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76화 (276/365)

276화. 검들.

일어났던 그림자들이 흩어지고,

그것에 얽매여 있던 부산물들이 쏟아지면.

그 가운데 서 있던 기사들은 그제야 한숨을 돌리며 자리에 주저앉는다.

선명히 점찍힌 별들을 올려다보며,

누구는 작은 병 안에 담긴 술로.

다른 누군가는 직전의 과정을 통한 안식의 바람으로.

저마다 메마른 부분을 짧게 적신 뒤에는 너 나 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 작업에 착수했다.

그림자들이 산화하며 남긴 것.

하얀 잿가루와 간간이 보이는 밤으로 이루어진 실크.

기사들은 그것들을 수거해 후방에 대기시켜놓은 마차에 실었다.

마차를 지키고 있던 소여가 말하기를,

그림자의 잿가루는 연마제를 비롯해 가공 방법에 따라 향료, 약품 등으로 만들 수 있는 고급 재료라고 했다.

거기에 밤 실크는 그 잿가루에 비해 수거된 양이 현저히 적었지만, 의류와 관련해선 명품의 기초에 해당할 정도로 필수적인 소재.

이것들과 관련해 조이와 이야기를 나눈 결과 잿가루는 군대의 보급품으로, 밤 실크는 베나즈 가문에서 관리하고 있다가 따로 치하를 위한 증정품에 소비하기로 했다.

그렇게 뿌연 새벽이 다 되어서야 모든 작업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우리들의 의무를 지켜보기 위해,

각지에서 날려 보낸 새들은 이미 어디론가 다 흩어져 날아갔는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중엔 분명 언제라도 우리에게 적대를 드러내며 존재를 과시할 깃발도 있겠지.

해서 두렵지 않다곤 못하겠다.

보이지 않는 적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법이니까.

“자네들이 마차와 먼저 출발하게 우린 공과 함께 뒤따라 복귀할 테니.”

땀으로 번들번들해진 얼굴을 한 차례 훔친 테티르가 발리르의 세 기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에 가르웨가 대표해 테티르에게 예를 보였다.

“그럼, 먼저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같은 발리르의 기사라고, 테티르가 따로 그들에게 편의를 봐준 것이다.

“공, 출발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직후 테티르는 내게 다가와 보고했다.

뒤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조이는 조용히 만지던 고삐를 내려놓고 안장 위에 올라탔다.

맨 뒤에 서성이고 있던 아리나는,

아직 내 눈치를 살피며 안장 가방을 정돈 중이었다.

“그럼 출발합시다.”

주위 사람을 한바탕 훑은 나는 안장 위에 올라타,

왼편 구석에 홀로 떨어져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따로 나눠야 할 이야기도 있고 하니, 가장 뒤에 붙어 따라가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에 테티르가 걱정을 내비쳤지만,

“경, 공께서 말씀하셨지 않나.”

조이가 그를 제지했다.

그러자 테티르는 콧수염을 한차례 씰룩거리다가, 온순한 표정으로 수긍한 듯 자신의 말 위에 올라탔다.

그 틈에 나는 조이에게 눈짓을 보냈고, 그런 조이는 우스꽝스러운 수염을 실룩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자, 출발하자!”

조이의 말을 끝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행렬.

마지막으로 아리나가 내게 인사를 건네며 지나치기 무섭게, 멀찍이 떨어져 있던 사내가 고삐를 놀려 내게 다가왔다.

“이리도 양해를 구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네드릭 나르드.

여유인지, 아니면 나른한 것인지.

평온한 표정으로 해맑게 인사를 해오는 그에게.

“머나먼 길을 따라 올라오셨을 텐데, 적어도 그에 상응하는 것을 쥐여드려야 도리 아니겠습니까.”

천연덕스럽게 대답하자,

“하하, 소인이 생각보다 넓은 강물에 발 담그고 있었나 봅니다.”

그는 꺼벙한 모습으로 활짝 웃으며 답했다.

* * *

“저는 여덟 자루 검이라 불리는, 어느 명명된 명칭 가운데 속한 사람입니다.”

반응을 떠볼 목적으로 곧장 본론을 찔러 넣었다.

동시에 집중 부린 눈으로 상대의 얼굴을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반응이,

있다.

적어도 여덟 자루의 검과 관련된 무언가를 접해본 적이 있겠군.

찰나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끝으로 금세 태연한 모습으로 돌아온 디안 베나즈가 대답을 이었다.

“그렇습니까.”

“예, 검밥으로 먹고 살아온 그 축적된 시간에 대해 아이베리아는 그런 이름을 붙여주었답니다.”

어느새 디안 베나즈는 내 이야기를 경청할 준비를 마쳐놓고 있었다.

