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82화 (282/365)

282화. 파견대 (4)

[페리크]

높게 세워진 낡은 이정표.

그 너머를 향해 나아가던 마차는 곧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멈추었다.

드드득.

이어서 차창을 두들기는 빗소리에 화답하듯 마차 문을 열면.

쏴아아!

먹먹했던 폭우의 살벌함이 귓구멍에 박힌다.

별안간 들이닥친 그 빗소리에 가장 안쪽에 앉아 있던 시트리에는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굉장한 폭우네요.”

이에 옆에 앉아 있던 론이 그녀의 중얼거림에 답했다.

“내년부턴 이런 비를 많이 보게 될 겁니다. 북상한 구름 전선이 아이베리아를 한바탕 훑고 갈 테니까요.”

그 답에 시트리에는 자신의 팔을 주물럭거리며 푸념했다.

“맞물린 톱니들에겐 정말 우울한 소리네요.”

그러자 둘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벨리타인이 끼어든다.

“해당 하늘의 조립을 담당하는 탑들은 지금 좋아 날뛰고 있을 거요, 몇 없는 ‘자연적인’ 개념으로 아이베리아에 물 먹일 수 있는 시기니까.”

그녀의 괴팍한 농담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론은 피식 웃으며 얼른 후드를 뒤집어썼다.

뒤이어 마차에 남은 자들도 모두 후드를 뒤집어쓴 채 차례로 나가기 위해 엉덩이를 들었다.

바돈은 이들의 움직임에 맞춰 마차 밖으로 가장 먼저 빠져나갔는데, 불과 그사이에 그의 후드는 흠뻑 젖어 있었다.

그렇게 후드를 뒤집어쓴 여섯의 사람이 거친 빗줄기 사이를 헤집으며 작은 마을로 향했다.

그 와중에도 유독 제리드 은행 측 사람인 제이는 내 바로 옆을 지키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런 그에게서 뭔가 익숙한 결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아이베리아의 기사들만 가지고 있는 그 특유의 맹목 같은 것 말이다.

한참 마을 중앙 길을 따라 들어간 우리는 곧 바돈의 안내를 받아,

[높새 그루터기]

녹슨 팻말이 달린 작은 주점으로 들어섰다.

협소한 주점 안은 생각보다 멀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기가 괜찮을 겁니다, 한 오륙 년 전까진 이곳의 단골이었거든요.”

흠뻑 젖은 후드를 벗어 비어 있는 의자에 등받이에 건 바돈은 아무렇지도 않게 구석진 자리로 들어가 내게 공손히 손짓했다.

그를 따라 구석진 자리 중 하나를 골라 앉자, 뒤따르던 넷도 우르르 몰려와 차곡차곡 빈 자리를 채웠다.

이제 바돈이 그들을 둘러보며 묻는다.

“흑색 에일, 벨린트산 증류주가 있는데 마시겠소?”

그러자 론이 슬쩍 손을 들어 바돈에게 조심스레 대답했다.

“저는 흑색 에일로 하겠습니다, 바돈님.”

론을 뒤따라 제이 역시 흑맥주를 고르자 눈치를 보던 시트리에가 수줍은 얼굴로 증류주를 골랐다.

마지막까지 조용히 있던 벨리타인은,

“혹시 우유가 있을까요.”

조곤조곤한 말투로 물었고 바돈은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왜 없겠습니까, 그럼…, 공께서는…?”

그 어스름조차 눅눅해질 정도의 폭우다.

그러다 보니 몸이 많이 식었어.

“증류주로 하겠습니다.”

* * *

론과 시트리에는 바돈을 도와 매대 안으로 들어갔다.

바돈의 말로는,

이 높새 그루터기는 무인 주점이란다.

그러니까 자기가 알아서 찾아 마시고 맘대로 취하는 곳이란 소리.

추가로,

그루터기라는 이름이 있는 주점 대부분 무인으로 돌아간단 부연설명은 덤이었다.

그러고 보니 되새겨보면 꽤 정확한 것 같아,

기업 ‘디세잉’의 측량 말이야.

매대 안에 들어간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자리에서 일어나면,

마치 무릎반사처럼 잠자코 앉아 있던 제이가 벌떡 일어섰다.

“공, 무슨 일이십니까.”

“괜찮습니다, 그냥 둘러보려는 것뿐이라서요.”

