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교차점
“이거…, 상황이 아주 엿같이 흘러가는군.”
순례자 하나가 중얼거렸다.
이에 그 옆에 있던 순례자 젤란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했다.
“저놈들은 누구지? 우리의 목표물론 안 보이는데…?”
“메트로폴리아의 망령들.”
“망령…? 전에 내게 설명해줬던 광증에 걸린 무리를 말하는 거야?”
“아니, 기업이란 이름 아래 종속된 채 평생을 살아가는 놈들이다.”
젤란 옆에 있던 순례자는 한 차례 뒷걸음질 치며 대치하고 있는 무리를 빠르게 살폈다.
“저놈들은 기업 ‘오페라’ 놈들이야.”
“오페라?”
“없다면 영혼까지 쪽 빨아내는 대부기업이지.”
“메트로폴리아의 기업들은 0이 떨어진 날 모두 다 망한 거 아니었어?”
“그렇다고 기업들 아래 있었을 수많은 사원이 모조리 죽은 것도 아니니까. 그 당시 금지로 점철된.., 자아 개조나 이성 고정 따위의 기술로 만들어진 완벽한 ‘사기업의 사원’이 생존해 대를 이은 결과가 바로 저놈들이야.”
젤란은 혼란에 빠진 눈동자를 바삐 굴려야만 했다.
“그게 광증이 아니면 뭐란 말이야…?!”
“엄연히 다르지, 저들은 기업이 내린 저주를 축복으로 알며 살아가는 놈들이니까.”
곧이어 점점,
양측의 대치점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한 기류에 젤란은 직전까지의 혼란을 서둘러 정돈한 채 현 상황에 집중해야 했고,
곧 양측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들이 한 걸음씩 나아가 서로를 맞이했다.
“세상이 참 좋아졌어, 탑의 까마귀가 이런 곳까지 날아오고 말이야.”
오페라 측의 우두머리인 금발 남자는 우락부락한 육체를 과시하며 운을 뗐다.
그러한 그에게 순례자들을 이끄는 자, ‘오닐’은.
뒤집어쓴 검은 후드와 함께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좋아진 게 확실한가? 아직 너희와 같은 족속들이 살아있는 걸 보면 그리 확신이 들지 않아서 말이야.”
그러나 오페라 측의 우두머리는 표정의 변화 없이 그저 은은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그래서 까마귀야, 무슨 냄새를 맡고 왔니?”
부드럽게 화제를 전환한 오페라 측의 우두머리는 대화에서 써먹을 수 있는 자신의 패를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 시작은 어떤 속삭임 같은 정보로 시작했겠지? 맞춰볼까? 켓 데니즈, 아닌가?”
드러냈다.
이에 오닐은 두 어깨를 흠칫거렸지만, 그와는 반대로 더욱 냉철해진 목소리로 반문했다.
“너희들이었군? 켓 데니즈 놈들을 정리한 게.”
“맞아, 원한다면 놈이 있는 위치를 말해줄 수 있어. 너희들의 목적은 인챈트잖아?”
흥정하듯 가벼운 목소리로 제안하는 오페라 측의 우두머리.
그러나 그 제안성이 짙은 말과는 달리 얼굴엔 금방이라도 죽여주겠다는 살기가 가득하다.
젤란의 시점에선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자다.
“우리의 목적이 인챈트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조차도 어떤 기준에 따라 순서가 정해지거든.”
과연,
선두에 서서 고립의 탑을 무너트렸던 순례자 오닐 답다.
은근히 압박하듯 내뱉는 선전포고와 같은 말은 같은 순례자인 젤란이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페라 측의 우두머리는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래서, 지금 그 순서를 다 정한 건가?”
“그래.”
“그럼…, 더 생각할 것도 없겠군.”
“다만, 골치 아픈 방해 요소는 없었으면 하는데. 너도 아주 잘 알 거야. 메트로폴리아의 보안들 말이야.”
오닐의 말에 오페라 측 우두머리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뭐?”
“그거라니, 잘못하다간 서로의 목적은 커녕…,”
“지랄하지 마, 그저 싸울 뿐이다. 우리 오페라는 환경 따위를 생각하며 추심을 하지 않아.”
“미친놈.”
“미쳤으니까 이 메트로폴리아에서 살아남은 거다.”
그렇게 빠르게 오가던 대화가 끝이 나기 무섭게.
양측은 기다렸다는 듯 서로를 향해 가진 모든 무기를 드러낸 채 매섭게 달려들었다.
