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03화 (303/365)

303화. 움직이는 방향타

“공께서 종자를 손에 넣으셨다는군.”

바람 냄새를 물씬 풍기는 까마귀 앞,

막 받아든 전서구를 읽어 내려가던 기지어의 말에 옆에서 문서를 살피던 조엘이 화답했다.

“정말입니까? 그것참 다행이군요!”

이윽고 조엘은 자신이 들고 있던 문서를 기지어에게 건넸다.

“검토를 끝낸 건가?”

“예.”

문서를 건네받은 기지어는 앞서 날아온 전서구를 살펴보았을 때보다 반짝이는 눈으로 그 문서를 훑었다.

“참으로 화려하군.”

어차피 공께서 종자를 얻는 데 실패하실 리가 없다고 생각한 기지어였기에,

그렇기에 그는 모든 감정의 소비를 조엘이 건넨 문서에 쏟았다.

그런 그의 관심에 따라 조엘 역시 흐뭇한 표정으로, 그러다 벅차오르는 감정으로 기지어에게 말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러나 조엘의 그런 벅참과는 달리,

기지어는 그 시선이 문서 끝에 가까워질수록 냉정함에 젖어 들었다.

지금 그의 눈엔,

베나즈의 총 군사.

그 명확한 윤곽이 가득 차올라 있었으니까.

베르융 오르테를 필두로 베나즈의 깃발 아래 모인 무수한 깃발들이 재편된 것이다.

이는 베나즈 가문 아래 기사라는 족보가 새롭게 새겨지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아이베리아에선 빠져선 안 될 근간이기도 했다.

재상인 기지어로선 앞으로 맞서 평생 팽배를 유지해야 할 상대의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인 거다.

총 군사.

5,058명.

그 군사를 이끄는 기사의 수만,

62명.

능히 아이베리아의 어디든 그 상공에 원하는 재해 하나쯤은 그릴 수 있는 그런 군세이리라.

물론 이 어마어마한 숫자가 적혀있다고 하여 그것이 곧 확립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저 숫자는 연합, 그리고 구심점에 모인 공동체로 만들어진 것이다.

하나의 천이나,

실체는 하나의 천을 이루는 무수한 실과 같단 소리.

물론 이것은 그저 냉정히 따져 내미는 실없는 소리기도 하다.

그 구심점이 누구인가?

0과 베나즈.

애초에 저 두 개의 막강한 파급력이 아니었으면 위에 상기된 숫자에 이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남쪽 국경인 프랑쿠아조차 한때 중립지역이었던 곳으로부터 시선을 떼고 베나즈에게로 향했다.

그들 공동체 대표 기사의 이름은 ‘베지어 리튼’

마땅히 강한 인챈트도 가지지 못한 변방의 기사지만,

글쎄.

그럼에도 아이베리아의 변방 하나를 도맡아 책임지던 자인 걸 생각하면,

베르융이나 테티르, 조이와 같이 아이베리아의 잔뼈 굵은 기사로서 가질 수 있는 특유의 걸출함을 모두 갖춘 자임이 틀림없다.

이렇게만 보면,

기지어가 팽배를 유발시켜야 할 상대라고 하기엔 그 덩치가 너무 커 불합리해 보이겠지만.

아니,

그 부풀려진 덩치를 유지하고 보수할 열쇠는 기지어가 쥐고 있다.

리케니엔은 작은 땅이다.

버려진 땅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척박한 지역.

베나즈라는 이름이 붙었기에 무관심이란 척박으로 뒤덮였던 그 지역을 시발점으로,

저 위에 적힌 군사력에 이르는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비될까?

최소 년, 그 앞에 수십이 붙어야 할 것이다.

폭발적인 성장에는 그에 따른 기폭제를 기반으로 두고 있어야 하는 법.

0과 베나즈, 그 두 개의 결합으로 인한 폭발적 성장을 뒷받침 한 것은 기업과 조합이다.

위에 적힌 숫자는 반대로 놓고 보면 지금 베나즈와 연합한 기업과 조합의 자본이 감당할 수 있기에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이러면,

대등하게 맞서 마땅한 팽배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도 디안은 기업과 조합의 인재들과 함께 파견대를 꾸려 외부 임무를 나간 상태.

깃발에 부여된 외부적 의무는 그 깃발과 함께하는 기업과 조합으로 구성된 자들로 해결해야만 한다.

아이베리아의 오랜 전통 중 하나이기도 한 그것은 깃발 아래 재정, 군사 조직의 치우침을 방지해내는 법칙이기도 하다.