“혹 제 경계가 불편하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정도를 조절하는 것은 자신 있습니다.”

“아뇨, 귀하의 그 날카로운 부분은 계속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임무가 시작되었을 때 그 날카로움이 절실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내 말에 제이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과거가 조금은 궁금해진다.

기사,

그래.

그에게선 아이베리아의 기사와 같은 기운이 가득하다.

곧이어 매대 쪽으로 다가가자 부쩍 신이 난 시트리에와 가득 담긴 맥주잔을 들고 있는 론이 보였다.

그리고 그 둘 너머엔,

막 은화 세 개를 동전 구멍에 집어넣는 바돈이 보였다.

땡그랑,

하고 은화 하나가 구멍 속으로 굴러떨어지면 이에 맞춰 안에서 재깍재깍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요란한 소리에 맞춰 비어 있는 술 진열장의 각 받침이 미끄러지듯 이동했고,

그렇게 미끄러진 받침에 딸려 나온 건 뜨겁게 데워진 우유와 작은 유리병에 담긴 증류주 두 병이었다.

“건네는 손 조합의 최신 제품을 이런 곳에서 보다니.”

시트리에는 그런 진열장에 뺨을 댄 채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 술집 주인은 유행에 아주 민감한 사람인가 봅니다, 세상에 소리만 들어보면 이중 교차 톱니바퀴 장치가 네 개나 들어간 것 같은데…!”

속사포 같은 그녀의 중얼거림에,

론은 또 뭐가 떠올랐는지 흥미로운 얼굴로 혼자 중얼거린다.

“일전에 그쪽 조합의 채권 문제로 의뢰를 받아본 적이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고지식한 난쟁이들이라 진땀을 뺀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군요.”

중구난방이긴 하지만 제법,

이들 사이에서 어색함은 이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누그러진 것 같네.

* * *

사방을 두들기는 빗소리를 배경으로,

우리는 작은 원탁에 둘러앉아 본격적으로 임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저 메트로폴리아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론이 자연스레 담론의 주체가 되었다.

“일단 제가 알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론은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는지,

챙겨온 종이 위로 쉬이 알아볼 수 있는 약도들을 척척 그려내었다.

“간단히 설명하면 메트로폴리아는 크게 외곽, 미로, 그리고 중심으로 나뉩니다.”

비교적 온전한 모양으로 그려진 바깥쪽 약도와는 달리, 중간부터는 이리저리 무너지고 엉켜 알아볼 수 없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것에 시선을 쏟는 우리에게 론은 다시 설명을 이었다.

“외곽은 0에 의해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아 비교적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수많은 파견대의 목적지이기도 하지요. 이곳에 도가 튼 용병들은 세력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업을 벌이기도 합니다.”

론은 깃펜을 휘날리며 외곽지역 약도 쪽에 각각 동그라미 세 개를 그렸다.

“이 외곽지역의 핵심이라 불리는 지역은 기업 ‘마티스’ ‘파라기어’ ‘엔손’ 지부입니다.”

그의 설명에 시트리에가 반응했다.

“마티스는 기계장치 기술로는 당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굉장한 기업이었어요. 마티스에서 나온 설계도는 우리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요.”

그럼 그것을 받아든 론이 자연스레 잇는다.

“맞습니다, 그리고 파라기어와 엔손은 보험사이지요.”

그 말에 이번엔 벨리타인이 짧게 휘파람을 부른다.

“용의 시대 때의 보험사는 보유 자금을 미끼로 영업을 했었다지.”

이번에도 론은 씩 웃으며 받아쳤다.

“그러니 지금도 어딘가에 잠들어있을 금고를 따기 위해 수많은 파견대가 노리고 있는 거겠지요.”

이제 론은 외곽 안쪽에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번 파견대의 목적은 내년의 수확을 위한 종자확보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이 미로에 해당하는 지역을 넘어야 하죠.”

바돈이 물었다.

“이곳이 미로라 불리는 이유는 뭡니까?”

그 물음에 론은 즉답했다.

“이 미로라 불리는 곳부터가 0에 의해 직접적인 타격을 받은 지역입니다. 말 그대로 수많은 비밀과 기술이 잠든 기업들의 무너짐으로 탄생한, 종잡을 수 없는 해괴한 미로지요.”

