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메트로폴리아 (4)
도시라는 단어의 그 규격적 느낌을 건축물로써 표현하려고 하면 딱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한 마디로,
커도 너무 크다.
기업 메킨토의 건물 내부가 그렇다.
탑의 세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건물 안에 광장으로 보이는 공간과 시계탑을 비롯해 상점가까지 있다.
“당시 기업들은 다 이 정도 규모였습니까?”
혀를 내두르며 던진 내 질문에 제이는 정말 당연하다는 듯한 뉘앙스로 이렇게 말했다.
“세기말이었으니까요, 기업의 제국화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을뿐더러 메트로폴리아는 그런 제국적 기업이 다발로 묶여있는 곳입니다.”
물론 그렇게 대답한 본인도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끝내 혀를 내두르며 사족을 붙였다.
“저도 책으로 배운 입장이라…, 거기에 적힌 대로만 대답해드렸을 뿐입니다. 실제로 보니 정말 어마어마하군요.”
이윽고 한참을 앞장서 가던 론이 큰 목소리로 우릴 불렀다.
“모두 이쪽으로!”
그 부름을 받고 다가가자 론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앞에 놓인 거대한 자판기를 가리켰다.
검은색 투박한 자판기 아래에는 두 개의 사출구가 있었지만, 위에는 투입구가 단 하나뿐이었다.
투입구가 없는 쪽엔,
[사내 지도 –정직원 전용-]
화려한 무늬가 들어간 팻말이 박혀있었고 반대로 투입구가 있는 쪽은,
[사내 지도 –비정규직 전용-]
건조한 느낌의 팻말이 박혀있다.
이내 자판기 곳곳을 살펴보던 시트리에가 관련한 지식을 내뿜었다.
“정직원용은 관련된 인장 따위를 증명하면 자동으로 지도가 배출되는 식일 거예요.”
그럼 벨리타인이 묻는다.
“증명을 어떻게 하지?”
시트리에는 곧장 손가락으로 팻말 위를 가리켰다.
“저기, 훼손된 부분 보여요?”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가 보니 정말 팻말 위에 일부분 훼손된 흔적이 있다.
“이 당시의 증명은 대부분 특정 문양을 각인시킨 진주 따위를 썼어요. 그 각인된 문양은 정직원들이 들고 다녔을 인장의 모양과 똑같았을 거고. 그래서 대조가 성립되면 자판기가 알아서 작동하는 거죠.”
시트리에의 설명을 묵묵히 듣고 있던 론이 파손된 부위를 유심히 관찰하며 추리를 덧댔다.
“언젠가 방문했던 누군가 돈이 될만한 것을 다 뜯어간 거로군. 훼손의 정도를 보면 엄청난 실력자로 보여. 바꿔 말하면 이 정도 수준의 훼손이 아니면 기업의 보안 체계에 걸린다는 뜻이겠지.”
담론을 나누던 그들은 임의로 내린 결론에 따라 자연스레 나와 제이를 바라보았다.
파견대에서 가장 막강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우리에게 해결의 여지가 달린 것이다.
내 눈치를 살피기 급급한 제이를 뒤로하고,
나는 조용히 자판기 앞으로 다가갔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키며 전투태세를 갖추는 론, 뒷걸음질 치는 시트리에와 벨리타인.
곧이어 조용히,
품속에 손을 넣은 나는.
허리에 달린 자루 위 주머니 속에서…,
땡그랑─
꺼낸 금화 하나를 투입구에 집어 넣어보았다.
궁금했거든.
덜그럭, 덜그럭.
틱틱.
복잡하게 울리기 시작하는 자판기.
그와 동시에 맥이 빠진 듯 멍한 표정으로 돌변한 네 사람.
이윽고 자판기가 급격히 요동치기 시작하더니 안에서 손상된 음질로 점철된 노래가 울려 퍼진다.
[당신은 현명한 비정규직]
[우리 기업을 이해한 똑똑이]
[길 잃어 죽지 말아요]
[당신을 위한 보험이 없기 때문이에요]
[아 참]
[지도의 유통기한은 하아루]
터무니없는 노래를 끝으로,
덜커덕!
하고 내뱉어지듯 사출구를 통해 튀어나온 빳빳한 종이뭉치.
여러 장치의 맞물림, 그 맞물림의 결과로 기인한 묘한 흥분.
그 앳된 감정을 느끼며 조용히 사출구에 걸린 종이를 꺼내면, 안에는 마치 미로처럼 복잡하고 청사진처럼 세세한 지도가 빼곡히 그려져 있다.
그렇게 지도를 든 채 뒤돌아선 나를,
조용히 지켜보던 제이는 말없이 본인의 품에서 금화 하나를 꺼냈다.
