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미로 (5)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직전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듯 한참을 비틀거리던 론이 언덕 위 제이를 향해 다가갔다.
그렇게 그와 함께 나란히 서서 내려다본 것은,
막 건설된 협곡 하나와.
그 협곡의 시발점에 우뚝 서 있는 디안 베나즈였다.
“뭐야…, 저게…,”
놀라움으로 점철된 풍경, 그 전체를 바삐 아우르던 론의 눈동자는 곧 자연스레 한 점으로 집중되었다.
이질적이기 짝이 없는 풍경 속,
그것과 더욱 궤를 달리하는 이질적인 부분.
디안 베나즈와 그의 발치에 놓인,
지금은 스러져 미동도 없는 그것.
그것은 괴물임은 확실해 보였다.
다만 이 메트로폴리아라는 환경에서만 잉태될 수 있는, 그런 부류의 괴물일 것이리라.
론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리고 그 괴물과 대비된 채 우뚝 서 있던 디안 베나즈는.
그 머리 뒤에 둥근 칠색 빛의 광채가 서려 있었다.
무지개.
디안이라는 존재가 직전까지 재해였음을,
재해로서 세상에 나타났음을 알리는 증표이기도 했다.
론은 책으로만 읽어봤던 내용을 이렇게 목격할 수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동시에 아이베리아의 기사란 존재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다시 한번 상기할 수 있었다.
뒤늦게 따른 시트리에와 벨리타인 역시 펼쳐진 풍경을 눈에 담은 채 제각각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뒤늦은 그들의 등장이 이뤄지고 나서야,
론은 얼룩진 당황을 차가운 냉정으로 닦아내었다.
“공!”
서둘러 걸음을 옮겨 디안 쪽으로 달려나간 론,
그리고 그런 론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디안.
칠색 후광은 그 고개의 움직임을 따라 찬란히 움직였다.
“괜찮으신 겁니까?!”
론이 쏟는 걱정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디안은 후광 탓인지는 몰라도 인상 자체가 지워지다 만 듯 흐릿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인상을 넘어서 존재 자체가 흐릿해진 것이 맞겠다.
하지만 그 걱정이 무색하게,
디안은 눈에 박힌 아름다운 별무리를 반짝이며 대답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다른 분들은…?”
그리고 그런 반짝이는 대답을 끝으로 디안의 존재감은 순간 명확히 선명해졌다.
이윽고 디안이 론의 뒤편을 한 번 아우르듯 살피고는 작게 안도했다.
이어 그 안도가 식을 때쯤.
무지갯빛 후광 역시 사라졌다.
* * *
따로 여러 말이 오가진 않았다.
충격에 수반된 놀라움, 그리고 그에 버금가는 안부의 나눔.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다시 완만한 기류를 되찾을 수 있었으니까.
뜨거운 여름일수록,
다가올 겨울 역시 차갑듯이.
한바탕 격한 감정의 기류를 겪은 우리는 완곡하게 환기된 마음으로 본연의 목표에 집중했다.
물론 바깥으로 보이는 모습으로만 보자면 말이지.
나 역시 겉으로는 그들과 같이 당장 내년 리케니엔의 수확을 책임질 종자를 찾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방금 얻은 낡은 팔찌에 온 신경을 쏟고 있다.
키르즈의 식욕은 지금껏 마주한 괴물 가운데 단연 가장 강력한 개체였다.
원정대가 그것의 트로피를 몇으로 책정했을까 궁금할 정도로.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것을 상대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과자 회사 키르즈라는 환경 때문에 그 특성이 식욕에 매몰되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식욕을 통해 내놓는 공격적인 수단 역시 단순했다는 점 때문에.
하지만 후반부 살덩이로부터 튀어나온 그것의 등장은 전혀 다른 얘기다.
살덩이 때의 식욕 따위가 해결됐던지, 아니면 다른 조건을 충족했는진 모르겠지만.
한 차례 허물을 벗고 성장하듯 나타난 후반부 개체는 보는 것만으로도 막연한 두려움이 느껴지는 상대였다.
그 두려움을 증명하듯,
그것은 재해를 휘둘렀다.
인력의 매개가 되는 재해가 몇이나 될지 싶지만, 확실히 충격적인 힘인 건 확실했어.
