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95화 (295/365)

295화. 교차점 (3)

살아있다.

분명하다.

눈에 박힌 윤택도, 하얀 살갗에 내려앉은 광택도.

하지만,

살아만 있다.

그것은 그저 불붙은 호롱처럼 부여받은 기능을 다 하기 위해 자아를 일으킨 것처럼 보였다.

직전까지,

보안과 좌우로 펼쳐진 기계장치 속에 누워있던 그것은 지금.

어느새 내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

눈을 굴리며, 눈 위에 펼쳐진 속눈썹을 휘청이며.

미간으로 주름을 잡고 입술을 움찔거리던 그것은 적색 단발을 휘날리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본사에 직접적인 피해가 발생하였습니다. 보험 약관 2조에 의거, 정규직을 제외한 모두를 본사로부터 배제합니다.”

마치 나처럼.

성대가 세공된 듯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뱉은 그것은 그대로 상체를 작게 숙여,

내게 적대를 드러냈다.

살기, 본능, 어떤 결심에 의한 행동.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 무결한 기계적 움직임은 다른 의미로 무서운 것이었다.

그러니까 시트리에의 말마따나,

저 인형은 누군가의 출력된 자아 따위가 이식된 하나의 장치.

여러모로,

지금껏 마주했던 메트로폴리아의 광기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이내,

인형이 땅을 박차 단숨에 내 쪽으로 달려왔다.

무시하기 짝이 없는 몸통의 출력에 박차진 바닥에선 수십 미터에 달하는 모래 기둥이 치솟았다.

그렇게 인형의 주먹이 정확히 내 머리를 향해 내질러졌고,

그 직전의 순간까지 두 눈으로 상대의 모든 동선을 붙잡았던 나는.

스륵─

새비안을 뽑아 인형의 내질러진 주먹 쪽 겨드랑이를 파고들어 그대로 올려 베었다.

파각!

묵직한 금속을 벤 듯한 감각.

인형은 그대로 나를 가로질러 바닥 위를 한참이나 미끄러졌고, 그렇게 그것이 멈춤과 동시에.

턱!

내 근처에서 인형의 잘린 오른팔이 떨어졌다.

정확히 어깨 관절부가 베인 오른팔 단면에선 수십 개의 미세한 톱니와 하얀 액체가 울컥거리며 쏟아져 내렸다.

곧이어 뒤돌아 지나친 인형을 향해 다시 검을 치켜세우면,

인형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손상된 부위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리곤 곧장 아까와 같은 적대를 내비치며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다시 그것이 박차를 가하기 직전,

나는 두 눈으로 녀석의 시선이 시트리에 쪽으로 쏠리는 것을 포착했다.

바로 약체를 노리는 치밀함을 부린 것이다.

번쩍하며 구름을 스친 벼락처럼, 판단과 동시에 시트리에 쪽으로 발을 내민 그 시점에.

이미 인형은 시트리에의 지척까지 다가와 그녀의 몸을 걷어차려는 동작까지 마친 상태다.

이윽고 뻗어진 인형의 다리.

주위 바람을 허옇게 만들 정도로 걷어차진 그 다리의 속도에 맞추어 뻗은 새비안이,

정확히 무릎을 가로지른다.

파가각!

요란한 불똥과 함께 그대로 베어진 인형의 정강이가 하늘 위로 높이 솟구쳤다.

중심을 잃은 인형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고,

그렇게 주저앉은 인형의 목을 즉시 베어 넘기자.

툭!

뒤늦게 떨어진 정강이에 맞춰 인형의 몸이 축 처지며 바닥에 쏟아졌다.

“무… 뭐가… 뭐에요 방금…?!”

일련의 모든 상황 가운데,

단 한 장면조차 간파하지 못한 시트리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뒷걸음질 치다 엉덩방아를 찍었다.

“시트리에, 괜찮습니까?”

“검은 언제 뽑…, 아니 그보다…, 저거…,”

의식이 앞서나간 인지를 붙잡지 못해 부조화를 일으킨 그녀가 당황을 쏟아냈다.

저 상태는 지금 상황에선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트리에,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하여 단호히 꾸짖었다.

직전까지 멍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그녀는 그제야 초점이 돌아온 눈으로 바짝 마른 입술을 앙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의 보안 체계가 작동한 것 같은데, 이것과 관련해 아는 것이 있습니까? 가령 작동된 체계를 정지시킨다던가.”

“아…, 그러니까…, 그게…,”

“시트리에, 서두르지 않으면 나뉘어 움직인 파견대까지 위험해질 겁니다.”

“할 수 있어요.”

다행히 그녀는 내가 요구하는 감정에 딱 들어맞는 표독을 내비쳐 주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일으켜 넓은 보안과의 기계장치를 살피던 그녀는 그중 가장 거대한 장치 쪽으로 향했다.

