잔뼈 굵은 기사인 아리나는 그런 내 의도를 알아차린 듯.

처음으로 그 아름다운 얼굴을 피어 만개한 꽃 같은 미소를 지은 채 내 손을 맞잡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리나 경.”

“명, 받들겠습니다.”

* * *

평원 바깥쪽에 보이는 아피즈 모두를 거두고 나니 날이 제법 어둑어둑해졌다.

그리고 그 시점부터가,

본격적인 토벌의 시작이었다.

진흙으로 더럽혀진 부츠와 서코트 자락을 이리저리 흔들어 털어대던 조이가 다 핀 연초를 던지며 작게 읊조렸다.

“굶주린 땅거미들이 이제 쏟아지는 밤을 삼키려 일어서겠군.”

그럼 옆에 있던 테티르는 조용히 메이스를 고쳐 잡는다.

그런 그의 행동만으로도 주위에 꽤 거친 바람이 일었다.

이에 바로 옆에 있던 엘르길이 헝클어진 서코트 자락을 정돈하며 투덜거렸다.

“경, 조심 좀 합시다.”

이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베르긴은 남몰래 깊은 미소를 한 입 베어먹었다.

이곳에 도열한 자들은 모두,

항간에선 두 발 걷는 병기라 불리는 기사들이다.

그들 사이에서 튀어나온 게 거친 불똥이 아닌 가벼운 티격태격이라니.

극히 상반된 그 모습은 마치,

바깥 모습과 안 모습이 다른 아버지 베르융을 보는 것 같아서.

베르긴은 잠깐의 지침을 털어내는 순수한 웃음을 지은 것이다.

그러나 이내 베르긴은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이제 정말로 기사들 사이에서 불똥이 튈 것이거든.

그러면서 조용히 앞 열에 서 있는 디안의 뒷모습을 바라본 베르긴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같은 또래,

아무것도 모르는 사석에서 마주쳤다면 금세 술을 나누며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를 또래.

그 역시 지금 자신과 같은 긴장을 하고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조금은 슬플 것 같다.

저 자리는,

고독한 것이니까.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더욱 고독해지니까.

아.

그것을 알기에.

그 뒤를 따르는 기사들은 더욱 맹목을 바치는 것이로구나.

막 기사들과 나란히 서 있던 베르긴은, 어떤 시선을 통한 깨달음을 얻은 듯.

찰나 동안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윽고,

평야 너머로 짙은 그림자들이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덜그럭거리며 일어난 망자의 것들이 그림자에 들려진 채.

두 발 걷는 자의 형상으로 다듬어진 것이다.

보울, 디보울.

그것들로 구성된 디보울 에페.

이내 마주한 기사 가운데 테티르가 메이스를 치켜세운 채 조금은 울적한 목소리로 외쳤다.

“기다려라, 편히 잠들게 해줄 테니…!”

그 말을 끝으로,

디안이 슬쩍 고개를 돌려 도열한 기사들을 훑었다.

기사들은 반사적으로 디안에게 시선을 집중했고, 그런 집중된 시선을 잡아끈 디안은 그대로.

허리춤에서 0을 뽑아 들어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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