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메트로폴리아 (2)
얼핏 보면 민머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바짝 넘긴 금발 머리.
양옆에 두 여울을 만들 정도로 높게 솟은 콧대.
그리고 두 여울짐 속에 맺힌 녹색 눈.
솟은 광대와 묵직한 턱은 신경질적인 인상을 그대로 정형한 것처럼 생겼고,
그런 정형에 비례하듯 목 아래 뻗어진 몸의 굴곡은 연속된 능선처럼 다부지고 복잡하다.
그 남자의 이름은 배닝스 오페라.
그의 양 손가락 마디마다 걸려 있는 반지는 하나하나가 봉인과 결제 따위의 권한이 부여된 인장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인장 가득 걸린 주먹으로 막,
퍽!
무릎 꿇고 마주 앉아 있던 남자의 턱을 후려갈겼다.
가뜩이나 장신인 배닝스의 주먹은 말 그대로 철퇴에 가까운 것이었다.
게다가 그 주먹에 걸려 있는 것은,
살벌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단단한 인장들이다.
이러한 두 맞물림의 파괴력을 증명하듯,
턱을 얻어맞은 남자는 벌목된 나무처럼 상체를 쏟았다.
그렇게 쓰러진 남자 뒤편엔,
이미 한바탕 두들겨 맞은 듯 보이는 여인이 내팽개쳐져 있었다.
“캣 데니즈 조합도 별거 없네, 그렇지?”
곧이어 배닝스가 목을 까딱거리며 너스레를 떨자,
주위 곳곳에 대충 걸터앉아 있던 자들이 시시껄렁한 웃음으로 화답해 주었다.
“어디 보자, 어디 보자.”
이제 중요한 순간에 접어들었는지, 배닝스는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쭈그려 앉아 쓰러진 남자의 어깨를 밀쳤다.
“커… 흑…!”
겨우 숨을 붙이고 있던 남자는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피를 토하며 고통을 호소했지만,
배닝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의 오른팔을 번쩍 들었다.
이내 오른손가락에 걸려 있는 반지를 빼낸 배닝스가,
“금융권 양반, 일로 와 봐.”
뒤돌아 누군가를 부르면 걸터앉아 있던 무리 가운데 하나가 불쑥 걸어 나온다.
난쟁이보다 작은 키,
창백한 황톳빛 피부를 가진 그는.
고블린이었다.
“요 인장 감정 좀 해봐.”
배닝스는 다가오는 고블린에게 피 묻은 인장을 던졌다.
익숙한 듯, 작은 손으로 날아온 인장을 낚아챈 그는 곧바로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범 신용 확인 및 조회서 – 중앙은행]
표지서부터 온갖 톱니장치가 얽혀 있는 그 책은 고블린의 작은 손이 닿는 순간 요란하게 돌아가며 열림을 허락했고,
그렇게 난쟁이는 책의 펼쳐진 공백 위로 방금 받은 인장을 찍었다.
“따로 잉크 따위가 필요할 일은 없겠어.”
그러면서 길게 늘어진 코를 실룩거리며 이죽거리던 고블린에게,
배닝스는 천진한 어린아이처럼 미소지어 보였다.
이윽고 붉게 찍혀진 인장 옆 페이지에, 스멀스멀 글자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두구두구두구…, 빰!”
흥이 돋은 듯 요란스럽게 중얼거리던 고블린은 곧,
옆 페이지에 떠오른 글을 눈에 담은 채 배닝스에게 보고하듯 말했다.
“캣 데니즈 정식 조합 소속!”
그 첫 대목만으로도,
주위 모든 이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오래간만에 제대로 낚았네.”
“아직 모른다! 개밥일지 누가 알아?!”
“정식 조합 소속이면 상차림부터가 다르다 이 말이야!”
배닝스는 살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고블린을 재촉했다.
“계속 말해.”
“기획 조합원, 멜즈 폰드리아.”
고블린은 이제 가장 하단에 적힌 부분을 주시했다.
“멜즈 폰드리아의 인장으로 결제 가용한 금액은 통용 금화로 총 23만 개.”
이 대목을 기다렸던가.
배닝스를 비롯한 주위에 앉아 있던 자들 모두가 너나 할 것 없이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그들은 여기서 그칠 생각이 없었다.
배닝스는 곧장 널브러진 남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말해 봐, 이곳까지 와서 찾으려고 했던 게 무엇인지.”
그의 물음에,
막 걸쭉한 피 한 줄기를 토해낸 남자는 힘없이 바닥에 이마를 박을 뿐이다.