그러나 끝에 가서도 그것에게 질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품은 0이, 마그나베노스가 내게 주는 확신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만큼 어느새 0은 내 몸속 어느 본능으로 작용 될 정도로 스며들어 있었다.
이 정도의 융화력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나와 인챈트를 이어주는 매개체인 새비안 덕분이겠지.
물론 그에 따른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새비안을 위시한 내가 낼 수 있는 0의 출력이 강해진 만큼, 그 반동 역시 거대해졌으니까.
해서 더 절실해졌어.
동시에 조이가 내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도 알겠다.
출력과 반동 사이를 조율해줄,
0.
마그나베노스의 역사가 필요해.
다시 돌아와서,
이 팔찌는 키르즈의 식욕이 쓰러져 액화된 부분으로부터 나타난 것이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이것은 키르즈의 식욕이 발휘했던 재해의 원천이겠지.
그래서 이 인챈트가 깃든 팔찌와 관련해 확인할 점이 하나 있다.
본디 인챈트는 피로써 독점적인 맹약을 성립해야만 그 소유권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 소유권이 가지는 권한은 절대를 넘어 초월적이기까지 한 것이어서,
맹약의 대상자 외의 누군가가 해당 인챈트를 손에 넣는다고 해도 그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이것은 맥레인을 통해,
그의 죽음을 향한 각오를 통해 내가 가장 먼저 배운 인챈트의 절대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만약,
해당 인챈트의 주인이.
가진 피의 증명에 부여된 자아 자체가 도중에 증발해버린다면?
쉽게 말해,
인챈트와 체결된 피의 성질이 두 발 걷는 자의 것이 아니게 된다면?
과연 그 맹약이 계속해서 유지될지가 궁금하다.
나는 현자의 법칙을 모두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알지 못하는 법칙 속 규칙들을 알기 위해서는,
직접 부딪혀 맞고 틀림을 얻어내야겠지.
* * *
[알가르의 별실]
갈색을 띠는 증기, 그 사이사이 잠이 든 듯 미동조차 없는 나무들.
아슬하게 걸려 있는 나뭇잎조차 얼어붙은 듯 굳어있는 숲 곳곳에는,
여러 짐승이 태연한 표정으로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러한 짐승들 가운데 잘 꾸며놓은 단상 위 유리관 속 작고 늙은 개 한 마리를 눈에 담았을 때.
신기루는 다시 한번 내 눈에 글귀를 적어 넣었다.
[알가르의 명물, 잠으로 박제한 ‘윌키즈’]
마찬가지로 같은 것을 보고 있던 벨리타인은 부쩍 반가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세상에 윌키즈를 직접 보게 될 줄이야!”
흰 털,
앙증맞은 코.
곤히 잠든 그 개를 애정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벨리타인의 발은 떨어질 줄을 모른다.
그런 벨리타인의 옆으로 시트리에가 다가왔다.
“이 아이를 아세요?”
“동물 수면 마취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범위 의학을 다루는 자들에게 있어선 잃어버린 과학의 증표이기도 하지.”
자부심 넘치는 벨리타인의 말을,
그저 멍하니 듣던 시트리에는 귀엽게 잠든 개를 보며 살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구나…, 이 친구 살아있는 거죠?”
“글쎄.”
“그게 무슨 소리예요?”
“신기루를 통해 보았듯이 윌키즈는 잠으로 박제된 상태거든. 늙어 죽기 전에.”
“어…,”
아리송한 표정의 시트리에,
그런 시트리에를 보며 살짝 눈썹을 찌푸린 벨리타인.
“윌키즈는 절대 깨지 않아, 그저 평생 잠을 잘 뿐이지. 생전 자면서 보여주었던 행동조차 보이지 않은 채 말 그대로 죽은 듯 잘 뿐이야.”
이어지는 설명에도 복잡한 표정을 짓는 시트리에에게,
벨리타인은 더욱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순환적, 생리적 현상도 없이 눈 감고 있는 것을 살아있다고 말할 순 없어. 이건 어떤 박제 종류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지.”
“잠을 자는 것도 그 순환적, 생리적 현상에 포함되는 것 아니에요?”
