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77화 (277/365)

277화. 순항

“그래서 어떨 것 같습니까?”

양복쟁이 하나가 긴장한 표정으로 묻는다.

이에 옆에 앉아 있던 또 다른 양복쟁이 하나가 주위 눈치를 보며 속삭였다.

“눈앞에 있는 줄만 잘 잡으면 되는 일 아니겠소?”

그러자 그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마찬가지로 양복을 입은 사내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어차피 뼛속까지 친 베나즈인 사람이잖습니까?”

그럼 제일 처음 질문을 던진 남자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걱정을 내비쳤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기업을 지켜줄 일말의 울타리라도 없다면 조금의 위협에도 크게 출렁이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 모여 속삭이는 무리는 비단 셋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맞은편,

양복을 차려입은 난쟁이 둘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은밀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위험을 감수해도 될 만큼 베나즈 가문은 매력적인 시장이니…,”

“하지만…, 기업 모나켈에 대한 소문을 그쪽도 듣지 않으셨습니까. 재상은 기업을 찢는다고요.”

“어허, 이 난장이가! 소문일 뿐이잖소, 소문!”

거대한 홀,

그 구석구석에 삼삼오오 모여 밀담을 나누는 그들 중 몇몇은 화약 불로 붙인 사치스러운 연초를 입에 물고 있었다.

또 누구는 값비싼 회중시계를 주변에 보란 듯이 펼쳐 시간을 확인했고,

누군가는 그렇게 보이는 회중시계를 자신의 것과 비교하려는 듯 시선을 바삐 옮겼다.

그렇게 그들의 웅성거림이 봄철 꿈틀거리는 꽃밭처럼 융성해질 때쯤.

누군가가 홀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의 등장에,

미리 모인 양복쟁이들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연초를 끄고 손에 쥐고 있던 회중시계를 얼른 놓아야 했다.

물론 이런 일련의 행동들을,

막 홀에 들어선 남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는 자신 있는 발걸음으로 홀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오, 마차의 장제 작업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바람에 내 제일 늦어버렸구려.”

슬쩍 떤 그의 너스레에,

주위 양복쟁이들은 얼른 환하게 웃으며.

“하하, 그럴 수도 있지요.”

“이참에 2두 마차로 바꾸시는 건 어떨지요?”

“그래도 4두가 맞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에게 어떻게든 한 마디씩 보태려 애썼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방금 홀에 들어온 남자는 제리드 은행의 회장.

깁슨 제리드.

존재 자체만으로도 기업가들과 조합 대표들의 이목을 휩쓸기에 부족함 없는 자.

베나즈 가문의 승승장구라는 전제하에,

아이베리아의 중앙 시장을 장악하게 될 그와의 인맥은 그 어떤 것보다 값진 것.

자연스레 깁슨의 뒤를 따르기 시작하는 기업가들과 조합 대표들.

그렇게 그들이 홀 끄트머리에 있는 문을 향해 다가가자, 안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그 문을 열어젖혔다.

너머엔 내쉬 가문의 자랑 중 하나였던 접견실이 펼쳐졌지만,

이제 그 가문의 색깔은 하나도 발견할 수 없다.

대략 보름 정도 되었을까?

그래,

보름 전까지만 해도 그곳은 틀림없는 내쉬 가문의 접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경제 지구로 새롭게 명명된 티히트라, 그리고 그곳에 새로이 군림한…,

재상의 별 특별하지도 않은 접견실 중 하나였을 뿐.

“얼른 들어오세요.”

격식 같은 건 차리지 않는다.

추레한 면바지, 목이 다 늘어난 리넨 셔츠.

붉은 수염 곳곳에 묻은 견과류 조각.

지새운 밤이 치열하게 묻은 눈 밑.

그러나 그것이 무색하게 태양처럼 강렬히 빛나는 두 눈동자.

기지어 도.

그가 손을 뻗어 우르르 들어오는 기업가와 조합 대표들을 손수 맞이했다.

“정돈이 끝나지 않은 터라 공간이 협소한 점, 이해 좀 해 주시오. 저기 저 책더미 위에 앉아도 되고, 아 그 바닥은 안 되오. 저 책장엔 기대도 좋지만…, 반대쪽 책장은 안 됩니다.”

이리저리 좁은 공간을 쏘다니며 앉을 자리를 골라주는 기지어의 말을 따라,

기업가와 조합 대표들은 엉거주춤하며 책 위에 걸터앉거나,

바닥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거나, 책장이 기대는 등 여기저기 구겨진 모습으로 자리에 임해야 했다.

이내 자리에 모두 앉은 그들을 바라보던 기지어는,

“안개꽃이 재료인 연초라면 펴도 좋습니다.”

자기 책상 끝에 대충 걸터앉은 채 담담히 편의를 제공했다.