론은 미로에 해당하는 외곽 안쪽 지역에 두 개의 동그라미를 그렸다.

“미궁 내에 가장 잘 알려진 길은 이 두 곳, 제과 기업 ‘키르즈’와 완구 기업 ‘오르펭손’ 지부입니다.”

곧이어 그는 두 동그라미 사이 공간에 별표 하나를 그려 넣었다.

“그리고 바로 이곳이 메트로폴리아에 몇 없는 종자 기업 중 하나인 ‘그라드’입니다. 아마도 공께서 찾으시는 종자도 이곳에 있을 겁니다.”

하지만 론은 그려진 별표 옆에 점을 찍으며 우려를 보태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 그라드 근처에 있었던 기업입니다. 제가 아는 것이라곤 인형을 만들던 회사 ‘돌체르’뿐이지만, 그것 하나만으로도 종자확보의 난도가 확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가 직접 그에게 질문했다.

“이유가 뭡니까.”

“그라드의 지부는 깊은 지하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에 돌체르는 아주 고층의 건축물이었거든요, 이 둘이 무너지면서 아주 결정적인 미로가 완성되었다 들었습니다.”

이제껏 침묵을 유지하던 제이가 한마디를 보탰다.

“거기다 돌체르가 만들던 인형은 일반적인 개념을 아득히 벗어난 것들입니다.”

그럼 바돈이 제이에게 묻는다.

“그게 무슨…?”

제이는,

바돈의 눈을 맞추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외부의 위험요소에 근거를 차릴 필요는 없다.’ 돌체르의 유명한 사명입니다. 그들이 만드는 인형은 위험요소를 직접 제거하도록 만들어졌거든요.”

아니,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오히려 다행이군요, 명확한 위험요소 하나를 상기하고 들어가는 거니까요.”

그 말에 제이는 자신의 허리춤에 달린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제이의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바돈은,

끝내 궁금했는지 그에게 질문했다.

“귀사에 관해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예, 바돈님.”

“제리드의 전신은 제리워드지 않습니까, 그…, 충분히 메트로폴리아의 주축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확실히, 메트로폴리아에 막대한 자금을 대고 있었던 건 사실일 겁니다. 다만 당시에는 다른 중요한 일로 인하여 그곳에 직접적인 개입은 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원스럽게 내민 대답에 바돈은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바돈.

나도 조금 궁금했거든요.

한차례 대화가 오간 뒤,

론은 주위를 환기하듯 다시 본론을 꺼내 들었다.

“명확한 위험요소라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는 이제 메트로폴리아의 중심을 깃펜으로 가리켰다.

대강이긴 하지만 제법 부분적으로 자세한 외곽과 그보다는 못한 미로 부분의 약도와는 달리,

단 한 줄의 약도도 그려 넣지 못한 그 중심을.

“바로 ‘별’입니다.”

그의 심각한 표정에 모두의 얼굴이 굳는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메트로폴리아 전역엔 ‘별의 시선’이 쏟아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소수는 그것을 ‘방사선’이란 단어로 표현하기도 하죠.”

벨리타인이 처음으로 혀를 내두르며 말을 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메트로폴리아는 0에 의해 그 상공의 벽이 완전히 깨진 상태라 그 어떤 여과 없이 별빛이 직격으로 떨어지는 곳입니다. 그들의 강렬한 시선이 누적되면 광증이나 붕괴증을 앓게 되지요.”

제이도 말을 보탰다.

“통상 땅거미에 해당하는 저열한 괴물이라도 시선으로 인한 광증을 거치면 매우 상대하기 힘든 요소가 됩니다.”

착하면 척,

다시 벨리타인이 즉시 꼬리를 물듯 이어 말한다.

“심지어 광증에 걸린 두 발 걷는 자나 그로 구성된 무리를 만나게 된다면..,”

“잠시만요.”

론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 그린 약도를 고이 접으며 주위의 시선을 모았다.

“우리 정말 중요한 한 가지를 잊고 있었네요, 뭔지 알아요?”

그의 물음에 제이와 벨리타인, 시트리에가 의문을 비친다.

론은 그러한 의문을 산산이 조각내듯 허무한 얼굴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와 함께하는 이름이 ‘베나즈’라는 거.”

왜 그렇게 일축되는 건데?

론의 말을 듣고 또 왜 다 납득하는 거야?

부담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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