문서 읽기를 모두 끝마친 기지어는 그 안에 내재 된 무수한 수들을 읽고 나서야,

당당한 표정으로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에게도 절실한 목표가 하나 있다.

그 목표는 가히 추상적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어려운 것이다.

‘어느 태양을 쏘아 추락시키는 것.’

그래, 가히 추상적이나 그 자체가 실제 목표이기도 한 그런 목표.

지금은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중간 지점이다.

그러니 마땅히 그 지점에 부여되고 이내 앉게 된 재상이라는 자리에서,

기지어는 그저 최선을 다하기로 다시 한번 다짐했다.

재상 기지어로서 말이다.

“조엘, 저녁까지 각 기업과 조합의 대표들을 소집시키도록 해라.”

기지어는 머릿속에 담아 놓고 있던 계산들을 빈 문서에 쏟아냈다.

여러 복잡한 계산을 거쳐 쏟아진 단 하나의 숫자는,

재편된 베나즈의 군사를 책임질 정확하고도 명확한 추산액이었다.

문서 속 향후 여러 수를 내다보면서도 해당 재편된 군사들의 한 해 추산액 산정까지 다 마친 것이다.

이어 기지어가 건넨 문서를 받아든 조엘이 밖을 나서려는 찰나,

“참, 조엘.”

“예.”

“포개어진 손 조합은 아직 응답이 없나?”

기지어의 물음에 조엘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기지어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한 기지어의 끄덕임을 보고 나서야 조엘은 밖을 나설 수 있었다.

그렇게 홀로 남은 기지어는,

가느다란 의자 등받이에 상체를 쏟으며 뭐가 그렇게 웃긴지 퍽 시원스러운 웃음을 쏟아냈다.

“개국 공신이 성역이긴 해.”

그러면서도 조금은 떨리는 눈동자로 말을 잇는다.

“선생께서 아주 걸출한 투자의 귀재를 만들어내셨구먼.”

* * *

“공께서 실망하셨을 거야.”

우울한 표정으로 누워있던 바돈이 입술을 질끈 씹을 만큼의 통증을 억누르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막 일으켜지려는 상체 위로 보드라운 손 하나가 나타나 가로막았다.

“아뇨, 공께서는 그러실 분이 아니에요.”

세라는 너그러운 표정으로 일어나려는 바돈을 손쉽게 눕힌 뒤 머리맡에 식어 있는 향초에 새로 불을 붙였다.

“하지만, 세라.., 나는 새로 일어선 베나즈 가문의 첫 외부 임무를 보기 좋게 망쳤어.”

이어서 내뱉은 바돈의 실의에 세라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침에 날아온 전서구를 확인하셨잖아요, 종자를 손에 넣는 데에 성공했다고.”

세라의 말에 바돈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냥 전서구였게요? 무려 베나즈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는, 공께서 직접 공들여 보내신 전서구였다고요.”

“그랬지…,”

“그게 무슨 뜻이겠어요?”

“뜻? 뜻이 있어?”

“같이 외부 임무를 함께 했던 당신을 생각해 공께서 직접 보내신 거라고요.”

세라의 말에 바돈은 멍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다가,

“이런 세상에, 그런 공의 뜻도 모르고 난…,”

그 두꺼운 눈썹을 보기 좋게 구겼다.

이런 바돈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세라는 울컥 쏟아지려는 웃음을 꾹 참은 채 바돈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세라에게 있어서 바돈은 참으로 다루기 쉬운 사람이다.

반대로 말하면 바돈은 세라에게만큼은 쉬워지기로 작정한 사람이다.

그러니 세라가 건네는 위로도 격려도, 그녀에게 쉬워지기로 작정한 바돈에겐 모두 다 진심 어린 것이 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공께서 돌아오시면 당신도 그 파견대의 일원으로서 당당한 모습을 보여드리세요. 더군다나 당신은 시종장으로서 지켜야 할 품위가 있잖아요?”

이렇게 말해도 이미 그를 따르는 집사부 전원은 그에게 거리낌 없는 막역함을 지니고 있다.

그만큼 베나즈의 집사부는 가족적인 분위기로 돌아가고 있었다.

물론 이런 집사부의 풍조를 만든 것은 세라였다.

정말 냉정히 말하면 베나즈 가문의 내부는 세라가 모두 다 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바돈은 세라의 말에 구겼던 눈썹을 풀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시종장이 사흘 내내 골골대며 누워있는 것만큼 볼썽사나운 일도 없겠지.”

“그렇죠.”

맞장구치는 세라의 반응에 바돈은 더욱 기합을 다진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지금은 회복에 전념해야겠어.”

바돈의 그 결심이 떨어지기도 전에, 세라는 이미 꺼져있는 다른 향초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 * *

“베르융.”

