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75화 (275/365)

275화. 안식

여울지듯 쇄도하는 그림자.

이를 역류하듯 앞으로 나아가는 기사들.

충돌의 첫 시작은 디안의 검, 새비안으로부터.

팍!

달 깨지듯 튀어나온 은빛 섬광과 함께, 디보울 하나가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 뒤로 바짝 쫓은 기사들이 연달아 몰아치며,

퍼벅!

육중한 타격음과 함께 디보울들의 기세를 팍 죽였다.

어떤 전술이나 요령 따윈 이 자리에서 필요하지 않다.

다만 앞에 놓인 어둠을 거둘 뿐이다.

그래서 기사들은 쏟아지는 그림자 속에 과감히 뒤엉켰다.

간간이 그림자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빛과 뻘건 불똥이 튀어 오를 때면,

뒤이어 몇몇 기화한 그림자들의 희뿌연 연기만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한창 충돌 일선이 고착화되갈 즈음,

우악스러운 사내 하나가 그것을 뚫고 나섰다.

발리르의 기사, 테티르 론바즈.

“흐아아!”

열렬히 끓는 함성과 함께 앞으로 치달은 그가 손에 든 메이스를 크게 휘둘려 쳤다.

팍!

하얗게 질린 바람의 장막이 전방에 켜지고, 뒤늦게 딸려온 충격음이 고막과 살갗을 따갑게 때린다.

그 충격파에 마주한 그림자 여덟이 결속된 망자들의 장비를 흘린 채 산화했다.

그런 테티르를 향해,

좌측으로 치달은 그림자 하나가 팔 부분에 결속된 대형 방패를 내세워 달려들었다.

“군세의 전열이었던 자여, 이제 쉬어라!”

비록 버려진, 상태 나쁜 방패임에도 불구하고 굳건함을 자랑하던 그 방패 앞에서.

테티르는 되려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토했다.

이윽고 늙은 나무의 밑동만 한 주먹을 쥔 테티르는 다가오는 방패에 대고 그대로 내질러,

콰직!

말 그대로 산산조각을 내버렸다.

완력으로 방패와 결속된 디보울을 산화시킨 테티르는 이제 메이스를 한 차례 크게 휘둘러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런 테티르의 뒤로,

막 미끄러지듯 튀어나온 한 사내.

리케니엔의 기사, 그리고 베나즈의 서기.

조이 크레비디.

그가 막 테티르에게 날아오던 불상의 화살을 말끔히 쳐냈다.

“그러지 않아도 됐는데!”

이에 테티르가 투덜거렸지만,

“천만에.”

되려 능청을 부린 조이는 들고 있던 세이버를 몇 차례 돌리며 마주한 그림자들을 향해 나아갔다.

얇고 유려한 그의 세이버는 손목에 의해 돌려질 때마다 묘한 은빛을 흘렸는데,

그 빛은 어느새,

작은 물방울과 함께 튀기기 시작했다.

이 물방울은 필시,

21년, 이다치오.

세상을 적신 하늘의 눈물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무겁기 그지없는 홍수의 파편이리라.

그렇게 디보울 무리 속으로 미끄러지듯 파고든 조이는 가진 검술,

‘플루투스’를 전개했다.

거대한 남만으로부터 전파된 검술 플루투스는,

특히 휩기와 같은 강력한 횡 베기가 특징다.

거기에 조이의 인챈트가 가진 특성까지 더해졌으니,

그 휘두름은 한차례 몰아치는 파도와 진배없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시작된 검의 궤적은,

조이 앞에 선명한 초승달을 남겼다.

그 초승달에 찢긴 허공에선 금세 거센 물줄기가 터져 나왔고, 빠르게 고여 후방에 있던 보울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직후.

이런 상황을 기다렸다는 듯 달려 나와 조이 옆에 나란히 선 기사.

엘르길 마스가 들고 있던 할버드를 크게 치켜세웠다.

그는 곧 복부를 호흡으로 팽배시킨 뒤, 화려한 외모완 어울리지 않는 야인의 표정과 께.

“하…!”

짧은 기합을 내지르며 할버드를 땅에 내리찍은 뒤 뭔가를 퍼 올리듯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조이가 흘려놓은 비가 할버드의 움직임에 맞추어 일순간 커다란 파도로 일어난다.

그것은 이내 보울들의 군세를 한차례 휩쓸어버렸다.

덕분에 보울들의 기세가 크게 줄어들자,

이번엔 뒤쪽 측면을 정리하고 있던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우수수 앞으로 쏟아져 나갔다.

발리르의 3기사 요함비크 비조스의 육중한 몸이 엄청난 탄력을 자랑하며 치솟는다.

