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신용
[짚과 구유]
끽 끽.
낡은 팻말이 요란스럽게 흔들린다.
작은 여관, 두 발 걷는 자들의 발길이 그리 많지 않은 곳.
이를 반영하듯 침묵에 젖은 홀에 있는 자라곤 네 명뿐.
술을 홀짝이며 옛날이야기에 빠져 사는 노인 하나,
이름 모를 산어귀에서 약초를 파는 중년 여인.
그런 중년 여인의 장성한 아들과,
여관을 운영하는 젊은 귀 큰 자.
그들은 별안간 침묵을 깨트리며 들어온 사람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외진 곳,
인근 거주자가 아니라면 발견하기 힘든 이곳에 그것도 여섯이나 되는 사람이 한 번에 들이닥친다.
홀에 모인 자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메트로폴리아로 향하려는 자들.
그것도 갱도를 통해서 온 자들.
이 여관은 무사히 갱도를 지나쳐 온 자들이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으니 당연히 도달하게 되는 생각이다.
그래서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들이닥친 인원들에게 다가갔다.
갱도를 통해 온 자들이 멀쩡할 리 없었으니.
아니나 다를까,
그들 중 한 사람이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도 다 같은 두 발 걷는 자들이라고, 여관 사람들은 부상자로 보이는 그를 안전히 받아들기 위해 기꺼이 거들었다.
와중에 노인이 물었다.
“다른 부상자는 없소?”
이에 유독 호리호리하고 지적인 모습을 한 남자가 즉답했다.
“없습니다.”
그러면서 부축한 남자를 테이블 위로 올리는 과정에서, 그의 허리에 채워진 단검과 머스캣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드러난 무기의 모습에 여관 주인과 젊은 사내가 부쩍 경계했지만,
“불을 좀 더 키워주십시오.”
반들반들한 피부를 가진 여인의 외침에 얼른 그 경계를 풀고 움직여야만 했다.
그렇게 중년 남자가 테이블 위로 올라오자,
붉게 젖은 그의 옆구리가 활짝 드러났다.
중년 여인은 익숙한 듯 환부 주위로 달려가 보조를 자처했고, 꽤 능숙한 솜씨를 보여주었다.
이런 정신없는 상황이 연속되는 와중,
막 벽난로에 장작을 잔뜩 먹이고 있던 귀 큰 자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이들 가운데 가장 어두운 후드를 뒤집어쓴 그는,
“하루 동안 이곳을 빌리겠습니다.”
참으로 감미로운 목소리로 부탁했다.
귀 큰 자는 아주 어릴 적, 고향에 있었을 때 들었던 가장 큰 나무의 노랫소리와도 같은 그 목소리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역시 장사꾼이었기에,
그렇지 않아도 손님이 없을 하루를 포장해냈다.
“하루 동안 손님을 받지 않는 만큼 대관 비가…,”
“얼맙니까.”
남자의 즉답에 귀 큰 자는 얼른 머리를 굴려야 했다.
그래도 여관의 볼품 없는 규모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자가 바로 본인이었으니까.
거리낌 없이 양심까지 팔아치울 그런 자는 못 되는지, 귀 큰 자는 조용히 시인하듯 답했다.
“은화 60개입니다.”
그럼 역으로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제안한다.
“이곳 물자를 비롯해 우리에게 완벽히 개인적인 공간을 마련해 준다면 금화 2개를 지불하겠습니다.”
그걸,
누가 거절하겠나.
귀 큰 자는 마치 음식을 마주한 걸신처럼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아차 싶었는지 뒤늦게,
“네, 예. 그렇게 하죠.”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러자,
남자는 검은 후드 속에서 손을 꺼내 귀 큰 자에게 보여주었다.
딱 보아도 검밥을 먹고 사는 자로 보이건만,
그의 손은 참으로 부드러워 보였다.
아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귀 큰 자는 그의 엄지에 걸려 있는 반지에 집중했다.
딱 봐도 알 수 있다.
가문의 인장.
너머 아이베리아라는 땅 위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것은,
도리어 건너편인 이 땅에서조차 그 영향력이 미치는 물건이다.
아!
이들은 아이베리아에서 건너온 깃발.
