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파견대 (2)
깃발 아래 자유민들을 위해 깃발 주인이 마땅히 해내야 할 의무.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의무는,
영위를 위한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
당시에는 몰랐었는데.
그러니까 토르킨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있었던 당시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정확히 몰랐었는데.
지금은 알 것 같다.
그리고 이 모호한 앎은.
이어지는 조이의 보충으로 점점 더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걸 설명하기 위해선 먼저 메트로폴리아라는 개념부터 이해하셔야 합니다.”
얼핏 흘러가듯,
그러면서 또 은근하게 들어본 적이 있어.
과거 기술로 일어선 기업들이 집대성한 곳이라고.
“영주님께선 메트로폴리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과거, 수많은 기업의 집합으로 구성된 도시 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조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풍부한 손짓과 더불어 설명을 계속했다.
“정확히는 용의 시대를 주름잡았던, 또 선도했었던 막강한 기업들로 집대성된 대도시를 말합니다.”
이어 그의 표정이 진지함으로 굳는다.
“그 메트로폴리아 내 일개 기업 하나가 지금 시대의 국가 하나와 맞먹는 규모를 자랑할 정도였다고 하니 총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는 것부터가 무의미할 정도입니다. 그럼 이제 이런 의문이 드실 겁니다.”
그 정도로 영향력 있는 기업들이 어찌 한 자리에 집대성되었는가.
이런 내 생각을 꿰뚫듯, 조이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기업 간 물리적 전쟁까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던 용의 시대에 그들은 왜 한 장소에 모여 도시를 구성했는가?”
그의 묻는 말에 쉬이 대답하지 못하자,
그는 내 몰입을 모두 끌어당길 요량인 듯 더욱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메트로폴리아는 용의 시대와 그 이후로 넘어가려는 과도기적 상황에 세워진 것이로군요.”
“정확합니다.”
조이는 양팔을 크게 벌리며 장황한 말투로 설명했다.
“용의 시대, 당시 기업은 그 시대의 모든 과학과 기술이 집약된 정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용의 시대 때에나 성립 가능한 공식이었을 뿐.”
용의 시대와,
용의 시대 이후의 규칙은 차원이 다르다 표현해야 할 정도로 극히 상이하다.
그 말인즉슨 용의 시대를 주름잡던 기업에게 용의 시대 이후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것이겠지.
“해서, 용의 시대 이후의 규칙에서도 존립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던 그들이 머리를 맞댄 것이로군요.”
장고 끝에 내뱉은 말에,
조이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해가 빠르십니다.”
이어 그는 펼쳤던 양손을 모아 공기를 압축시키려는 듯 맞잡으며 다시 진지한 설명을 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기업의 협력이 이어지면서 말 그대로 다가올 시대를 관통할만한 기술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내렸습니다.”
“가령…?”
“가령 햇살 대신 눈 결정의 반짝임을 먹고 자라는 볍씨 같은, 그런 것들이 따위로 불릴 만큼.”
지주들이 보낸 편지 속, 그 종자를 설명하는 조이에게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조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구연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나아가 더욱 상징적인 것을 필요로 했습니다.”
“상징적인 것?”
“자신들의 건재를, 동시에 다가올 시대에 세워질 주도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릴 그런 상징 말입니다.”
전 시대의 주인이 다음 시대의 주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그 양도의 증표 같은 걸 말하는 거로군.
“힘은 행사되었을 때보다 과시되었을 때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법.”
“그래서, 조이. 그 상징이란 게 무엇입니까?”
“용의 시대 이후로 접어들며 주류로 떠오른 것.”
그의 말이 들리기 무섭게 내 머릿속에 반짝이며 떠오른 단어 하나.
“인챈트.”
홀리듯 내뱉은 내 말에 조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한참 뒤에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운을 뗐다.
“메트로폴리아는 건재의 상징으로서 인챈트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다가온 시대의 주류를 직접 만듦으로써, 전시대의 주인이 건재하다는 것을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해.”
“그렇지요, 그렇게 온 세상이 메트로폴리아를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질 이야기는,
아마도 몰락과 같은 떨어짐으로 점철되어 있겠지.
더욱 굳어진 조이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런 내 시선을 읽은 듯, 조이는 좀 더 느슨한 표정을 지으며 푸념하듯 말했다.
“그들은 기어이 해냈습니다, 인챈트를 만들어냈지요. 그것도 0에 해당하는 인챈트를.”
괜히 심장이 덜컥거렸다.
그러면서 자연히 마른 침을 꿀꺽 삼켜본다.
“그것은 분명 최강의 인챈트였지만 동시에 최악의 인챈트이기도 했습니다.”
“대체…,”
“0, 던 카서스. 일명 ‘새벽의 추락’은 우주로부터 쏟아져 그대로 메트로폴리아를 집어삼켰습니다.”
그의 설명에 압도된 나는 지끈거리며 올라오는 소름을 얼른 등 밑으로 흘려보내야 했다.
* * *
잠시간의 틈.
그 사이를 귀신같이 비집고 들어온 바돈이 우리에게 뜨거운 차를 건네주었다.
덕분에 과열된 분위기는 한 차례 차분함으로 식혀졌고,
자연히 합석한 바돈으로 인해 분위기는 더욱 부드러워질 수 있었다.
머리를 한차례 쓸어넘긴 조이는 차에 젖은 콧수염을 아랫입술로 살짝 훔치곤,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설명을 이었다.
