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00화 (300/365)

300화. 미로 (3)

알고 있다.

그만큼 버거울 정도의 거물이니까.

제리드.

과거 산업 시대의 정점이었음과 동시에 철강왕이라는 전신으로서 이어져 내려온 명맥을 생각하면…,

그래, 그들의 접근 그 자체만으로도 끝없는 의구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맞겠지.

하지만 모르겠다.

말 그대로 제리드라는 단어를 연상하면 그 뒤로 모르겠단 생각뿐이다.

막연함?

아니면 모호함이라고 해야 할까?

경계는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 것이며, 또 어떻게 그보다 한 걸음씩 앞서나가야 할지.

뚜렷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반대로 제리드라는 거물을 품에 안았을 때 따르게 될 압도적인 이득은,

위의 것과는 전혀 상반된 뚜렷함을 갖고 있어.

그래서 더 어럽다.

그냥 있는 그대로 설명하자면,

뿌옇게 가려진 천칭으로 수평을 꾀하고자 하는 느낌.

다만 다행인 점은 기지어를 비롯해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기사들 덕에 놓일 추의 무게를 알고 있다는 것이겠지.

그것마저도 지금이라는 데에 한정되어있지만.

꼬리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생각들에 골이 울릴 지경이다.

특히 지독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단내까지 더해지니 정말 죽을 맛이야.

처음 알았는데,

단내만으로도 혀 안쪽이 쓰라릴 수 있는 거였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쓰린 혀에 집중한 덕분에 머릿속이 깔끔해졌다.

그런 내 모습을 기다렸는지, 옆에 나란히 걷던 론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에 맞춰,

“공, 조금 천천히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뒤쪽에서 제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이,

제이 팔기어.

현 제리드 가문의 가주인 깁슨의 경호인.

론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에 대해서도 부쩍 궁금한 게 많아져 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궁금증은 모두 긍정적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서 제이는 제리드 가문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제리드 가문의 심부와 가장 가까이 맞닿아있는 자이기도 하지.

다가가 관계를 지속하기엔 위험도가 양날의 검과 같겠지만 말 그대로 양날의 검이다.

그 말인즉 제리드 가문의 입장에서도 양날의 검이라는 뜻이다.

어쩌면 제리드 가문이라는 미루고 미뤄야 하면서도 꼭 언젠가 맞닥트릴 문제의 돌파구가 되어줄 수도.

제이의 말에 걸음을 멈추자 내 옆에 있던 론도 걸음을 뚝 그쳤다.

그리곤 일변한 계절처럼 표정에서 진지함을 거두고 능청을 덧씌운 그가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대신 대꾸했다.

“지도를 통해 좀 더 원만한 길을 찾아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공께서 말씀하신 길이 가장 좋을 것 같군요.”

이러한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론, 당신도 만만찮은 인물인 건 매한가집니다.

기업 모나켈의 사고 생존자와 관련해 여러 의문에 대한 담론으로 돌고 돌다가 막판에 꺼낸 진정한 본론이 앞서 한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라니.

그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다.

의심이 가지만 확신은 없다.

추론은 하지만 그것을 정론으로 건설해낼 골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짱있게 내게 이런 말들을 쭉 해낸 걸 보면,

자신이 느낀 촉에 대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소리겠지.

그게 아니라면,

소속사인 레프리길과의 아주 긴밀하게 오간 말들을 통해 행동했거나,

론 개인이 고도의 계산을 치러 장기적 관점의 정치를 시도하고 있거나.

중립지역 때가 그립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는 정말 쉽게 생각하고 쉽게 행동했었는데.

그 관계 역시 너무나 선명했잖아.

맥레인은 까칠하지만 내게 다정한 사람, 끝내 내 가족이 되어준 사람.

매튜 아저씨는 온화하면서 냉철한, 언제나 내 정신적 등받이가 되어줄 믿음직한 지주.

함부로 미워하기 힘들었던, 관계들의 구심점인 시몬과…,

그냥 씹새끼 그 자체였던 재키.

아, 이렇게 생각해보니까 참 역설적이구나.

몰랐었지.

그래, 몰랐었어.

알았다면, 그때부터 알았다면 쉽게 생각하고 쉽게 행동하지 않았을 거야.