메트로폴리아로 향하는 파견대로구나.
귀 큰 자는 허겁지겁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그리곤 매대로 달려 들어가 낡고 허름한 명부를 펼쳤다.
아니, 아니다.
귀 큰 자는 낡은 명부를 얼른 덮었다.
거래 과정에서 찍혀진 인장은 그 자체로 수표가 된다.
그러니 이런 남루한 것 위에 찍히게 둘 순 없다.
그래서 귀 큰 자는 안주머니에 고이 접어 넣어놨던, 평소 아끼던 손수건을 꺼냈다.
아끼는 손수건이라고 해봤자,
그게 금화 2개만큼의 가치 있는 물건은 아니거든.
손수건을 펼치고, 매대 끝에 오랫동안 방치된 밀랍을 꺼내 불을 붙인 그는 이제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남자는 밤과 같은 그 후드를 벗으며 다가왔다.
그 순간,
귀 큰 자는 두 눈에 가득 차오르는 빛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려야 했다.
티 없다는 그 말을 그대로 의인화한 것이 아닐까?
이성이고 뭐고 간에 느낄 수밖에 없는 필연적 아름다움.
남자는 그러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다가온 남자는 능숙하게 녹기 시작한 밀랍을 한 스푼 떠 귀 큰 자가 펼쳐 놓은 손수건 위에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 위로 자신의 반지를 꾹 찍어 눌렀다.
이어서 옆에 놓인 싸구려 깃펜을 뽑아 찍힌 인장 아래에 금화 2개를 보장한다는 문구를 적어넣은 그는,
“거래 고맙습니다.”
슬쩍 손수건을 귀 큰 자 쪽으로 건네었다.
한창 넋을 놓고 있던 귀 큰 자는 뒤늦게 정신 차리곤 쫓기듯 상투적인 대답을 내뱉었다.
“펴… 편히 쉬십시오.”
휙,
조금은 아쉬운 감정이 남을 정도로 뒤돌아 걸어가는 그림 같은 남자를 뒤로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귀 큰 자는 손수건 위에 늘어 붙은 인장이 단단히 불어 말리는 데 온 집중을 쏟았다.
* * *
눅눅했던 하루가 지났다.
아직도 목 뒤에 켜켜이 내려앉은, 갱도의 그 찐득한 습기가 남아있는 것 같아.
그래서 챙겨온 날씨 파편을 꺼내 쏟았다.
꽃을 기지개 켜게 만드는, 그런 햇살 아래 종일 말린 빨랫감처럼.
이내 몸은 후덕한 나른함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렇게 문밖으로 나서서 바로 옆방으로 들어가면,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벨리타인이 날 반겼다.
“오셨습니까, 상태는 아주 좋습니다. 후유증도 없을 거고요.”
벨리타인은 근처 침대에 누워 있는 바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다만 일전에도 말했다시피, 그는 우리와 동행할 수 없습니다. 날씨도 개었으니 그를 하루빨리 리케니엔으로 후송하는 게 좋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벨리타인은 슬쩍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추가로 후송에 인원이 필요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 남은 그들은 이번 파견 임무에서 빠질 수 없는 재원들이지요.”
“당신은 어떻습니까, 벨리타인.”
그녀가 퍽 섭섭한 눈빛으로 날 꼬집듯 본다.
“베나즈 가문의 주인이신 귀하께서 다치실 거란 상상은 잘되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만, 그것이 남은 인원 모두의 무사를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찌 그렇게 말씀…,”
“그냥 한번 해 본 말입니다.”
내 말에 벨리타인은 꿍한 표정을 짓다가도 이내 고개를 숙이며 픽 웃었다.
“참…, 어제 갱도에서 있었던 일은…,”
그러다가 다시 진지해진 그녀가 내게 질문을 잇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 규모의 괴물들에게서 살아 돌아오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물론 진지함은 잠시뿐, 그녀는 다시 심드렁하면서도 유쾌함을 덧붙였다.
“베나즈라는 이름 안에 담긴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저 같은 자들에겐 참으로 추상적인 영역이거든요.”
“정확히 무엇이 말입니까?”
