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박동
자각자각.
미세한 톱니 소리를 내며 움직이던 거미가 내 손등에 내려앉는다.
거미의 꽁지 부분엔 빛으로 이루어진 실이 길게 늘어져 있다.
그 빛나는 실을 따라,
나는 론과 함께 샛길에서 기어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실의 근원을 쫓아 한참을 이동하면, 그제야 익숙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모두 괜찮으신 겁니까?”
그 인기척에 대고 말하자 너머 어둠에선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사하셨군요!”
하지만 시트리에의 반가운 목소리와는 달리,
“영주님.”
벨리타인의 목소리는 굉장히 냉소적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그러고 보니 바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순간 불안감이 일기 시작하던 그때.
“공, 저 여기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숨이 거칠다.
“시트리에, 빛을.”
너머 어둠 속에 있을 시트리에에게 말하자,
위잉, 위잉.
그녀는 곧바로 품속의 손잡이를 돌려 불을 밝혔다.
주위가 밝혀지자마자 론은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바로 앞에 보이는 바돈을 향해 달려들었다.
바돈은 둥근 벽에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벨리타인은 그런 그의 주변에 앉아 무언가에 몰두한 듯 바쁘게 움직인다.
“바돈!”
내 불안감이 반영된 두 눈은 빠르게 그를 훑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그의 옆구리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의 옆구리는 눅진한 모양새로 붉게 물들어 있다.
“… 바돈 대체….”
식은땀을 흘리던 바돈은 내 얼굴을 보며 애써 웃는다.
“다행히 그리 심각한 상처는 아니랍니다.”
그리곤 벨리타인을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공께 설명 좀 해주십시오.”
마치 밀랍처럼 미끈한 피부를 가진 벨리타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슬쩍 눈을 내리깔아 바돈의 얼굴을 본 뒤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동 중에 넘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튀어나온 턱에 옆구리가 크게 쓸렸고요.”
“목숨에 지장은 없는 겁니까?”
“예, 하지만 이 상태론 임무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말을 마친 벨리타인은 조용히 품에서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방금 그녀가 거론했던 럼주로 보여.
듣기만 했는데도 굉장히 독한 술인 것 같던데.
“소독하려는 겁니까?”
얼른 그녀를 돕기 위해 바돈의 옷을 벗기려는데,
그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럼주를 한 모금 머금었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코가 찡해질 정도의 독주를 아무렇지도 않게 꿀떡 삼킨 그녀는.
“아뇨, 제가 마시려고 꺼낸 겁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부르르 떨듯 고개를 떨었다.
그녀의 그런 행동에 당황한 나는 그저 벙찐 듯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 소독하려는 것도 맞구요.”
벨리타인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품에서 꺼낸 구슬 하나를 입에 물었다.
“이얼 이에 무채로 입기므 부며…,”
동시에 웅얼거리며 설명을 잇던 그녀가 바돈의 환부 쪽으로 고개를 불쑥 내밀자,
그에 맞춰 나는 얼른 론에게 손을 뻗었다.
“론, 단검을.”
“예.”
초췌해진 얼굴로 주위를 경계하던 론은 얼른 품에 있던 단검을 내게 건네주었다.
그 받은 단검으로 환부를 뒤덮은 옷가지를 가른 나는,
직후 피에 진득이 엉겨 붙은 옷을 조심스레 떼어냈다.
이에 바돈은 전신을 움찔거리며 이빨을 갈았다.
“끄… 후… 읍…!”
그렇게 드러난 환부.
말 그대로 딱딱한 것에 제대로 쓸려 안에 있는 근육 결이 보일 정도다.
벨리타인은 그 환부에 대고 구슬을 입에 머금은 채 입김을 불었다.
“크으으윽…!”
발작하듯 허리를 꺾은 바돈, 그런 그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제지하던 나는 초조함에 아랫입술을 씹어야 했다.
환부에 입김을 한바탕 불던 벨리타인은 구슬을 뱉은 뒤, 이번엔 축축하게 젖은 주머니 안에서 얇은 피막 하나를 꺼냈다.
“솔시그의 속껍질이에요.”
덤덤히 설명을 마친 그녀는 그것을 바돈의 환부에 부착했다.
척,
하는 소리와 함께 들러붙은 그것은 쉬이 떼어내기 힘들어 보일 정도로 밀착되었고.
그에 맞춰 고통을 호소하던 바돈 역시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조치가 끝날 때쯤.
“제가 너무 늦었군요.”
저 멀리서 제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론과 제이가 행렬 중간에서 바돈을 부축하고,
그 앞과 뒤를 시트리에와 벨리타인이 경계한다.