“그것이 성립되려면 깨어남까지 이뤄져야지. 잠이란, 곧 일어나기 때문에 잠이라 불릴 수 있는 거야. 이건 ‘잠’ 그 자체로 박제된 거고.”
그 말에 시트리에는 살짝 슬픈 표정을 지었다.
“뭔가 이해하기 힘든 가혹함이네요.”
“차가운 기계를 다루는 것과는 달리 아주 뜨거운 마음씨를 갖고 있네, 공순이 양반.”
그럼 벨리타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유순한 타이름을 건네며 시트리에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론이 끼어들었다.
“동료 탐정 하나가 저 윌키즈에게 쓰인 마취제를 얻어 달라는 의뢰를 맡았었죠.”
이에 벨리타인이 다시 얼굴을 찌푸리며 되묻는다.
“탐정이 그런 것도 하나?”
“못하는 게 없죠, 탐정은.”
우습게 받아치는 론에게 벨리타인은 그와 같은 미소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애완동물에 애정을 쏟는 자들에겐 꿈과도 같은 일이에요. 단어 그대로지만 어쨌든 평생 함께할 수 있는 거니까. 그래서 애완동물을 기르는 귀족이나 부유층들에게 간간이 의뢰가 접수되곤 해요.”
잠든 윌키즈를 보며 느긋한 미소를 짓는 론에게, 벨리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딱딱한 박제보다야 잠으로 박제하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이긴 하지.”
알가르에서 만난 명물,
그 앞에서 여러 소감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길이 안전한 것 같으니 슬슬 움직입시다.”
제이의 말에 곧장 너머 길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그라드의 정원]
도달한 목적지는,
말 그대로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었다.
장대하게 펼쳐진 숲.
그 밑에 깔린 녹음.
그러나 숲을 이루고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일반적인 개념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었다.
“이것 봐요.”
시트리에가 황홀한 표정으로 한 나무 앞에 다가가 말했다.
그녀의 앞에 놓인 거대한 나무는,
껍질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었다.
시트리에와 똑같은 표정을 지은 벨리타인은 날 것에 가까운 감탄사를 내뱉었다.
“허어, 미친.”
유리로 빚은 듯 영롱한 자태를 뿜어내는 나무,
그 위로 뻗은 가지와 나뭇잎은 자연이란 이름으로 만들어낸 샹들리에였다.
“범위 의학을 배우면서 귀 큰 자들의 의학도 몇 배웠었는데…, 그들은 숲의 주인답게 ‘접목’에 아주 대단한 일가견이 있었거든.”
이어지는 벨리타인의 중얼거림에 제이가 반응했다.
“그러니까…, 저게…?”
“그래, 아무래도 나무와 유리를 접목한 것 같은데.”
그들의 감탄을 바탕으로,
똑같이 내 눈에 담긴 그 유리 나무는 확실히.
경탄스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정도의 기술을 자랑했기에, 겨울을 양분 삼아 자라는 곡물이 있는 거겠지.
리케니엔의 혹독한 내년을 책임질,
그 수확의 종자가 마땅히 존재하는 것이겠지.
그렇게 우리는 심어져 꽃핀 미지의 숲을 거쳐, 몇몇 인위적인 건물 파편들을 건너고 나서야.
[그라드의 종자 보관소]
새로운 구역에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회중시계를 열어보니 그라드에 발을 들인지 꼬박 네 시간이 지난 때였다.
이미 메트로폴리아에 발을 들인지 수십 시간이 흘렀음에도.
역시나 하늘에선 푸르스름하고 차가운 새벽이 펼쳐져 있다.
기업 그라드는,
만들어진 0에 의한 후폭풍을 예상이라도 한 듯.
뿌리 식물을 통해 종자를 보관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박 따위의 단단한 열매를 통해 그 안에 종자를 보관한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식물은 0이라는 만들어진 재해 속에서도 꿋꿋이 일어나 본연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일전에 귀 큰 자들의 사회를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지.
아마도 그들의 그 자부심은 이러한 숭고하기까지 한 식물의 억척으로부터 기인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벨리타인과 론의 도움을 받아 어렵지 않게,
나는 내 깃발 아래의 땅,
그 내년의 풍족을 확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