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파견대
엘르길 경과 조식을 함께한 뒤,
빌로즈 가문의 가니아를 통해 켄타나 곳곳을 구경할 수 있었다.
가니아는 상위 계층이었지만 그와는 어울리지 않게 소박한 사람이었다.
어느 이름 모를 집 옆에 놓인 방아를 건드려보거나, 널려 있는 빨랫감 아래로 들어가 휘날리는 색색을 즐겼으며.
또 길거리의 음식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고,
그래서 기어이 거대한 사탕 하나를 손에 쥐어야만 했다.
사탕 겉면엔 그을음으로 새겨진 상표가 있었는데,
아이 얼굴 아래 포개어진 손 그림이 있는 걸 보면 어디서 만들었는지 딱 봐도 알 것 같다.
가니아는 본인의 봉긋한 뺨만큼 커다란 사탕을 손에 쥔 채 내 눈치를 한참이나 살피다가.
“정말 안 먹을 거예요?”
부쩍 천진해진 말투로 내게 물어왔다.
“저는 괜찮습니다, 가니아. 그나저나 이곳 시장의 규모는 정말 크군요.”
혹여나 먹을 것을 가지고 그녀에게 눈치를 주는가 싶어서 되려 관심을 돌려봤지만.
그녀의 얼굴은 더욱 초조해질 뿐이다.
이윽고 그녀는 갑자기 사탕에 종이 포장지를 덧씌우더니, 그것을 자신의 치마 밑단에 감쌌다.
그리곤 쭈그려 앉아 근처에 굴러다니는 돌을 들어,
와작!
사탕을 한바탕 내리치고는 천진한 얼굴로 사탕을 꺼냈다.
크게 조각조각 난 붉은 사탕,
그중 가장 큰 조각 하나를 내게 건네는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흔쾌히 그녀가 건넨 조각을 받아 입에 담으면,
알싸하게 느껴질 정도로 진한 과실 맛이 입안을 휘감는다.
중간중간 혀를 건드리는 찌릿찌릿함은 사탕을 녹여 먹는 재미를 더욱 배가시켜주었는데,
보아하니 사탕 안에 작게나마 날씨 파편이 들어가 있었나 보다.
어떤 것일까.
가을이 일으킨 정전기 한 줌 정도일까?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사탕은 길거리에선 꿈도 못 꾸는 음식 중 하나였어요.”
시장 한쪽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난간,
그곳에 기댄 가니아가 자신의 옛이야기를 해준다.
“간혹 집에서 사탕을 만들면, 그것을 몰래 가지고 나와 친구들이랑 나눠 먹은 게 전부였거든요. 그마저도 쭈글쭈글하고 단맛보다 쓴맛이 강한 볼품없는 사탕이었는데.”
그녀는 입안에 일어난 찌릿함에 눈썹을 움찔거리다가,
픽 웃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베나즈 가문의 개방 정책 덕분에, 이제 켄타나는 길거리에서 어렵지 않게 사탕을 접할 수 있게 됐어요.”
그럼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옳은 방향일까요.”
이에 그녀는 별 고민 않고 답했다.
“적어도 아이들은 최고의 지지를 보내지 않겠어요?”
그 당돌한 답변에 나는 농익은 웃음을 떨구기 위해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이런 비슷한 감정의 교류를 예전에 느껴본 적이 있었어.
시몬 바스티유,
그 울타리 안에 있었을 때.
비교적 나이가 적은 자들의 고민과,
소위 어른들의 사정에 해당하는 높은 고민.
그 둘은 절대 나란히 하지 않았고 끝내 서로 어긋나버렸지.
솔직히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어른들의 고민이란 거.
그만큼 나는 아직 장성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많이 부족하다.
“그나마 다행이로군요.”
뒤늦게 가니아에게 답한 나는 이제 난간으로부터 뒤돌아섰다.
이에 가니아는 주섬주섬 부서진 사탕을 챙겨 내 뒤를 따랐다.
* * *
“공께서 조속한 복귀를 원하시네, 그러니 서운해하지 말게.”
조이의 말에 엘르길은 되려 크게 웃으며 화답했다.
“서운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조이 경. 나중에 한 번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엘르길의 말에 조이는 씩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행위만 봤을 땐 단순하기 그지없겠으나 그에 내포된 뜻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모든 것들에 대한 협의를 악수라는 하나의 행위만으로 묶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악수는 절대로 단순한 행위라고 치부할 수 없으리라.
엘르길은 얼른 조이의 손을 맞잡았다.
두 기사는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본 채, 굳건히 맞잡은 손을 한참이나 휘청거렸다.