그럼 그들 중 몇몇이 눈치를 보다가 얇은 연초를 꺼내 들어 그 끝에 불을 붙인다.

“직전까지 특수한 상황이었던 시국을 이유로 이러한 자리를 마련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뻐끔뻐끔.

유순한 향을 머금은 부드러운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와중, 기지어가 점잖은 목소리로 운을 뗀다.

안개꽃을 원료로 쓴 연초는 비록 흡연자의 목을 시원하게 긁어주지는 못하지만,

덕분에 내뱉어지는 연기가 무해 한 것이다.

이런 연기가 자욱해져 갈 때쯤.

기지어의 의도를 벌써 파악한 깁슨은 좀 더 편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

“하지만 오늘, 비로소 자리가 마련되었고 이는 특수한 시국이라 명명해야 할 정도로 두서가 없던 베나즈의 기틀이 잡혔다는 소리입니다.”

어느새.

접견실은 안개꽃의 연기로 가득 차올랐다.

기지어는 그런 연기를 헤치며 그들 앞에 나섰고,

그에 따라 접견실에 모인 이들은 자연스레 기지어를 우러러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나는 이제 내 역할을 제대로 할 거요. 이렇게 당신들을 내려다보며 감시하겠다, 이 말이야. 지금처럼 그대들 입에서 이토록 온화한 것들이 피어오른다면 내 유감없이 재상으로서 당신들을 밀어주겠어.”

이어지는 기지어의 말에 이제 대부분이 그의 의도를 꿰뚫고 바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못한다면, 그 역시 재상으로서 해야만 하는 일을 해야 하겠지.”

너희들,

이미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다 들었잖아?

라고 묻는 듯이.

소문에 대한 포장과 반박이 아닌, 그 자체를 은유로 압박하는 기지어의 모습은.

누구도 감히 업신여길 수 없는 것이었다.

* * *

리케니엔 외곽.

조촐하게 마련된 제리드 가문의 자택.

그곳에서 막 더블렛을 차려입은 호리호리한 장신의 청년 하나가 바삐 걸어 나왔다.

그는 일찍이 도착해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얼른 올라탔고, 동시에 벨트에 체결된 아밍소드를 풀어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직후,

손쉽게 뒤쪽에 있는 벨트 주머니를 뒤적거린 청년은 그곳에서 작은 수첩 하나를 꺼내 들었다.

검과 검집을 벨트로부터 떼어낸 것은 수첩을 좀 더 편히 꺼내기 위한 행위였으리라.

이제 청년은 깃펜을 들어 펼친 작은 수첩 안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러다 적는 것을 멈춘 채 수첩 안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다시 뭔가를 적길 반복했다.

그러던 중.

“운반은 다른 마차가 할 겁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기수가 뒤돌아 청년에게 대뜸 말을 걸어왔다.

그 말에 청년은 알겠다는 듯,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빠르게, 그러면서 은밀함을 자랑하며 달려나가던 마차는 어느 외진 길 한복판에 다다라서야 멈춰 섰다.

그 마차의 맞은편엔,

언제 도착했는지 모를 검은 마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덜컥,

하며 마차 문을 열고 나온 청년이 들고 있던 수첩을 고이 벨트 주머니 안에 넣는다.

그러자 맞은편 검은 마차 안에서도 실크 햇을 눌러쓴 남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

짧게 눈인사를 나눈 뒤 그대로 서로를 지나쳐 각자 타고 온 마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실크 햇의 남자는 마차에 타기 무섭게 말머리를 돌려 사라져버렸고,

검은 마차에 올라탄 청년은 다시 수첩을 펼쳐 무언가를 끄적였다.

그리곤 수첩 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그가,

끝내 수첩을 덮는다.

이어,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소년에게 정답게 말을 거는 남자.

“두려워할 것 없다, 레프리길의 임시 위탁보다 제리드 가문의 적극적인 후원이 너에게는 더 도움이 될 거야.”

그의 말에 살짝 놀란 듯,

움찔거린 검은 후드 속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찌…, 제게 이런…,”

그럼 청년은 맞은편 소년을 위로하듯, 너그러운 목소리로 작게 읊조린다.

“너의 운명은 보상받을 필요가 있어.”

그렇게 기수가 고삐를 당겨 어디론가 출발하기 직전,

청년은 수첩을 다시 꺼내 그 안의 내용을 한 번 훑고는 씩 웃으며 소년에게 재차 말을 걸었다.

“이름을 잃었다고 들었는데…,”

이에 소년은 울적한 목소리로,

“제가 알기로…, 제 이름은 ‘일’일 거예요.”

힘겹게 답했다.

청년은 수첩의 내용을 눈에 담은 채, 진심 어린 위로를 담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해주었다.

“너만 괜찮다면, 우리가 새로운 이름을 줘도 될까?”

“새로운…, 이름…?”