직후 떨어져 내리며 묵직한 철퇴를 사방으로 휘두른 그의 뒤로는,

마찬가지로 발리르의 3기사 가르렝 멜리즈가 쌍수로 교차해 든 에스톡을 풀어헤쳐 고속의 찌르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런 둘 사이에,

마지막 발리르의 3기사인 가르웨가 가슴 앞에 세워 잡은 아밍 소드를 휘둘러.

쾅!

내치는 벼락에 맞춰 앞선 두 기사의 공백을 신속하게 메꿨다.

이어 좌측 전열.

“과연, 오르테 가문의 적장자로군.”

“과찬이십니다, 반대로 켄타나의 고압과 이렇게 등을 맞대고 싸울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베르긴과 가버트가 서로 등을 맞댄 채 짧은 담소를 나누고 있다.

곧 가버트는 씩 웃으며 하얀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 영광도 내게 과찬이네.”

가버트의 두 손에 의해 돌아가기 시작하는 긴 창대.

과연 사람이 만들어낸 선풍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작은 소용돌이와 같은 것이 이내 가버트 앞에 맺힌다.

그의 뒤로,

자신의 키만 한 중검을 고쳐 잡은 베르긴이 자세를 다잡는다.

둘 사이에 그 어떤 인챈트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서로에게 이끌린 것을 증명하듯,

곧이어 둘에게서 고결할 만큼 깔끔한 중후가 터져 나왔다.

사선과 횡에 해당하는 궤적의 잔상이 동시에 남을 정도로 중검을 빠르게 휘둘러 나가는 베르긴과,

선풍의 잔상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 중앙을 꿰뚫어 찌르는 가버트.

이 둘의 압도적인 움직임은 주변 그림자에겐 아침과 같은 것이었다.

* * *

아리나 에커즈는 무표정한 얼굴로 마리아에게서 빌려온 금장 세이버를 들어 올렸다.

[12년, 프 템프레]

[밤을 속인 간헐적 아침 ‘빛나는 소나기’]

인챈트의 일부를 담아 휘두르는 게 아닌, 말 그대로 인챈트가 가진 재해를 펼치는 것.

그에 걸맞게 곧 금장 세이버 주변에 굵직한 전류가 휘감기기 시작한다.

동시에 그녀의 머리 위 하늘도 밝아진다.

이 정도면 괜찮겠다 싶었는지, 아리나는 오른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곤 치켜든 세이버를 아래로 크게 휘둘렀다.

쾅!

콰릉!

그러자 밝아진 하늘로부터 쏟아지기 시작하는 줄벼락.

그것들은 곧장 보울들의 정수리에 꽂혀 들어갔다.

사실 이런 방식이라면 아리나라고 할지라도 금세 지쳐버릴 것이다.

저 앞에 노련한 기사들이 왜 인챈트의 일부만을 드러내며 싸우겠는가?

다 효율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가진 힘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면서 최대한의 지속력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전투의 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나 역시 그걸 모르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 그녀는 직전 누군가와 나눴던 결의 때문에.

평상시보다 기합이 바짝 들어간 상태였다.

사실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서투르다.

무적이라는 칭호가 붙을 정도로 위신이 높은 에커즈 기사단의 단장이 된 직후,

어느 순간부터.

무뎌진 것이다.

다만 무뎌졌다고 해서 그 천성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 막 20대 초반에 접어든 여인이 무뎌져봤자 얼마나 무뎌졌겠는가.

그녀는 무뎌진 그 나름대로 감정을 표출하는 법을 익혔다.

문제는,

쾅!

쾅!

그 표출의 방식이 실력 행사라는 것에 있겠지만.

* * *

주섬주섬.

네드릭이 막 그루터기에서 일어섰다.

부산스럽게 뻗친 머리를 대충 정돈한 그는, 슬슬 난폭해지는 기류를 흠뻑 마시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이런 살아있는 날씨는 아이베리아에서밖에 느낄 수 없지.”

살갗을 자극하는 그 기류에 덩달아 호승심이 일었을까.

두근거리기 시작한 가슴에 손을 얹은 네드릭은 쉬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기상 대부분이 탑의 조립에 매몰된 다른 땅과는 달리, ‘기사’ 그 자체가 하나의 기상이 되는 땅이라니. 이 얼마나 벅찬 땅인가.”

그러나 그 흥분은 곧 허무하게 휘발되어 버렸다.

시조를 읊듯 느긋하게 중얼거리던 네드릭의 얼굴에 다시 나른함이 뒤덮였기 때문이다.

번쩍!

저 너머 하늘에서 섬광이 일었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네드릭은 잠자코 있다가,

“쾅.”

쾅!