“앞서 말했듯, 그런 위기에서 살아 돌아오는 것 말입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나는 고개를 얼른 가로저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도 당연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당신이 바돈을 치료하고 살린 게 당연함으로 치부되지 않는 것처럼.”
물었다.
“바돈을 치료할 때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그녀는 답했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기에 했습니다.”
그럼 나는 똑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내려 노력했을 뿐.”
“깃발을 거머쥔 자들은 그 생각도 다를 줄 알았는데.”
“두 발 걷는 자가 다 똑같죠.”
내 대답을 들은 벨리타인은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그것은 남의 시선을 재지 않는,
참으로 호방하고 털털한 웃음이었다.
“그럼 바돈의 후송에 대해선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렇게 바돈의 모습을 한 번 더 눈에 담은 뒤 밖을 나서려는 찰나,
“공.”
벨리타인이 부쩍 가라앉은 목소리로 날 불렀다.
“우리 뒤를 따라 갱도 밖으로 나오셨을 때, 저는 들었습니다.”
“무엇을?”
“두 종류의 박동을.”
나는 다시 그녀에게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공, 디펠리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물론이지.
예전, 시몬 바스티유에 있었을 때.
포드에서 디펠리스 간호사회에 소속된 여인을 위해 일했던 적이 있었다.
“간호사회, 아닙니까?”
“맞습니다. 저는 사실 디펠리스 간호사회에 소속된 인원이기도 합니다. 대놓고 말하면 위장 신분으로서 소속되어 있지요.”
“그걸 제게 말하는 이유는?”
벨리타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식에 매몰되어 살아가기로 작정한 자들의 객기, 뭐 그런 거지요. 각설하고, 그 디펠리스 간호사회의 의학 서적 가운데 두 개의 박동과 관련한 자료가 있었습니다.”
“해서, 그것과 관련해 내게 해줄 이야기가 있습니까?”
“지금은 여건상 곤란합니다, 시간이 많지 않기도 하고…, 추후 공께서 제게 시간을 내어주신다면…,”
“좋습니다.”
벨리타인은 창백한 그 얼굴에 가장 잘 어울리는 미소를 지었다.
* * *
벨리타인.
수수께끼와 같은 그 외형적 모습과 걸맞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인물이다.
끝까지 경계하여 멀어져야 하는 걸까.
아니면 가까이 두어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것에 다가가야 하는 걸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지금은 그저 눈앞에 직시한 일을 해결할 뿐이다.
벨리타인의 말대로 바돈의 후송에 파견대의 인원을 차출할 순 없다.
그들 모두가 있어야,
메트로폴리아에 산재 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후송과 관련된 문제는 오히려 더욱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어제,
난 보았지.
그 귀 큰 자가 보여주었던 돈에 대한 신용.
돈과 관련해 완벽한 신용을 보이려 노력하는 자들만큼 쉽게 믿음을 줄 수 있는 상대도 없다.
그에 따른 보상만 잘해준다면,
그들은 절대로 저버림을 보여주지 않을 테니까.
옛날,
정말 옛날에 흐릿하게나마 기억나는 게 하나 있다.
누이가 내 옆에 정답게 누워 읽어주었던 동화.
그 동화에선 돈에 맹목적인 자들을 악인으로 묘사했었거든.
그런데 동화의 내용을 듣다 보니까 의문이 하나 생겼다.
결국엔 주인공의 행동도 그 악인이 노리던 돈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귀결되었었으니까.
다만 주인공이라 부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정당했기 때문이지.
지금에 와서 보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 동화 속 주인공이구나 싶다.
그리고 나도 그 수많은 주인공 중 하나일 뿐이고.
* * *
홀에 들어서자 기꺼이 그곳에서 잠을 청했던 자들이 날 반겨주었다.
노인, 중년 여성, 청년, 귀 큰 자.
그런 그들과 마주한 나는 조용히 앉아 입을 열었다.
“모두 알다시피 제 일행 중 하나의 몸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를 안전히 호송시켜만 준다면 내 충분한 사례를 해드리겠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그들은 묵묵히 시선을 나눈 뒤.
한 이야기의 주인공을 자처하듯 순수한 눈빛으로 화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