나는 그들 모두를 아우르기 위해 최후방에서 뒤따랐다.
거대한 뱀의 목구멍같이 생긴 갱도 길은 끝을 보여줄 생각이 없는 듯 같은 어둠만을 보여줬지만,
선두의 시트리에는 후방의 나를 믿고 제법 씩씩한 모습으로 길을 개척해 나갔다.
그렇게 한참 완만한 내리막길을 내려가다가 마주한,
거대한 공간.
그곳에서 우리는 또 한 번 빠르게 발을 재촉해 이동해야만 했다.
이번엔,
괴물이다.
음습한 이끼와 그것에 엉킨 그림자 따위로 생겨난 듯 보이는 그것들은,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는 뼈들을 휘감은 채 우리를 위협했다.
사방에서 물 쏟아지듯 쇄도하는 그것들을 보면,
이미 ‘증폭’의 단계까지 마친 것으로 보여.
이런 환경이라면 애초에 괴물의 번성이 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소리겠지.
“바돈을 데리고 이곳에서 얼른 빠져나가세요!”
말 떨어지기 무섭게 시트리에와 벨리타인이 바돈을 붙들고, 그에 맞춰 제이가 빠르게 떨어져 나와 내게 달려온다.
즈즈즈즉.
차진 진흙이 뭍으로 범람하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은,
질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쏟아진 해골들은 이제 내 코앞에까지 다가와 있다.
자루에 손을 얹은 뒤,
부드럽게 잡아 뽑자.
스륵!
새비안은 다시 한번 주위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번쩍였다.
그리고 그쯤에,
검을 뽑아 든 제이가 내 뒤에 찰싹 달라붙었다.
“베나즈 가문과 이렇게 직접 같이 싸우게 되어 영광입니다.”
곧 있을 전투에 잔뜩 흥분한 제이의 목소리에,
나는 기사의 웃음으로 화답해 주었다.
그렇게 괴물들과의 충돌 직전,
고개를 돌려 나머지 인원이 무사히 빠져나갔음을 확인한 나는 이제 유감없이.
0,
안에 담겨 있는 강대한 태풍을 살살 풀었다.
* * *
휙!
강렬한 바람 소리,
팍!
그와 함께 내쳐지듯 발산된 허연 풍압.
파가각!
그것을 고스란히 밭은 괴물들이 산산이 부서져 사방으로 비산한다.
바람결대로 찢긴 뼛조각이 눈처럼 흩날리는 그 아래, 지성의 부재를 야성으로 가득 채운 괴물들은 기계처럼 달려들 뿐이다.
새비안은 실로 명품이라 부르기조차 버거울 정도로 막강한 무기다.
떨어진 별을 벼려 만든 무기답게,
뭉쳐진 그림자와 같은 모호한 것조차 말끔히 벨뿐더러 거기에 그치지 않고 검날에서 쏟아진 별빛이 그것들의 존재를 휘발시키듯 지워나갔다.
그러한 예리함을 가진 검으로 휘둘러 친,
태풍의 파편 역시 날카롭기 짝이 없다.
잘 몰랐는데,
이런 어두운 곳에서 휘둘러 보니 조금은 알겠다.
이 검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한때 기사왕의 검이었던 이것이 휘둘러지며 그려나갔을 추구가 무엇이었는지를.
어둠으로 가득했던 공간은 어느새 밝아져 있었다.
휘둘러진 새비안의 별빛으로 인해서.
은빛 청명한 조명이 켜진 듯, 점점 공간을 가득 메우기 시작한 그 빛은 종래에 그림자들의 기세마저 팍 꺾을 정도로 번쩍였다.
좀 더,
조금만 더 휘두르다 보면 뭔갈 더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에.
나는 전신의 모든 부분을 예리하게 다듬고 다듬어가며 휘두르길 반복했다.
지금 내가 0의 힘을 드러내는 방식은,
비유하자면 수많은 실로 엉켜 있는 타래에서 실 하나씩을 뽑아 던지는 것과 같다.
그 뽑아 던지는 행위가 바로 검의 휘두름인 것이다.
그마저도 새비안이라는 무기 덕에,
풀어 내놓는 0의 속도와 날카로움 그리고 정확도는 내 의도 이상으로 뛰어나다.
하지만,
결국엔 실 하나씩을 뽑아 던지는 것은 변함이 없다.
검의 휘두름이라는 수단을 통해 수십 다발의 실을 동시에 뽑을 순 없는 걸까?