확실히 베나즈라는 이름에 걸맞게 무인 기질을 타고난 자인가.

검과 관련한 이야기에 순수한 관심을 보이는 걸 보면.

“비록 3자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라곤 해도, 붙여진 이름이 고착되면 그것이 정설이 되기 마련이지요. 여덟 자루의 검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은 각자가 쌓아 올린 명성 따위가 한 개로 묶여 명명되었을 뿐이었지만, 지금은 하나의 조직과 같은 모양이 되었습니다.”

“그 조직의 유대는 끈끈한 편입니까?”

그의 질문에 나는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하…, 애석하게도 유대랄 것이 없습니다. 모양만 조직의 형상을 띠고 있을 뿐이지 정확히는 여덟 자루 검이라는 명명을 이용해 각자도생을 꾀할 뿐이니까요.”

디안 베나즈가 나를 바라본다.

이에 나는 시인하듯 말을 이었다.

“제 가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디 검 말고는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던 외골수 가문이, 그 여덟 자루 검이라는 칭호 덕분에 먹고 살고 있거든요.”

“그 칭호를 통해 어떤 일을 하는지 여쭈어봐도 됩니까? 가령 용병 일이라던가…,”

“유파 창설, 그리고 전파입니다.”

대답했을 뿐인데 내 가슴이 덩달아 뛰었다.

그만큼 우리 가문에 있어서 검술은 항상 벅차오르는 것이었으니까.

“저희 선조께선 가문의 검술이 끝내 사라져 없어지는 비전으로 남는 걸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여 명맥을 잇기 위해 외부에 검술을 노출하셨지만 이름도 없는 가문의 검술을 익히려는 자는 없었지요.”

“그런데 여덟 자루 검이라는 칭호를 얻은 뒤에는…,”

“예, 나르드 가문은 지금 아이베리아 남동쪽을 아우를 만큼 꽤 유명한 유파가 되었습니다.”

디안 베나즈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알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나르드 가문 전체가 여덟 자루 검이라 불리진 않을 테고, 지금 그 칭호는…, 당신의 것이겠군요.”

“맞습니다.”

“그때 보낸 편지에 적힌 추신의 백로는, 해당 칭호에 따른 별칭입니까?”

“부끄럽게도 누군가 붙여준 이름이 제 이명이 되어버렸답니다.”

디안 베나즈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슬슬,

그가 본론을 꺼낼 차례다.

내 짐작대로 그는 곧 날카롭게 치켜뜬 눈으로 물었다.

“이제 와 묻지 않을 수 없군요, 귀하가 보낸 그 관심의 방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겁니까.”

제법,

단호한 물음에 나도 모르게 두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불과 직전에 그가 휘두른 검의 단편을 바로 눈앞에서 봤잖나.

“디안 공, 여덟 자루 검은 지금 그 이름에 맞지 않게 두 자리가 비어있는 상태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어떤 문제라도 발생하는 겁니까.”

“고착이라는 건, 바꿔 말하면 중간에 어떤 갈등 없이 순탄히 굳을 수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여덟 자루 검은 서로 아군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적군 역시 아니었지요. 앞서 말했듯, 그저 명성을 통한 각자도생만을 쫓았으니까요.”

“그런데요?”

“최근 두 공백 중 하나를 메꾸고 들어오려는 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여덟 자루 검 내에 크고 작은 소요를 일으키려는 것처럼.”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거기에 더해 그런 자가 일으킬 소요들을 기회 삼아, 잠자코 있던 다른 몇 검들 역시 기다렸다는 듯 들고 일어설 겁니다.”

“그런데 왜 그런 고민을 제게 토로하시는 겁니까.”

“귀하께 도움을 구하고 싶어서입니다.”

망설임 없는 내 대답에 디안 베나즈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무리 부정해도 베나즈라는 이름은 한때 아이베리아에서 가장 거대한 대명사였습니다. 하여 여덟 자루 검 내에서 일어날 일들을 중재시켜주십사 하고 이렇게 직접 찾아뵌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내 절박함을 전달할 수 있다면,

그깟 조바심 따위는 얼마든지 내비칠 수 있다.

그러나 디안 베나즈는 좀 더 냉정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이어 그는 살짝 내 쪽으로부터 시선을 떼곤,

“영악하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군요.”

입에서 조곤조곤함으로 벼린 비수를 꺼내 들었다.

“그게 무슨…?”

“대명사였기에, 분명 베나즈라는 이름이라면 그리해줄 것이리라 생각했기에 이렇게 부탁을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막 아이베리아를 설득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베나즈라면 이런 부탁을 기회로 보고 적극적으로 도와줄 거라 생각한 겁니까.”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조바심 때문에 헤아려야 할 것을 놓친 것이다.