그렇게 엘르길과 인사를 마치고 돌아 나오는 조이에게,
성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테티르가 다가왔다.
“이제 돌아가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조이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 침묵을 유지하다가,
이내 테티르에게 입을 열었다.
“발리르는 요즘 어떻습니까?”
“군사기지의 중심이 된 만큼 그에 따라 수반된 일들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소.”
“그러니 더 다행이오, 베르융 경 옆에 테티르 경 같은 분이 계시니까.”
그 말에 테티르는 조용히 조이를 내려다보았다.
“기왕이면 그 곁에 더 많은 사람이 있는 게 좋겠지요.”
그럼 조이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넌지시 허공을 바라본다.
“그렇겠지요.”
아마도 그 씁쓸한 웃음은,
지금 조이를 바라보는 테티르의 눈빛 때문일 것이다.
에르앵의 깃발이 무너질 당시,
서기관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기사의 신분으로부터 뒷걸음질 쳐야만 했던 그였으니까.
그러나 테티르 론바즈는 화끈한 성정과는 달리 헤아림이 넓은 자다.
조이의 그런 고충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같은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런 테티르의 마음을 알아챈 조이는 다시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테티르와 마주할 수 있었다.
“참, 조만간 베르융 경의 주제로 각지 기사들이 발리르에 집결할 겁니다.”
“디안 공께서도 알고 계시는 일입니까.”
테티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곧 보고 드릴 예정입니다.”
“무엇 때문에 집결하는 건지 물어도 됩니까?”
“합동군 창설 및 변방 경비의 공동화를 추진하기 위해섭니다.”
“그렇다면 람비가 걱정이로군요.”
조이는 벌써 지끈거리는지 미간을 주물렀다.
“사슬이 무거울수록 느슨함을 고치는 것은 힘드나…,”
테티르가 아이베리아의 유명한 격언을 입에 담자, 미간 주무르는 것을 멈춘 조이는 헛웃음과 함께 맞받아쳤다.
“반대로 무거운 사슬로 이룩한 체결은 백 년의 부동을 만든다.”
테티르는 이제 서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조이는 그 뒤를 바짝 따랐다.
“아무래도 내 겨울은 더 빨리 올 것 같소, 람비 방문이라는 살얼음판을 걷게 생겼으니.”
이어지는 그만의 유쾌한 너스레는 덤이었다.
* * *
해의 고개가 서쪽으로 갸우뚱거릴 즈음.
우리는 리케니엔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복귀 과정에서 거친 두 번의 경유지에서 행렬을 이루던 기사들은 각자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그래도 거의 이틀 이상을 붙어 다니며 의무를 다한 탓에 그들과의 유대는 꽤 많이 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늘 느끼는 거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이 순간은 늘 좋구나.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건,
“공! 예정보다 일찍 오셨군요.”
언제나 맹목적으로 날 반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갑자기 집이 고팠거든요, 바돈.”
한달음에 달려온 바돈은 내 말에 싱긋 웃으며 수행을 시작했다.
“일단 올라가 옷깃에 묻은 남루부터 털어내시지요.”
그러면서 바돈은 손짓으로 주변에 있던 집사부 한 명을 불러들였다.
“목욕물을 준비하게.”
“어떤 식으로 준비할까요?”
“공기 온도는 치솟은 검지에서 나온 4월 말로 하지.”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시종은 조심스레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겨 예를 갖췄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공.”
그 인사에 눈웃음으로 화답하자 그는 좀 더 홀가분한 모습으로 뒤쪽 복도로 향했다.
그렇게 계단을 오르면서 바돈에게 부재중 간의 일을 묻자,
“티히트라 내 일을 정돈한 재상의 보고서가 올라와 있습니다. 그리고 리케니엔 지주들이 보낸 건의서도 있지요.”
“건의서 말입니까?”
“올해 총 수확량을 비롯해 그것과 관련한 건의가 포함되어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주들이 보낸 건의서도 결국 재상인 기지어가 일정 이상 관여되어 있을 것이다.
기사로서의 몫을 다하기 위해 잠시 중대한 사안들로부터 멀어져야만 했지만,
지금부터는 다시 베나즈로서 그 몫을 다해야 할 때다.
위층으로 올라온 나는 곧바로 집무실을 향했다.
이에 뒤따르던 바돈이 걱정 깃든 목소리로 날 부른다.
“공…,”
막 집무실 문을 연 나는 뒤돌아 바돈에게 말했다.