“그래, 더는 과거에 널 융해시키지 마. 이제 그런 지옥 같은 뜨거움은 네 삶에 없을 테니까.”

“조… 좋아요. 가지고 싶습니다. 새 이름.”

소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역시 절박했던 거다.

아직도 자신을 묶고 있는 그 끔찍한 과거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였어.

청년은 수첩 속 단어를 눈에 담아 또박또박 사내에게 말해주었다.

“네 이름은 ‘레안’, 레안이다.”

“레안…,”

“그럼 정식으로 인사할까? 난 ‘제이’라고 해. 안녕? 레안.”

청년의 말에 소년은 떨리지만 그만큼 벅차오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반갑습니다, 렌씨…, 저는 레안…, 레안입니다.”

조금은 측은한 표정으로,

레안을 내려다보고 있던 제이는 곧이어 복잡한 표정과 함께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제이 팔기어.

깁슨 제리드의 측근이자,

깁슨을 바로 옆에서 보좌하는 수호자.

그는 레안과 함께 방금 막 리케니엔을 벗어났다.

* * *

높은 장벽,

그 너머로 펼쳐진 장대한 규모의 자유시장.

그리고 그러한 자유시장 너머로 거대한 산처럼 흐릿하게 세워져 있는 성관.

켄타나는 그런 곳이었다.

사방에서 활력이 쏟아지는, 그러면서 그만한 치열함이 동시에 뛰쳐나오는.

그런 곳.

의무를 다하고 복귀한 터라 조촐하기만 한 행렬이었지만, 그래도 베나즈 가문의 공식적인 첫 방문이라고.

자유민들은 나와 내 뒤를 따르는 기사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보내주었다.

적어도 켄타나 내에서 나보다 더한 지지를 얻고 있을 엘르길은,

그런 환영 앞에서 한 발짝 물러난 자세로 최대한의 침착함을 발휘하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 그는 언제부턴가 입꼬리가 귀에 걸릴 만큼 뭔가 좋은 일이 있는지 계속해서 웃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공, 저길 보십시오. 켄타나의 귀족들입니다.”

옆에 바짝 따라붙은 조이의 말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환호하는 자유민들 너머 정갈한 복색을 한 소수의 인원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봄의 일부 같은 화사한 양산을 쓴 채 자유민 못지않은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비록 자유민들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 보였지만,

두 계층이 제법 거리낌 없이 융화되어 보이는 것을 보면.

켄타나의 내부 결속은 상상 이상으로 강력해 보인다.

하긴,

엘르길 마스라는 거대한 파도가 군림하고 있는 이상,

그 파도가 작은 물줄기로 갈라질 리가 없지.

“공! 바로 성관으로 모실까요? 아니지, 이곳의 흑맥주가 기가 막힙니다. 자유민들과 어울려 한바탕 엮인 회포를 푸시겠습니까?”

자유시장의 길목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엘르길이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내게 다가와 물었다.

늘 차분하기만 했던 그의 모습이 순간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그는 퍽 유쾌해져 있었다.

켄타나 밖에 모르는 바보처럼 보일 정도로.

그래서 그러한 의외의 모습에,

제법 정이 갔다.

엘르길 마스라는 인간에게.

“그럼 그렇게 합시다, 엘르길 경. 괜히 성관에 들어갔다가 그곳의 집사부들에게 미움이라도 받을까 걱정되니.”

“하하, 역시 아량이 넓으십니다. 그럼 제가 바로 모시겠습니다!”

엘르길의 안내를 받아,

스물에 가까운 기사들이 작은 주점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여지없이 바쁘게 굴러다닐,

자유민들의 삶이 곳곳에 얼룩진 그곳은 첫 방문임에도 내게 안락함을 선사해주었다.

여기저기 포크 따위로 새긴 듯 보이는 낙서를 비롯해,

곳곳 자리에 앉아 있던 자유민들의 자연스러운 웃음소리까지.

마음에 드는 장소다.

우르르, 장성한 기사들이 점령한 테이블.

직전까지 의무의 흔적으로 더럽혀진 서코트를 출렁이며 서둘러 맥주잔을 나누는 그들 가운데.

나는 마땅히 대표로서 일어나 건배사를 준비했다.

그럼 조이를 비롯해 엘르길과 테티르,

저 멀리 조용히 앉아 있던 아리나 역시 묘한 웃음과 함께 술잔을 번쩍 들어 올린다.

“구슬퍼야만 소회가 완성되는 게 아니듯, 기림 역시 꼭 처연함으로 완성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소회는 심심한 것으로, 기림은 시원섭섭한 웃음으로 완성 시킵시다.”

그렇게 내 건배사를 끝으로,

기사들은 묵묵히 감쳐왔던 감정을 내뱉듯.

칼칼한 호응과 함께 잔을 치켜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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