“각자도생이라고 했지요, 물론 귀하와 같은 올곧은 목적으로 살아가는 일원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반대급부에 해당하는 저열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자들도 있겠지요.”

그래,

백번 맞는 말이다.

최근에 생긴 공백,

그 자리를 메우고 있던 검이 지금 디안 베나즈가 말하는 반대급부에 해당했으니까.

화약의 성지, 피로스의 청부업자…,

이어 디안 베나즈는 정면을 주시한 채 단언하듯 말했다.

“해당 문제로 여덟 자루 검이란 유구한 명칭이 무너져 내린다면, 그 명칭은 애초에 그만한 그릇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여덟 검의 일원들을 규합해 뜻을 하나로 모으는 쪽이 그릇의 깊이를 늘리는 데 좋지 않겠습니까?”

무어라,

변명할 거리가 하나 생겼었는데.

그러니까 그런 일을 통해 여덟 자루 검을 이루는 일원들에게 우리 쪽 여지를 내준다는 그런 변명 거리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디안의 짧은 말이 그런 내 의지를 모조리 날려버렸다.

“여덟 자루 검의 일원으로서 얻게 된 지분을 지키기 위해 외부에 손을 벌리는 걸 저는 각자도생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르겠다.

절로 고개가 툭 떨어져 버렸다.

부끄러움에 못 이겨 시인하듯이 말이야.

그러나 되려 디안 베나즈는 자조적인 목소리로 허탈히 웃으며 내 긴장을 덜어주었다.

“규율은 적폐를 감수해야만 만들 수 있는 겁니다. 이 베나즈라는 이름이 일어설 수 있었던 것도 제가 가진 것에 의한 적폐로 생긴 것이니까요.”

매력적인 사람이다.

정말 보석처럼 반짝이는, 그런 사람.

이 정도니까,

베나즈라는 이름을 일으킬만한 재목이 될 수 있는 거구나.

“검이라면, 검으로서 고치십시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군요.”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이제 고민하지 않았다.

고삐를 잡고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무인으로서의 예를 갖춰 그에게 고개 숙였다.

“글라디옴의 후예에게 값진 배움을 얻었습니다.”

참,

“공, 그 검술 말입니다. 세상에 하나뿐일 수밖에 없는 그것의 이름이 무엇인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순수한 내 물음에 디안 베나즈는 흔쾌히 답해주었다.

“운명의 노래.”

그럼 나는 그 답례로 내가 가진 것을 말해주었다.

“백로의 파문이 잘 듣고 갑니다.”

이윽고 박차를 가해 말을 바삐 몰았다.

뒤로 멀어지는 디안 베나즈의 시선을 느끼면서.

이제는,

여덟 자루 검에 변화가 일어날 때다.

적폐라도 되어주마.

검으로서 명성의 뼈대가 될 규율을 직접 새겨주마.

* * *

백로의 파문이라.

딱 한 번,

교차 된 한 합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아이베리아의 백로.

강하다.

아직 찾지 못한 운명의 노래, 그다음 절을 발견해 부르지 못한다면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정도로.

아이베리아엔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강자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나도 모르게 온몸이 바짝 달아올라 버렸다.

무엇이 피를 끓게 했는가.

맥레인, 당신의 그 호승심 하나만큼은 내가 잘 물려받았나 봅니다.

* * *

평야를 막 벗어나는 길.

그런데 뒤쪽 저 멀리,

───── !

뱃고동 같은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래서 마지막 고갯길 무렵에서 멈춘 나는 자연스레 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렸다.

그랬더니 직전까지 의무를 다해 망자의 넋을 기렸던 그 평야 위에,

거대한 산 하나가 세워져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반투명한 밤의 장막으로 만들어진, 어떤 실루엣에 가까운 형상이다.

그것의 꼭대기에는 눈처럼 생긴 하얀 점 두 개가 흐리멍덩한 모습으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저게,

소여가 말했던 ‘논’에 해당하는…,

퇴치 불가 등급인 25 트로피의 존재.

멜소르인가.

과연,

말 그대로 어떤 모호한 현상 그 자체 같다.

───── !

그것은 다시 한번 뱃고동 같은 소리를 내며 크게 움찔거렸다.

그러자 그 반투명한 몸통 안에 여러 빛줄기가 맺혀 오르더니 끝내 멜소르의 머리를 타고 하늘 높이 날아가 버렸다.

그 일련의 모습은 마치,

하늘로 올라갔어야 할,

그러나 하늘로 올라가지 못해 땅에 남은 것들을.

장사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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