일전에 조이가 말해주었던,
재해의 추억을 눈에 담아야만 그 이상의 일을 해낼 수 있는 걸까?
자루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싣는다.
그럼 가슴 속에 0이라는 태풍의 윤곽으로 가득 찬 느낌이 든다.
그것은 벅차고, 무거우며.
한없이 버겁다.
도저히 그 거대한 태풍에서 수십 가닥을 뽑아 검으로 휘두를 수 없을 것 같다.
아니,
없다 단정 짓는 것은 결국 내가 내린 잣대일 뿐이다.
검을 휘두르는 내가 기준이라면,
오히려 기준인 내가 해야 하는 것은.
제시하는 것.
잣댈 부술 용의를 제안하는 것.
그러니까.
단지 다음 영역을 향해 뻗어 보는 것이야말로.
지금 내가 묻고 구하려는 답이겠지.
두근!
순간,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격한 뻐근함이 느껴졌다.
잊고,
있었다.
자유 속에서 눈을 떴을 때 느꼈었던 그 이질감 가득한 박동 말이야.
두근!
내 의지를 반영하듯 갑자기 고개를 쳐들며 두근거리는 그것은,
가슴 속 들어찬 0, 마그나베노스의 중앙에 위치해.
두근! 두근!
더없이 격한 박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박동으로 인해 울리는 전신은 어느새, 확신에 들어찬 모습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무엇에 홀린 듯이.
그래서 한 번 그 홀림에 전신을 쏟아 보았다.
양손으로 맞잡은 새비안을 아래에서 위로,
사선을 그리며 올려 베었다.
다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묵직함이 새비안의 검날에 휘감겨 있다.
쾌감이 느껴졌다.
개선에 기인한 변화는 그런 것이었다.
압도적인 성취감을 뒤따라오는 쾌감.
그렇게 휘두름을 마치자,
내 주변에 강대한 바람이 일었다.
* * *
갑자기 뭔가 달라졌다.
기류?
호흡?
제이는 자신의 감각을 건들며 들어오는 무언가를 느끼며 눈썹을 찌푸려야 했다.
하지만 이내,
그는 경직된 표정으로 디안을 바라봐야만 했다.
뭔가가 달라진 게 아니라,
전부가 달라졌다.
그의 예민한 청각은,
디안의 가슴 속 연속으로 치닫는 심장 소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는,
제이 팔기어로 하여금.
극상의 기쁨을 느끼게 해주었다.
잘.
‘잘 있었구나!’
연달아 치닫는 박동, 그리고 그 박동을 반주 삼아 휘둘러진 그것은.
과연 아이베리아에서 최강의 수식을 써 내려간 베나즈의 것이었다.
그 베나즈의 것이라는 것도 참 역설적인 것이…,
디안이 가진 것은 베나즈의 것을 잡아먹고 만들어진, 어떻게 보면 베나즈 자체의 대항마에 해당하는 것이다.
최강의 역설.
그 역설로 만들어진 최강.
아.
제이는 얼른 황홀로 일그러진 얼굴을 고쳐야 했다.
지금은 현재를 직시해야만 하는 상황이야.
저 정도의 휘두름으로 내쳐진 0이라면, 그 반동만으로 이 갱도는 박살이 나버린다.
그러니,
맞춰 보조해줘야겠지.
[9년, 페록스칼러]
어느 겨울을 일그러트린 세상의 열기.
추억, 재의 지붕.
디안, 그리고 그의 검으로부터 발산된 수십 다발의 바람이 소형 태풍의 모습으로 주위 모든 걸 휩쓸고 있다.
창궐이라는 마침표를 찍은,
증폭된 괴물을 멸절시켜버리는 그것은 과연 살아있는 재앙이로다.
갱도에서 일어난 태풍이라니.
바로 이 아이러니함이야말로 인챈트라는 힘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리라.
제이는 한 손으로 검을 치켜세워 남은 손으로 폼멜을 받쳤다.
그러자 붉게 달아오른 검 끝에서부터 무지막지한 열선이 뿜어져 나온다.
이내 그것이 우산처럼 번져,
디안 베나즈의 태풍을 뒤덮었다.
휘이익!
치이익!
뒤덮인 열기를 만난 태풍은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뿌연 연기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외벽과 천장이 태풍의 영향권 안에 들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제이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게 열기로 형성된 돔 아래, 태풍은 힘을 잃고 사그라들었다.
디안은,
조용히 자신의 검을 거둔 채 날 바라보았다.
“막아주어 고맙습니다.”
그 역시 뒤늦게 후폭풍을 가늠해본 듯, 당황하고 얼빠진 표정으로 내게 감사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