그렇게 해서 얻게 된 결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야.

돌고 돌아 긴 생각 끝에 내놓은 고찰은 결국,

당착에 빠진 현재에 도착한다는 것 말곤 없었다.

* * *

“그렇게 말 많던 미궁도 직접 와 보니 제법 시시하네요.”

잠시 걸음을 멈춰 쉬고 있는 와중, 시트리에가 초콜릿으로 만들어진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있는 벨리타인에게 다가왔다.

그럼 벨리타인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코웃음 치며 대꾸한다.

“미궁에 따라붙는 소문에 비하면 그래, 시시한 게 맞는 것 같네. 그래도 말이야, 여긴 적어도 혈당 관련 질환을 가진 자들에겐 죽음 그 자체인 곳이라고.”

“듣고 보니 또 그렇네요.”

“뭘 또 그렇게 진지하게 듣고 있어, 그런 예민한 질환을 가진 자들이 메트로폴리아 같은 곳까지 모험을 떠날 리가 없잖아.”

말을 마친 벨리타인은 품에서 바늘이 없는 작은 주사기를 꺼내 자신의 코에 대고 약품을 투여하기 시작했다.

“어디 아프세요?”

“후각 마취제.”

“오.”

시트리에는 단내에 찌든 자신의 코 밑을 손가락으로 한 번 훔치고는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이야.”

그 감탄을 일그러트리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진담일까.

벨리타인은 냉소적인 웃음으로 시트리에게 답했다.

그럼 또 시트리에는 놀란 표정으로 반응한다.

동시에 그녀의 벨트에 체결된 전구 하나가 빛나는 건 덤이다.

“파란 불은 뭔 뜻이야?”

방금 들어온 전구 빛을 가리키며 묻는 벨리타인의 말에 시트리에는 해맑은 표정으로 즉답했다.

“놀랐을 때 들어오는 불빛이에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연히 말을 놓으시네요?”

“누가 봐도 내가 제일 후줄근한데 상대적으로 탱탱한 것들한테 존대하고 싶진 않거든.”

“그럼 디안 공도…,”

“장난에 맞장구쳐줄 생각 없어.”

정색하며 고개를 가로젓는 벨리타인에게,

시트리에는 덧없는 미소를 그렸다.

“그런데 외적인 모습은 정말 젊어 보이시는데요?”

그녀의 말에 벨리타인은 아직 손에 쥐고 있던 빈 주사기를 말없이 품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조용히 시트리에를 바라보던 벨리타인은,

“방금 코를 통해 넣은 이 약 덕분이야.”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트리에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반응이 또 색다른지 벨리타인이 되려 질문을 이었다.

“뭐 때문인지 안 물어봐?”

“벨리타인님이 어떤 기계장치였다면 물어봤을 거예요. 하지만 두 발 걷는 자잖아요. 두 발 걷는 자들은 기계장치와는 달라요.”

“뭐가 다른데?”

“장치는 고장 나잖아요.”

“나도 고장 났는데.”

“해서 스스로 해결책을 찾고 개선해나가고 있잖아요.”

“너 철학과 나왔냐?”

시트리에는 부끄러운 얼굴로 답했다.

“부전공이었어요.”

“오, 북쪽의 ‘아카데미’? 아니면 동쪽의 ‘사학’?”

“북쪽의 아카데미요.”

“그럴 줄 알았지, 형편없는 철학이야.”

“푸핫!”

뜬금없이 팍 터진 시트리에, 그런 그녀를 미적지근하게 바라보는 벨리타인.

“죄송해요, 반응이 너무 웃기셔서.”

“뭐 어때, 그 잘난 철학에 빗대어 생각하면 두 발 걷는 자이기에 웃을 수도 있는 거잖아?”

벨리타인의 말에 시트리에가 두 눈을 반짝였다.

그 초롱초롱한 눈빛에 질린 듯 벨리타인은 좀 더 껄렁한 자세로 고쳐 앉으며 시선을 피했다.

“시트리에.”

“네?”

“세상엔 망가진 기계보다 망가진 자들이 더 많아.”

담담하고 무던한,

그런 벨리타인의 확언에 시트리에는 끝내 씁쓸함 한 조각을 입에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너 그 표정 지으니까 내가 잘못한 것 같잖아.”