그런 그녀 주위에 위험요소가 없음을 확인한 나는 그제야 그녀를 등진 채 전방에만 신경을 몰두할 수 있었다.

“명색이 보안과인데 어찌 인형이 단 하나밖에 없었을까요?”

내 물음에 기계에 있는 각종 표시를 살피던 그녀는 아까보다 좀 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인형 대부분이 활동 중에 정지된 상태라고 나와 있는 걸 보면…, 이곳에 0이 떨어질 당시에 보안 체계가 발동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회사에 물리적인 충격이 가해진 탓에 인형들이 작동했다는 겁니까?”

“네, 그리고 그대로 방치되었고요. 제 역할을 마친 인형들은 그 자리서 작동을 정지했을 거예요.”

“그러면 외부의 인형들은 작동하지 않겠군요?”

“아뇨, 인형의 동력은 삽입된 자아이기에 언제든 다시 작동할 수 있어요. 자아만큼 혁신적인 동력원도 없거든요. 끄면, 그러니까 자아의 입장에선 수면 상태에 돌입하면 그 자체가 동력원을 충전하는 요소가 되니까요.”

무한동력이라,

비정함에 걸맞은 결실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그녀의 말대로라면, 메킨토 전역에 흩어져 있을 인형 모두가 활동을 개시했다는 소리다.

제이, 론, 벨리타인.

그들도 지금의 위협에서 무사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비록 인형 하나를 수월히 제거했다곤 하지만,

부딪혀보니 그것이 가진 위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알 수 있었어.

공격 궤적을 흘리듯 빗겨 치지 않았다면 결코 무사하지 못했을 거다.

거기다 어떤 합금으로 이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새비안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쉬이 베지도 못했을 거야.

그런 경도를 가진 합금이 겉은 두 발 걷는 자의 피부와 똑같은 모습이라니.

오싹하기 짝이 없다.

“저…, 공?”

뒤이어 시트리에가 바짝 마른 목소리로 날 불렀다.

“왜 그러십니까?”

“여기 변동된 표식에 따르면…, 따르면…,”

“따르면?”

“인형들의 최우선 목표가 보안과로 변경되었어요.”

* * *

제이는 꺾인 한쪽 팔을 감싸 쥔 채 이를 갈았다.

광증 무리에게 소비했던 힘조차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마주친,

저 말도 안 되는 괴물에게 당한 것이다.

그런 제이의 발아래엔 사지 일부분이 말끔히 베인 채 쓰러진 인형 세 개가 널브러져 있었다.

아직 대치 중인 인형은 둘.

그마저도 인챈트의 힘을 발휘하면 저들을 쉬이 상대할 수 있겠지만,

그의 바로 뒤에는.

“제이! 그 팔…!”

“다행히 금이 갔을 뿐이야, 충분히 치료할 수 있어!”

론과 벨리타인이 있어 쓸 수 없다.

그들과 거리가 멀어진다면 쓸 수야 있겠지만, 그마저도 인형들이 모두 간파해낸 상황이다.

론과 벨리타인이 제이로부터 멀어지려 하면,

인형은 노골적으로 론과 벨리타인만을 노리고 쫓아온다.

그런 그들의 추격을 막기 위해 제이가 들러붙어야 하는 형국이 된 것이다.

물론 이런 인형의 맹목 덕분에 제이는 인형 둘 정돈 쉽게 베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

인형이 내지른 주먹의 궤적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실수를 범해버렸다.

사실 실수라고 하기에도 뭣하다.

다가오는 인형의 공격을 맞받아친다는 것은 인지 범위 밖에서 흘러내리는 무수한 장대비 속 어떤 물줄기 하나를 특정해내는 것과 같은,

그런 터무니 없고 무의미해 보일 지경의 일과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인형의 공격에 대해 정면으로 부딪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두 발 걷는 자들의 통상 인지를 초월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그 단 한 번의 부딪힘으로 제이는 죽음을 등지고 있는 상황에까지 몰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제이는 여기서 죽지 않는다.

그에겐 ‘할 일’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최후까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저 인챈트의 힘을 발휘하면 될 뿐이다.

물론 힘을 발휘한다 한들 인형과의 거리가 짧은 이상 그전에 팔과 다리 하나쯤은 내주어야 할 판.

결과적으론 홀로 목숨만큼은 부지할 수 있겠다.

그 나중의 일에 대한 것은 어떻게든 참작의 여지를 만들면 되겠지.

무려 제리드 은행이라는 거대한 뒷배가 그것을 이루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재상이라는 거대한 충주의 지지대가 된 거잖아?

그런 결심까지 머금은 제이는 이제 멀쩡한 손으로 쥔 검을 치켜세운 채 인형 둘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의 뒤에 있던 벨리타인은,

그녀는.

