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제자리
기지어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묵은 체증을 쓸어내리듯,
정말 오랜만에 취해보는 숙면이었다.
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몸 곳곳에 묶인 숙면의 여운을 풀어헤쳤다.
수염을 긁적거리며, 바닥 위로 맨발을 질질 끈 채 책상 앞으로 다가간 기지어는.
이제 게슴츠레 뜬 눈으로 가장 위에 올라온 안건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가본 내쉬의 처형 건]
막 잠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맞이하기엔 꽤 무거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기지어는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안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다가,
끝내 서명란 안에 자신의 인장을 스스럼없이 찍었다.
티히트라는 재상의 이름으로 베나즈 가문에 속한 분권 지역이 되었다.
그러니,
없어져야 하는 것이 맞지.
경제특구 내 권력의 정점에 선 남자에게 과거의 이름은 걸림돌에 불과했으니까.
또 이러는 편이,
가본 내쉬 본인에게도 더욱 편할 것이다.
저 좁은 첨탑 꼭대기에 갇혀 비참한 삶을 이어갈 바에야, 이견이 없는 마침표를 찍고 퇴장하길 소원하고 있을 테니까.
이로써,
얼추 그럴싸한 중앙 체계가 완성되었다.
군권의 베르융.
행정권의 기지어.
두 양립을 유지 시키는 거대한 기둥, 디안 베나즈.
물론 말은 이렇게 했지만,
아이베리아의 특성상 행정권의 영향력은 군권을 넘어서기 힘든 구조로 되어있다.
해서,
몸집을 불려야 한다.
그 몸집의 구성은 특출난 인재여야만 한다.
이러한 인재의 충당은 사실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이미 기업과 조합 내에 차고 넘치니까.
…,
무수히 늘어나는 곁가지를 따라 여러 생각을 거듭하던 기지어는 끝내 지끈거림에 콧대를 주물럭거려야 했다.
참 피곤하다,
대국이라는 건.
머릿속을 환기할 겸 다음 문서에 시선을 옮긴 기지어는 새삼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그 내용을 훑었다.
그러고 보니,
이맘때쯤이면 수확과 그 가늠이 전부 끝나는 시기였었지.
[베나즈 가문, 재정 결산]
디안을 위시한 베나즈 가문이 이 아이베리아에 돌아온 지도 벌써 반년 가까이 지났다.
그래서 그 결실은…,
“허.”
기지어는 안의 내용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 헛웃음은 금세 진심 어린 것으로 변하였다.
“즉시 가용 가능한 자산만 금화 120만 개…, 축적 자산 추정치는 총 430만 개정도인가.”
가히 폭발적인 성장이다.
0의 명분과 베나즈라는 이름이 만났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지만,
글쎄.
그 두 개나 되는 거대한 것을 짊어지고 소화할 수 있는 자가 이 땅에 몇이나 될까 생각해보면…,
실로 경이롭다고밖에.
물론 눈에 보이는 수치가 높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원정을 통해 수반될 베나즈 가문의 반감은 더욱이 축적되어 가고 있고,
폭발적 성장의 이룩 뒷면엔.
개국 공신에 해당하는 포개어진 손 조합이 볼 압도적인 이득이 적혀있을 터.
당장 어제만 해도,
그 깁슨 제리드를 위시한 걸출한 기업가들과 조합 대표들이 내 한마디에 우르르 몰려 왔었다.
물론 깁슨과의 거래를 통해 그의 적극성을 끌어냈다곤 했지만 그런 전제를 다 떼고 봐도 실로 놀라운 결실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자리에,
포개어진 손 조합의 대표인 스페라는 오지 않았다.
애초에 올 필요도 없었겠지.
개국 공신이 가지는 위상이 바로 그런 것이니.
선생께서…,
무서운 후배님 하나를 기르셨어.
솔직히 그 여인이 가진 심장이 얼마나 야수적인지 지금도 정확히 가늠할 수가 없다.
베나즈 가문이 돌아온 초창기 시점에서 투자를 결심한 것은,
거의 도박 노름에 가까운 행위였을 텐데 말이야.
똑똑.
갑자기 들려온 노크 소리에 기지어는 또다시 복잡하게 일어난 생각들을 정돈한 뒤 가지런한 목소리로 답했다.
“들어오시오.”
이에 문을 열고 들어선 중년 남자.
예민한 기지어가 보기에도 한 치 티끌조차 발견할 수 없는 그는,
“깁슨 공께선 어쩐 일로.”
기지어의 물음에 깁슨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재상인 그에게 예를 갖추는 것을 잊지 않았다.
“딱 이 시간대라면, 재상께서 제게 지시할 일이 생길 것 같았거든요.”