* * *
살갗을 찢는 바람,
몸을 짓누르는 낙석,
번쩍이며 내리찍는 벼락,
작은 신기루와 소용돌이.
위와 같은 한 줌짜리 재해가 사방에서 빗발친다.
한바탕 벌어진 두 무리의 충돌은 이렇듯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일으켰다.
오페라의 사원 하나가 거대한 도끼를 내리치면, 그 궤적을 따라 부서진 바닥재 따위가 비처럼 쏟아진다.
그것에 직격당한 순례자 하나는 그대로 온몸이 무너져 절명했다.
그런 절명한 시체 위로,
막 다른 순례자 하나가 뛰어올라 교차해 든 쌍수 단검을 휘두른다.
도끼를 든 사원은 그 공격을 가볍게 막았지만, 단검의 궤적에 딸려온 두 개의 소용돌이에 문자 그대로 사지가 갈려버렸다.
한쪽에서 죽음이 나오면,
보란 듯 반대쪽에 죽음을 선사한다.
그 사이에서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고 있던 젤란은 들고 있던 에스톡을 내질러 군더더기 없는 찌르기를 펼쳤다.
[63년, 블라그시즈]
[겨울과 눈이 빚어낸 폭포 다발.]
어느 겨울 얼어붙은 폭포로 인해 완성된 고드름이자 거대한 ‘빙창’인 그 재해는,
젤란의 의지에 따라 들고 있는 에스톡에 맺혔다.
파악!
한기가 가득한, 소름 끼치는 굉음과 함께 젤란의 에스톡으로부터 폭발하듯 튀어나온 고드름이 오페라의 사원 셋을 그대로 관통했다.
이런 젤란에게 오페라의 사원 하나가 즉시 달려들었지만,
채 한 발자국 떼기도 전에 그 목이 말끔히 달아났다.
직후 뒤늦게,
번쩍!
하며 터진 섬광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그는,
젤란과 함께 움직이며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그 순례자였다.
이에 젤란은 입꼬리를 올리며 그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순례자는 그에 화답하듯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지만,
찰나의 순간.
순례자 뒤로 갑작스레 나타난 한 형상.
젤란은 황급히 그를 향해,
“… 아…!”
소리쳐 알려주려 했으나 이미 순례자는 뒤에서 나타난 이에게 머리를 잡힌 뒤였다.
금발의 남자,
오페라 측의 우두머리다.
그는 거대한 한 손으로 붙잡은 순례자를 조용히 내려다보다가, 곧 타오르는 듯한 눈빛으로 젤란을 바라보았다.
가히 동물적 감각.
잡은 상대에게 꽂혀있는 시선까지 갈무리한 그는 이제…,
자신이 가진 인챈트의 힘을.
* * *
[17년, 퍼레시타스]
[구름에게 버림받은 땅]
그것은 한때 침울의 단어마저 메마르게 했던 만들었던 극한의 가뭄.
몇 년에 걸친 구름의 악의라고도 불린 지독한 재해.
배닝스 오페라는 난쟁이 제 팔찌에 각인된 자신의 인챈트를 해방했다.
17년,
현자의 정의법으로만 봐도 그 재해의 위상은 충분히 강한 쪽에 속해 있다.
그러나 배닝스의 인챈트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같은 17년의 재해를 아득히 상회하는 힘을,
그는 발휘할 수 있다.
해당 인챈트와 관련된 모든 역사를 ‘이해’했으니까.
그리고 그가 가진 이해로 내뱉은 첫수는,
[몰수]
가뭄이 자신의 갈증을 해갈하기 위해 빼앗았던, 그 땅 위에 살아가던 자들의 생기.
자연에 의해 벌어진 일방적인 갈취가 지금 배닝스의 손에 의해 재현된다.
“끄…으윽.”
머리통을 잡힌 순례자가 전신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의 얼굴은 삽시간에 쪼그라들었고 동공은 허옇게 질렸으며, 얼굴에 몇 안 되는 뼈의 마디마저 그 윤곽을 드러내었다.
그러한 과정에서도,
배닝스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젤란을 노려보고 있었다.
두려움과 분노로 복잡하게 뒤섞인,
그런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젤란을.
“꺼…거거걱.”
순례자는 마지막 단말마를 끝으로 배닝스의 손 아래 관절 인형처럼 덜그럭거렸다.
그 허망한 움직임을 본 젤란은,
끝내 두 눈으로 분노를 표출하며 들고 있던 에스톡을 내질렀다.
팍!
하는 푸른 섬광과 함께 에스톡으로부터 뛰쳐나온 고드름은 그대로 배닝스의 가슴을 관통했지만.