* * *
“그럼 18시에 이곳 광장에서 다시 만납시다.”
내 말을 끝으로 제이는 론과 벨리타인, 이 둘과 함께 왼쪽 길을 향했다.
근처에 박혀있는 이정표에 따르면 왼쪽 길은 인사과와 복지과로 향한다.
자연스레 나와 시트리에는 남은 오른쪽 길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오른쪽은 기획과와 보안과.
특히 보안과는 기계적 지식을 요 할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위험성이 높은 일이기에 내가 옆에 붙어 그녀를 보조해주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어두컴컴한 배경.
길게 뻗은 도로.
그 도로를 달렸을 것으로 보이는, 이제는 다 부서진 마차들.
그리고 그 마차 앞에 널브러져 있는 말의 백골들.
단지 그것들의 나열만으로 오싹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까,
아까부터 유독 눈에 밟히는 것이 하나 있다.
이 거대한 구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계속 보이는 같은 것이기도 하다.
하늘색 표지를 가진 책, 아니 수첩으로 보이는 것이 사방 곳곳에 널브러져 있어.
한창 길을 걷는 와중,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비교적 멀쩡한 것을 하나 골라 집어 들자 옆에서 걷던 시트리에 역시 근처에 보이는 것 중 하나를 골라 집었다.
“저도 아까부터 궁금했거든요.”
아직 쑥스러운 듯 행동하는 그녀에게 작은 미소로 화답한 나는 얼른 그 책을 펼쳐 살폈다.
[사원 일지, 다르간 유리(기획부)]
아,
그래서 곳곳에 같은 책들이 이렇게 널브러져 있는 거구나.
하다가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난리가 벌어진 것마냥 사원 일지가 사방에 널려 있는 걸까?
해소와 동시에 의문이 인다.
이곳 메트로폴리아는 그런 곳이었다.
“시트리에, 잠시 근처에서 이것들을 좀 살펴봅시다. 어쩌면 좋은 단서를 얻을 수도 있을지 모르니.”
발그레,
광대를 붉힌 그녀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내 뒤를 따랐다.
* * *
7월 21일.
세상에!
드디어 메트로폴리아의 합동 이사회가 정신 나간 짓을 벌였다.
0을 만들겠단다, 0을.
으레 그렇듯 높으신 분들이 해내는 생각들은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다.
대체 0을 만들어서 뭘 할 건데?
증명? 넘어간 다음 세대에서도 주류적 핵심임을 알리기 위해서?
그래 다 좋으니까 내 월급도 좀 올려주라.
7월 24일
새벽,
당연히 나는 생리를 거스르는 짓을 하고 있다.
야근이라는 이름의 그것은 두 발 걷는 자의 잠을 갉아먹는 해충이다, 니미럴!
그런데 오늘은 제법 흥미로운 일이 있었어.
갑자기 하늘에서 청록색 섬광이 번쩍거렸으니까!
벼락일까?
아니면 중심지의 그 잘난 재벌들이 한 번의 섹스를 위해 쏘아 올리는 비싸기만 한 폭죽일지도 모르지.
7월 29일
또 새벽,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 회사는 아직 ‘논스리스’ 꼴이 나지 않았다는 거지.
그쪽 얘기를 얼핏 들은 적이 있는데,
거기는 사원들에게서 물리적으로 잠이란 것을 거세했단다.
최근에 날씨 파편이란 게 새로 발견되어 세상이 발칵 뒤집혔는데, 그 와중에도 기업가 놈들은 우리의 얼마 남지 않은 피를 뽑기 위한 기술을 개발한 것이다.
거기다가…,
최근엔 그 청록색 벼락이 심심하면 내리쳐 자빠지고 있다.
이러다가 내 동공 색깔이 청록색으로 물들겠어.
이거…, 산재 되나?
안… 되겠지?
8월 3일
덥다,
회사는 1층 나부랭이들에겐 관심이 없다.
어쩌다 2층으로 올라가 본 적이 있는데, 거긴 무슨 가을인 줄 알았다니까?!
와 그게 말로만 듣던 날씨 파편인가 싶더라고.
아, 그나저나 오늘 1층에서 길을 잃어 죽은 비정규직이 무려 마흔 명이나 나왔다.
지도의 어느 부분에 오류가 났다곤 하는데,
언제나 그렇듯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겠지.
8월 19일
누가 저 벼락 좀 없애봐 제에에에에발!
이제는 하루에 수백 번은 내리치는 것 같다!
9월 1일
뭔가 이상하다.
그러니까…,
기획과의 아는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오늘 인사과 전원이 4층으로 올라갔단다.
수천에 달하는 그들은 그리고 오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내려와 업무를 시작했다고 한다.