그의 대답에 기지어는 손에 들린 문서를 한 번 내려다보곤,
기가 막힌 듯 실소를 자아냈다.
“나를 너무 꿰뚫어 보지 마시오, 그러다 구멍이 커지면 반대로 내가 공을 들여다볼 수도 있으니까.”
“혹시 모르지요, 그것이 어떤 협의의 시발점이 될지.”
기지어는 알고 있다.
자신은 아직 저 깁슨이라는 거물에 비할 깜냥이 아니라는 걸.
토르킨 선생의 제자이자, 베나즈 가문을 점찍은.
이른 시점부터 아이베리아 전역에 붉은 귀신이란 명성을 떨쳤던 지식인이라고 해도.
대륙들을 주물렀었던,
그리고 지금도 확실히 주무르고 있는 깁슨이라는 존재감에 비할 바는 못됐으니까.
그래서 기지어는 너스레를 떨며 시인했다.
“협의라고 하니 덜컥 겁부터 나는군요.”
그럼 깁슨은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한 발짝 물러서 주었다.
“제가 감히 베나즈 가문의 행정 근간을 꿰뚫어 보려 하겠습니까, 혹 보고자 한들 재상께서 틈을 만드실 분도 아니시지요.”
“그거 안심이군요. 해서, 베나즈 가문의 재산과 관련한 이야긴데 말입니다.”
기지어는 아직 정돈되지 못한 책더미 하나를 골라 턱짓했다.
그럼 깁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별 망설임 없이 책더미 위에 걸터앉았다.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고고함이 흘러나오는 게,
확실히 다른 기업가들이나 조합 대표들과는 결이 다른 존재였으리라.
“예, 말씀하십시오.”
“베나즈 가문의 가용 자산을 그쪽 은행에 맡기겠습니다.”
“그럼 바로 각 행장에게 전달해 베나즈 가문의 인장에 대한 효력 발생을 시작하도록 하지요.”
제리드는 품에서 작은 곽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곽 안에는,
안개꽃으로 만든 연초와 그렇지 않은 연초 두 종류가 담겨 있었으나.
깁슨은 그중 안개꽃으로 만든 연초를 집어 입에 물었다.
“액수는 금화 100만 개.”
“최대한도는 그 두 배인 200만 개로 해두겠습니다.”
깁슨은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기지어를 올려다보았다.
“베나즈는 지금에 그칠 이름이 아니니까요.”
* * *
첨탑 아래, 땅거미 진 곳.
치덕치덕.
한 노파가 주름진 손으로 빨랫감을 치대고 있다.
구정물을 연거푸 토해내는 빨랫감 위로 깨끗한 물을 쏟아내고, 다시 치대길 반복한다.
이윽고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난 노파가 쭈글쭈글한 빨랫감을 털어 작은 줄 위에 하나둘 널기 시작할 때쯤.
초로의 남자 하나가 첨탑으로 다가왔다.
이에 노파는 하던 빨래를 멈추더니 휘둥그레진 눈으로 남자에게 물었다.
“올라가시는 거요…?”
그럼 남자는 챙겨온 나무 바구니를 잠시 내려놓으며,
“예, 그러니 하던 건 멈춰도 될 거요.”
바구니 안에 담긴 가죽 앞치마를 둘렀다.
앞치마에 달린 주머니엔,
날카롭게 갈린 작은 손도끼 하나와 단검이 한 쌍처럼 나란히 담겨 있었다.
그렇게 남자가 첨탑 위로 올라가려다가,
빨랫감 앞에서 머뭇거리는 노파를 발견하곤 멈춰 되물었다.
“왜 그러시오?”
“며늘아기가 임신했는데, 마땅한 임부복이 없어서 말입니다.”
그럼 남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식은 웃음을 지으며 노파에게 말했다.
“다 가져가시오, 곧 주인 잃을 옷들이니.”
남자의 말에 노파는 조용히 첨탑 꼭대기를 올려 보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곤 줄에 널린 빨래를 꼬깃꼬깃 품에 안은 채 집으로 돌아갔다.
그 노파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이제 첨탑 꼭대기를 향했다.
겨우 햇빛 한 줄기 들어오는 감옥.
켜켜이 쌓인 곰팡이로 색칠된 철문이 열리자,
조촐한 의자에 걸터앉은 채 책을 읽던 노인이 반색하며 말을 걸어온다.
“오늘은 유독 햇살이 좋은 것 같구려.”
그러나 직후 감옥에 들어온 이를 확인한 노인은,
마른 입술을 움찔거리며 입맛을 다시다가.
끝내 체념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이쪽으로 오시오.”