이곳은,
이곳 메트로폴리아는 어떤 목적 없이는 향할 수 없는 곳이다.
기업과 조합, 그리고 깃발마저도.
단지 갈구만을 위해서 찾는 곳이 바로 이 메트로폴리아.
그리고 그런 메트로폴리아에서 찾아낸 것들은,
현시대의 어떤 난해함을 풀 수 있는 열쇠와도 같은 것.
한 마디로 그 가치를 쉬이 산정할 수 없을 만큼 값진 것이란 뜻이다.
하여 배닝스는 다시 남자에게 물었다.
“뭘 얻기 위해 이곳에 온 거냐.”
바깥에서 모은 정보를 통해 이곳으로 향하리라 결심한 그 확신의 근거를,
다 말해보아라.
배닝스는 살벌한 눈빛으로 남자를 쏘아붙였다.
“바르코, 저년 허벅지 부러트려.”
대답 없는 남자에게 배닝스는 스스로 해답을 찾은 듯 대답했다.
그러자 뒤편에서 누군가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잠깐 발작하듯 움직이던 남자는 거의 의식이 꺼져가는 두 눈으로 배닝스를 노려보았다.
그리곤 뭉개진 손을 허리춤에 달린 단검 자루에 얹었지만,
되려 배닝스가 선수 치듯 그의 단검을 뺏어 들었다.
“확실히, 조합 소속 놈들인지 몰라도 싸움 실력 하나는 기똥차더군. 우리 가운데 둘이 이 단검에 쪽도 못 쓰고 당했지. 어떤 인챈트지? 맞춰볼까? 겨울과 관련된 재해인 것 같은데, 맞지?”
남자를 농락하듯 단검을 이리저리 던져 잡던 배닝스는 익살스러운 웃음으로 말을 이었다.
“너도 알잖아, 이건 네 손에 있어야만 가치 있는 물건이라는 걸. 내 손에 들어온 이상 이건 단지 조금 우쭐거릴 정도로 잘 벼려진 단검일 뿐이야. 그렇다고 내가 널 죽도록 고문한다고 해도 네가 이 인챈트를 내게 양도할 것 같진 않을 것 같고.”
콱!
남자의 바로 코앞,
그 바닥에 괴력 적인 힘으로 꽂힌 단검.
갑작스러운 일에 남자의 뿌옇던 두 눈에 잠깐이지만 선명한 초점이 맺혔다.
그리고 그것을 놓치지 않은 배닝스가 게걸스러운 움직임으로 바닥에 엎드려 남자의 시선을 훔친다.
“네 손에 있을 때 생기는 가치를 지켜, 너만이 아는 그 가치를 놓쳐서 일말의 여지도 없는 쓰레기로 만들지 말란 말이야.”
“야, 배닝스. 지금 막 이년 발목을 잡아 들었는데 어떻게 해. 진짜 부러트려?”
바닥에 뺨을 맞댄 채 열변을 토하던 배닝스의 뒤편으로,
끼어들듯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
이에 배닝스는 갑자기 광분한 듯 목에 핏대를 세우며 신경질 냈다.
“이 씨발놈아, 지금 내가 말하고 있잖아!”
얼마나 무시무시한 포효인지,
순식간에 주변 일대 공기가 얼어붙을 정도였다.
“배닝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기가 죽은 듯 즉답한 남자의 말에,
순간 발작하듯 움직여 일갈한 배닝스는 이번엔 편집증적인 모습으로 온몸을 벌벌 떨며,
간신히 화를 가라앉혔다.
그리곤 차분해진 모습으로 돌아와 이마 위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성껏 쓸어넘긴다.
“자,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갈까? 너도 알지? 허벅지 뼈가 부러지면 그 안에 엉켜 있던 혈관은 진창이 되어 버려. 저 여잔 사망 확정이라고.”
“쿠… 울럭.”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상체를 움찔거린 남자가 말 대신 핏방울을 토해냈다.
“그래그래, 네 선상에 있을 때 가치 있는 것을 지켜.”
이제 배닝스는 마치 자기 자식을 다루듯 애정 어린 눈빛으로 쓰러진 남자의 목을 손수 받쳐주었다.
“나는…, 아니 ‘우리 오페라’는 거래 하나만큼은 확실히 지켜. 선이라는 게 존재한다 이 말이야. 우리도 알아, 그런 선 하나 없이 움직이는 건 괴물 새끼나 다름없다는 걸. 그리고 우리도 원해, 그런 괴물이 되지 않기를.”
남자의 입 주위, 엉겨 붙은 피를 손수 닦아주고.