나는 음모론에 그렇게 심취하는 쪽은 아니었는데,
계속 의심이 든단 말이지.
9월 14일
하늘이 어느 순간 뿌연 녹색 빛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건 그냥 느낌상 얘기하는 건데, 영업 쪽 사람들이 요즘 부쩍 이상해진 것 같아.
거기다 4층에 다녀온 그 이후로 영업 쪽 성과가 400배나 올랐다지?
400배!
난쟁이, 아니 고블린에게 외주를 맡겨도 그렇게는 못 할 거다!
9월 17일
결국 일이 터져버렸다!
아니, 터졌다기보다는 내 직장생활에 둘도 없을 정말 흥미로운 사건이 터져버렸다!
2층 과장이 3층 계장을 쏴버렸다.
말 그대로!
총구가 두 개 달린 스피안 머스캣으로 3층 계장의 머리통을 박살 내버린 거다.
저게 말로만 듣던 ‘광증’이라는 건가?
메트로폴리아의 제약 기업, ‘올텐즈’에서 화학약품이 누출되어 생긴 전염병이라는데.
정말 무섭네.
근데 나…,
휴가도 없잖아!
9월 27일
메트로폴리아의 0이 곧 완성된다고 한다.
거대한 이 도시 상공에 펼쳐질 0은 어떤 모습일까?
그런데…,
요즘 자주 머리가 아프다.
속도 매스껍고…,
이상한 목소리도 머릿속에 몇 번이고 맴도는 느낌이야.
10월 1일
오늘 밤이다.
메트로폴리아에서 만들어진 0이 오늘 밤 모두의 머리 위에 펼쳐진다.
솔직히 조금 기대가 되긴 해.
10월 4일
어제 우리 부장이 죽었다.
내일은 위층 계장이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 아래층 사원에게 찢겨 죽겠지.
───────…,
* * *
없는 시간,
그나마 쥐어짜 적어 내려간 누군가의 착실.
그 끝은 처절함으로 맺어져 있었다.
특히 끝에 직전의 상황을 암시한 듯한 아무 의미 없는 휘갈김은 보는 것만으로도 닭살이 돋는 느낌이다.
적어도 이 수첩의 주인은…,
이곳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군.
여기서 알아낸 것은,
기업 메킨토의 영업과와 관련된 비밀.
그리고 이곳 메트로폴리아 상공에서 쏟아지고 있는 별들의 시선으로 촉발된,
‘광증’이라는 이름을 가진 병의 막연한 연상.
적어도 당시 설계된 보안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을 이 광증으로 인한 위협을 다시 인지하게 됐다.
“시트리에, 그쪽 내용은 어떻습니까?”
“그게…,”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며 아랫입술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리곤 슬쩍,
들고 있던 책의 첫 장을 펼쳐 내게 보여주었다.
[사원 일지, 오티스 카롤 (영업부)]
아마도,
좀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겠어.
* * *
“진짜야! 내가 봤다고!”
방방 뛰며 간절하게 애원하듯 말하는 남자.
그런 남자를 뒤로한 채 아찔한 난간에 걸터앉아 있던 이는 저 멀리 펼쳐져 있는 미로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다가,
끝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정말 제대로 본 거 맞지? 허탕이라면 난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말끔히 넘긴 금발,
그 아래 초롱초롱히 빛나는 녹색 눈.
배닝스 오페라는 살기 어린 표정으로 남자를 쏘아붙였다.
그가 내뱉는 말들은 하나같이 진심이 아닌 적이 없었기에, 그 살벌함을 느낀 남자는 직전까지의 그 당당함은 어디로 가고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확실해? 웬 무리를 발견했는데, 그들 중 하나의 손에 인장이 걸려 있었다고?”
재차 이어진 배닝스의 물음에 남자는 한 번 크게 부르르 떨다가도,
부릅뜬 눈으로 당당히 대답했다.
“봤어, 분명히. 그것도 아이베리아에서 만들어진 인장이었어. 틀림없다고!”
애써 발휘한 그 당당함 덕분일까,
아니면 그의 입에 오르내린 아이베리아란 단어가 걸렸을까.
배닝스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아이베리아의 인장은 일개 기업이나 조합의 인장 따위와는 그 급이 다르다.
물론 그만큼 위험요소도 배로 늘어난다.
무려, 기사들이다.
두 발 걷는 자들을 문자 그대로 철거시켜버리는 인간병기들.
해서 배닝스는 더욱 끌렸다.
높은 위험요소만큼,
지금 그의 관심을 끌 수 있을 만한 요소는 없었으니까.
이제 배닝스는 일어나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수십의 동료에게 말했다.
“미로로 들어가기 전에 그 일당을 먼저 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