순간 일변한 제이의 박동 소리를 듣고 표정을 굳혔다.

물론 주위에 대해 예리한 눈초리를 가지고 있던 론 역시 벨리타인의 급변한 표정을 눈치챈 상태였다.

하지만 둘의 입장은 다르다.

론은 모두가 죽을 바에 제이라도 홀로 살 수 있다면 그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게 맞다 생각하고 있다.

벨리타인은 제이의 그 급변한 박동에 기인했을 감정을 알고 있기에,

그의 어떤 어두운 속내에 해당하는 윤곽을 엿보았기에.

그래서 론과는 정반대의 생각을 품고 있다.

이렇듯 사이에 상반된 생각들이 판치는 상황 속에서 제이는 저벅저벅 다가오는 두 인형을 향해 흉흉한 살기를 쏟아냈다.

이윽고 충돌의 직전.

제이가 검을 고쳐잡고 휘두를 자세를 한 그때.

두 인형은 갑자기 걸음을 멈춘 채 서로를 마주 보았다.

대화 대신 보석처럼 아름다운 눈 속 작은 태엽의 째깍거림으로 모종의 대화를 마친 두 인형은,

설계된 방식에 따라.

“최고 등급의 위협 발생, 목표 재설정.”

“해당 목표를 최우선으로 제거할 것.”

그제야 옥구슬 같은 목소리와 함께 획 돌아 뒤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사라졌다.

* * *

살아남은 순례자가 대략 다섯.

실로 처참한 결과이나,

절멸이라는 참담에 비하면 이 다섯의 생존조차 기적이라 불릴 만하다.

이를 증명하듯.

“이… 인형으로부터 살아남다니, 이건 기적이야…!”

“세상에 살면서 인형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세상 어떤 미친놈이 고대의 보안을 건드리나 싶었는데, 그 정도로 미친놈일 줄은…!”

생존한 순례자들이 몰려있던 그간의 절망감을 토하듯 절절한 소감을 내뱉었다.

그 끝에 남아있는 것은,

씁쓸함과 허무함.

정확히는 광신으로 비롯된 것이나 그것으로 인해 충족시켰던 소속감의 부재, 그 상실감일 것이리라.

젤란은 아직도 순례자들과 함께 도망치라는 오닐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그렇게 그들은 메트로폴리아 바깥쪽으로 서둘러 향했다.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근처에 어떤 기업의 잔재가, 또 어떤 파견대가 그들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다섯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젤란은 자신이 가진 미천한 감각을 최대한 펼쳤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젤란은 자신의 감각으로 하나를 포착해낼 수 있었다.

저 멀리,

반대쪽에서 이쪽으로 향하는 한 남자.

젤란이 급히 품에서 에스톡을 뽑아 들었지만, 뒤늦게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남자를 확인한 동료들이 그를 제지 시켰다.

“녀석을 건들지 마라, 얼마 없는 메트로폴리아의 이정표니까.”

“몇 안 되는 메트로폴리아의 불가침 영역 중 하나란 말이야.”

그들의 말림을 듣고 있던 젤란은 그저 멍하니,

반대편에서 흥얼거리며 지나치는 남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기업 메킨토의 영업사원,

아소를 말이다.

* * *

인형 하나가 한쪽 눈을 감은 채 시끄럽게 째깍거린다.

그런 인형 옆으로 다른 인형 하나가,

그리고 나타난 그 인형의 뒤로 둘이,

셋,

다섯,

여덟.

수많은 인형이 집결한다.

세상 선남선녀를 모아놓은 듯한, 조각된 그들의 모습은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아름다움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보안이라는 이름 아래 철저한 살육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

곧 한쪽 눈을 감고 있던 기계가 두 눈을 활짝 뜨고서 작게 입을 열었다.

“보안과를 제외한 1층 소란의 총 책정 위험도, 51”

어떤 공식을 거쳐 내린 계산,

이윽고 그 인형이 재차 말을 잇는다.

“보안과 내 단일 개체 책정 위험도, 85”

그런 인형의 두 눈엔,

그들보다 더욱 찬란한.

어떤 보석과 같은 이가 맺혀 있다.

“기업의 존폐가 달림, 보험 약관 14조에 의거 메트로폴리아의 면제법에 해당하는 무력 소거실시.”

끝내 모인 대략 사십에 달하는 인형.

그리고 그런 인형들과 대치한 남자가 검을 고쳐 잡는다.

어떤 결심을 내린 것인지,

그가 들고 있던 찬란한 검에 푸른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해당 현상에 인형은 다시 기계적인 계산 끝에 역시나 무미건조한 말을 내뱉었다.

“책정 위험도, 100. 회사는 파산을 각오하십시오. 보험 약관 31조에 의거 불가피한 재앙으로 인한 보안 실패는 당사가 책임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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