피와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호호 달래던 배닝스의 모습에,
완전히 기가 질린 남자는 끝내.
“기업…, 비…, ‘빌체포스’로 가…, 려고 했어.”
목구멍에 가득 찬 피가래를 밀어내며 말했다.
“빌체포스? 왜?”
배닝스는 온화한 모습으로 되물었다.
이에 남자는 슬쩍 고개를 돌려 발목을 잡힌 채 거꾸로 들려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배닝스의 말대로,
놈들에겐 확실한 선이 있다.
여인은 자신과 같이 두들겨 맞았을 뿐, 어떤 능욕의 흔적도 없었다.
애초에 이러한 정황을 거래라는 무대 위로 가져다 쓰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지만,
그렇게 따지면 배닝스라는 인간에게 통용될 상황 따위가 있긴 한 걸까?
달달달.
남자는 저도 모르게 이빨을 부딪치며 떨었다.
봤거든.
저 일당과 싸우는 와중, 갑자기 튀어나온 배닝스의 무력을.
그가 가진 인챈트를!
배닝스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거꾸로 들려 있는 여인 쪽을 바라보았다.
“야야, 내려놔.”
그의 말에 잔뜩 기가 죽은 남자는 잡고 있던 여인의 발목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이제, 배닝스의 품에 안긴 남자가 작심한 듯 말한다.
“비…, 빌체포스에 있다는 어…, 떤 ‘주판’을 손에 너…, 넣기 위해서. 그 이… 상은 나… 도 몰라.”
“그래, 모르는 거 이해해. 그래서 그 금융 기업인 빌체포스의 보안을 어떻게 뚫을지도 다 생각한 거야?”
“계… 계산.”
“계산?”
“비… 빌체포스의 중..앙 설비에 대한 저… 정보가 있어서 그걸…, 미리 풀어봤지…,”
“너희 조합 진짜 대단하구나?”
배닝스는 초롱초롱한 두 눈으로 진심 어린 칭찬을 쏟았다.
그리곤 감동한 표정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우리랑 거래하려고 작정했고 말이야.”
“… 그… 래.”
남자는 겨우 턱을 내려 자신의 품을 가리켰다.
배닝스는 그것을 따라 그의 품 깊숙이 있는 은밀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렇게 주머니 속에 나온 것은 유리로 코팅되어있는,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종이.
“거… 기에, 빌체포스의 주… 중앙 설비와 관련된…, 단서가 있어.”
배닝스는 조용히 남자를 내려놓은 채, 반질반질한 종이를 소중히 품 안에 집어넣었다.
“그래, 알았어. 우리가 잘 쓰도록 할게.”
배닝스는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얘들아, 약물 몇 개 줘봐.”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 형형색색의 용액이 담긴 유리병들을 건네받았다.
“그래도 네 신체적 능력이라면 저 여자보다 빨리 회복될 거야, 그럼 이 약물로 치료한 다음 여자도 치료해서 이곳에서 빠져나가도록 해. 참, 네 인장은 방금 막 가져가서 최대한도 금액만큼 인출 할 거야.”
차곡차곡,
정돈하듯 쓰러진 남자 주위에 도미노처럼 약물 병을 나열한 배닝스는 마지막까지 친절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저거 전부 기업 ‘올텐즈’에서 만든 약이니까, 의심은 하지 않아도 돼. 메트로폴리아에 몇 없는 제약회사인 만큼 효능이 죽이니까.”
배닝스는 이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메트로폴리아 외곽,
어느 간판 떨어진 고층 건물 안.
그곳에 조촐히 남겨질 남자와 여자에게 배닝스는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지 출구 앞에 멈춰 선 채 말했다.
“우리 대부기업 ‘오페라’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복수해도 됩니다. 복수만큼 좋은 ‘이자’도 없으니까.”
별의 시선에 뇌가 녹기라도 했나.
저 천연한 광기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막 의식을 잃기 직전, 남자는 이 미친 상황에서 얻은 안도가 참으로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이내 저 바깥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을 끝으로,
“그럼 페르소나 거리를 통해 가야겠네?”
“그쪽을 시작으로 미로에 진입하면 손꼽을 만큼 엿 같은 데로 가는 거 아냐?”
남자는 의식을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 * *
무지갯빛 조명 아래,
벽돌로 복잡한 격자무늬를 수놓은 도로.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로,
용의 시대가 허락한 최선의 세련으로 포장된 길 위.
그 위에 올라선 나와 나를 따르는 파견대는 이제.
“갑시다.”
향했다.
도시 메트로폴리아의 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