“여독 푸는 건 좀 더 나중에 해야겠습니다. 조이 경에게 집무실로 오라고 하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 * *
“티히트라 건의 봉합에 대해선 이견의 여지가 없군요. 재상이 아주 잘 처리한 것 같습니다.”
기름이 좔좔 흐르는 얼굴,
바삐 갈아입은 듯 보이는 갈색 리넨 셔츠.
목 주위엔 직전까지 입은 사슬 갑옷 자국이 선명하다.
그러나 그런 행색과는 달리 조이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보고서를 살피며 내게 의견을 전달했다.
“보고서 말미는 베나즈 가문의 재산 현황과 인장의 추가 효력에 관한 것이군요.”
“저도 읽었습니다.”
“제리드 은행이라면 인장 결제가 되지 않는 땅은 없다고 봐도 될 겁니다.”
끝내 조이는 뭔가 서슬 퍼런 것을 마주한 것처럼 허무한 표정을 지은 채 한숨을 픽 내쉬었다.
“마치 난쟁이들이 만든 기계가 일처리 한 것 같군요.”
그런 그의 의견에 나는 끄덕임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누락 된 부분이 있다.
“경,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 말입니다.”
내 물음에 보고서를 들여다보고 있던 조이가 얼른 반응한다.
“예.”
“그의 예후는 어떻게 되었는지, 경께서 따로 알아봐 주셨으면 합니다.”
“재상이라면 생존자의 예후까지도 가늠했을 겁니다.”
그래, 기지어라면 그것까지도 헤아렸겠지.
다만 그 생존자와 동질감이 느껴져서일까.
궁금하다.
“그래도 그와 관련해 추가적인 보고를 듣고 싶습니다.”
조이는 별 고민하지 않고 흔쾌히 수긍했다.
“최대한 빠르게 관련한 사항을 알아본 뒤 보고드리겠습니다.”
이어서 다음 문서에 시선을 쏟은 조이에게,
나는 막 쏟아지려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져야 했다.
“조이, 그 건의서에 적힌 내용에 대해서 말인데…,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요.”
빠르게 눈알을 굴려 내려가던 조이는 이런 내 반응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의 일들이 깃발이라는 궤도에 안착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 건의서에 적힌 내용은 궤도 위를 달리기 위한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게 운을 뗀 조이는 좀 더 내 쪽을 향해 자세를 바꾼 뒤 열정적인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유감없이 소신이라는 바퀴를 굴리소서.”
* * *
올해 리케니엔의 총 수확량은 그간의 설움을 보상받을 만큼 폭발적이었습니다.
포개어진 손 조합을 위시한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개간 사업을 시작으로 이만한 결실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
다시 세워진 베나즈의 깃발 덕분입니다.
어느 한쪽의 의견으로 점철된 역사 아래, 리케니엔의 자유민들은 모진 핍박을 겪어야 했습니다.
대부분이 내렸던 뿌리를 거둔 채 등을 졌고, 그러한 결정이 합당이라는 의미에 이르렀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합당을 고집하던 뿌리들이 남았습니다.
과실은커녕 가지 하나조차 제대로 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 뿌리는 기어이 수십의 가지를 뻗치고 과실을 맺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베나즈라는 이름으로 우리 위에 떠 올라 주셔서.
이제 우리는 당당한 리케니엔의 자유민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땅을 일굴 것입니다.
올해 이룬 것처럼,
봄을 간직한 채,
여름을 토대로,
가을을 건설하겠습니다.
하지만 겨울 만큼은,
공께서 우리를 거두어 주십시오.
베나즈 가문의 배려로 창설된 지주 회의는 지금까지 개간을 위해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그와 관련한 정보 역시 사방으로 긁어모았지요.
그 결과,
올겨울과 내년에 찾아올 날씨가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첫째.
올해 말부터 내년까진 서부 탑과 북부 탑의 하늘 경계선이 아이베리아 내륙을 지납니다.
이를 드러낸 구름은 땅에게 박해를 쏟아내지요.
하여 내년은 아주 힘든 시기가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둘째.
올겨울은 북부의 리시론이 머금고 있던 추위를 남쪽으로 쏟아낼 것으로 보입니다.
평생을 산지기로 살아온 자의 말에 따르면 하얀 모자를 뒤집어쓴 산들이 벌써 그에 걸맞은 옷가지를 준비하고 있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다고 합니다.
혹독한 겨울은 후년의 따듯한 박자를 어그러트립니다.
상기한 두 이유를 들어,
매트로폴리아에 있을 겨울에 강한 한해살이 종자를 확보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 지주 성명 -
로니 루리
베니얼 그리브
로이
에테럴 팍스
스탭 리뵨
아만즈 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