배닝스는 그저 헤죽거리는 얼굴로 젤란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그 모습에 젤란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두 발 걷는 자를 상대하는 것이 아닌 자연을 상대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젤란의 반응은 배닝스의 어떤 더러운 욕망을 더욱 부추겼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모두에게 공평한 갈증이니까.”
가슴을 관통당한 그 상태로,
저벅 저벅.
거침없이 젤란을 향해 다가가던 배닝스는 이제 손에 들린, 순례자였던 것을 옆으로 휙 던져버렸다.
“으…으아아!”
기가 질린 젤란이 서둘러 에스톡에 피어오른 인챈트를 거둬들였다.
그렇게 배닝스의 가슴을 관통했던 고드름이 사라지면서 그 반동으로 그가 걸치고 있던 셔츠가 반쯤 찢어졌고,
찢어진 셔츠 너머로 드러난 그의 상체는…,
곳곳이 쩍쩍 갈라져 있다.
극심한 갈증을 호소하는 땅처럼!
마치 바싹 마른 모래로 구성된 신체인 듯, 관통당한 부위에서조차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그의 모습에.
이제 젤란은 공포에 질려 있다.
말 그대로 살아있는 재해.
그게 배닝스였다.
그 앞에서 한낱 펼치기만 할 줄 아는 고드름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니,
“읍…!”
젤란은 자신을 지배하고 있던 공포를 씹듯 짧은 신음을 내뱉은 채 자신을 다 잡았다.
이내 다시 한번 에스톡을 고쳐 잡아 인챈트의 힘을 펼치려는 찰나.
그의 앞으로 한 남자가 나타났다.
순례자 오닐,
그가 검은 후드를 휘날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배닝스의 앞을 막아섰다.
“기업 오페라가 가지고 있었던 착취, 그 자체가 되어버렸나.”
아마도 배닝스의 조상은 기업 오페라 내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던 인물일 것이다.
그만큼 기업에 의해 체결된 종속이 강했을 것이고.
그렇게 이어진 대를 통해 저 배닝스라는, 기업의 살아있는 의도가 완성되었을 것이리라.
짧게 생각을 마친 오닐은 보다 근본적인 웃음을 내뱉었다.
“어쩌면 우리 순례자는 그 시작이 이런 살아있는 인챈트를 해방하기 위한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다른 순례자가 들었다면 필시 주인인 탑에 대한 경멸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를,
그런 발언을 내뱉던 오닐은 이제 자세를 고쳐 잡았다.
직후 오닐은 고개를 돌려 젤란에게 말했다.
“후방의 순례자들을 데리고 이곳에서 나가라.”
단호한,
순례자의 우두머리가 전하는 그 명령에.
온갖 복잡한 생각으로 엉켜 있었던 젤란은 모든 생각을 파해야만 했다.
단지 주어진 명령을 이행하기 위한 의무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젤란은 곧장 뒤돌아 달렸다.
그리고 죽음과 죽음이 교차하는 싸움 속에서 같은 순례자들을 이끌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오닐은 다시 고개를 돌려 배닝스를 맞이했다.
“내 너를 직접 해갈시켜주마.”
말을 마친 오닐이 들고 있던 긴 창을 위로 치켜세웠다.
그의 그 말에 배닝스는 불타오르는 듯한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며 질문했다.
“네가, 나를? 어떻게?”
이에 오닐은,
행동으로 대답했다.
재현,
[21년, 텍스윌리]
[하늘이 뚫은 바다]
하늘로부터 쏟아져 대양에 거대한 구멍을 만들어 낸 그 재해는,
광범위에 뒤틀림을 선사해낸 하나의 소용돌이.
재림형 인챈트인 그것이 막 오닐의 손에 의해 재현되었다.
그리고 그 재현된 소용돌이는 사방을 휩쓸며,
기업 메킨토 곳곳에 설계되어 있던 보안 체계들을 보란 듯이 건드렸다.
* * *
이마 한쪽이 지끈거린다.
내 감각이 이곳의 어딘가에서 펼쳐지고 있는 압도적인 힘에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이에 나도 모르게 시트리에의 어깨를 붙잡아 뒤로 물린 뒤 자루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멀리서 들려오는,
쿠궁─
묵직한 굉음.
이윽고 시트리에의 얼굴도 돌처럼 굳어진다.
“공…!”
“무슨 일입니까, 시트리에!”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런 그녀의 손짓을 따라 눈길을 돌리면,
분명 기계장치로 가득했던 보안과인 이곳에.
누군가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