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메트로폴리아
바람,
이에 흔들리는 나뭇잎.
떨어진 낙엽의 모양까지도.
모두 다르다.
갱도 너머를 통해 접한 땅은.
한바탕 쏟아진 폭우, 그 이후 허무감이 들 정도의 쾌청이 자리 잡은 지금.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인다.
그래서 두근거렸다.
중립지역, 그 쫓기는 와중에 느꼈던 설렘 비슷한 것으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면,
정말 거대한 바다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바다 아래 갱도를 통해 이곳에 왔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묘하게 피가 끓는 느낌이다.
아직 먹구름을 품은 저 넓은 바다는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너울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다 너머에 아이베리아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
괜히 적적하고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정말,
이제는 나의 고향, 나의 보금자리구나 싶다.
저 아이베리아가 말이야.
덜그럭덜그럭,
바닥, 모난 부분마저도 감싸 안듯 구른 바퀴에 마차가 연신 흔들린다.
짧다면 짧은,
그 어두운 갱도 속 여성 가운데 이곳에 모인 다섯은 꽤 끈끈한 유대를 형성시킬 수 있었다.
제이 팔기어는 스스럼없이 가진 인챈트로 날 보조해주었고,
벨리타인은 최선을 다해 바돈을 치료해 주었으며,
시트리에는 그 어둠 속에서 우릴 하나로 묶어주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유려히 연결 지은 것은 론이었다.
그들도 나와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을까.
이제 그들 중 누구를 봐도 선뜻 어색한 기류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과자 드실래요?”
벙벙한 표정으로 과자를 먹고 있던 시트리에가 천진한 표정으로 우리 모두에게 물을 만큼.
이 사이의 기류는 편한 것이었다.
시트리에가 쥐고 있던 과자를 받아간 제이와 론은 그것을 한입씩 깨물었다.
“아직 당이 부족한 것 같진 않아.”
이어 벨리타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하자, 시트리에는 입술을 쭈뼛거리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해서 아무렇지 않게 건넨 과자를 받아들자,
시트리에는 고개를 팍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기업이나 조합에서 만든 과자가 아니군요?”
론의 물음에 시트리에는 얼굴에 올라온 싱그러움을 애써 감춘 채 대답했다.
“여관에서 가져온 거예요.”
제이는 별 차이를 못 느끼겠다는 듯, 아리송한 표정으로 남은 과자를 여물 먹는 소처럼 입안에 털어 넣었다.
“론씨는 미각도 예민하신가 봐요?”
금세 호기심을 드러내며 묻는 그녀에게,
막 과자를 다 먹은 론은 입가를 털며 스스럼없이 답했다.
“레프리길 정도 되는 기업의 자유 탐정이 되려면 예민한 미각은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죠.”
“그럼 온갖 다양한 것들을 미각으로 접해보셨겠어요?”
그녀의 물음에 론은 그리 좋지 않은 기억이 났는지 씁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렇죠, 독은 물론이고 각종 뼛가루부터 시작해서 혀에서 받아들여지는 날것과 죽은 것들의 미세한 차이까지…,”
시트리에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지만,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벨리타인이 갑자기 관심을 보였다.
“아주 흥미롭네요, 당신 혀를 본뜨고 싶을 만큼.”
“혀를 잘라서 박제한다는 걸로 들리는데요.”
“에이, 그럴 리가. 그러면 좋긴 하겠지만…,”
“어쩌면 조만간 당신과 관련해서 수사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께름칙함을 느낀 론의 짓궂은 장난을,
벨리타인은 느긋한 미소로 가벼이 받아쳤다.
어느덧,
오른편에 보이던 바다가 하나도 보이지 않을 만큼.
마차는 큰 고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 큰 고개를 넘어서기 무섭게, 마차 위로 펼쳐진 하늘은 부쩍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시간이 당겨진 것처럼.
별안간 쏜살같이 쏟아진 어둠에, 우리는 모두 바삐 눈을 굴려 차창 밖을 살펴야 했다.
이윽고 론이 나를 보며 말했다.
“공, 보십시오. 저곳이 바로 메트로폴리아입니다.”