남자의 말에 노인은 고분고분, 바닥에 난 하수구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가본 경, 내 경력을 걸고 약속합니다. 고통은 없을 겁니다.”
무릎 꿇은 가본 앞에 나무통을 가져다 대고,
그의 뒤편에 선 남자는 이제 단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들어오는 한 줄기 햇살과는 어울리지 않는 스산함이 참 서슬푸르다.
남자는 곧바로 역수로 쥔 단검을 내리쳐,
가본의 목 뒤에 깔끔히 찔러 넣었다.
이 과정에서 그 어떤 신음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가본 내쉬는 짧은 숨과 함께 푹 고개를 숙였다.
척추와 신경을 끊으며 들어온 죽음은 적어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으리라.
남자는 이제 도끼를 들어 박아 넣은 단검을 기준 삼아 가본의 목을 회수했다.
덩그렁.
나무통에 굴러떨어진 소리와 함께.
내쉬 가문의 마침표는 그렇게 찍혔다.
* * *
이른 아침,
엘르길은 급히 주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시종들은 엘르길의 등장에 일련의 행동을 멈추고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지만,
“아니네, 하던 거 계속하게.”
엘르길은 서둘러 그들을 제지했다.
그리곤 한쪽 구석으로 간 그는 직접 앞치마를 두른 채 조합에서 만들어진 매끈한 팬을 꺼내 들어 요리를 시작했다.
그것도,
“흠 흠.”
경쾌한 흥얼거림과 함께.
그가 이렇게 신이 난 이유는 사실 별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에겐 적어도 별것이 맞을 것이다.
지금 바로 이 위로,
무려 디안 베나즈가 잠을 자고 있었으니까.
그뿐만이 아니다.
의무를 떠났던 기사 모두가 다 엘르길의 저택에서 신세를 지고 있다.
그 말은 즉,
엘르길의 발이 실시간으로 넓어지고 있다는 소리와 진배없다.
그렇게 넓어진 발로 새겨질 발자취는,
틀림없이 켄타나의 밝은 미래로 귀결되겠지.
이러한 생각들만으로도 엘르길에겐 참 즐거운 것이어서,
그래서 그는 시종들 사이에서 거리낌 없이 흥을 발산했다.
캬,
그러고 보니.
어제 그 건배사는 참 걸출했었지.
끝내 무겁게 끝날 줄 알았던 자리를 그리 경쾌히 풀어 줄 줄이야.
엘르길은 어느새 디안 베나즈라는 인간에게 흠뻑 빠져 있었다.
그렇기에 덩달아 은연중에 키워왔던 욕심 역시 커지기 시작했다.
베나즈가 다다르려는 대의.
그 중심에 켄타나의 엘르길이 있었다.
그것을 새겨넣고 싶어진 것이다.
더불어,
베나즈 가문이 켄타나의 귀족과 좀 더 본격적인 관계로서 묶이게 된다면.
향후 그려질 미래는 단순히 삼색으론 칠할 수 없을 정도로 휘황찬란해지겠지.
* * *
지끈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내 몸은 늘 그래왔었으니까.
덕분에 잠에서 깰 때마다 묘한 허무함을 느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간 나는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손을 뻗었다.
처음,
시몬 바스티유의 천막 안에서 눈을 떴을 때 만졌던 햇살은 참으로 이질적이었었지.
지금은 그렇지 않아.
햇살 앞에서 영락없이 반짝였던 보석은 이제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허무함은 가시지 않는 것일까.
달래고 싶다.
달래주고 싶다.
나를.
하지만 그러기엔,
벌써 멀리까지 걸어 나왔구나.
그래도 외롭지는 않다.
어느덧 뒤를 돌아보면, 나를 위해 따라와 준 자들의 얼굴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그러니까.
그냥 계속 나아가야 하는 거구나 싶다.
“공.”
부름에 뒤를 돌아보니 조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예, 경께선 괜찮으십니까?”
“벌써 몸 안에서 새로운 발효주가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조이는 찌그러진 콧수염을 매만지다가도,
나를 보며 정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곤 내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첨언을 덧붙인다.
“이곳에서 천천히 여독을 풀고 돌아가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보입니다.”
“확실히, 이곳은 생기가 넘치는 곳 같습니다.”
내 대답에서 뭔가를 보기라도 했을까.
조이는 잠시 멋쩍은 표정을 짓다가 끝내 진지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공, 그저 내키시는 대로 하소서. 길이란 건 그래야만 길로서 불릴 수 있는 겁니다.”
“그럼.”
나는 한결 가벼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슬슬 돌아갑시다, 조이. 역시 집만 한 게 없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