“아녜요.”

“아무튼.”

벨리타인은 조용히 초콜릿으로 이루어진 둔덕 꼭대기,

그 위에 우뚝 서서 너머를 관찰하고 있는 디안 베나즈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아이베리아로 온 거야, 그나마 덜 망가졌으니까.”

“대체 어디서 오셨길래 기사의 땅을 그렇게 표현하실 수 있는 거예요?”

“테리라스가 아닌 남쪽.”

그 뒤로 둘은 침묵을 유지한 채 한참이나 나란히 앉아 있었다.

* * *

“론.”

“제이.”

먼 곳에서 홀로 연초를 피고 있던 론에게 제이가 다가왔다.

이에 론은 자연스레 연초 하나를 꺼내 건넸지만 제이는 정중히 거절했다.

“궁금합니다.”

뭔가 서두를 두껍게 자른 듯한 제이의 말에,

론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뭐가 말입니까?”

“공께 제의하신 길 말입니다, 아까 같이 지도를 살피며 선두로 나아가셨을 때…,”

“아, 그때 말이군요.”

론은 찰나의 여지조차,

아니 어떤 틈조차 보이지 않는 자연스러움으로 물 흐르듯 말을 이었다.

“떠나기 전 아이베리아의 경유지 기억나십니까? 무인 술집이었던…,”

“기억납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당시엔 제가 유일하게 메트로폴리아에 대해 몇 줄 정도 알고 있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공께서 제시하신 길과 제가 그때 제시했던 길을 비교해보았습니다.”

제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론은 그런 그에게 같은 질문이 아닌 배려를 이었다.

“이해합니다. 제이님은 인원 보호라는, 파견대에서 가장 막중한 임무를 갖고 계시니까요. 해당 사항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보호에 있어 따로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은 없으니까요. 인형이라도 나타나지 않는 한…,”

서로의 의도가 어찌 되었든,

제이가 꺼낸 그 인형이라는 단어에 의해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진심 어린 반응을 꺼냈다.

“정말 말로만 들어봤는데, 과연 소문이 파다할 만한 이유가 있더군요.”

식은땀을 흘리며 말하는 론에게 제이 역시 절절한 공감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테티르 경을 아십니까? 그분과 정면에서 부딪히면 딱 그 느낌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이어지는 제이의 생생한 경험담에 론은 순수한 탄식을 내뱉었다.

그렇게 이어진 어색한 침묵.

그리고 그 침묵에 마침표를 찍듯.

“출발합시다.”

막 어스름을 고쳐 두른 디안 베나즈가 모두에게 말했다.

* * *

슬슬 보인다.

좀 더 선명해진 새벽 아래 그어진,

다음 지역으로 향하는 경계선이.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경계선 너머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눈앞에 떠오른 글귀.

[알가르의 오르막]

[이런, 오르막을 보자마자 한숨부터 나오셨다고요?]

[아! 그게 아니라 마땅히 ‘올라가야 할 것’이 안 올라간다고요?!]

[그렇다면 넘치는 활력, ‘캐논’을 추천합니다!]

[한 병만 마셔도 메트로폴리아의 출산 혜택 걱정은 끝!]

[아! 종족적 한계를 뛰어넘고 싶으시다고요?!]

[그렇다면 ‘불캐논’을 추천합니다!]

[한 병이면 태양도 따먹을 수 있을 테니까요!]

[넘치는 활력, 캐논!]

[절찬 판매 중]

“오..와오…,”

흐릿해져 가는 글귀들 사이에 튀어나온 벨리타인의 작은 감탄.

그리고 이어진 어색한 침묵.

마치 쩌렁쩌렁한 효과음을 들은 듯한 그런 글귀들이었어.

아직도 시야가 일렁거리는 듯한 기분이다.

그나저나,

알가르라는 곳은 또 키르즈와는 달리 전혀 다른 곳이다.

곳곳에 듬성듬성 나무가 자라 있고, 그 사이로 뿌연 운무가 흩뿌려진 것이.

막 태동하기 시작한 숲 같아.

그런데,

그 숲 초입에 다다르자마자 알 수 있다.

근처에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게 인기척이 아니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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