그의 가리킴을 쫓아간 곳엔,
한눈에 다 담기지 않을 만큼 거대한 풍경이 맺혀 있었다.
하나하나가 거대한 땅의 상징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그런 마천루가 연속된.
과도와 점철이라는 단어로만 이루어진 듯한 곳.
그리고 그 위에 펼쳐진 하늘은,
문자 그대로 뚫려 있다.
둥근 모양으로 드러난 우주의 민낯.
그리고 그 테두리엔 하늘로 보이는 반투명한 막이 여러 균열을 품은 채 위태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그것은…,
용의 시대 이후,
그 변함이라 일컬어지는 모든 부분을 함축한 듯한 풍경이었다.
영원한 새벽에 갇혀 있다고 했었지?
이젠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메트로폴리아의 하늘은 드러난 우주와 깨진 하늘이 뒤섞여 푸르스름하고도 고고한.
그런 차가움으로 가득 차 있다.
* * *
메트로폴리아에 인접한 검문소에 도착하자마자 바돈이 섭외한 기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차를 몰아 되돌아갔다.
이윽고 조촐한 검문소 안에서,
한바탕 부산스러운 인기척을 내며 나타난 한 남자.
“반갑습니다, 저는 기업 ‘메킨토’의 4세대 영업사원 ‘아소’라고 합니다.”
검은색 낡은 양복.
살짝 금이 가 있는 단안경.
그런 남루에 어울리지 않는, 머릿기름으로 깔끔히 정돈한 검은 머리.
조금 어벙해 보이는 그 남자는 단번에 우리 사이의 질서를 알아본 듯 나를 바라보며 재차 인사했다.
“메킨토의 전신은 영원한 새벽에 갇혔지만, 외부에 나가 있던 영업부가 그 명맥을 이어 기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창백한 그의 악수에 응하자,
“짧게 기업 메킨토의 영업부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로 진지하게 열변을 토하던 그는,
이제 두 손을 휘저어가면서까지 설명을 이어갔다.
“메트로폴리아의 전반적인 환경을 비롯해 방문자들을 위한 길 안내와 약도 제공 및 여러 위험요소에 대한 상기를 제공해드리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론이 냉정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것들을 신뢰할만한 바탕이 있긴 한 겁니까?”
이에 영업사원 아소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비록 메킨토의 전신은 사라졌지만, 그 정신만큼은 계승되어왔다고 자부합니다. 메킨토의 사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고객 등친 직원은 애미 없는 새끼다.’입니다.”
그러곤 뭐가 웃긴지 자기 혼자 피식거리며 사족을 덧붙인다.
“저희 어머닌 4년 전에 돌아가셨지만요.”
도대체 뭐 하는 정신 나간 기업이기에…,
이런 내 생각을 환기하듯,
어이없는 표정으로 일관한 론이 작게 중얼거렸다.
“누가 세기말 광기로 똘똘 뭉친 기업 아닐까 봐…,”
그제야 메트로폴리아가 다시 보인다.
세기말 감성으로 집대성된,
저곳이 애초에 정상적인 사고로 건설되었을 리가 없지.
비로소 창백한 얼굴을 한 채 기계적으로 영업을 펼치는 아소의 모습이 다시 보여 소름이 끼쳤다.
“결정적으로, 당사에서 고객님들께 제공해드리는 모든 부분은 ‘무료’입니다. 이것만큼 훌륭한 신뢰의 바탕도 없죠.”
론이 미간을 짚으며 대꾸했다.
“요즘 세상에 공짜만큼 비싼 것도 없습니다.”
이에 아소는 실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세상이 정말 미쳐 돌아가고 있군요. 메트로폴리아에서 공짜란 단어는 자살이나 병신이란 단어랑 일맥상통하거든요. 그만큼 보기 힘든 거란 말입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다.
아소의 세상은 내가 사는 곳과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아.
론이 더욱 따지고 물었다.
“그럼 공짜라고 합시다, 그렇다고 아무 의미 없는 공짜는 아니겠죠? 그로 기인한 기대심리라도 있겠죠, 그렇죠?”
쏙쏙,
의표를 찌르는 론의 질문에 아소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허공을 손가락으로 콕콕 찍었다.