“오랜만이야, 조이.”

평상복을 입은 두 기사가 작게 차려진 탁자를 사이에 끼고 가벼운 인사를 나눈다.

갑옷도, 무기도 없는 맨몸이었지만.

둘의 마주침은 수천의 메아리를 나눈 두 태산과 같이 그 존재감이 대단했다.

“이제 대원수 베르융이라 불러야 하나?”

인사를 나눈 뒤 자연스레 자리에 앉은 조이의 첫 마디는 친구 사이에서 오갈 법한 가벼운 농같이 가벼운 것이었다.

그러나 친구들 가운데 부쩍 진지하기만 한 이가 있듯.

베르융은 한사코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겁게 대답했다.

“재편이 끝났을 뿐이야, 조이. 군의 임명은 공께서 복귀하고 나신 다음에 이뤄질 일이고.”

이에 조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 그렇지, 그렇고말고.”

아무래도 친구로서 반응해줘야 할 것 같아서, 베르융은 뒤늦게 풀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좋겠군.”

하지만 조이는 거기서 또 한 번 입술을 실룩거리며 장난을 걸었다.

“베르융, 자네는 선봉 기사가 체질이잖아? 대원수가 되면 선봉에 서지 못할 텐데?”

“못할 거 뭐 있나, 그냥 선봉에 서면 되지.”

“대원수가 선봉에 선다는 게 말이 되나?”

“말이 왜 안 되나? 과거 에르앵의 기사들이 그러했는데.”

자연스레 이어지는 베르융의 대답에,

순간 둘 사이의 기류가 차갑게 식었다.

차갑게 식은 기류는 그러나,

“베나즈의 기사이기에 그 정도 각오쯤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베르융의 각오로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어, 베르융은 달아오른 기류를 환기하려는 듯 화제를 돌렸다.

“조이, 자네도 준비해야 할 걸세. 수도 방위를 책임질 궁병 사령관의 자리에 오를 확률이 높으니까. 거기다 서기장의 자리도 겸직할 가능성도 있으니.”

그럼 조이는 대번에 진지해진 표정으로,

이 자리에 온 목적을 날카롭게 내비친다.

“수도 방위라, 리케니엔엔 이렇다 할 성벽도 없는데 말이야.”

이런 조이의 말에 베르융은 숨김없이 태연하고 담담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생기지 않겠나, 앞으로 마땅히 거머쥐어야 할 ‘성지’로부터.”

* * *

제리워드 은행의 도움을 받은 덕에 돌아오는 길은 매우 순탄했다.

작은 구름을 용골 삼아 만들어진 배를 타고,

마법사의 탑이 그린 기류에 편승해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건너간 지, 네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아이베리아의 땅에 발을 댈 수 있었다.

얻은 종자는 한 줌에 불과한 양이었지만,

베나즈의 땅 전역을 배 불릴 만큼 충분한 양이었다.

그 확신은 벨리타인의 설명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는데, 확실히 과거 메트로폴리아의 한 자리를 수놓은 기업답게 종자에 걸려 있는 상술 역시 범상치 않은 것이었다.

이 종자는 보관되어 있던 곳에서부터 벗어난 순간 3개월의 기한이 생긴다.

그 기한 안에 종자를 심으면,

추위를 먹고 자라는 볍씨를 무수한 열매로 피워내며 성장한다.

이렇게 자라난 볍씨조차도 외부에선 1년이라는 기간을 버티지 못하고 산화한다.

그 안에 심으면, 비로소 식량으로 거둘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식물이라는 종의 연구를 통해,

끝내 지속 재배를 배제 시켜 그라드라는 기업의 경쟁성을 확보해낸 셈이다.

어쨌든,

시간상, 그리고 여건상 메트로폴리아라는 별세계를 자세히 탐구할 수는 없었다.

조이가 말했던 재해와 관련된 정보도 얻을 수 없었어.

하지만 그것이 이번 파견대 본연의 목적이 아니었기에 아쉬움은 없다.

오히려 이번 활동으로 인해 메트로폴리아라는 미개척지에 심적 이정표를 여럿 세울 수 있었다.

동시에 0, 마그나베노스의 역사에 대한 절실함도 되새길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곧,

다음 목표로 메트로폴리아에 발을 들였을 때.

필연적인 달성과 개척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거기다,

다른 부수적인 얻음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되려 아주 큰 소득일지도 모르는,

두 개의 물건이 지금 내 품에 들어와 있다.

기업 메킨토의 비밀 은행 인장과,

미로에서 마주친 과거와 지금으로서 완성된 존재로부터 획득한 팔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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