벼락 치는 소리가 들려올 타이밍에 맞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베나즈라는 이름에 걸맞게, 품은 기세 역시 대단하구먼. 그 에커즈까지 함께 할 줄은 정말 몰랐어.”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둘러보던 네드릭은 결심한 듯 앉은 자리에서 튕겨나듯 일어섰다.

“그러나 베나즈라는 그 이름만으로는 결코 품을 수 없는 기세이기도 하지. 아이베리아에서 베나즈라는 이름은 금기에 해당한 것이니까. 해서 요는,”

네드릭은 곧 벼락과 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평야 너머를 바라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베나즈의 이름을 가진 자. 그가 지금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는 뜻 아니겠어?”

삐죽.

입술을 내세운 네드릭은 꺼벙한 표정으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곳엔 휘청거리는 가지에 위태롭게 걸터앉은 수십의 새들이 있었다.

“니들이 고생이 많다, 감시역 하기가 보통 일이 아니거든. 그렇다고 가까이 다가가 보기엔 그 초라한 깃이 버텨주지 못하겠지.”

보란 듯이 새들을 향해 측은한 눈빛을 보내며 놀리던 네드릭은,

“니들 몫까지 내가 가까이서 잘 보고 올게.”

휘휘 휘파람을 불며 천천히 평야 너머를 향해 걸어갔다.

* * *

보인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모든 궤적이.

그러나 그것들로 역전을 그려내기엔 되려 모든 동선에서 손해를 본다.

그래서 그저 궤적 사이로 보이는 빈틈을 향해 검을 휘두를 뿐이다.

새비안은 내 휘두름에 맞춰 허공을 은색으로 칠했다.

날의 은밀함이 어찌나 대단한지, 휘두르는 내내 바람의 그 작은 비명조차 들리지 않는다.

단지 자루를 잡은 손으로부터 베인 바람의 진동이 잔잔히 느껴질 뿐.

디보울은 새비안이 머금은 은색 도료에 칠해져 여지없이 흩어져갔다.

그러다가 더는 새비안이 침투할 길이 보이지 않으면,

새비안에 담긴 0의 말단을 내뿜었다.

그저 압축된 공기를 사방으로 터트리는 것에 불과한 그 행위는,

그럼에도 지극히 파괴적이어서.

옭아맨 무장으로 벽을 새운 디보울들을 모조리 무너트렸다.

경쾌한 도약, 직후 이어지는 나의 비전.

나의 스탠스.

강과 약의 경계가 없는 무수한 궤적이 그림자들을 꿰맨다.

이것은 깃발을 위해 깃발 아래 죽어간 자들을 위한 장례.

그렇기에 깃발을 내세운 기사들의 고유한 의무다.

휘두름을 거듭해 나가보니 문득,

가슴 한쪽이 뜨거웠다.

어쩌면,

비로소 나는 아이베리아의 사람이 되었구나 싶어서.

슬슬 끝이 보인다.

땅거미로부터 솟아오른 그림자들의 숫자는 이제 눈대중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줄었다.

그렇게 맨 뒤에 있는 디보울을 향해 달려나간 나는,

정확히 목에 해당하는 부위에 얇은 궤적을 그린 뒤 한쪽 발을 축 삼아 한 바퀴 돌았다.

그러다가.

퍼뜩.

들고 있던 한쪽 발을 내디뎌 돌아가던 몸을 멈춰야 했다.

방금 뭔가를 포착한 것 같거든.

그래서 본능적인 감각을 쫓아 고개를 돌려보면.

무리에서 떨어져 있는 보울 두 개체가 보였다.

가죽과 풀 따위를 갑옷처럼 옭아맨 그 보울 앞에는,

어린 두 아이가 겁에 질린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인지와 즉시 이뤄진 행동.

0의 폭발적인 풍압을 이용해 바람을 가르며 앞으로 치달은 나는,

이내 두 보울의 지척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계산상 둘을 한 번에 가로지르는 궤적을 그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마저도 인챈트의 힘을 쓰면 가능하겠지만,

그러면 아이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최대한 빠르게,

하나를 베고 그 반동으로 연달아 나머지 하나를 몰아친다.

그 시간 내에 아이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을까?

직전까지 의심을 거듭한 나는 그럼에도 행동을 개시했다.

빠르게 허리를 좌측으로 튼 뒤 보울의 목 위로 사선을 그어…,

팍!

베었다.

그리고 그런 내 머리 위로 들려오는 또 다른 날렵한 소리.

확!

고개를 들어 보니,

내 옆에 한 남자가 막 바닥에 착지했다.

네드릭 나르드.

“잘 보았소, 그대의 검.”

그 말을 끝으로 보울 두 개체가 거의 동시에 스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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