“아하, 역시 예리하십니다. 당사의 영업을 받고 계신 고객님답습니다.”
마치 영혼을 잃은 광대를 보는 것 같군.
아소는 해맑은 표정으로 우리 모두를 훑어본 뒤 큰 결심을 한 양 크게 소리쳤다.
“기업 메킨토의 4세대 영업사원, 아소의 친절 제공 평점란에 만점을 부여해주신다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
우리는 그저 서로 시선을 마주한 채 침묵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고객님께서 아량을 베풀어주셔야만, 저흰 당사가 말하는 애미 없는 새끼가 되지 않을 수 있거든요. 물론 저희 어머니는 4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그… 그만.”
머리가 아픈지 론이 고개를 재빨리 가로저었다.
대체 그 점수와 평가에 얼마나 얽매어있는 거야?
심지어 붕괴한 지 한참 된 기업에!
아소는 친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객님, 그럼 조심스럽게 부탁드리면서…, 원하시는 정보에 대해 제공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는 품에서 손수 그린 듯 보이는 똑같은 지도 뭉치 가운데 두 장을 뽑아 우리에게 건넸다.
“귀하께선 목적지가 어떻게 되십니까?”
천진한 그의 물음을 듣자 하니,
구태여 속이거나 감출 생각은 들지 않아 대답했다.
애초에 그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한들, 지금의 파견대가 전력으로 밀릴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라드로 가려 합니다.”
내 대답에 아소는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딱 좋군요, 딱 메킨토를 거쳐 가실 수 있겠어요!”
그는 우리 모두를 모이게 한 뒤, 그 가운데 지도를 펼쳐 손수 여러 군데를 지목하며 설명했다.
“우선! 여러분들은 메트로폴리아 외곽 길 중 하나인 ‘페르소나’로 가셔야 합니다. 중간중간 건물을 점거한 과격한 용병들과 세대를 아우르며 생존한 기업의 직원들이 있어 그 부분만 조심하시면 되지요.”
그는 곧이어 미로에 해당하는 부분을 가리키기 직전,
유독 자세히 그려진 건물을 가리켰다.
“여기가 바로 메킨토의 본점입니다.”
슬쩍,
내 눈치를 살핀 아소는 설명을 계속했다.
“페르소나를 통해 메킨토를 지나쳐 미로로 진입하시게 되면, 그 유명한 제과 기업 키르즈가 나오죠. 아 그 전에 설명해드릴 게 있습니다.”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우리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그런 모아진 시선을 휘어잡은 아소는 그려진 미로 부분 전체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말을 이었다.
“이 미로에는 ‘신기루’가 흩어져 있습니다. 신기루란 과거 메트로폴리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어느 광고 기업의 획기적인 기술을 말하죠.”
“신기루? 기술?”
론의 물음에 아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당 광고 기업이 붕괴하면서 그 안에 있던 기술이 미로 지역 전체에 누출된 겁니다. 해서 그 신기루라는 기술이 어떤 환경 따위와 같이 미로에 자리 잡게 된 것이죠.”
그는 나를 보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유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걱정하진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환각처럼 눈에 어떤 글씨나 그림 따위가 떠오를 뿐이니까요. 되려 그것이 그라드로 향하는 과정에서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눈에 글귀나 그림 따위가 환각처럼 떠오른다?
그런데 그게 광고 기업이 만들어낸 기술이라고?
메트로폴리아,
점점 더 종잡을 수 없는 곳처럼 느껴지네.
“미로 관련해서 정말 진지한 위험요소가 될 법한 것들은 지도 뒤편에 정리되어 있으니 가면서 천천히 읽으시면 될 겁니다.”
아소는 그렇게 공손한 인사를 거듭한 뒤 우리에게 지도를 챙겨주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꼭 가는 길에 귀사에 들르도록 하겠습니다.”
위로하는 뉘앙스로 말을 건네주었다.
그럼 그는,
“정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하고 해맑게 인사를 건넨다.
작은 친절조차 부풀어 받을 줄 아는 그를,
세대에 걸쳐 짓누른 메트로폴리아의 광기는 과연 어떤 것이기에.
이제,
그것을 확인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