“메트로폴리아의 중심부는 그로 인해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받았습니다만, 그럼에도 구시대의 주인이었던 그들의 수도 전체가 완전히 붕괴한 것은 아닙니다.”
그 말을 흥미롭게 듣고 있던 바돈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조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곳의 하늘엔 항상 새벽이 펼쳐져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그 질문에 조이는 똑같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친절히 답해주었다.
“맞습니다, 0이 떨어지면서 그곳의 하늘도 깨져버렸거든요. 그래서 메트로폴리아는 영원한 새벽에 갇힌 꼴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험가들은 메트로폴리아가 아닌 ‘던전’이라 부르더군요.”
“던전?”
“새벽의 감옥이라는 뜻을 가진 고어입니다.”
이후 조이는 시선을 내 쪽으로 옮겨 본격적인 주제를 꺼냈다.
“이제 파견대라는 것을 설명해드릴 차례군요.”
그 말에 바돈은 휘둥그레진 얼굴로 나와 조이의 눈치를 번갈아 살폈다.
“파견대란 말 그대로 메트로폴리아에 파견되어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 특수한 임무라는 건 아까 조이 경이 설명하던 시대를 관통할 기술의 결과물 회수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당시 광기에 젖은 기업들의 해괴한 감성이 고스란히 남아있을뿐더러, 떨어진 별과 깨진 하늘로 인한 괴물들까지 헤쳐나가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파견대는 여러 방면으로 돌파를 꾀할 수 있는 그런 인재들로 조합되어야만 한다, 이 말입니까.”
조이는 다시 흐뭇하게 웃으며 즉답했다.
“제가 내딛으려는 한 걸음보다 두 걸음 먼저 이해하시니 뭔갈 더 설명하기가 힘들군요.”
예측된 내년의 불황,
깃발의 주인은 마땅히 그것의 돌파구를 제시해야만 한다.
지주들이 내민 근거에 따라 내가 해야 할 대답은 조이가 설명한 파견대로서 이루어져야 해.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턴 파견대의 구성과 관련해 고심을 해봐야겠군요.”
도달한 결론의 내뱉음에,
조이는 잠시 바돈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다.
그것을 놓칠 리 없는 바돈은 비워진 찻잔을 여유로이 수거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소신은 이만 물러가 있겠습니다.”
조이는 그런 바돈에게 예를 갖춰 고개 숙였다.
다시 집무실엔 나와 조이 단둘뿐이다.
조이는 기다렸다는 듯 속삭이는 듯한 은근한 말투로 내게 본론을 말했다.
“영주님, 직접 파견대를 이끄셔야 합니다.”
“제가 직접 말입니까? 지금의 시기에 그러한 외부 활동이 가능하겠습니까?”
조이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민은 기사들의 몫입니다. 그러니 영주님께서는 그저 물으십시오.”
“그 물음에 대고 부정할 기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 질문에 조이는 피식 웃었다.
“역설적이게도, 기사들은 그런 맹목 덩어리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런 맹목으로 똘똘 뭉친 고지식함은 이 아이베리아를 지배하는 주류가 되었지요.”
“허.”
내 헛웃음에 조이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곧 베르융 경이 모든 기사를 소집할 겁니다. 확장된 변방의 경비와 새로운 군사 재편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 재편 과정엔 무려 에커즈 기사단의 합류가 내포되어 있을 겁니다. 그러니 서기관인 저로선 이 당당함이 마땅한 것이지요.”
확실한 근거로 기반한 그의 설명에,
내가 어떤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오히려 지금이 가장 시기적으로 좋습니다. 한데 모여 재편할 베나즈의 군사적 시기는 바꿔 말하면 외부의 간섭 억제력이 가장 강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맹렬한 눈빛으로 의견을 내비치던 조이는 이제 좀 더 가까이 다가와 내게 작게 속삭였다.
“공, 이번 파견은 비단 내년에 예정된 불황의 돌파구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조이의 눈이 가늘어진다.
“마그나베노스, 그 재해의 기억과 관련된 실마리를 찾게 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자연스레 두 눈이 커졌다.
“그것과 관련해 아는 것이 있습니까?”
이어진 내 물음에 조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챈트와 관련된 실마리는 오롯이 그것을 거머쥔 자만이 느낄 수 있습니다. 피로서 거머쥔 인챈트의 실체를 용의 시대라는 책을 통해 본인만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바로 납득했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에 대한 근거는?
하고 의문이 들었지만, 그마저도 스스로 납득 할 수밖에 없었다.
조이 크레비디는 과거 기사왕의 서기관.
그렇다면 역시 그 당시 파견대와 관련해 많은 것들을 알고 있을 터.
그것만으로도 그가 제시한 가능성의 근거는 확실하다.
* * *
어제,
늦은 저녁까지 조이와 긴밀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새벽.
바돈을 통해 파견대 추진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메트로폴리아는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조이의 긴 설명 끝에 여러 생각을 고쳐야 할 만큼.
이윽고 점심 무렵이 되었을 때쯤.
바돈이 나를 찾아왔다.
“이번 파견대에 적합한 인물들을 모두 추려봤습니다.”
그의 손엔 빳빳한 서류가 들려 있었다.
이내 바돈은 그것을 조심스레 내게 건네었고,
나는 건네받은 서류를 통해 지금까지 쌓아 올린 베나즈의 반석 위에 모인, 마땅한 자질을 갖춘 자들의 목록들을 차례로 눈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